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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르바이트로 12억 벌었다

조인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한 달 10만 원으로 먹고사는 초절약 생활기

버스비 700원 모아 용돈 쓰는 남자


새벽 5시. 나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들러붙는 마수에서 벗어나려는 듯 벌떡 일어나 잠을 털어낸다. 서둘러 씻고 아내가 차려준 따뜻한 음식을 먹다 보면 눈두덩에 붙어 있던 자투리 잠이 씻은 듯 달아나고 정신이 바짝 든다. 5시 30분, 집을 나선다. 지하철 4호선 범계역까지는 3km 남짓 거리인데, 내 걸음으로 25분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이 거리를 날마다 걸어서 다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서 역까지 간다. 10억이 넘는 재산이 있으면서 시내 버스비 700원 아끼겠다고 그 먼 거리를 날마다 걸어다니는 건 욕심이 지나쳐 병이 된 거라고 어떤 사람은 살짝 비꼬기도 한다.



버스나 택시 대신 걷는 쪽을 택하는 건 꼭 돈 때문만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 택시를 탔더라도 일단 택시의 편한 맛을 알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슬그머니 택시를 타려고 이런저런 핑계를 찾게 되겠지. '오늘은 감기 기운이 좀 있으니까, 태권도장에서 무리를 했으니까,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으니까….' 구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택시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싶으면 버스라도 원할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왕복 1시간쯤 걸리는 출퇴근길이 자꾸만 고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잃어버리는 것은 한 달에 7만 원쯤 지출되는 교통비뿐만이 아니다. 조금 편안하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내 삶과 일터,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슬금슬금 스며들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끝이다. 마치 처음엔 손가락 하나로 막을 만했지만 차츰 주먹으로, 머리로, 마지막엔 온몸으로 막아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금세 커지는 댐의 구멍과 똑같다. 작은 구멍이라고 하찮게 여겨 막지 않은 방심이 결국 힘껏 공들여 쌓아놓은 재산과 삶의 태도 전부를 허물어뜨릴 거센 물난리가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마다 30분 거리를 묵묵히 걷는 것은 이젠 돈도 좀 써가며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유혹에서 내 삶을 물 샐틈없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이다.



밥 먹고 사는 데는 10만 원이면 충분하다

아내와 나, 우리 두 식구가 한 달 동안 쓰는 생활비를 살펴보면 내가 왜 현대판 신(新)자린고비라 불리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가 받는 월급과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들이는 돈을 합치면 한 달 수입은 400만 원 남짓이다. 이 가운데 300만 원은 예금, 적금, 보험, 연금 등의 형태로 무조건 저축한다. 소위 '묻지 마' 저축이다. 이는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세운 불변의 원칙이다. 남은 100만 원 가운데 40만 원은 양가 부모님께 각각 20만 원씩 드리는 용돈으로 지출된다. 용돈을 드리고 나면 60만 원이 남는다. 이 돈이 우리 부부의 한 달 생활을 위한 순수 예산인 셈. 여기서 10만 원 정도가 아파트 관리비로 지출되고 5만 원은 인터넷 사용료 등의 잡비로, 5만 원은 차량 유지비로 쓰인다. 차비 등 한 달 개인 용돈은 내가 7만 원, 아내가 13만 원 정도 쓴다. 이제 남은 돈은 20만 원. 한 달치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는 10만 원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10만 원은 예비비로 남겨두고 문화생활이나 외식, 봉사 단체 후원회비 등 특별한 행사나 일에 요긴하게 나누어 쓴다(핸드폰 요금도 여기서 지출된다).



하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뜬구름 잡는 것 같아 도무지 못 믿겠다면, 우리 집의 1급 비밀인 소비 원칙을 공개할 수밖에.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하므로 주중에는 밖에서 점심과 저녁을 거의 해결한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날은 주말이나 휴일뿐이어서 식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사면 두 달 동안 넉넉히 먹는다. 그러니 한 달 쌀값을 따지면 2만 5,000원 정도 들어가는 셈. 남은 7만 5,000원으로 쇠고기부터 콩나물까지 여러 반찬거리와 간식과 음료 등을 모두 사고도 돈이 남을 때가 더 많다. 물론 몇 가지 구입 요령을 꼭 지켜야 가능하다.



① 쇼핑은 철저히 늦은 밤에 대형 마트를 이용한다. 우리 동네 마트는 밤 10시가 넘으면 거의 모든 야채와 부재료 값이 반으로 뚝 떨어진다. 쇠고기까지 반값에 판다.

② 장을 볼 때는 한 번에 2만 원어치 이상은 절대로 구입하지 않는다. 상한선을 정해 놓으면 충동 구매할 위험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다.

③ 외식비와 영화 관람료는 예비비에서 지출한다. 극장에는 자주 못 가고 석 달에 한 번 정도 간다. 영화도 제값 내고 볼 수는 없는 일! 조조할인이나 핸드폰 멤버십 카드 등 가능한 할인 서비스를 모두 동원해 관람하곤 한다.

