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믿어라
볼프강 헤를레스 지음 | 생각의나무
제1부 모험심과 아이디어로 성공한 창업자1. 일단 한번 해봐(Just Do it) - 필 나이트 - 너도 할 수 있어, 일단 한번 해봐!그리스 신화에서 승리의 여신 이름을 딴 나이키는 스포츠 용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마케팅 전략이다. 『일단 한번 해봐', '반드시 이기려고 해야 한다', 이는 승리를 갈망하는 미국 사회의 좌우명이 되다시피 했으며, 이러한 이미지 마케팅은 기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전략의 하나이다.
1938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신문사 발행인이었다. 오리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스탠퍼드 대학에서 학위논문을 써 졸업했다. 졸업논문에서 그는 독일계 스포츠 회사인 아디다스가 미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삼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미국이 더 좋은 품질의 운동화를 개발하고 아시아에서 이를 제조할 경우 독일 경쟁사보다 더 유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창 시절 필 나이트는 대학의 중거리달리기 선수였다. 팀에서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팀의 코치는 빌 바우어만이었다. 그는 오리건주에서 유명한 코치였는데, 훈련방법이 혹독하고 특이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이트는 바우어만을 "반은 천재이고 반은 미친 사람"이라고 일컬으면서 "내가 본 코치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다. 바우어만은 팀 선수들이 신던 질이 낮은 신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필 나이트는 바로 이것을 자신의 졸업논문 주제로 삼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잠시 동안 공인회계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많은 졸업생들이 그렇듯이 그도 미래의 전망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코치였던 바우어만과 힘을 합쳐, 논문 주제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1964년 나이트와 바우어만은 500달러의 자본을 들여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포틀랜드 외곽에 자리잡은 이 회사는 벽만 있는 허름한 매장이었고 바로 옆은 술집이었다. '타이거'라는 상표를 단 최초의 운동화는 일본 고베에서 제조했다.
주말이면 나이트는 초록색 소형 트럭을 몰고 전국의 신발업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신발을 팔곤 하였다. 그는 아디다스 판매담당자의 비웃음을 받아가면서 이런 일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공인회계사 일은 계속 해나가면서 포틀랜드 대학에서 1969년까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필 나이트가 나이키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모델은 '코르테즈'라는 이름의 스포츠화였다.
회사 설립 첫해인 1964년 나이키는 고작 1,300 켤레를 파는 데 그쳤으나 1993에는 1억 켤레를 돌파하였다. 1980년 나이키는 자본금 300만 달러로 주식시장에 상장하였다. 그 해 경쟁사인 아디다스를 밀어내고 미국 내 판매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다가 1986년 갑자기 참패한다. 나이키는 2위로 떨어졌고 주가는 28달러에서 7달러로 폭락하였다. 700명이 넘는 직원이 직장을 잃었다. 이렇게 참패한 원인 중 하나는 나이키가 당시 부상하던 에어로빅 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 데 있었다. 회사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의 급격한 성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키는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과 광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노선을 수정했다. 1997년에는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도 나이키와 계약하였다. 1997년 나이키는 매출액 64억 달러에, 순이익 5억 5,33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97년에는 25년 회사 역사상 가장 좋은 영업 실적을 거두었다. 매상이 91억 9,000만 달러로 치솟았고 이익도 7억 9,580만 달러에 이르렀다.
2. 소프트의 괴물 - 빌 게이츠 - 세상에는 뛰어난 기업가들이 많지만 빌 게이츠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다. 그가 우리 시대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빌 게이츠는 자신의 기업을 대중문화의 일부처럼 경영한다. 아마 컴퓨터 전문가보다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빌 게이츠가 훨씬 더 천재적일 것이다. 그는 미래의 모습을 감지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에는 그를 비난하는 홈페이지들이 많다. '빌 게이츠 꼴통' 이런 빈정거리는 말도 적혀 있지만 때때로 그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괴물처럼 느껴진다.
