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의 모험
스티븐 슈워츠먼 지음 | 비즈니스북스
투자의 모험
스티븐 슈워츠먼 지음
(주)비즈니스북스 / 2020년 8월 / 631쪽 / 28,000원
성장의 원칙 - 방향을 정하고 장애물을 뛰어넘다
크게 생각하라 그리고 포기하지 마라 성공은 얼마나 원하느냐의 문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포목점의 고객들은 충성심이 높았다. 아버지는 그 가게를 운영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지만,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지금에야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한다. 반면 어머니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야망이 있었다. 이런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분이다. 어느 날 요트 항해법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6미터짜리 요트를 사서 항해법을 배우고는 우리를 요트 경주에 데리고 나갔다. 이때 어머니가 키를 잡았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많은 트로피를 땄다. 쌍둥이 동생들과 나는 늘 어머니의 승부욕을 우러러봤다.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어머니는 분명 대기업의 CEO가 되었을 것이다.
달릴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달려라: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혁신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했다. 나는 다른 학생회장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학생회장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발상을 줄기차게 탐색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그 위대한 발상이 떠올랐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인 리틀 앤서니 앤드 임페리얼스를 초대해 학교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브루클린에 살았으며 결정적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줄 공연비가 없었다. 그렇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사만 된다면 정말 대단한 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50년도 더 된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씨름을 했다. 친구들의 아버지들의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리틀 앤서니 앤드 임페리얼스가 필라델피아 애빙턴 고등학교에 왔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이 무대에서 움직이는 걸 보며, 모든 사람이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뭔가를 정말 간절히 바라면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어느 순간엔가 소망하던 것이 이뤄진다.
모두 원하지만 아무나 해낼 수 없는 일에 도전하라: 이후 나는 예일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 기숙사 식당은 작고 아담했다. 그래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뒤에 곧바로 공부하러 내 방이나 도서관에 가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뭉개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이른바 ‘상류사회’라는 것에 눈길이 갔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들, 즉 스포츠 팀의 주장들, 교지 편집장들, 아카펠라 그룹의 리더들이 회원인 클럽들 말이다. 어쩐지 비밀스러워 보이는 이 클럽들은 ‘해골과 뼈’, ‘두루마리와 열쇠’, ‘늑대 머리’, ‘책과 뱀’ 같은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클럽에 가입하려면 우선 그 클럽의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부터 해야 한다. 특히 ‘해골과 뼈’는 가장 배타적인 클럽이었다. 나는 3학년이 되기 전에 이 클럽 회원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데이븐포트 발레회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레단은 뉴욕 시립발레단이었는데, 나는 뉴욕으로 가서 책임자를 만났다. “저는 예일 대학교 발레회에서 왔습니다. 뉴욕 시립발레단이 뉴헤이븐에 와서 공연을 해주셨으면 해서 초대하려고 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초청 공연비를 마련할 돈이 없습니다만 미래의 관객이자 후원자들입니다.” 나는 계속 설득했고 결국 그 책임자는 무너졌다. “좋아요. 하지만 발레단 전체가 갈 수는 없고 소그룹을 보내죠.” 이렇게 해서 뉴욕 시립발레단 소속의 공연단이 학교에 와서 공연을 하게 됐다.
뉴욕 시립발레단과 관계를 맺은 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뉴욕 시립발레단의 정식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게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럴 수는 없어요. 티켓을 팔아야 발레단이 운영되니까요. 그렇지만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는 얼마든지 학생들을 데리고 와도 됩니다. 편의를 봐주지요.” 이렇게 해서〈호두까기 인형〉의 드레스 리허설 때 극장에는 예일 대학교 남학생들과 세븐 시스터스 여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생 발레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똑똑한 혼자보다 함께하는 여럿이 낫다: 4학년 때 나는 예일 대학교 학생 모두가 가장 큰 쟁점이라고 여기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여자가 교내 기숙사에서는 밤을 보낼 수 없도록 정한, 무려 268년이나 된 낡은 규칙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접근법은 학교 관계자와 협의해서 ‘이성 방문자에 관한 기숙사 규칙’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투쟁을 시작했다.