④ 주말 저녁에 하는 외식은 5,000원짜리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따라서 소박한 장국 메뉴가 주류지만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다. 이런 작은 여유마저 없으면 나는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하숙생이나 자취생과 다름없다.



나를 자린고비로 만든 충격적인 사건

억척스럽게 삼 남매를 키운 어머니께서는 막내이자 3대 독자인 내게 거는 기대가 유별나셨다. 하지만 나는 늘 어머니의 기대를 채우기에는 한참 모자란 자식이었으니.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정신없이 놀면서 날마다 술을 퍼마시고 놀러 다니며 난봉꾼처럼 살았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주신 한 달 용돈은 5만 원. 지금의 내 한 달 용돈과 맞먹는 금액이지만 그때는 아무 보잘것없는 돈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1학기 내내 놀며 지내다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친구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잘 아는 형이 운영하는 칵테일 바야. 일도 힘들지 않고 보수도 썩 괜찮은 편이거든." "그래, 마침 잘됐다!" 나도 내 손으로 돈이라는 걸 벌어 원 없이 펑펑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게 주인을 만나러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초행길이다 보니 내릴 곳을 놓쳐서 그만 우왕좌왕하는 동안 주인은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하고 말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전봇대에 붙어있는 종이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아르바이트생 모집. 단순 노무직. 시급 2,500원' 며칠 뒤 이 전단지를 붙인 회사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라면 상자와 과자 상자들을 큰 화물차에 옮겨 싣는 일이었는데 어서 빨리 한 달이 지나 내 손에 60만 원이라는 목돈이 들어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고된 일을 해 나갔다.



그곳에서 용역회사 직원인 김씨 아저씨를 만났다. 육순 줄에 접어든 분이었지만 덩치가 좋고 기력이 넘쳐 모두들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김씨 아저씨께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의 '왕년' 이야기를 자랑삼아 들려주곤 하셨다. 한때 무수한 부하들을 거느렸는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모두 90°각도로 머리를 조아렸단다. 시내 한복판에 아저씨만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이 잽싸게 두 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별명이 '인간 홍해'였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오전부터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날, 본사에서 '높은 분'이 나온다는 얘기가 작업장 안에 돌았다. 책잡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중간 관리자의 단속이 이어졌다. 라면 상자와 과자 상자는 종이로 만들었으므로 비에 젖으면 못 쓰게 된다. 따라서 그런 날은 서둘러 상자 위를 비닐 덮개로 씌워야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높은 분'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어이, 이봐 김씨, 어째 일이 더딘 거야. 저기 빈 곳 안 보여? 저기도 씌워야 할 것 아냐?" 돌아보니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새파란 얼굴에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나이가 우산을 쓴 채 김씨 아저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높은 분'이 뜻밖에 너무 어려 한 번 놀라고, 김씨 아저씨께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는 걸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예, 예,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예상과는 180°다르게 한때 서울 한복판을 갈랐다던 '터프가이' 김씨 아저씨께서 아들 뻘 되는 비실비실한 양복쟁이에게 순한 양처럼 굽실거리다니.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론 '아, 이게 세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뒤 내 모습이 저렇다면….' 그후 몇날 며칠 밤잠을 설쳤다. 세상은 어디나 완벽한 등급제를 요구한다. 학교에서 등급을 매기는 기준이 성적이었다면 사회에서는 돈으로 바뀐다는 것. 차이는 그 뿐이다. 자신을 지킬 돈이 없으면 돈 많은 사람이 매긴 등급에 평생 휘둘리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처럼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은 줄곧 하류 인생일 게 뻔했다. '더 이상 짓눌린 채 살아가고 싶지 않아. 세상의 잣대에 휘둘려 끝없이 나를 비하하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슨 방법을 쓰던지 내 앞에 놓여진 가혹한 현실을 딛고 일어나 세상에 보란 듯이 자리 잡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대학의 낭만을 바쳐 모은 종자돈 1억 5,000만 원

200만 원, 나의 첫 자본 투자


뷔페 음식점에서 2학기 주말 내내 하루 13시간씩 시간당 5,000원을 받고 일한 끝에 내 손에 쥐어진 돈은 200만 원 남짓이었다.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도무지 양이 차지 않았다. 이런 속도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1,000만∼2,000만 원 모으는 게 고작일 터였다. '그 돈으로는 집은커녕 고급 차 한 대 장만할 수 없겠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런 궁리에 빠져 있는데 마침 선배가 일자리를 소개해주었다.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여러 채소를 받아 필요한 가게에 배달해 주는 일이었다.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까지 하루 네 시간만 일하면 한 달에 11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는 점. 어쩔 수 없이 200만 원을 탈탈 털어 중고 다마스를 샀다. 자동차 값 100만 원, 보험료와 이런저런 세금을 내느라 100만 원이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벌이를 위한 '자본투자'라는 걸 하고 나니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털털거리는 다마스를 끌고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집을 나서 물건을 떼다가 야채 가게 20여 곳에 배달하고 나면 훤하게 날이 밝았다. 뷔페에서 일하는 것보다 무척 쉬웠다. 그렇게 한 달만 뛰면 무려 110만 원이라는 거금이 생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새벽마다 내 발이 되어주는 100만 원짜리 고물 차가 한없이 미더웠다. 돈 버는 재미를 알게 되자 이왕 고생하느니 조금만 더 고생하자는 생각이 슬그머니 싹텄다. 3학년 때는 새벽 3시부터 4시 30분까지 거리 가판대에 신문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맡았다. 고작 1시간 30분 가량 바짝 일하고 버는 수입이 60만 원이었다. 작은 승합차 한 대는 내게 자본투자의 위력을 톡톡히 가르쳐주었다. 채소와 신문배달, 게다가 주말마다 뛰는 뷔페 음식점 아르바이트까지 합쳐 벌어들인 한 달 수입이 210만 원대에 이르렀다. 1학년 2학기 내내 주말마다 13시간씩 일해 200만 원을 모았는데, 그걸로 차를 사서 굴리니 한 달만에 200만 원을 거뜬히 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간단한 차이는 나중에 돈을 모아 투자하는 과정에서 두고두고 깨닫게 되었다.



