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가치투자자 캐피탈 그룹
찰스 D. 엘리스 지음 | 굿모닝북스
위대한 가치투자자 캐피탈 그룹
찰스 D. 엘리스 지음
굿모닝북스 / 2008년 4월 / 414쪽 / 14,800원
영혼이 있는 기업
자산운용회사는 다른 전문가 조직과 마찬가지로 구성원 각자의 능력과 자질, 동기부여, 가치관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리고 설립 초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졌느냐가 앞으로 이 회사가 어떤 부류의 전문가들을 끌어들일지 결정한다. 일단 주사위가 던져지면 조직을 업그레이드하기란 매우 어렵다. 조나단 벨 러브레이스(JBL)와 그의 아들 존 러브레이스(JL)는 비범한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캐피탈로 데려오는 리더십을 끊임없이 발휘했다. 뛰어난 인재의 확보는 캐피탈에게 '운 좋은' 기회를 선점하는 반복적인 과정이었다. 캐피탈은 출중한 능력에다 능히 의기투합하려는 전문 인력이 모인 회사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다. 캐피탈은 입사하고 싶은 좋은 회사가 된 것이다.
때는 1929년, 서른넷의 JBL은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곧이어 그가 그곳에 세운 작은 회사가 훗날 세계적인 자산 운용 전문기업인 캐피탈 그룹 컴퍼니스가 된다. JBL은 군에 있을 때 에드워드 맥크론을 만났다. 맥크론은 소규모 위탁매매 증권회사인 E.E. 맥크론을 디트로이트에 세웠다. 맥크론은 JBL에게 자기 회사의 리서치와 통계업무를 맡아달라고 졸랐다. 1919년 JBL은 맥크론과 합류해서, 리서치 부문의 초기 개척자 대열에 가세했다. 하지만 JBL이 진짜로 관심을 쏟았던 분야는 크지 않은 자금을 운용하는 개인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신탁 업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뮤추얼펀드의 효시 격이나 다름없었다. 맥크론의 동의를 얻어 JBL과 맥크론은 투자회사인 아메리카 투자회사(ICA)를 설립하였다.
주식시장이 온통 강세 분위기였던 덕분에 JBL도 승승장구하였다. 엄청난 강세장에 도취해 대다수가 넋이 빠져있을 때, JBL은 투자자들의 열기가 과도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대한 우려도 깊어갔다. 1929년 JBL은 주식시장이 약세로 돌아설 것으로 보고, 그의 개인 보유 주식과 채권을 대부분 매도했다. 그는 맥크론에게 현재 상태보다 더 보수적인 포지션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 뒤 3년 동안 주식시장은 최고가 대비 900%나 떨어지는 대폭락의 길로 돌아섰다. 34세의 나이에 부유한 재산가로 '은퇴'한 JBL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931년 JBL은 작은 투자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같은 해 JBL의 회사는 맥크론으로부터 폐쇄형 펀드 2개의 투자자문 업무를 인수한다. JBL은 또 ICA가 곤란에 빠져있던 1932년에 이 회사의 사장으로 선출됐다. 그 후 10년 동안, 다우존스 평균주가가 연평균 7%씩 상승하는 동안, ICA는 연평균 14%의 수익률을 올렸다.