학교당국이 반대 이유로 내세울 근거의 목록을 작성한 다음 이것을 토대로 설문지를 만들었다. ‘당신은 이 규칙이 바뀔 때 학업을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자가 주변에 많이 있으면 산만해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등이다. 그런 다음 대학 내 11개 기숙사를 하나씩 맡아줄 학생 11명을 모아 점심시간에 각 기숙사 식당에서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눠 주게 했다. 우리는 예일 대학생 전원으로부터 설문을 받았고 응답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이 설문 조사 결과를〈예일 데일리 뉴스〉의 부편집장이었던 친구 리드 훈트에게 보냈다(훗날 그는 클린턴 정부의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리드, 기숙사 규칙 변경 관련 설문 조사 결과야. 폭탄이니까, 잘 요리해봐.”
사흘 뒤 문제의 그 규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내 이름은 교지 1면을 장식했다. 기사의 제목은 “슈워츠먼 주도의 설문 조사, ‘이성 방문자에 관한 기숙사 규칙’ 철폐를 원해”였다. 학교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서 나는 언론의 힘에 대한 첫 번째 교훈을 얻었다. 그 뒤 ‘해골과 뼈’는 내게 회원 가입을 제안했고, 나는 다가오는 6월에 있을 졸업 기념행사의 책임을 맡았다. 이는 내가 예일 대학교 졸업식의 공식적인 얼굴이 된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재료: 예일 대학교 졸업 직전 나는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답을 구하기 위해 애버럴 해리먼에게 편지를 썼다. 해리먼은 1913년 예일 대학교 졸업생으로 ‘해골과 뼈’ 회원이었으며 미국 외교가의 ‘현자들’ 중 한 명이었고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었다. 해리먼은 답장을 보내 자기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의 집에서 내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가능성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눈 뒤 해리먼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젊은이, 자네는 독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충분히 많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 조건이 자네 인생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네. 자네에게 충고하는데 말이야. 정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세상에 나가서 최대한 돈을 많이 벌게. 그 돈이 자네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줄 거야. 정치를 하겠다는 결정은 그때 가서도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네. 만일 내 부친이 유니언 퍼시픽 철도의 사장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지금 나와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걸세.” 그러면서 온통 모험이 연속이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는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시점이 빠르면 빠를수록, 잘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조장한 헛된 꿈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기회들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이든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라: 월스트리트에서 첫 면접을 볼 때였다. 지각할까 봐 일찍 나섰는데, 면접장에 도착하고 보니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주위에 있다가 오전 9시가 되자, DLJ 본사로 들어갔다. 30분쯤 뒤에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빌 도널드슨을 만났다. ‘DLJ’ 가운데 ‘D’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예일 동문인 래리 노블이었다. 빌이 물었다. “DLJ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해보세요.” “솔직히 DLJ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여기서 이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는 것을 보니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전 당신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습니다.” 빌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좋은 이유 같군요.” “회사를 둘러보고 내 파트너들을 몇 명 만나볼래요?” 나는 그렇게 했다.
2~3일 뒤에 그는 전화해서 내게 일자리를 주겠다며, 초봉은 1년에 1만 달러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곱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죠?” “전 1만 500달러를 받고 싶습니다.” “잠깐만…, 뭐라고요?” “1만 500달러를 받고 싶다고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다른 사람이 1만 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같은 해에 졸업한 사람들 중에선 연봉을 제일 많이 받고 싶거든요.” “1만 달러보다 더 많이는 지급할 수 없어요. 1만 달러입니다.” “그럼 가지 않겠습니다.” “안 오겠다고요?” 그러자 그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생각 한번 해보죠.” 이틀 뒤 그가 다시 전화했다. “좋습니다. 1만 500달러!” 이렇게 해서 나는 증권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누군가는 반드시 당신의 가치를 알아본다 / 일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라: DLJ에 취직하고 6달이 지났을 때 나는 훈련 소집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빌은 훈련을 받으러 떠나기 전에 한번 보자고 했고,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그때 왜 저를 채용했던 겁니까?” “그땐 언젠가 당신이 우리 회사의 최고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죠.” “네에?” “난 이런 일에 관해선 정확한 육감을 가지고 있거든요.” 나는 월스트리트는 정말 미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훈련소로 향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1970년 7월에 루이지애나에 있던 포트 폴크 훈련소에서 나왔고, 8월말에는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경영대학원)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후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 있으면서 나는 비록 DLJ에서의 출발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금융 분야가 적성에 맞다는 걸 확인했다. 이후 나는 6곳의 회사에 지원했고, 리먼브라더스가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 그곳에 입사했다.
