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걱정 없는 결혼 준비
박상훈 지음 | 서로가꿈
빚 걱정 없는 결혼 준비
박상훈 지음
서로가꿈 / 2012년 11월 / 296쪽 / 13,500원
신입 사원, 사랑이 찾아오다
첫 키스보다 짜릿한 첫 월급: 오늘은 첫 월급을 받는 날이다. 점심시간에 경호는 소망은행으로 갔다. 처음 팀장의 심부름으로 그 은행을 찾았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일을 당했다. 경호는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창구로 다가간 자신에게 친절하게 웃어 주던 여직원을 보고 경호는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강지원 사원'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잠시 응시했다가 얼른 눈길을 뗐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보고 반하다니, 경호에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경호는 수시로 소망은행을 들락거렸다.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할 것이며, 또 어떻게 지원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318번 고객님!" 창구로 다가가자 지원 옆에 앉은 텔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아마도 '너 또 왔냐?'는 비웃음이리라.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지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다. "저축 통장 하나 개설하려고요." 경호는 통장 개설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면서 지원에게 말을 걸었다. "지원 씨는 입사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 년째예요." "네……. 저기 지원 씨, 전 오늘 첫 월급 받았어요. 그래서 기념으로 통장도 하나 만드는 거고요." "고객님, 그러면 방카슈랑스 하나 가입하시는 게 어떠세요? 신입 사원이신 고객님들을 대상으로……." "아니요, 그건 다음에요. 그거 말고요. 오늘 일 끝나고 같이 저녁 먹어요. 제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좋은 데를 알아요. 아마 지원 씨도 좋아할 거예요." "전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다른 문의 사항은 없으세요, 고객님?" 지원의 마지막 말 때문에 경호는 어깨가 축 처졌다. 지원에게 경호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찾아오는 고객님 중 하나일 뿐이다.
산산이 부서진 데이트의 꿈: 지원에게 거절당한 경호는 우울함을 떨쳐 버리고자 카카오톡으로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님이 오늘 거하게 쏜다. 시간 되는 놈은 울 회사 근처로 고고!' 고교 시절 사인방이었던 녀석들이 모두 '오케이, 콜'을 외쳤다. 퇴근 시간, 경호는 먹자골목으로 갔다. 그때 경호 앞으로 은회색 세단이 지나갔다. 잠시 멈춰 서서 세단이 지나가길 기다렸던 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세단의 조수석에 지원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경호는 순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땅 밑으로 꺼지고 싶었다. 고깃집에서 오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조수석에 앉아 웃고 있던 지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 후 한동안 경호는 소망은행에 가지 않았다. 지원을 완전히 단념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지원 씨, 나 같은 남자가 진국이에요: "지원, 요즘 무슨 걱정 있어?" 옆 창구의 정 선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아니에요. 좀 피곤한가 보죠." 정 선배의 짐작대로 지원은 벌써 며칠째 마음고생을 하느라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 지원은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지난 한 달간 데이트를 하면서 좋은 감정을 주고받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훤칠한 키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다정함과 매너까지 갖춘 남자였다. 그런데 그는 지원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까지 자신이 가진 매력을 어필하고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지원에게는 거짓말을 해댔다. 지원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고 있던 다른 여자를 통해서 알게 됐다. 말하자면 일종의 고발이었던 셈이다. 지원은 비참함이 몰려왔고,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근데 참, 그 남자는 이제 안 오나 봐?" "네? 누구요?" 지원은 정 선배가 뭘 알고서 하는 말인 줄 알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난번에 월급날 데이트 신청했다가 너한테 까인 남자 말이야." "네에……." "큭큭. 왔네, 왔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지원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자, 언제나처럼 번호표를 여러 개 뽑아들고 서 있는 경호가 보였다. 지원은 처음으로 경호를 살펴봤다. 관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경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늘도 선약 있어요?" "아니요, 그건 왜……." "그럼 저랑 저녁 먹어요." "월급은 지난주에 받았잖아요. 월급 두 번 받으세요?" 지원은 경호에게 농담을 건넸다. "지난주에 분명히 월급을 받았는데 여기저기서 쏘라고 해서 다 쐈더니 돈이 없어요. 좋은 데는 못 가요." "그러면서 밥을 먹자고요?" "기회를 날려 버린 지원 씨 잘못이죠." "좋아요. 그럼 아무 데나 가요."
퇴근 후에 먹자골목의 설렁탕집에 마주 앉았다. "아까 돈 없다고 해서 그래요? 그래도 처음으로 같이 저녁 먹는 건데 이건 좀……." "어때요, 제가 요새 밥을 못 먹어서 다른 음식은 안 넘어갈 거 같아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지난 일주일 동안 은행에 안 왔어요?" "지원 씨한테 데이트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그날, 봤습니다." "뭘요?" "은회색 그렌저 타고 가는 지원 씨요." "그럼 은행에 다시 온 이유는 뭐예요?" "저 그렌저 그 친구처럼 지원 씨가 매력을 느낄 만한 놈은 못 됩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적극성과 진심은 그 친구보다 앞설 자신 있습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뭔데요?" "그렌저랑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 이제 볼 일도 없어요." "그러면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이 설렁탕처럼 저 정말 진국이에요." "그런 얘기를, 무슨 설렁탕 먹으면서 해요?" "뭐 어때요? 지금 장소가 중요해요?" "자신 있어요?" "뭐가요?" "아까 말한 적극성과 마음 말이에요. 그거 진심이에요?" "네, 그럼요. 맹세합니다!" "그럼 앞으로 잘 해봐요, 우리."
