이력서 100통도 넣어보지 않고 세상을 탓하지 마라
스카우트 지음 | 제3공간
1.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
그래, 100통만 채워 보자취업? 튼튼한 두 다리와 철판 같은 얼굴이 있어야지1999년 나는 IMF가 한창일 때 졸업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력서를 100번 넣은 사람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그때는 정말 남의 일 같았다. 졸업을 하고 나니 내 나이 24살. 경력은 없고 나이는 많았다. 처음에는 구인 광고만 보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서류 전형 합격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취직이 쉽지 않았다. 합법적이라는 피라미드부터 시작해 비전공 분야까지 이력서를 안 넣어 본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분간 이력서 쓰는 일을 중단하고 나름대로 취직이 안 되는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몇 가지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 게 있었다. 먼저 지방대 출신에 집도 지방인 데다 학점도 4점을 넘지 못했다. IMF라는 이유로 기업들의 횡포(일류 대학 선호)가 아주 심했던 때라 수요보다 공급이 훨씬 많은 상태였으니까. 무기력 정도가 극에 달했을 때쯤 그 동안 넣은 이력서 수를 세어 보았다. 자그마치 90여 통이 넘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100통만 채워 보자. 그 다음의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이력서를 쓰기 앞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탓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돋보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잣대로 보면 하잘 것 없는 이력일지 모르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대로 잘난 점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적극적이고, 뭐든지 쉽게 배우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간만 주면 경력자 못지 않게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외치고 다녔다. 면접관들은 자신 있는 모습을 좋아했고, 소극적인 사람보다는 적극적인 사람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취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조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직업이 무엇인가를 파악해 소신 지원을 하는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피해만 줄 뿐이다.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무조건 이력서를 넣었을 때보다 소신껏 적성에 맞는 분야에 원서를 넣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취직한 지 6개월이 되어 간다. 취직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할 필요 없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이 정말 맞다. 애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가 주어진다. 쉬지 말고 도전하라. 마지막으로 꼭 이 한마디를 하고 싶다. "이력서 100통도 넣어 보지 않고 세상을 탓하지 마라!""하다 못해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복권을 사러 가는 노력이 있었기에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다." 취업에 임하는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끊임없는 '두드림'이 필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난 기업은 저마다 요구하는 인재상이 제각각이다. 실력, 외모, 성격, 학벌과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 중에 어떤 부분에 더 많은 점수가 책정될지 스스로의 어설프게 판단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대단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두드리면 문은 열리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큰 기업들은 한 번에 1백여 명 안팎의 사람을 뽑는다. 물론 지원자는 2~3만 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적은 수의 인사과 직원들이 고작 2~3일만에 그 많은 지원 서류를 어떤 방법으로, 무슨 기준으로 추려낼까?
먼저 사진이다. 그 다음으로 서류인데 그 많은 서류를 다 읽을 것 같은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다른 사람과 차별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창시절에 학생회장, 동문회장, 서클회장을 했다는 경력 사항도 좋고, 학장, 총장, 학부장 추천서도 덧붙이겠다는 욕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해당 기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 지식 아울러 나름대로의 연구 결과물 따위를 입사 원서에 동봉한다면 회사 쪽은 많은 호감을 가질 것이 틀림없다. 미리 겁을 먹지 말라.
'내가 그런 대기업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학점이 3.0도 채 안 되는 나도 50여 회사에 지원해서 8곳에 합격했다. 자신감과 패기는 취업하는 데 가장 든든한 '경력'이요, '빽'이다. 취업은 직접 발로 뛰어 취업에 관한 자료나 정보를 얼마나 빨리 습득하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취업은 어렵다. 기업은 1년에 고작 한두 번 사람을 뽑는다. 사람을 뽑는 기업이 개인 사정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가고 싶은 기업, 파트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 기회가 생길지는 두 다리와 철판 같은 얼굴이 말해 줄 것이다.