JBL은 경비절감과 펀더멘탈 리서치를 중시하는 면도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철저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투자와 완전무결한 고객봉사 정신을 공유하며 일하는 데 충실했다. JBL은 외향적이거나 사교적인 편이 아니어서 쉽게 칭찬하지도 않았지만 비판할 때도 급하지 않았다. 그가 회사를 지휘하는 동안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은 스스로 최종판단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시간과 재량권을 누렸다고 생각했다. JBL은 투자에서는 크든 작든 실수가 생기는 법이고, 개인이든 회사든 장기적인 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JBL이 확립해 놓은 개인과 조직에 대한 태도와 사고방식은 아직까지도 캐피탈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JBL은 도덕관이 엄격했고 고결한 성품이었다. 그리고 겸손했다. 그러나 뛰어난 안목과 야심차고 총명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면모를 갖추어 출중한 능력의 인재들을 많이 끌어 모았다. 독자적인 사고를 중시했던 JBL은 자신의 역발상적인 투자관을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자비를 베풀겠다는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도하기를 원할 때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매수해줍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매수하기를 원할 때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매도해줍니다. 안달하면서 마지막 5%까지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JBL이 추진한 조직설계의 혁신이 결실을 맺으면서, 이 작은 투자회사의 운용자산 규모는 1931년 1200만 달러에서 지금은 1조 4000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더불어 캐피탈의 조직도 1931년 10명도 채 안 되는 인력으로 시작해 2008년 4월 현재 캐피탈 인력은 9000명을 웃돌고 있다. 캐피탈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회사에 속할 뿐 아니라, 3대 가치집단에게 지속적인 성공을 안겨주는 일에서 초일류로 인정받고 있다. 고객투자자들에게는 탁월한 투자 수익률을 꾸준히 올려 주고 있고, 회사 소유주들에게는 장기 수익률을 안겨주고 있으며, 공동경영자들에게는 보람 있는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캐피탈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영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봅 커비가 말하는 것처럼 "캐피탈은 영혼이 있는 기업이다."
다중운용자 시스템
뮤추얼펀드 업계에서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조직 구조를 채용해왔다. 하나는 각각의 펀드를 맡은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독립적으로 펀드를 운용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합의와 절충에 기초한 위원회 방식의 집단적 운용이다. 존 러브레이스(JBL의 아들. JL)는 두 가지 조직 구조에서 최선의 요소들을 골라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JBL은 그 제안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 명칭이 바로 "다중운용자 시스템"이었다. 그가 제안한 방식은 결국 자산운용회사의 전혀 새로운 조직 구조가 됐다. 다중운용자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설계는 더디게 출발했지만, 두 가지 전통적인 구조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입증됐다.
다중운용자 시스템은 문제를 여러 부분으로 쪼갠 다음 다시 그 부분들을 재정렬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 첫 단계는 캐피탈의 대형펀드 두 개를 각각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4개 부분으로 나눠 모두 8개 조각을 만들고, 네 명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각자가 두 펀드에서 한 조각씩을 맡아 운용함으로써 각 펀드의 운용실적은 포트폴리오 매니저 각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를 합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모든 기록을 수작업으로 하던 시절인 1958년 4월 1일 다중운용자 시스템이 처음으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9개월 뒤에는 워싱턴 뮤추얼에도 다중운용자 시스템이 적용됐다. 캐피탈이 다중운용자 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 운용자산 규모는 4억 달러에 불과했다. 오늘날 그 규모는 1500배로 불어났고, 150명이 넘는 투자 의사결정자들이 매일 각종 증권의 매매를 결정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펀드와 포트폴리오의 일정 부분을 맡아서 운용한다.
