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꿈을 이룬 14명의 보통사람들
게일 리버맨·앨런 라빈 지음 | 창해
부자의 꿈을 이룬 14명의 보통사람들
게일 리버맨․앨런 라빈 지음/권치오 옮김
창해/2002년 10월/288쪽/10,000원
안젤라 어데어-호이
'불행한 결혼'을 접고 온라인 출판사의 여왕이 되다
1999년 3월, 세 명의 아이를 둔 35세의 어데어-호이는 실직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자 남편과 얼마 전에 이혼했다. 하지만 1년 뒤 온라인 출판업에서 독특한 행보를 시작한 그녀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장부상으로 100만 달러를 보유한 그녀는 자신의 회사인 북로커닷컴(BookLocker.com)의 가치를 적어도 500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추정한다. 게다가 자신이 쓴 전자책의 판매를 통해 매달 5천 달러 정도를 벌어들인다. 그녀가 출판하는 온라인잡지 「라이터스위클리닷컴(WritersWeekly.com)」은 구독자가 5만 1천 명이다.
어데어-호이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중요한 교훈들을 세심하게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다. “어머니가 처음 가르쳐주신 교훈은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남자가 영원히 지켜줄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거기에는 한계가 없다고도 말해 주었다. 그래서 어데어-호이는 힘든 일을 싫어하지 않았고, 돈버는 일을 즐겁게 생각했다. 열 살 때 그녀는 하루에 10시간 동안 기꺼이 일했다. 그녀는 독서를 좋아했으며, 고등학교 때 실시한 적성검사에서 훌륭한 언론인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평가결과를 받기도 했다.
임신하여 대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첫 결혼을 한 그녀는 남편의 음주벽과 학대 때문에 자살까지 생각하다가 결국 이혼을 했는데 그 사이 그녀가 근무하던 스페이스 산업의 경영이 악화되어 실직했다. 하지만 실직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다. 함께 일하던 직원이 자신이 경영하게 된 인터넷 회사에 와서 일해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어려서부터 뛰어났던 글재주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후 한 온라인 잡지사에 자신의 글을 실어줄 수 있는지 문의하여 갈베스톤 만에서 가족들과 함께 경험했던 모험 항해 이야기를 재미있고 진솔하게 써서 보냈는데 그 글이 결국 잡지에 실리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글을 좀더 쓸 수 있는 기회를 찾던 그녀는 출판사와 편집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작가시장(Wirter's Market)』이라는 책을 구했다. 이 책은 출판사와 편집자에 대한 자료원으로써 작가에게는 성서와도 같은 책이었지만 내용이 매우 오래 전의 것임을 알게 된 그녀는 작가들에게 실제로 돈이 되는 출판시장을 정리한 잡지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출판시장 보고서』를 1천 부 찍어 무료 웹사이트를 통해 역시 무료로 배포했다.
6개월이 지나자 연간 구독료 39.95달러를 내는 독자들이 600명으로 늘어났다. 구독료는 그녀가 직장에서 받는 연봉을 훌쩍 뛰어넘었고, 그녀는 다른 작가들의 글을 신문에 판매하는 신디케이트 사업을 시작했다. 비록 이 사업은 실패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경쟁력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사업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겪게 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녀는 재혼했다. 그리고 1999년 9월에 집에서 BookLocker.com이라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전자책 출판사 경영자와 만나 그녀의 책 『전자책을 쓰고 출판하고 판매하는 방법』이라는 책을 전자책 출판사의 웹사이트 목록에 올리고 판매를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그녀의 책은 그 웹사이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 되었으며, 얼마후 어데어 호이 부부는 그 웹사이트를 직접 사들였다. BookLocker.com과 WirtersWeekly.com 사업으로 둘은 연간 6만 달러의 순수익을 거두었다.
“경쟁업체들은 작가로부터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들이 많은 책을 팔 수 있도록 돕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보통의 작가들이 전통적인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할 때 선인세로 받는 돈은 1만 달러를 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책을 도매로 판매한 금액에 대해 10~15% 정도의 인세를 받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전자책은 선인세를 지불하지 않으므로 온라인 출판업자가 가져가는 몫은 매출액의 30% 정도이다. 따라서 전자책이 성공하면 꽤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출판시장에서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틈새시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운 좋게도 시장에서 간과하고 있던 틈새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수요를 충족시켰지요. 앞으로도 이런 틈새를 계속 찾을 겁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자신만의 틈새시장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다른 사람을 그대로 따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2000~2001년 사이에 닷컴기업의 몰락으로 많은 투자자들이 첨단 기술주에서 많게는 50% 넘게 손해를 봤지만 어데어-호이의 회사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녀는 경영진들이 지나치게 부채에 의존했기 때문에 몰락했다고 주장한다. 많은 닷컴기업들이 기업공개를 통해 자본을 조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업공개를 하지 않고 사업모델을 외부의 도움 없이 운영할 것이며, 절대로 수입을 초과해 지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투자한 회사가 수익을 많이 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벤처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성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편집권 또한 빼앗겼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에 맞추어 살아갈 겁니다.”