어떤 일이든 직접 해봐야 내 것이 된다 일을 배울 때는 잭 웰치처럼: 리먼브라더스에서 2년차가 되었을 때 새로운 회장 겸 CEO가 왔다. 피트 피터슨이었다. 그런데 리먼브라더스에 와서 그는 회사가 재무 관련 문제를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시절에 썼던 논문에서 회사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예측했던 내부 암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다행히 피트에게는 파트너 조지 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국제적인 인맥을 동원해 이탈리아 상업은행을 설득했고, 마침내 이 은행에서 회사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금을 제공받기로 했다. 리먼브라더스가 기운을 회복했을 때 피트는 전 직원을 상대로 아이디어를 구했다. 나는 일주일 뒤에 계획서를 만들어 제출했고, 피트가 전화를 해서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자리가 끝나갈 무렵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유능한 청년인 것 같으니까. 앞으로 자네와 나는 함께 일을 해야만 하네.” 피트가 했던 말의 요지는 자기가 비록 똑똑한 사람이긴 하지만 금융이나 투자은행업에는 아무런 경험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트의 말에 나는 내 실력이 더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제안했다. 피트는 나의 솔직함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2년쯤 지난 뒤에 그가 다시 불러 자기 팀의 일원이 되어달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잘 맞는 짝이었다. 나는 피트가 놓친 것이 뭔지 알았고, 그의 방식대로 하지 않을 만큼 젊었다.
어느 날 그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 레지날드(레그) 존스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 나를 불렀다. 레그는 자기가 아끼며 훈련시키고 있는 젊은 이사를 피트가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 데리고 나왔다면서 내게도 소개해주었다. “인사하게. 이 친구가 잭 웰치야.” 이어서 피트가 말했다. “레그가 잭을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건 잭이 GE의 차기 CEO이기 때문이네. 레그는 우리가 잭에게 금융에 대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으면 하는데, 그 일을 자네가 해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월스트리트와 재계는 좁은 세상이다. 좋은 학교나 큰 회사에서 출발해 또래에서 최고인 사람들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걸어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그들을 만나게 된다. 예일 대학교,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예비군, 사회 초년생 시절 월스트리트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이 지금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다. 그들과 맺었던 관계는 상상도 못 했던 온갖 방식으로 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은 인내와 고통 속에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1980년대 초는 내게 좋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었다. 나는 인수합병을 맡고 있는 사업부의 책임자로 승진해서 우리 회사의 최대 고객들 몇몇에게 자문을 제공했다. 그 무렵 피트는 리먼브라더스의 CEO이자 회장으로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하면서 결국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회사를 살려냈다. 비록 금융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에 뻗어 있는 폭넓은 인맥이 그의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피트는 나보다 스물한 살이나 많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업무상 밀접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나는 거래의 싹을 찾아내서 키우고 성사시켰다. 회사 주변에서는 피트와 나를 한 팀으로 여겼다. 그러나 리먼브라더스라는 암투의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신뢰했던 피트의 성격이 결국 그를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고, 결국 피트는 물러났다. 그 뒤에 나도 그만두었다.
투자의 원칙 - 실패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짜다
경쟁은 적고 기회는 많은 영역을 찾아라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창업은 원래 어렵다: 리먼브라더스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피트와 나는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진 주된 자산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 그리고 명성이었다. 창업을 이야기하면서 피트와 나는 소유주나 CEO가 여러 세대에 걸쳐 굳건하게 이어갈 그런 강력한 생존력을 지닌 금융회사를 만들자고 했다.
새로운 부의 영역, LBO 투자에 눈을 뜨다: 피트와 내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눌 때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사업 분야 후보 하나가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곤 했다. 바로 기업을 담보로 하는 차입매수(LBO, 사들이려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빌린 자금을 이용해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 것)였다. LBO 투자는 인수합병과 다르게 새로운 고객을 끊임없이 붙잡지 않아도 된다. 만일 투자자들을 상대로 어떤 펀드에 가입해서 한 10년쯤 묵혀두게 설득할 수만 있다면, 관리 수수료를 받으면서 매수한 회사를 개선해 우리와 투자자들 앞에 거대한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설령 그사이에 경기가 후퇴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며 운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경기가 후퇴할 때는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자기가 가진 우량 자산을 헐값에 마구 팔아치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