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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찰스 슈왑 지음 | 비즈니스북스


찰스 슈왑 투자 불변의 법칙

찰스 슈왑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21년 2월 / 479쪽 / 23,000원





시작



메이데이(May Day)


누구에게나 운명의 날이 있다:
나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립해서 세 번째 도전하는 창업을 했다. 당시 나는 수십만 달러의 빚을 지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동업자 한 명이 내놓은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자금을 빌렸고, 이혼 후 상당한 신용 대출도 떠안았다. 이후 재혼을 했지만 이렇다 할 자산은 없었다.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 헬렌과 함께 딸 케이티를 키우고 있었다. 헬렌은 부동산을 판매하는 일을 했고 나는 증권거래위원회가 수수료 관련 규제를 시범적으로 완화하면서(1974년 4월부터 적용되었다) 가능해진 주식 거래 수수료를 할인하는 실험을 1년째 하고 있었다.

금융 서비스 업계 사람들에게 메이데이로 기억될 그날의 하루 전인 1975년 4월 30일 수요일, 정말로 중요한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메릴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1년간의 시범 운영이 끝나면 완화된 규제의 법제화가 추진될 것이므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내 계획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1914년 찰스 메릴이 ‘월스트리트를 대중 곁으로’라는 기치 아래 설립한 메릴린치는 리테일 브로커리지(소매 위탁 매매) 부문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였다.

찰스 메릴은 중산층에게 투자 세계를 개방하겠다며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그 목표를 높이 샀다. 그는 1940년대에 이미 수수료가 아닌 급여 형태로 브로커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실험에 최초로 나서며 기존 시스템이 안고 있는 심각한 이해 충돌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 도널드 리건(1971~1980년 메릴린치 이사회 의장 겸 CEO로 재임) 체제가 되면서 과거 방식으로 회귀했다. 수많은 브로커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이유였다. 아무튼 메릴린치는 엄청나게 성공한 기업이었고,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메릴린치가 네가 하는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나서면 그땐 뼈도 못 추릴 거야.”

걱정은 됐지만, 메릴린치는 월스트리트 기득권층의 확고한 일원이었다. 메릴린치의 사업은 수많은 수수료 기반 브로커와 고수익 투자 은행 부문, 리서치 부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을 단번에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메릴린치도 규제 완화에 대응해 조금이라도 수수료를 낮춰야 했고 그렇게 된다면 내 사업은 시작하자마자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수요일 아침, 이런 고민을 하며 몽고메리 스트리트 120번지에 도착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을 집어 들자 1면에 “메릴린치가 5,000달러 미만의 거래 대부분에 대해 위탁 매매 수수료를 인상하기로 했다.”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일까? 수수료를 인상하기로 했다고? 나는 메릴린치가 보수를 낮추고 수수료를 우리 수준으로 낮춰 우리의 기회를 가로챌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릴린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가격을 올리고 대형 기관에 할인해 주는 방식으로 규제 완화를 활용했다. 나는 일단 충격이 가라앉자 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기회를 발견했고 제대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이제껏 험난하고 먼 길을 걸어왔지만 그날 찰스슈왑의 진정한 시장 기회를 찾은 듯했다.

불만에서 시작된 혁신의 씨앗: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지역 신문에 실린 주식 시세표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나는 투자라는 개념이 좋았다. 나는 투자야말로 재정적 독립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투자는 단순히 노동으로 소득을 얻는 것을 넘어 성장하는 경제에 참여하는 수단이다. 나는 낙관주의자이며, 이 낙관주의를 바탕으로 한 궁극적인 행위가 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찰스슈왑을 설립하면서 투자 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투자자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했다. 참고로 투자자들이 시장에 접근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는데, 평균 수수료와 스프레드(spread) 비용만으로도 투자자들의 자금이 무려 10퍼센트 가까이 잠식됐기 때문이다. 펀드 매니저가 투자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뮤추얼 펀드에 투자할 때는 대개 9퍼센트의 판매 수수료가 부과됐는데, 이는 투자금 대비 9퍼센트 수익을 올려야 비로소 손익 평형을 이룬다는 뜻이다.

한편 월스트리트는 1792년 출범한 날부터 수수료를 관리했다. 그곳에 모인 회원들이 뉴욕증권거래소를 설립해 회원끼리만 주식을 사고팔 수 있으며 수수료는 개별적으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새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100여 년을 이어 온 월스트리트의 카르텔을 해체하기 위해 과감한 실험에 나선 것이다. 참고로 옛 제도 아래서는 규제로 위탁 매매 수수료가 고정돼 있어 주식을 거래하려면 높은 비용을 치러야 했고 그 비용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증권업계의 규제 완화가 가져올 중대한 변화를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찰스슈왑을 설립했고 초점은 개인 투자자에게 있었다. 내가 쓴 책 『직접 하는 주식 거래』에서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모든 투자자는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 불공정, 부풀려진 수수료, 잘못된 조언을 하는 브로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 수많은 전통적 증권 회사는 규제 완화가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했다. 규제 완화 이후 1975년에 30곳이 넘는 뉴욕증권거래소 회원사가 문을 닫았고 100개 이상의 증권 회사가 사업을 접거나 합병됐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기존 시스템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혁의 명분을 진전시키고 개인 투자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며, 주식에 대한 소유권을 더 많은 대중의 몫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사업을 키울 기회였다. 나는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고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을 할 본격적인 시도였다.