장기 투자자를 위한 뮤추얼펀드
거의 모든 뮤추얼펀드 회사들은 두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다. 판매에 집중하는 유형 또는 투자에 집중하는 유형이다. 그런데 캐피탈이 우선하는 것은 투자가 틀림없지만, 아메리카펀드 디스트리뷰터스(뮤추얼펀드 판매회사. AFD)를 인수함으로써 투자와 판매에 모두 중점을 둘 수 있는 강력한 균형 장치를 마련했는데, 이런 균형 장치는 뮤추얼펀드 업계에서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대다수 뮤추얼펀드 회사들과는 대조적으로 고객투자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캐피탈은 투자자들에게 늘 장기적으로 최고의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캐피탈은 특정 시점에 정말로 훌륭한 펀드는 결코 인기가 높을 수 없다고 믿는다. 캐피탈은 시장에서 시세를 내는 업종이나 테마는 외면하고, 대신 시세가 꺾여 있는 업종을 주목하는 경우가 꽤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보상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대다수 뮤추얼펀드 회사들은 최근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개인투자자들에게 펀드를 판매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를 위해 스타매니저들을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막대한 광고비를 지출한다. 캐피탈이 가는 길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신규 펀드를 출시할 때 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캐피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건설적인 보수주의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캐피탈은 펀드 판매 방법을 혁신하는 일에서도 보수적이다. 캐피탈은 전략적인 결정을 내릴 때는 보수적이고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길 때는 매우 일관되고 지속적이며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대부분의 뮤추얼펀드 회사들이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광고와 판매에 집중하지만, AFD는 뮤추얼펀드를 판매하는 브로커-딜러에 초점을 맞춘다. 브로커-딜러에 대한 지원과 동기부여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이들은 약세장에서도 개인투자자가 장기투자에 집중해 투자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이끌어주는 능력과 의욕을 발휘할 것이라고 캐피탈은 믿고 있다. 딜러나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그들과 함께 오랜 세월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일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캐피탈은 위대한 기업과 프로정신의 결정적인 요소인 "신뢰"를 구축하는 데 이미 상당히 오랫동안 매진해왔다.
캐피탈은 투자의 노하우와 투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로서 "할 수 없는 일"과 "하지 않는 일"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깊은 책임감을 갖고 할 이야기가 많다고 절실히 느낀다. 캐피탈은 공개적으로 "이런 일은 할 수 없는 회사"임을 밝힐 때가 자주 있다. 캐피탈은 이렇게 설명한다. "발군의 뮤추얼펀드가 되기 위해서는, 펀드매니저가 매우 영리해야 하고, 수많은 일을 정확히 처리해야 하며, 운용자산에 큰 투자위험을 떠안아야 하고, 그리고 또 큰 행운이 따라야만 합니다!"
고객 서비스
고객들이 서비스의 가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관리자들은 회사의 사업기반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자산운용회사의 서비스는 고객과의 의사소통에서 시작된다. 캐피탈은 투자회사로서 뮤추얼펀드에 투자한 개인과 기관투자가 고객들에게 우수한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 캐피탈은 이 같은 노력을 "사내 기업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적자원을 적재, 적소, 적기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조직상의 큰 변화가 필요할 경우 이를 흔쾌히 수용하는 조직 문화와 확고한 자세로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리더십이 이런 노력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반드시 장기 투자자들의 장기적인 이익을 지켜내겠다는 캐피탈의 의지는 여러 면에서 잘 드러난다. 창의적인 시각으로 신규 상품 출시를 경계하는 보수적인 자세, 일관된 관점을 꾸준히 밀고 나가는 투자 철학, 늘 장기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충실한 투자보고서, 양질의 지속적인 투자자 서비스, 확고한 비용절감 정책, 자본 이득세의 최소화, 낮은 운용보수가 그런 예들이다. 특히 캐피탈은 다른 경쟁회사들이 관심을 갖기 훨씬 전부터 양심적으로 주주들의 세금 문제에 신경을 써왔고, 높은 자본이득세율이 적용되는 단기 시세차익 실현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애썼다.
캐피탈 인터내셔널이 기관투자가 고객을 위한 이머징마켓 투자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산운용회사 자리에 올라선 1997년 초에 캐피탈은 개인투자자 고객을 대상으로 한 뮤추얼펀드로는 이머징마켓펀드를 출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개인투자자 기반의 뮤추얼펀드는 처음에야 잘 판매되겠지만, 시세변동과 함께 환매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실망스런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머징마켓에 특화한 다른 회사들이 매년 10%씩 손실을 기록하던 1999년에 와서야(93~99년의 누적 손실은 50%가 넘음), 캐피탈은 시장이 바닥에 도달한 시점에 뉴월드 펀드를 출시했고, 포트폴리오도 이머징마켓의 채권과 이머징마켓 지역에서 사업규모가 큰 선진국 다국적기업들의 주식들로 신중하게 구성했다.
