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믿어라
볼프강 헤를레스 지음 | 생각의나무
1950년 옥스퍼드에서 태어났으며 유명한 스토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16살에 브랜슨은 「스튜던트」라는 전국적인 학생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이 신문은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여자친구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자 낙태수술을 할 병원을 어렵게 찾아다녔는데, 1968년에 브랜슨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곤경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피임법, 낙태, 법률적인 문제들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상담소를 세웠다. 이 상담소가 설립되자 도움을 구하는 젊은이들의 상담이 줄을 이었고, 이 상담소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상담소가 들어선 사무실에서 브랜슨은 1970년 '버진'이라는 이름의 음반 통신판매업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 그는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버진 음반 가게를 처음 열었다. 1972년 브랜슨은 처음으로 옥스퍼드셔에 녹음실을 마련하였으며, 그 곳에서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마이크 올드필드가 최초의 음반
를 녹음하였다. 그 음반은 1973년 출시됐는데 몇 주만에 전세계에서 히트곡 1순위로 올라섰다. 1년만에 음반이 500만 장이나 팔렸다. 의 성공은 이후 브랜슨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후 브랜슨은 벨린다 칼라일, 제네시스, 필 콜린스. 롤링 스톤스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해설가들을 '버진 레코드'로 끌어들였다. 버진 레코드는 쟁쟁한 음반회사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92년 브랜슨은 '버진 레코드'를 10억 달러를 받고 EMI에 매각하였다. 브랜슨은 EMI와 계약할 때 계약서에 이후 30개월 동안은 음반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명시했다. 30개월이 지난 1996년 11월 브랜슨은 'V2 뮤직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음반회사를 설립하였다.
브랜슨 제국은 '버진 그룹'이 조종하고 있다. 버진 그룹은 음반, 멀티미디어, 서적, 소프트웨어 등을 취급하는 체인점인 버진 메가스토어, 여행사, 호텔, 클럽들을 거느리고 있다. 1993년에는 버진 라디오를 개국했으며 매일 500만 명의 청취자들이 이 방송을 듣고 있다. 1994년 버진 콜라가 코카 콜라와 펩시콜라에 대항하여 음료수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첫해에 8,000만 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 1995년 버진은 금융 사업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생명보험사와 연금공제기금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1995년 여름 버진 그룹은 4억 5,000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영국의 MGM 영화들을 사들였다. 1996년 버진 그룹은 37억 마르크를 벌어들였다.
1984년 브랜슨은 '버진 애틀랜틱 에어웨이'를 설립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었다. 현재 이 항공사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항공사이며 미국과 아시아, 유럽을 운항한다. 항공 화물 사업에서도 버진 애틀랜틱은 라이벌인 브리티시 에어웨이에 도전장을 냈다. 1996년 브랜슨은 유럽을 운항하는 항공사 버진 익스프레스를 세웠다. 브랜슨은 여러 복지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보건교육재단인 보건기금의 공동 발기인이기도 하다.
한편 1985년 이후로 브랜슨은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세계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1986년에는 대서양을 가장 빨리 횡단하는 선박에게 주는 파란 휘장(Blue Band)을 획득했으며, 1987년에는 열기구를 타고 직접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였다. 1991년에는 일본에서 캐나다 북부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브랜슨은 몇 차례 기록을 깨기 위해 시도했지만 기후라든지 기술적인 문제들 때문에 중단해야만 했다. 열기구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계획은 1998년 1월 새로 시도할 예정이다. 브랜슨은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런던과 옥스퍼드셔를 오가며 살고 있다.1938년 11월 19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원래 목화 농장을 하던 집안이었으나 1920년대 경제공황으로 몰락하였다. 아버지는 생수 대리점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후에 그는 광고회사를 차려 광고 간판을 제작하였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테드 터너는 브라운 대학에 들어가 경영학을 공부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터너는 행실이 불량하여 대학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60년 터너는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으며, 1963년 아버지가 자살하자 기업 경영을 떠맡았다. 1970년 그는 애틀랜타의 지역방송인 '채널17'을 인수하여 몇 년 뒤에 돈벌이가 좋은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6년 케이블 시스템이 전국적으로 확충되면서 이 지역 민방은 '터너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6년 그는 야구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인수하였다. 1978년에는 애틀랜타 호크스도 사들이는데 이로써 스포츠 중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1982년에는 4,77개나 되는 케이블망이 터너의 프로그램을 중계했다. 1980년 6월 1일 뉴스 전문 채널인 CNN 방송이 시작되었다. ABC, NBC, CBS가 장악하고 있는 방송 체제를 깨뜨리며 24시간 보도 프로그램으로 틈새시장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이 목표였다. 1985년 3,000만이 넘는 가구가 CNN을 시청하였다. 1995년 CNN은 15개 위성을 통해 세계 210여 국가에 프로그램을 중계하고 있다. 1984년 CNN의 수익은 세금을 공제하고 500만 달러였는데, 1991년에는 1억 3,70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86년 터너는 14억 달러에 할리우드의 거인인 MGM을 사들였다. 외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몇 달 후 다시 되팔지 않을 수 없었으나, 3,000편이 넘는 고전 영화들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그가 보유하고 있다. 1988년 그는 오락 채널인 TNT를 설립하여 방송에 다시 복귀하였다. 이때 MGM 영화들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0년 터너의 기업이 올린 매상은 14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1991년 걸프 전쟁과 모스크바 쿠데타(1991년 8월) 동안에는 1,080만 가구가 CNN의 프로그램을 지켜보았다. 중간 광고 가격이 7,500 마르크에서 3만 마르크로 치솟았다.