애인으로부터 돈을 지켜라!
선물은 정성보다 가격?: 경호는 지원과의 연애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경호의 연애를 눈치챘다. 한 해 먼저 입사한 선배 기철이었다. 결국 사실을 털어놓은 경호는 기철에게 가끔씩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철의 조언에 따라 지원이 좋아하는 장소와 분위기를 틈틈이 연구했고, 실천했다. 그러자 비싸고 양 적고 입에 맞지도 않은 음식에도 익숙해졌고, 여자들만 득실거리는 디저트 카페나 미용실에 있을 때마다 나타났던 호흡곤란 증상도 많이 좋아졌다. 그런 경호가 기특했는지 어느 날 지원이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풀어 본 상자 속에는 타이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얼마나 하려나? 근데 이게 뭐야, 에이치, 이, 알… 브랜드 이름인가?' 처음 보는 브랜드라 경호는 검색창에다 단어를 입력했다. H, E, R, M, E, S. 에르메스라는 단어가 뜬다. 유명한 명품 브랜드임을 눈치챈 경호는 검색창에 에르메스 타이라고 쳐봤다. 그리고 놀랐다.
"뭐, 타이 하나에 최하 30? 그럼 이건 대체 얼마야?" 이제 여자 친구 생일이 다가온다. '여자들이 뭘 좋아하지?' "여자들 선물은 첫째도 백, 둘째도 백, 셋째도 백이야." 고민하는 경호에게 기철이 답을 찾아 줬다. "근데 너 이거, 타이 죽이는데? 이거 에르메스 아냐?" "지원이가 준 선물이에요." "쯧쯧, 불쌍한 놈……. 제수씨 취향도 참 보통이 아니구나. 너 이제 생일 선물 고르면서 고생 좀 하겠다." 경호는 다음 날 아침, 퇴근하자마자 백화점으로 가서 지원이 좋아하는 질스튜어드 매장으로 가서 원피스를 한 벌 샀다. 예전에 지원이 입어 보기만 하고 아쉬워하면서 내려놓았던 그 옷이었다.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덧대진 여성스러운 원피스, 이 천 조각 하나가 이렇게 비싸다니. 매장 직원이 "손님, 결제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일시불…… 아니, 할부로 해주세요. 삼 개월."
애인님, 그만 좀 질러요!: 경호에게 자가용이 생긴 뒤로, 퇴근길에 지원을 만나서 집에 바래다주는 일이 잦아졌다. "자기가 데려다 주니까 정말 좋아." "그런데 뒤에 저건 뭐야?" "요즘 피곤하고 체력이 달리는 것 같아서 비타민 좀 샀어. 내가 이따가 나눠 줄게. 자기 부모님한테도 드리고, 응?" "그래, 고맙다." 사실 경호는 요즘 지원이 쇼핑 중독에 빠진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원래 쇼핑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고장 난 컴퓨터를 고쳐 주느라 지원의 집에 들렀다가 경호는 놀라운 광경을 봤다. 좁아빠진 지원의 원룸은 정말이지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경호는 지원이 걱정스러웠다. 쇼핑하느라 지출을 많이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경호가 보기에 지원은 쇼핑을 하느라 과도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 경호는 적당한 기회를 봐서 이 문제에 대해 지원과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원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경호가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경호 씨. 신경 쓰지 마." "지원아, 내가 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네 문제는 곧 내 문제야.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봐." 지원은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경호 씨, 나한테 돈 좀 빌려줘. 잠깐만 쓰고 돌려줄게." 경호는 우선, 지원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하게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별일 아니야. 지난달에 카드를 좀 많이 썼어." 경호는 지원에게 필요한 돈의 액수를 물은 뒤에 군말 없이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원의 재정 문제에 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궁지에 몰린 여자 친구를 추궁하는 것 같아서 꺼림칙했지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지원에게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은행에서 근무하고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똑소리 날 것 같이 생긴 지원에게 이런 문제가 있었다니! "지원아, 그렇잖아도 너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내가 네 형편을 상세하게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너 지출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 그렇게 심각한 편 아니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소비 습관을 고칠 생각을 해봤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야." "누구나 사고 싶은 건 있잖아. 너무 심각하게 몰고 가지마. 그리고 경호 씨도 할부로 차 샀잖아." "내가 차 산 거랑 이 문제는 달라." "뭐가 달라?"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지출을 한 거고, 넌 정도가 심해."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사 봐야 뭘 그렇게 비싼 걸 산다고. 자기가 차 사느라 쓴 돈이랑 비교가 되는 줄 알아?" "차는…… 결국 너 때문에 샀잖아!" 지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호를 바라봤다. "네가 차도 없이 무슨 데이트를 하냐고 하고, 또 차로 모시러 가고 태우러 가고 하니까 좋아했잖아, 아니야?"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지원이었다. "경호 씨가 날 이렇게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 나 쇼핑 중독 아니야. 다른 여자들보다 심각하다고 생각 안 해." "그래.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난 다만, 쇼핑을 하더라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구해줘요, 데이트 통장: 다툰 후에 처음으로 맞은 주말 데이트였다. 약간은 서먹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봤다. 