투자란 성장의 한 조각을 갖는 것이다


성과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위험도 커진다:
경영대학원 2학년 때 생활비를 벌 일자리가 필요해서 포스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라는 금융 자문 회사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구했다. 학교에 다니며 저녁 시간과 주말에 근무했고 학교를 졸업한 6월부터는 정규직으로 합류했다. 이 회사는 특정 금융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자 자문 서비스를 판매했는데, 우리는 소식지를 발간했고 자금 운용도 했다.

우리는 서비스의 대가로 높은 비용을 청구했다. 먼저 8퍼센트 선취 수수료를 제한 뒤 매년 2퍼센트 수수료를 제하고 고객의 계좌에서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일반적인 위탁 매매 수수료를 부과했다. 고객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수수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보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장 기업에 투자했다. 연평균 성장률이 최소 30퍼센트인 회사가 목표였는데, 복리 기준으로 10년간 30퍼센트 이상의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는 회사라면 투자 원금의 10배 이상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게 우리의 기본 전제였다. 나는 그 전제가 마음에 들었고 내 회사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훗날 찰스슈왑 코퍼레이션은 최초 투자자들에게 훌륭한 성장주 역할을 했다. 1987년 상장 이후 배당금을 재투자한 찰스슈왑의 주가는 S&P 500 상승폭 두 배에 이르는 연평균 19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했다. 만일 최초 투자자들이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배당금을 재투자했다면 그들의 최초 투자 원금은 상장 이후 31년간 수백 배 증가해서 약 2만 1,000퍼센트 수익률을 기록했을 것이다. 다시 포스터 인베스트먼트로 돌아와, 우리는 주로 소형 성장 기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1962년 주식 시장 폭락은 고객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나같이 30퍼센트, 40퍼센트에 이르는 포트폴리오 가치 하락을 경험했고 내 개인 계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고객들이 불행에 빠졌고 그중에는 내 아버지도 있었다.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부를 쌓는 법 / 성장은 이익을 이끌고 이익은 주가 상승을 이끈다:
포스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열성적으로 성장주를 찾았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업을 하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1962년 둘째 딸 버지니아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뒤에 아들 샌디가 태어나 빠르게 뭔가를 이뤄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부’를 쌓으려면 창업이 최고의 시도라는 걸 알았다.

1962년 11월 나는 존 모스와 함께 포스터 인베스트먼트 서비스를 나와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나는 데즈먼드 미첼을 설득해 투자 소식지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를 발행할 자금 대부분을 조달했다. 그렇게 ‘미첼 모스 앤드 슈왑’이라는 회사가 세워졌고, 지분은 모스와 내가 각각 20퍼센트씩, 미첼이 나머지 60퍼센트를 갖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20대 중반에 내 사업과 기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우리는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를 격주로 발행해서 고객들이 직접 투자 대상을 선정하도록 했는데, 엄선한 상장주에 투자할 시점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의 순환 주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도록 경제 전반에 관한 큰 그림을 제공했다. 맨 처음 연간 구독료는 60달러였으며 나중에 72달러로 올렸다. 가입자는 최대 3,000여 명에 달했다.

1963년 3월 발행된 『인베스트먼트 인디케이터』 창간호를 다시 보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그때 이미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개인 투자자들을 목표 고객으로 삼았는데, 훗날 찰스슈왑에 계좌를 개설한 사람들은 정확히 이런 투자자들이다. 둘째, 성장 기업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들인데, 참고로 창간호에서 나는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이익이 증가하는 기업이 성장주로서 장기적으로 더욱 큰 수익을 낸다는 근본적 신념(역사적 사실)을 고수합니다.” 이후 모스는 학교로 돌아갔고 나는 그의 지분을 아주 싼값에 인수했다. 여전히 60퍼센트 지분을 보유한 미첼은 회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동업자들이 흔히 그렇듯 충돌도 있었다. 1968년 마침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보유한 주식을 사서 지배 지분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그는 지분을 팔겠다고 동의했다. 꽤 높은 프리미엄을 요구했지만 상관없었다.