나는 한때 운동을 했고, 야구 선수로 대학을 들어갔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수업 한 번 안 들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3.0이 안 되는 학점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만 나는 너무도 많은 노력으로 한 걸음씩 그들을 따라 잡았기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안정된 기업에서 인정받는 신입 사원으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커 가고 있다. 삼성이고 현대고 지방에도 다 있으니까 기죽지 말고 열심히들 해보기 바란다. 스스로 자신이 꼭 필요한 인재라는 자신감과 노력으로 매진하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는 따라오기 마련이다.야간 근로가 시작되었다. 12시간씩 일주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으레 그런 것이 되었고, 내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버린 지 벌써 13년... 군 생활 6년하고 제대할 때 계급은 중사. 군에서는 중간 간부의 임무를 수행하고 부하를 이끌며 다소나마 권위도 부리고 때로는 태만하게 생활하다 제대했다. 제대 동기가 확실했기 때문에 한 달 만에 중소기업 현장 근로 사원으로 취직했다.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식이나 주위의 편견 따위는 몰랐고, 직장을 가진 것에 대한 기쁨으로 만족감만 가지고 있었다. 현장 일을 하는 동안 단지 중사 제대라는,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것 같은 간부 생활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소신이 있었기에 의식하지 않으려고 태연히 일을 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일 뿐이었다.
현장 기술을 한 달 만에 배우고 남들보다 일찍 기계 운전자가 되어 작업을 시작했다. 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군에서는 전차 부대에 근무했고, 그래서 기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기에 일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직업에 대한, 그것도 노동자라는 내 직업적 신분이 가끔씩 나를 어렵게 만들곤 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익숙지 않은 근무 환경으로 몸이 무척 힘들었지만 적응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오기와 주위의 시선과 우려를 없애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로의 신분 차이, 일에 대한 노동의 대가, 사회적인 3D현상,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못한 내 직장 생활은 점점 나를 나태하고 처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안양 독서회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간호사, 소아마비, 조각가, 간 질환 환자 부부, 노동자를 위해 좋은 직장을 버리고 노동판을 돌아다니는 노동 운동가... 모두들 노동의 소중함을 힘주어 말하며 직업의 귀천을 의식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못한 이가 많음을, 그리고 일하는 기쁨은 주위의 시선이 아니고 자신 안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다시금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다그쳐 잡았다. 일은 다만 일이고, 일이 인격은 아니고 신분의 차이도 아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요소이고, 노동을 피하는 것은 두뇌를 게으르게 하여 주위 시선에 눈을 돌리게 하며, 그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가치는 낮아진다고 만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부터 일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잊기 시작하며 13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이지 미래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현실에 무조건 복종하면서 살자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뭔가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너무 멀리 있는 것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확실한 조건은 노동이다. 노동은 자유로운 노동이어야 한다. 일은 꼭 좋은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 그 속에서 나를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 나는 나이고 일은 내가 사는 방식의 요소이지 귀천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소중할 뿐이다.어느 날 갑자기, 흔히 말하는 알거지가 된 적이 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던 사람도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내 앞의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저 찍 소리 못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실 알거지라는 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평소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직장에서도 동료 직원들의 이야기나 부탁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같은 사무실 안에는 40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직원이 있었는데 그는 1년 중 말짱한 정신으로 제 시간에 출근하는 날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내게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미국 비자 발급 보증이라나 뭐라나). 난 기꺼이 응해 주었고 약 2개월 정도가 지났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그의 모습과 동작이 여간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퇴근을 할 때까지 그는 나가지 않고 있었고, 그 다음날 그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나는 내 자리 뒤쪽 벽에 걸려 있는 CCTV의 앵글 초점이 내가 쓰는 단말기 자판과 화면에 조준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가 나가고 난 뒤 내 비밀 번호를 이용해 내 자리에서 금융 전산망을 통해 다른 금융 기관에 현금을 이체했던 것이다. 내가 앞으로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 이상 벌어야 할 금액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가 이미 미국으로 도망한 뒤였다.