1992년 TNT는 최초로 전세계에 방영되는 트릭영화 프로그램인 만화영화 네트워크를 출범시켰다. 이 만화영화 네트워크가 출범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은 한나 바버라 필름 아키브가 소장하고 있는 8,500편의 영화들이었다. 1994년 터너는 자신의 열한 번째 방송국인 '터너 클래식 무비'를 설립하였다. 1995년 9월 TBS는 미디어 업계의 거인인 타임워너와 합병하여 총매출액이 187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미디어 오락기업이 되었다.
합병 후에 터너는 케이블 프로그램을 모두 맡았으며 타임워너 사장인 제럴드 레빈의 대변인이 되었다. 1996년 양 회사의 주주총회는 합병 협정을 승인하였다. 터너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폭스 사의 사장 루퍼트 머독은 이 합병에 반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다. 터너는 여배우 제인 폰다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첫 번째,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다. 터너는 요트 경기를 아주 좋아하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특히 1979년에는 패스트네트 레이스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피에히는 우수한 업무 능력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독일의 어떤 최고 경영자들보다 냉혹하고 비타협적이다. 그는 유럽의 자동차 산업이 사진 산업이나 전자 산업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유럽 산업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고 보고, 자동차 산업이 이 두 분야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9. 영공의 주권 - 필 콘디트
-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새, 비행기라는 현대문명의 신화에 도전한다!마우허는 평생을 네슬레에서 일했으며, 독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네슬레 총수가 되었다. 그는 일관성 있고 엄격한 경영으로 120년 네슬레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팽창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네슬레를 변화, 개혁하여 세계 최대의 식료품회사로 만들었다.5. 여러 역할의 연기자 - 하인리히 폰 피러 - 적재적소의 사람 배치와 올바른 투자 결정만이 사업의 미래를 결정한다!1917년 1월 2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홀리데이는 미국 전역에 여러 일간지를 발간하는 신문사의 법률 고문이었다. 1930년 페리의 아버지는 플로리다에서 자신의 신문사를 설립하였다. 존 페리 주니어는 예일대학에서 경영학과 예술을 공부한 뒤 1940년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다. 아울러 기술 설계도에 대한 강좌도 들었는데 여기서 쌓은 실력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페리는 아버지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때 다른 신문사 지분을 몰래 매입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이 신문사를 적대적 방식으로 인수하였다. 존 페리는 이런 식으로 이미 10대 후반에 중요한 회사 경영 경험을 쌓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미국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하였다. 페리 그룹은 1940년 들어 놀랄 만큼 급팽창하였으며, 1944년에는 독점혐의로 법정 심리가 열리기도 하였다.
195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존 페리는 동생 페어웰과 함께 페리 출판사의 경영권을 맡았다. 당시 이 기업은 30개의 신문과 12개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거느렸으며 직원 수는 1,100명이 넘었다. 10년 후 페리는 100만 달러를 주고 동생 회사(일간지 15개와 주간지 11개, 텔레비전 방송국 하나)를 인수함으로써 동업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페리는 노조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노조가 지칠 줄 모르는 페리의 기술혁신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페리는 미국에 윤전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사진식자가 발명되자 이를 즉시 받아들였으며 컴퓨터 식자로 인쇄 기술을 혁신한 선구자였다. 1963년 페리의 회사에서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 결과 페리는 점차 신문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는 텔레비전 방송에 투자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에 작은 잠수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6년 페리는 페리 케이블을 1,600만 달러에 매각하고 사업 일선에서 물러났다. 페리는 1960년에 이미 잠수함과 수중 로봇을 제조하는 '오셔노 그래픽스(Oceano graphics)'를 설립하였다.
그는 바하마 제도에 태양열, 바람, 수소 같은 미래지향적인 에너지 공급 체계를 시험하기 위한 연구 기지를 세웠다. 1971년 페리는 잠수함 회사를 노르웨이의 '뷔르드(Byrd)' 사와 '마틴 마리에타' 사에 매각하였다. 페리의 회사인 '에너지 파트너'는 화석 연료를 이용하지 않은 가연 물질을 이용한 전기 차량 연구와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이 회사는 포드 자동차와 제휴 관계에 있다. 페리는 로비스트 그룹을 이용해 자신의 이상인 '국민 배당금 계획'을 관철하고자 노력했다. 늘어나는 국가 부채와 불만스런 국가 재정 정책에 대한 페리 나름의 해결책인 셈이다. 페리는 세 번 결혼했으며 여섯 자녀를 두었다.19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스포츠카 회사인 포르셰를 설립했으며, 후에는 최초의 국민차 모델인 폴크스바겐을 설계하였다. 피에히는 취리히에 있는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며 1962년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포르셰 주식회사에서 엔진 테스트 부서의 기술자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1968년에는 개발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1971년에는 포르셰 회사의 기술이사로 승진하였다. 현재까지 피에히는 회사의 최대 주주 중 한 사람이다.