세이모어 '사이' 스펄링
대머리 이혼남, 헤어클럽의 대부가 되다
헤어클럽 포멘(Hair Club for Men)의 창립자인 그는 자신이 대머리일 때의 모습과 가발을 착용한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텔레비전 광고로 유명해졌다. 스펄링은 2000년에 회사를 매각하면서 1,800만 달러를 받았다. 여기에다 앞으로 5년 동안 매각한 회사에 자문을 해주는 대가로 매년 80만 달러를 받고, 경쟁업체를 설립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매년 60만 달러씩 받는다.
스펄링은 배관공 아버지와 경리일을 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대단히 사랑하고 존중했지만 혼자 배관일을 하면서 몇 달씩 실직상태로 지내는 가난한 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구두닦이, 가이드를 하거나 아버지의 배관일을 돕기도 하던 스털링의 인생에 대한 전환점은 공군에 입대했을 때였다. 그는 입대한 기지의 권투 챔피언과 3라운드를 싸웠는데 결국 무승부였다. 이 경기를 계기로 그는 공군 권투부에 가입해서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그리고 복무기간 동안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시야를 넓혔고, 대학도 다녔다.여자친구의 임신 때문에 대학도 포기하고 맞이한 첫 번째 결혼은 20대 중반에 파경을 맞이했다. 낙담해 있던 그는 어느 날 형과 함께 신문에서 헤어위빙(hairweaving,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 남아 있는 머리에 가발 등을 덧넣기)의 새로운 개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 헤어위빙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시작은 소규모로 가발을 만드는 남자와 스펄링 형제가 각각 머리 만지는 일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자 형제들만 따로 나와 헤이위브 크리에이션스를 차렸다. 이후 형에게서 독립한 스펄링은 1976년에 헤어클럽 포멘을 차렸다.
스펄링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을 광고에 출현시켰다. 사업은 계속 성장했고, 새로운 고객들이 늘어났지만 당시에 가발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가발을 3~4년 사용하면 가발과 원래의 머리카락 사이에 보기 싫은 선이 생기고 염소로 소독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면 머리가 탈색되는 등의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가발업계는 늘 이러한 나쁜 이미지를 극복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가발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객의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일반적인 봉투에 정보를 담아 고객에게 발송했다. 또한 매달 회비를 낸 고객에게 언제라도 와서 머리손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혁명적인 방법도 사용했다.
현재 헤어클럽에서는 첫달 가입비로 1,500달러를 받고 그 후에는 매달 200달러씩 받는다. 계약서 같은 것은 없으며, 고객이 가발을 계속 사용한다는 약속을 하면 충분하다. 이 개념은 가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꿔놓았으며, 고객들의 이탈도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그는 하버드 MBA 출신을 CEO로 임명하여 함께 운영했지만 스펄링이 회사의 재정상태에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에 거의 도산 위기까지 갔다. 결국 새로운 CEO를 고용하여 수익이 없는 센터의 임대를 해지하고 직원을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해 회사를 살려냈다.
그리고 당시 80개의 센터를 보유하고 있었던 헤어클럽 포멘을 캐나다인 투자자그룹에 좋은 조건으로 매각하고 나서 통장을 확인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건 그 돈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부’라는 것은 그것을 감당할 자격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펄링은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천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세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배우세요. 나는 하버드를 다니지 못했고, MBA를 따지도 못했습니다. 평범한 보통사람일 뿐이지만 기꺼이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서 손님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글로리아와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
쿠바 이민자들이 음악제국을 건설하다
글로리아와 에밀리오 에스테판 주니어, 두 사람의 인생은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정권을 탈취했을 때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그 당시 글로리아와 에밀리오는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속한 가족은 모두 쿠바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는 돈도 없었고, 낯선 말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배움을 선택했고, 자신의 정열을 추구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후 에밀리오는 미국으로 이주해 라틴계의 인기가요들을 연주하는 밴드의 퍼쿠션 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고, 글로리아는 쿠바를 떠나 미국의 마이애미 빈민가에 정착해 살면서 음악을 사랑하는 가족들 덕분에 기타를 연습하며 비틀스의 노래와 쿠바 음악까지 혼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에밀리오를 처음 본 것은 1975년이었는데 글로리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에밀리오는 자신의 밴드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고 그녀가 이를 받아들여 마이애미 사운드 머신이라는 그룹이 탄생했다.