투자와 인생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침체 속에서 도전한 퍼스트커맨더:
금융 서비스 사업가로서 맞이한 첫 환경은 좋지 않았다. 짙은 먹구름이 업계 전체에 드리웠으며 빚 문제도 심각했다. 미첼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크로커뱅크에서 10만 달러를 빌렸지만 미첼과의 거래가 끝난 직후 시장이 폭락하면서 회사의 가치도 하락했고 수입도 줄었다. 사업에 현금 투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윌리엄 슈왑 삼촌으로부터 10만 달러 투자를 받았고, 다른 동업자도 영입해 사업을 재편하고 퍼스트커맨더(First Commander)를 설립했다. 우리는 필라델피아증권거래소에 회원사로 등록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때는 일과 가정 모두 엉망이었다. 수전과 2년 동안 별거한 끝에 1972년 초 이혼했다. 결혼한 지 13년 만이었다.

혼자서라도 바닥을 찍고 다시 시작하라:
30대 중반에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으며 이렇다 할 자신도 없었다. 가진 것은 빚뿐이었다. 그때 고등학교 친구인 휴고 쿼큰부시와 자주 어울렸는데, 그의 여자 친구가 헬린 오닐을 내게 소개해 주었고, 우리는 1972년에 결혼했다. 헬렌과 내가 결혼하자마자 약세장이 시작되었다. 불황은 1973년과 1974년에 극에 달했다. 퍼스트커맨더의 사업이 부진하자 지친 삼촌은 손을 떼고 싶다고 말했다. 삼촌은 자신의 퍼스트커맨더 지분 전체를 10년 만기 채권으로 교환했고, 지분의 대부분은 나와 동업자들이 나눠 가졌다. 그해 말 나는 다른 동업자 지분마저 사들였는데, 지분에 대한 대가로 지불할 현금이 없었기 때문에 삼촌에게 갚아야 할 약 10만 달러의 부채를 내가 떠안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나 홀로 (그리고 극히 소수의 직원들만) 남았기 때문에 1973년에 회사를 찰스슈왑 앤드 컴퍼니 주식회사(Charles Schwab & Company, Incorporated)로 다시 법인화했다.

찰스슈왑이라는 실험을 시작하다


변화를 기회로, 생각을 행동으로 바꿔라:
1974년 4월 나는 슈왑을 주식 거래 전문 증권사로 재정비했다. 더 이상 투자 은행 업무는 하지 않았다. 투자 은행 업무와 대중을 상대로 한 주식 영업이 업계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이해 충돌 문제의 근원이라고 여겼고 그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서치 업무도 그만두었고 뮤추얼 펀드와 헤지 펀드도 접었다. 소식지 발행도 중단했다. 잡다한 비용을 모두 줄여 전례 없이 낮은 가격, 즉 기존 증권 회사가 부과하는 것보다 최대 75퍼센트 저렴한 가격을 투자자들에게 제시하고 싶었다. 이는 몇 달 뒤 광고를 시작할 때 투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요소였다. 규제 완화가 이룬 중대한 진전과 시장의 의미 있는 변화, 실질적인 기회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은 남김없이 없애고 싶었다. 커다란 기회가 눈앞에 있었고 절대로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상승



금융계의 아웃사이더


나아가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메릴린치의 설립자 찰스 메릴은 “주식은 고객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는 것이다.”라는 말로 영업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로 접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찰스슈왑입니다.” “계좌번호 12105002입니다. 모터스 2,000주, 57달러에 지정가 매수.” 그리고 클릭. 그게 전부다. 우리의 거래는 브로커가 아니라 고객으로부터 시작된다. 밖에 나가서 고객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하거나 골프를 치지도 않으며 좋은 정보가 있다며 전화를 돌리는 일도 없다. 고객의 요청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역할은 고객이 원하는 걸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다. 이런 우리의 거래를 홍보하는 광고를 몇 건 내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20건, 30건씩 처리하던 거래 건수가 곧 100건이 됐고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내게 없는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아라 / 현실의 장벽에 압도되지 마라:
1980년에는 우리는 14개 주에 22개 지점, 9만 명의 고객, 13만 개 계좌, 6,000만 달러의 고객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작은 반항아였던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 나이에 걸맞게 행동할 때였다. 그것이 바로 래리 스툽스키를 채용한 이유였다. 그는 지점장으로서는 형편없었지만 정확히 내가 찾던 미래의 COO였다.

당시 우리는 끝없이 자본을 구했고 끝없이 좌절했다. 궁극적으로 현금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만큼 충분한 거래 수수료가 발생해야 했지만, 새로운 계좌에서 곧바로 수익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는 성장이 지속되길 원한다면 쉬지 않고 자본을 조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 초, 마침내 상장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회사의 가치에 관한 외부 의견이 필요했다. 물론 내게도 꽤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주당 4달러에 120만 주를 팔아서 480만 달러를 조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가격 산정 회의에서 한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는데, 나는 숫자를 들여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달러 75센트. 나는 그대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찰스슈왑의 첫 상장 시도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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