지원이 말했다. "경호 씨, 오늘은 내가 맛있는 점심 살게. 얼른 가자." 두 사람은 지원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경호는 메뉴판을 봤지만 메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 끼 밥값으로 써 버리기에 아까운 가격만 눈에 들어왔다. 경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말고 내가 더 좋은 데 알아. 나가자." 경호가 지원을 데리고 간 곳은 맥도날드였다. "나 지금 이게 정말 먹고 싶어. 이거 아닌 건 다 싫어." 지원은 헛웃음이 났다. 햄버거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경호가 지원에게 물었다. "지원아, 너 아까 그 레스토랑 왜 가자고 한 거니?" "지난번 일로 미안한 마음도 있고 분위기 있는 데서 같이 점심 한 끼 먹고 싶었어." "지원아, 너 정말 내가 그런 것들을 원한다고 생각하니? 비싼 타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난 너랑 함께하는 미래를 원해." "미래?" "응, 미래. 난 너랑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이 인생을 계획하고, 그런 걸 하고 싶어." 지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결혼이 뭐길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 지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이 저녁을 살 테니 뭉치자고 했다. 그 자리에 예비 신부도 소개할 생각인데, 지원도 같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약속한 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경호와 지원, 지훈, 그리고 (지훈의 예비 신부) 현주 커플이 만났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분위기가 어색하다는 것을 눈치챈 현주와 지원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남자들은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원 씨랑 너도 잘 어울리던데 결혼 안 해?" 경호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렇잖아도 경호 역시 이제는 결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자금이 부족했다. 경호의 이런 사정에 대해 지훈이 대꾸했다. "너희 부모님 사업하시지 않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얼마라도 보태 주시겠지."
경호는 용기를 내보기로 하고 당장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었어?" "아니, 아직. 술 많이 마셨어?" "아니야, 맥주 조금 마셨어. 그보다 지원아……." "응?" "우리 결혼할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지원은 깔깔 웃어댔다. 그러다가 경호가 아무런 말이 없자 농담이 아님을 눈치챘다. "아니, 그런 말을 그렇게 갑자기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경호 씨, 경호 씨가 그 말 해준 거 너무 기뻐!" "지원아, 그럼 우리 내일 만나서 결혼 이야기해보자."
예비 사위, 예비 며느리 출사표: 다음 날, 경호와 지원은 공원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다. "어제 내가 전화로 결혼 이야기한 거, 술 마시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거 아니야. 지원아, 난 너랑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넌 어때?" "그동안 경호 씨 만나서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아도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긴 했어." "지원아,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본격적으로 결혼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해." "그래서?" "출사표를 던져야지. 일단 부모님부터 만나자. 주말에 우리 집에 가는 거야." "내가 경호 씨 부모님을 뵈면 다음 차례는 경호 씨야." "당연하지."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났고 또 한 번의 일요일이 다가왔다. 경호와 지원은 지원의 부모님이 계신 구미로 갔다. 지난 일요일에 지원을 보신 경호 부모님은 지원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셨다. 특히 평소에도 지원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편 경호를 대하는 지원의 아버님의 태도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그나마 아버님보다는 덜 무섭고 온화한 인상의 어머님이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구미에 다녀온 날 저녁, 경호는 부모님 가게에 들렀다. 어머니는 먼저 들어가셨는지 아버지만 테이블 앞에 앉아 계셨다. 오랜만에 부자가 소주 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경호는 지원이랑 구미 부모님 댁에 잘 다녀왔노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취기가 오른 아버지께서 무겁게 입을 여셨다. "네가 결혼할 생각이 있고 또 지원이 집에 인사도 드렸다니까 하는 말인데……. 네 엄마랑 둘이서 상의를 좀 해봤다. 네가 우리 집 장남이고 또 우리 집안으로서는 개혼(開婚)이니까 네가 결혼한다고 하면 당연히 전셋집 정도는 우리가 해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게, 가게 사정도 그렇고 보증금을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구나. 아버지가 돼서 참 면목이 없다……."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보자, 경호는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 뭐가 미안하세요? 평생 일하시고 지금도 가게 나가서 손님들 비위 맞추느라 힘드신데 아버지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경호는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방에 앉아서 생각하니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경호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결혼을 준비하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