글로벌 투자를 개척하다
캐피탈이 해외투자를 시작한 건 1955년이었다. 시장이 최악으로 치달았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캐피탈은 해외사업에서 계속해서 손실을 기록했고 국내 사업에서의 이익도 미미했다. 캐피탈이 해외사업을 추진했던 유일한 이유는, 러브레이스 부자가 단지 직관적인 판단에 따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여러 해 동안 꾸준하게 지원했다는 점이었다. 해외투자가 캐피탈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으로 성장하는 데는 존 러브레이스(JL) 개인의 지속적인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해외사업의 규모가 국내사업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성장해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었다.
1955년에 캐피탈은 국제자원펀드(IRF)를 시작으로 미국 기관투자가들의 초기 해외투자 대열에 가담했다. 캐피탈은 1962년 스위스 제네바에 유럽 사무소(캐피탈 인터내셔널)를 설치했다. 이때는 미국인들이 해외투자를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기 25년 전이었고, 당시 투자 비중 10%는 상당히 높은 해외투자 비중이었다. 캐피탈만의 특별한 해외투자 신화와 성공의 역사는 이렇게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좀 놀라운 일이지만, 해외투자와 해외리서치에 일찍 나섰던 캐피탈의 개념적 기반은 탄탄했다. 외국의 주가수익비율(PER)은 분명히 낮았다. 이렇게 싼 주식 가치는 캐피탈과 같은 장기적인 가치투자자에게는 매력적인 투자대상이었다. 더욱이 국제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캐피탈의 리서치 애널리스트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의 장기 전망을 파악하기 위해 해외의 경쟁기업들에 대한 1차 자료를 확보하고 싶어 했다.
캐피탈은 해외사업을 추진하면서 1960년대 말 EAFE 지수(유럽, 호주, 극동 이 세 지역의 주식시장을 결합한 지수)를 만들었는데, 이 지수는 곧 해외투자의 실적을 측정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는 일은 척 심프가 주도했다. 그는 해외투자를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하고, 다중운용자들이 정말로 포트폴리오의 가치를 높여가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객관적이며 공정하게 비교할 수 있는 잣대가 캐피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EAFE 지수는 바로 이런 목적에서 개발됐다. 이 지수를 산출하는 데 들어간 자료들은 대부분 이전에 한 번도 집계되거나 활용된 적이 없었다. 캐피탈은 1970년에 EAFE 지수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Capital International Perspective》라는 자료집으로 외부에 판매했다. 캐피탈은 여기서 올린 판매수입으로 제네바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비용의 일부를 충당했다.
JL은 글로벌 투자 사업을 키워가기 위해 미국 투자자들에게 적합한 뮤추얼펀드를 만들어 출시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번햄(Burnham & Co.)의 리서치 책임자 월터 스턴을 스카우트해 뉴 퍼스펙티브 펀드의 회장직을 맡겼다. 캐피탈이 새로 설계한 이 펀드는 미국 이외의 지역에 25%까지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돼, 이 펀드의 판매를 맡길만한 증권브로커로 "해외투자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스턴이 물망에 오른 것이었다. 스턴의 채용은 정확히 들어맞았다(공모 규모가 뮤추얼펀드 역사상 두 번째를 기록해 캐피탈의 글로벌 투자 사업이 가시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캐피탈은 전 세계적으로 현지의 투자정보와 전문지식을 개발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지출한다. 캐피탈은 현지 출장을 중시한다. 캐피탈은 1960년대부터 일지감치 회사 차원에서 전 세계적인 현지 지식수준을 높이기 위해 투자전문가 각자에게 연구해야 할 지역을 할당했다. 해외시장 연구의 전형적인 방식은 2~3주간에 걸친 해외 기업 탐방이었다. 매년 두세 차례씩 반드시 주말을 낀 해외 출장이 기획됐고, 아무 일 없이 한 주를 더 체류하기도 하면서 음악회나 무용, 연극 관람, 유적지 방문 등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