1955년 10월 28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두 누이와 함께 여기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어머니는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접하기 시작하여 13살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같이 시애틀의 교통량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판매 첫해에 2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 몇 년 뒤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한다. 그들은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였던 알테어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언어 베이식을 함께 보완해 낸다. 그때까지는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1975년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하며, 알테어 컴퓨터 회사인 MITS 사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 달라고 주문하자 얼마 후 대학을 중퇴한다. 1979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시애틀 근처의 밸러뷰로 이전하며 1980년 IBM이 개인용 컴퓨터에 사용될 운영체제를 찾고 있을 때 이 큰 주문을 따낸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신화적인 발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빌 게이츠는 무명의 프로그래머에게 5만 달러를 주고 운영체제를 사들여 이를 'MS-DOS'라는 이름으로 IBM에 계속 공급했다. 나아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MS-DOS에 대한 권리를 계속 보유한다고 IBM과 합의함으로써 전대미문의 성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협력업체들에게도 MS-DOS 운영체제를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직원은 100여 명 정도였지만 5년 뒤에는 벌써 1,200명을 넘어섰다. 1986년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현재의 사옥이 있는 시애틀의 레드먼드로 이전하며 그 해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빌 게이츠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몇 달 뒤인 1987년 그가 보유한 45퍼센트의 지분은 10억 달러로 불어났다. 그 뒤 몇 년 동안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그래픽 운영체제인 윈도우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였다. 1990년 3.0 버전과 연이은 후속 버전으로 프로그램 개발의 돌파구가 열렸으며, 이 윈도우 버전이 시장을 완전히 석권하게 된다.
1992년에는 직원수가 8,000명을 넘어섰으며, 전년도보다 20퍼센트가 늘어난 10억 달러 이상의 이윤을 남겼다. 1991년과 1996년 사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시장 지배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경쟁사들은 차례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항해서 전략적으로 제휴했다. 미 법무부의 반독점 심리가 여러 번 열렸으며, 1994년과 1995년에 이루어진 심리는 모두 당사자간의 타협으로 종결된다. 1995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새로운 운영체제인 '윈도우95'를 세계시장에 출시하였다. 이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롤링 스톤스의 노래
을 1,2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 무렵 빌 게이츠의 재산은 130억 달러에 이르렀다. 처음 빌 게이츠는 인터넷의 경제적 가치를 대단치 않게 여겼고 그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6년 초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기업의 목표를 완전히 바꾸었고 그로부터 몇 달 내에 빌 게이츠는 기업을 개편하여 인터넷에 도전하였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세계 48개국에서 약 2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매출액 86억 달러에 21억 9,000만 달러의 이윤을 남겼으며, 전년도에 비해 46퍼센트 성장했다. 1997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컴퓨터 회사인 애플사에 1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을 사들이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년 전에 매킨토시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혁신을 일으켰던 애플사가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결합하게 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애플 사용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재계는 한 목소리로 이 소식을 환영하였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270억 달러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인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된 이후 빌 게이츠는 2억 7,000만 달러 이상을 공익 단체들, 특히 교육 분야에 기부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근무하던 멜리사 프렌치와 결혼하여 1996년에 딸 제니퍼 캐서린을 낳았다. 빌 게이츠는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5년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을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 중국에서만 40만 부 이상이 팔렸다.
3. 향기를 파는 로맨티스트 - 애니타 로딕 - 광고비 한 푼 안 들이고도 '보디 숍'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자양분은 무엇인가?
'보디 숍은 단순히 화장품이나 욕실 용품만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 사회 변화. 제3세계와의 공정한 거래를 위한 개척자라는 의식으로써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시도한다.
1942년 10월 23일 웨스트 서섹스의 리틀팸프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왔으며, 어머니는 친척들과 같이 작은 이탈리아식 아이스카페를 운영했다. 지방의 여학교를 다녔으며 배스에 있는 뉴턴 파크 칼리지를 졸업했다. 1962년 파리로 가서 인터내셔털 헤럴드 트리뷴지의 도서관에서 일했다. 영국에 돌아와서는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유엔의 산하 조직으로 제네바에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여성 권리를 위한 부서에서 일했다. 고향인 리틀햄프턴에서는 레스토랑 지배인을 거쳐 호텔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70년 남편 토머스 고든 로딕과 결혼했다. 1976년 서섹스주 시배드 브라이튼과 골목길에 최초의 '보디 숍'을 개점했다. 1997년 이 회사는 세계 47개국에 약 1,500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다. 그 중 절반은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운영한다. 제1호 보디 숍 개점 때 애니타 로딕은 모두 25종의 스킨 케어와 샴퓨들을 선보였다. 지금 이 기업은 약 580가지의 각종 제품과 600종에 이르는 액세서리를 공급하고 있다. '보디 숍'은 욕실 용품과 화장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뿐만 아니라 환경, 사회 변화, 제3세계와의 공정한 거래를 위한 개혁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리틀햄프턴에 있는 본사에는 1,300명의 직원들이 근무한다. 1996년에는 총 8,300톤의 제품이 생산되었다. 그 중 1,800톤이 모발 제품과 스킨케어 제품이었고, 176톤은 파우더, 55톤은 립스틱이었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생산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1997년에는 세계적으로 평균 0.4초마다 판매가 이루어졌다.