앞으로 내 처자식과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하늘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나는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파면 조치되었으며, 그나마 감방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알아야 할 정도였다. 세상에는 참으로 비열하고 야비하며 나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진정서를 내고 탄원서를 내고 언론사를 찾아가고 금융감독원을 찾아가도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 누구도 자기 '모가지'를 내놓으면서까지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갔다. 모두 현직에 있으니까... 이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한단 말인가? 나이가 차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시 취직을 한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장사를 하자니 밑천이 없고, 취직은 IMF 이후라 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운전밖에 없으므로 택시 운전을 하려고 가까운 택시 운수 회사를 찾았다. 준비하는 데 만 1개월이 걸렸고, 그 뒤에는 보조 기사로 대기하다 정기사가 빌 때면 빈차 한 대씩 배차 받아 운전했다. 그때 내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그래! 이 일이 결코 하찮은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이 일을 계속할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럭저럭 택시 기사 역할도 8개월쯤 했다. 생활 자체가 완전히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었다. 낮과 밤이 바뀌면서 정말 힘들게 벌어도 고작 1백만 원 벌면 참 많이 번 것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하기까지는 사연이 없지도 않았지만 여러 계층의 사람과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어느 날 외국계 은행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사실 외국계 은행도 알게 모르게 감원 바람이 거센 것이 사실인데 조건이 상상을 초월하고 기절 초풍 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거지 생활 1년 10개월 만에 다시 안정된 생활을 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뒤 무든 것이 정상이 되었다. 아니 예전보다도 훨씬 더 나아진 듯 싶었다. 건강을 잃어 본 사람만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듯,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달았다. 끝으로 어려움에 처할수록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와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도록 하자.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솟아오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97년 6월 30일. 패기만만하게 2년 6개월 동안의 장교 생활을 마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해외 사업부로 발령 받았다. 합격자 10여 명 중 무역학 전공은 내가 유일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동기들도 부러워하는 본사 근무에 해외 사업부라니... 6개월 간 열심히 업무를 배웠고, 중동, 아프리카 담당이라 나름대로 그쪽 지역의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자 회사 사정이 어려워 250명이 퇴사하게 되었다. 나는 설마 입사 6개월 된 신입을 자르는 회사가 있겠냐는 생각에 대리와 과장님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퇴사자 이름에 내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그 사람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윗사람들과 친한 사람들만 회사에 남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참 순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사회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회사에 나간 날 부장이 부르더니 나는 계열사로 이동하는 선에서 잘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 번 큰 일을 당하고 나니 언제 어떻게 다시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회사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들었다. 조직에 대한 강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 (대)기업은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커다란 집의 벽돌 한 장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내 가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 내 일을 하자." 나는 그 날로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컴퓨터와 관련한 일이 앞으로 유망한 직종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학원을 알아보고 6개월 간 정보통신 교육을 받았다. 수료를 할 때는 당당히 1등을 했고, 'Y소프트랩'이라는 한국형 ERP를 개발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통합 정보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에 투입되었고, 회계 시스템의 세무와 자금 시스템의 개발 담당이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인 만큼 프로젝트가 끝나자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왔다. 물론 지금 받고 있는 연봉도 이전 회사에서 근무하는 입사 동기들보다 많다. 중요한 것은 미래가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고, 자기 능력을 인정받는 일을 하는 것이다. 기업 회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았으니 이젠 회계사 자격증을 따 기업 회계 전산화에 대한 컨설팅을 하려고 한다. 인생은 끊임없는 변화인 것 같다. 도전하는 자에게, 변화하려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지기 마련이다.행복을 위한 확실한 조건, 노동2.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새 출발
은행 대표 통역자에서 택시 드라이버로, 다시 외국계 은행에 스카우트되기까지대기업 사표 내고, 내 가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 내 일을 하러가다3.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신입 일기
잠깐 거울 본다고 혼내고, 신발 소리 크다고 혼내고사람을 보는 것이지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니다6. 나라는 작아도 일자리는 많다
언론사 취업을 바라는 이들에게나는 모 금융기관에 다녔다. 몇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 달 동안의 연수도 마쳤다. 이름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