알짜를 고르는 노하우, 현장에서 배운다

3학년 2학기 여름방학 때였다. 6개월 동안의 단기 사병을 마치고 복학을 앞두고 있던 무렵, 어느 건축 현장의 막노동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두 달 동안 평일 낮에 나와 열심히 일하면 두 달치 임금 300만 원을 한몫에 몰아준다는 거였다. 나는 두 달만 바짝 고생해 목돈을 챙기고 한 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쉬면서 체력을 기를 계획을 세웠다. 새벽에 야채와 신문을 돌린 뒤 다시 뙤약볕 아래서 뜨겁게 달궈진 벽돌을 실어 나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조금만 더. 마침내 월급날이 다가왔다. 들뜬 기분으로 도착한 공사 현장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인부들이 한데 모여 책임자 나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아저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모두 화를 내고 계세요?" "아니, 아직 얘기 못 들었어? 공사반장이란 놈이 우리한테 줄 임금을 몽땅 갖고 튀었대."



아뿔싸! 청천벽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얼굴 벌겋게 더위 먹어가며 일한 인부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건축주는 건축주대로 자신은 이미 임금을 다 지불했다며 책임이 없다고 하니 힘들게 일한 우리들만 중간에서 불똥을 뒤집어쓰게 된 판이었다.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억울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 무더운 여름날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못 마시고 땡볕 아래서 쏟았던 땀과 노동이 자꾸만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나에게 두 가지의 큰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첫째는 주인과 임금 지급자가 일치하지 않고, 임금 지급자를 신뢰할 수 없는 아르바이트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는 당시 공사반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건축주가 믿을 만하다는 이유로 덥석 일을 맡은 게 최대 실수였다. 건축주 못지않게 공사반장의 됨됨이를 살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게 화근이었다. 또 하나는 일을 하고 난 뒤 일금을 받을 때까지의 사이가 너무 긴 아르바이트도 되도록 피한다. 다른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예상치 못한 사기를 당할 수 있다. 이때 입을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임금이 적어도 주급이나 월급 단위로 반드시 정산되어야 한다.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맡을 때는 두 달 동안의 임금이 한꺼번에 목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미지급 금이 쌓이면 사고가 터졌을 때 입을 수 있는 손해가 커진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르바이트 7년 만에 1억 5,000만 원 모으다

밤낮으로 미친 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다보니 대학과 대학원 시절이 훌쩍 지나갔다. 그 대신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1억 5,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쥘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어떻게 1억 5,000만 원을 모을 수 있지?" 독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의문을 품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그 무렵의 지출 내역서를 공개한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것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졸라매 돈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학년 2학기 때 번 돈 200만 원을 중고 다마스 구입에 몽땅 투자했다. 2학년 때는 이 차로 주중에는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야채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 달에 110만 원을 벌었다. 주말에는 뷔페 음식점, 이삿짐 센터 등에서 일하고 30만∼4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한 달 동안 벌어들인 140만 원 정도 돈 가운데 다마스 기름 값 5만 원 정도를 떼어놓고 다달이 130만 원 남짓 저축했다. 이때 1년간 모은 돈이 1,500만 원쯤 되었다. 그런데 다마스를 끌고 다니며 일해보니 뭔가 하나 더 배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3학년 때 일간지 돌리는 일을 추가했다. 덕분에 60만 원을 더 벌었다. 이때 적게 잡아도 한 달에 200만 원은 족히 벌었던 것 같다.



1년간 모은 돈은 2,500만 원 정도. 2,400만 원의 정기적 수입 외에 방위를 마치고 복학할 때까지 100만 원 정도 더 벌어들인 것. 4학년 때는 농수산물 시장과 뷔페 음식점 등에서 경력을 인정해 몇 푼씩 더 주는 덕분에 한 달 수입이 250만 원까지 올라갔다. 이 돈 역시 고스란히 통장으로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모인 돈이 8,000만 원이나 됐다. 대학원 시절에는 야채 배달을 그만두고 낮에 생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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