1984년 주식시장에 상장하였다. 회사 소유주와 주주들의 관계가 계속해서 좋지 않자, 1996년 애니타 로딕과 남편 고든은 독립적으로 사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주식을 재매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주가가 심하게 폭락하는 바람에 이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할 경우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주식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당금을 55퍼센트로 올림으로써 주주들의 구미를 끌어당기는 새로운 노선을 택하였다. 1996년 보디 숍의 매출은 전년도에 비해 17퍼센트가 늘어난 2억 5,600만 파운드였다.
4. 열기구 조종사 - 리처드 브랜슨 - 살아 있는 한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작고 기민할 것, 브랜슨은 이를 자신의 성공 처방으로 생각한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며, 특히 자신이 가진 위치와 영향력을 세계를 개선하는 데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확실성과 가치 질서가 붕괴된 현대 사회에서 기업가의 정신이 어떻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1950년 옥스퍼드에서 태어났으며 유명한 스토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16살에 브랜슨은 「스튜던트」라는 전국적인 학생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이 신문은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여자친구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자 낙태수술을 할 병원을 어렵게 찾아다녔는데, 1968년에 브랜슨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피임법, 낙태, 법률적인 문제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상담소를 세웠다. 이 상담소가 설립되자 도움을 구하는 젊은이들의 상담이 줄을 이었고, 이 상담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상담소가 들어선 사무실에서 브랜슨은 1970년 '버진'이라는 이름의 음반 통신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그는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버진 음반 가게를 처음 열었다. 1972년 브랜슨은 처음으로 옥스퍼드셔에 녹음실을 마련하였으며, 그 곳에서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마이크 올드필드가 최초의 음반를 녹음하였다. 그 음반은 1973년 출시됐는데 몇 주만에 전세계에서 히트곡 1순위로 올라섰다. 1년만에 음반이 500만 장이나 팔렸다. 의 성공은 이후 브랜슨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후 브랜슨은 벨린다 칼라일, 제네시스, 필 콜린스. 롤링 스톤스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해설가들을 '버진 레코드'로 끌어들였다. 버진 레코드는 쟁쟁한 음반회사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92년 브랜슨은 '버진 레코드'를 10억 달러를 받고 EMI에 매각하였다. 브랜슨은 EMI와 계약할 때 계약서에 이후 30개월 동안은 음반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명시했다. 30개월이 지난 1996년 11월 브랜슨은 'V2 뮤직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음반회사를 설립하였다.
브랜슨 제국은 '버진 그룹'이 조종하고 있다. 버진 그룹은 음반, 멀티미디어, 서적, 소프트웨어 등을 취급하는 체인점인 버진 메가스토어, 여행사, 호텔, 클럽들을 거느리고 있다. 1993년에는 버진 라디오를 개국했으며 매일 500만 명의 청취자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있다. 1994년 버진 콜라가 코카 콜라와 펩시콜라에 대항하여 음료수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첫해에 8,000만 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 1995년 버진은 금융 사업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생명보험사와 연금공제기금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1995년 여름 버진 그룹은 4억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영국의 MGM 영화들을 사들였다. 1996년 버진 그룹은 37억 마르크를 벌어들였다.
1984년 브랜슨은 '버진 애틀랜틱 에어웨이'를 설립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었다. 현재 이 항공사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항공사이며 미국과 아시아, 유럽을 운항한다. 항공 화물 사업에서도 버진 애틀랜틱은 라이벌인 브리티시 에어웨이에 도전장을 냈다. 1996년 브랜슨은 유럽을 운항하는 항공사 버진 익스프레스를 세웠다. 브랜슨은 여러 복지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보건교육재단인 보건기금의 공동 발기인이기도 하다.
한편 1985년 이후로 브랜슨은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1986년에는 대서양을 가장 빨리 횡단하는 선박에게 주는 파란 휘장(Blue Band)을 획득했으며, 1987년에는 열기구를 타고 직접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였다. 1991년에는 일본에서 캐나다 북부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브랜슨은 몇 차례 기록을 깨기 위해 시도했지만 기후라든지 기술적인 문제들 때문에 중단해야만 했다. 열기구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계획은 1998년 1월 새로 시도할 예정이다. 브랜슨은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런던과 옥스퍼드셔를 오가며 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일도 꽤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신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속 나를 찾아오는 거구요." - 리처드 브랜슨
5. 용사 - 테드 터너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CNN이 있었다면 히틀러로부터 정말 세계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