1978년 결혼한 두 사람은 1년 뒤, 첫 번째 앨범 ‘Renacer'를 2천 달러라는 초저예산을 들여 녹음했다. 에밀리오는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두 개의 앨범으로 전 재산을 잃었음을 밝혔다. 그룹이 레코드 계약을 통해 받는 돈은 곡에 대한 4%의 인세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실수를 통해 매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겁니다.” 그후 지금은 소니 디스코스가 된 디스코스 CBS 레코드에서 4장의 스페인어 앨범, ‘Dr. Beat'라는 싱글 앨범, ’Primitive Love' 등의 앨범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음에 따라 그룹의 인기가 한층 높아졌고 글로리아와 에밀리오는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후 교통사고를 당해 아이까지 크게 다친 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보트의 물결에 휩쓸린 29살의 법대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깊이 절망하지 않고 에밀리오는 사업가로서의 영향력을 키웠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작곡한 노래의 지적 재산권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에스테판 부부는 음악으로 수 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그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업에 돈을 투입하고 다른 투자처를 찾았던 것이다. 그들 부부는 한 바구니에 자신들의 게란 전부를 담지 않았다.
에밀리오는 부동산 사업을 시작해 호텔, 대지, 사무용 빌딩, 콘도 등을 매입하고, 레스토랑과 카페를 개장했다. 오늘날 에스테판 부부가 사우스 비치에 소유하고 있는 레스토랑과 호텔은 마이애미에서 꼭 들러야 할 명소로 자주 언급된다. 유명 인사들의 지원을 받은 레스토랑이 대부분 실패했지만 에스테판 부부의 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리오 에스테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유명하다니까 그곳에 가보게 됩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음식과 서비스 때문에 가게 되죠.”
에스테판 부부는 그들이 거둔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과거와 미국 생활 초창기의 비참했던 생활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선사업에도 열심이며 개인생활도 모범적이다.
앤터니 데이비드 파크스
생활보호대상자, 이웃집 백만장자가 되다
캘리포니아 이스트 오클랜드의 빈민가에서 흑인으로 태어난 앤터니 데이비드 파크스는 반평생이 넘도록 일했고, 일찍부터 사업가로 활약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 청과물 판매 사이트 ‘웹밴 그룹’의 출범을 도울 기회가 왔을 때, 나름대로 비전도 갖추고 있었다. 그가 다른 닷컴기업 백만장자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면, 회사의 주식이 상장되기 전에 자신이 받은 스톡옵션의 1/3 이상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점이다. 많은 백만장자들이 대부분 재단을 설립하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과 달리 파크스는 대리인을 통해 웹밴의 주식을 직접 작성한 편지에 동봉해서 100여 명의 친구와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파크스는 자신이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을 이야기한다. 그의 가족은 생활보조금을 받아서 생활하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파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과 자존심, 추진력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이 원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고등학교 3학년 때 상담교사의 조언을 계기로 그때부터 파크스는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으며, 바닥을 청소하거나 피자 가게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산호세 주립대학을 여자친구의 임신 때문에 한 학기만 다니다 그만둔 파크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하얏트리젠시 호텔 커피숍에 취직했는데 호텔에서 호스트와 웨이터 일까지 했고, ‘올해의 직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주어진 하얏트의 유명한 경영수업 기회를 활용한 그는 가족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이 더 커지자 그곳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때 일하던 피자 가게에 부지점장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다른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해서 집세를 벌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고 말하는 이 순간을 거쳐 여러 레스토랑을 옮겨다니며 경력을 쌓았지만 그는 인정받지 못했다.
파크스는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친구 두 명과 함께 레스토랑 솔루션스라는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에서 하루종일 일하면서 쉬는 날에는 레스토랑 컨설팅을 했는데 파크스가 호텔의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배운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처음부터 좋은 직원을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조급하게 사람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레스토랑 사업에서는 지배인을 반드시 도입해서 유지하고 강력하게 시행해야 하는 특정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파크스는 90일 안에 넵튠 펠리스라는 레스토랑의 경영을 정상궤도로 올려놓지 않으면 해고된다는 조건을 달고, 이 원칙을 시행하여 놀라운 성공을 이뤄낸 후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1994년 스타벅스에 합류한 그가 1996년 스타벅스를 떠날 때 받은 연봉은 4만 8천 달러였다. 이때 처음으로 스톡옵션의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만큼의 스톡옵션을 받았고 매년 25%씩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파크스는 샌프란시스코에 20개의 스타벅스 점포를 개장했다. 스타벅스는 다양성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자는 파크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파크스는 유색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