1972년 젊은 엔지니어 피에히는 바이에른 지방의 잉골슈타트에 있는 아우디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뛰어난 설계자라는 평을 얻었으며, 1975년에는 기술이사로 임명되었다. 1988년에는 주식회사로 바뀐 아우디의 회장에 임명되었다. 피에히의 주도하에 실린더가 5개인 엔진과 차체 무게를 줄이는 제작 방식으로 설계하여, 이미지 변화에 성공한 아우디는 벤츠와 메르세데스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1991년 아우디는 창립 이후 가장 좋은 사업 실적을 달성하였다. 1992년 피에히는 모회사인 아우디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으며 1993년 1월 1일에는 폴크스바겐 회장에 임명되었다. 폴크스바겐 회장 자리를 놓고 역시 이사였던 다니엘 괴터베르트와 경합을 벌였다.
피에히는 11년 동안 기업을 이끌어온 카를 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혹독한 비용 절감과 합리화 조처를 통해 폴크스바겐을 적자에서 건져내겠다고 굳게 다짐하였으며, 과거 제너럴모터스의 경영인으로서 '코스트 킬러'로 알려진 스페인인 로페스를 1993년 초에 채용하였다. 이 무렵 피에히는 직원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더구나 1994년에는 폴크스바겐 경영진이 공개적으로 그에게 항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로페스를 폴크스바겐으로 스카우트한 일과 관련하여 제너럴모터스는 자사의 기밀을 누설하고 서류를 횡령한 혐의로 로페스를 기소했는데, 이때 이미 분란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폴크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 수뇌부들은 몹시 전투적인 어조로 몇 달에 걸쳐 공개적으로 언쟁을 벌였다. 피에히는 이를 '기업 간의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로페스 사건으로 한동안 피에히의 위치가 위태롭게 되는 듯 했으나 결과적으로 약화되지는 않았다. 1997년 1월 폴크스바겐과 제너럴모터스는 재판이 아닌 화해에 합의했다. 폴크스바겐은 제너럴모터스에 1억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며 앞으로 7년 동안 약 10억 달러 어치의 제너럴모터스 부품을 구입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폴크스바겐의 이사였던 로페스는 1996년 11월 회사를 그만두었으며 이로써 두 자동차 회사 간에 화해의 길이 열렸다.1997년 3월 폴크스바겐의 감사위원회는 페르디난트 피에히와의 계약을 5년 더 연장하였다. 1997년 4월 피에히는 1996년도 결산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따르면 매출액은 881억 마르크에서 1,011억 마르크로 늘었으며, 6억 7,800만 마르크의 이윤을 남겼다. 1996년 한 해 동안 폴크스바겐은 399만 4,000대의 차량을 판매하였다. 피에히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는 전원주택에서 산다. 두 번 결혼했으며, 두 살에서 서른 다섯 살까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요트를 아주 즐긴다.피러는 유럽최대의 전기, 전자 제품회사 지멘스의 총수로서, 자유로움과 엄격함, 부지런함과 절제, 자연스러움과 적응력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의 장점은 내부, 외부와의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개혁정책을 취하면서 모든 직원들에게 새로운 기업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1941년 1월 18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빌바오 공대에서 시스템 조정장치와 제조 기술을 공부했으며 1966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해서 딸을 셋 두고 있다. 기계 제조회사인 웨스팅하우스의 스페인 자회사에서 생산 책임자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 타이어 회사인 파이어스톤에서 기업 조정 관리자로 헌신했다. 1980년 로페스는 스페인 중부 사라고사에 있는 제너럴 모터스 자회사로 자리를 옮겨 그 곳에서 자재책임자로 승진하였다.
1987년 말 로페스는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자회사인 아담 오펠 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어 뤼셀하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생산과 구매를 담당했다. 1988년 11월 그는 제너럴모터스의 유럽 담당자가 되었으며 몇 달 뒤에는 제너럴모터스 본사 구매를 담당하는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1992년 로페스는 제너럴모터스의 모든 구매를 책임지는 이사로 임명되어 미국 디트로이트로 자리를 옮겼다.
제너럴모터스에서 톱 매니저로 이렇게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단가를 고려하는 구매와 냉혹한 협상으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미 제너럴모터스에 있을 때부터 그는 차량이 완성될 때까지의 연쇄적인 가치 창조라는 개념을 하청업자들에게도 강요하였다. 결국 제너럴모터스의 재고품 관리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