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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저)중국상인, 그 4천 년의 지혜

차오 티엔솅 지음 | 가람기획


중국상인, 그 4천 년의 지혜

차오 티엔솅 지음

가람기획 / 2000년 6월 / 248쪽 / 9,000원





제1장 역사를 바꾼 상인들



대표적인 큰 상인들


중국 상인들은 저마다 특유의 개성이 있다. 유교의 교양이 몸에 밴 사람, 의협심이 강한 사람, 이익에 눈이 어두워 의를 저버린 사람 등. 이들 중 어떤 이는 특이한 경영 수완을 발휘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손에 들어온 막대한 재산은 안중에도 없이 새로운 사업에 도박을 걸기도 했다. 심지어 돈의 노예가 되어 권력을 포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정치를 장사 수단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일반 상인과는 다른 기이함이 있어 다른 상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에 도전했고,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는 것에 도전했으며, 결국 성취해냈다. 이들의 기이함은 담력과 식견, 특이한 사고방식, 미래를 지향하는 과감한 도전 정신에서 연유했다. 그러므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벤처 기업가라 할 수 있다.

‘와신상담’을 권유했던 상인 - 범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범려도 큰 상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시비를 가리는 정치 세계를 결연히 버리고 상업에만 전념함으로써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부르며 상인의 시조로 여긴다.

범려는 춘추 시대 말기에 초나라의 완읍(宛邑, 지금의 하남성 남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라며 재학을 갖추어 기품이 드높았고, 얽매임이 없는 분방한 성격이었다. 범려는 먼저 오왕 부차를 섬기고자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자, 월나라로 건너가 월왕 구천(句踐)을 섬겼다.

국력과 군사력이 미흡했던 월왕 구천은 범려의 간언을 물리치고 오나라를 공격하다가, 전력의 열세로 대패하여 오히려 오나라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때 범려도 월왕 구천과 함께 끌려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 풀려나 월왕 구천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그 후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부흥에 전력을 기울이며 와신상담을 권유하여,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정치를 버리고 거상이 되다


월왕 구천이 패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범려는 홀연히 조각배를 타고 월나라를 떠났다. 그런데 그는 떠나기 전 친구인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남겼다고 한다.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고,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 월왕 구천의 인상은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하여, 이런 사람과는 곤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자네는 어찌하여 월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가?

범려의 권유를 듣지 않던 문종은 결국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범려가 상인의 길을 택한 것은 월나라의 정치가이던 계연(計然)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 옛날 구천이 회계에서 부차에게 포위당했을 때, 계연은 구천에게 경상칠책(經商七策)을 건의했다. 내용인즉, 생산을 늘리고 시장 경제를 발전시킨다면 월나라는 빠르게 윤택하게 된다는 주장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상품이 생산되는 계절과 사회 수요와의 관계를 파악해, 시장의 수요·공급의 균형을 명확히 한다.

- 해와 달이 농업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감안해, 자연의 규칙을 파악하고 수해와 가뭄에 대비한다.

- 식량의 가격은 1두 30~80전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이 적당하다. 가격이 너무 낮으면 농민들이 파산하고, 토지가 황폐해진다. 또한 가격이 너무 높으면 상인들이 손해를 보고, 시장이 얼어붙는다. 물가가 이치에 맞아야 농민과 상인 둘 다 이익을 보고, 국가도 세수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 매점을 할 때는 확실한 상품, 즉 장기 보존에 강하고 쉽게 팔리는 것을 골라 파손과 재고를 피한다. 부패하기 쉽고, 파손되기 쉬운 물건은 매점이나 장기 보존을 피하고 비싸게 팔아 치운다.

- 물가의 움직임을 파악해, 상한에 이르면 매점했던 물건을 분토(糞土) 버리듯 하라. 물가가 바닥이다 싶으면 보석처럼 재빠르게 사라. 금전은 자주 유통되어야 이윤이 생긴다.

흥하고 쇠함을 아는 것이 장사의 비결


범려의 장사는 순조로웠다. 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수십만의 재산을 가진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그러자 범려의 명망을 들은 제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영입하려 했다. 그는 제나라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지체 없이 재산을 동향의 친구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얼마 안 되는 보석을 가지고 도읍(陶邑)으로 옮겼다. 그곳 사람들은 범려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렀다.

범려가 도읍(陶邑)에 정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도읍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여러 나라와의 왕래가 편리해 장사를 하기에 최적지였다. 그래서 그는 이곳 도읍에다 상품을 쌓아 모은 다음 가격을 자유롭게 조절해 시기를 보아서 방출하거나 매점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모든 일은 믿을 수 있는 지인에게 맡겨서 처리했다. 사업은 순식간에 발전해 19년간 세 번이나 천금을 벌기도 했다.

후세 상인들은 범려를 상인의 시조로 삼고 있는데, 범려의 경영 요체는 장사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똑같이 성쇠와 변화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번창했을 때 멈출 줄 알아서 쇠퇴의 국면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 쇠잔한 상태라도 낙담하지 말고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여 약세를 강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범려는 물가의 등락이 수요와 공급에 있어 잉여와 부족 때문에 생긴다고 여겨 그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용하였다. 즉 가격이 낮을 때는 구매하고, 가격이 높을 때는 팔아치웠다.



제2장 상인의 역사



상인이란 말은 지명에서 유래했다


상인의 ‘상(商)’의 어원은 촌락의 이름이다. 그 촌락은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시 남부였고, 촌락을 세운 시조 계(契)는 우(하 왕조를 열었던 전설상의 제왕)의 치수 공사에 공이 있어 그 땅을 봉토로 받았다. 계의 10대 후손인 왕해(王亥)는 장사에 수완이 있었다. 사육하고 길들였던 소를 밭농사에 이용하는 한편, 달구지를 끌게 하면서 황하 일대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왕해의 4대 후손인 탕은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 왕조를 세웠다. 그 이후에 몇 번의 천도가 있어, 마지막으로 은(殷)에 이르렀다. 따라서 상(商)을 은이라고도 불렀다.

은이 멸망한 후, 주 왕조의 주공 단(旦)은 은의 유민에게 장사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은상(殷商) 사람들은 장사를 잘한다고 알려졌으며, 주 왕조에서는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켜 은상인(殷商人), 즉 상인(商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던 사람들을 상인이라 부르게 된 시초였고, 그 상인들이 벌이는 사고파는 활동을 상업(商業)이라고 했다.

관상(官商)


관상은 관리의 신분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을 뜻한다. 말하자면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장사를 하는 것으로, 특수한 위치를 앞세워 재산을 눈덩어리처럼 늘릴 수 있었다. 관상은 최고 통치자인 황제가 임명하며 녹봉을 받으며 장사를 했다. 한편, 황족은 장사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봉건 사회에서 상업은 말업(末業)으로 여겨 비천한 일이라 생각되었기에 황족이 장사를 하면 신분을 잃게 되었다.

유상(儒商)이란 어떤 상인인가?


유상이란 유가의 경전을 배워 공명을 떨치고자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장사를 하고 있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인들은 교양이 있고 유교의 영향도 깊게 받아 일반 상인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유교적 사상과 문화를 갈고닦았다.

유상의 한 무리를 사상(士商)이라 부른다. 사(士)는 관에서 임명한 임관된 자를 뜻하는 임(任)과는 다른 의미이다. 사는 고대 독서인, 지식인의 통칭이다. 봉건 시대 독서인이 책을 읽는 목적은 전적으로 관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며, 공명을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는 목표를 낮추어 독서에 두고, 관직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왜 상인은 선비를 부러워했는가?


전통적 중국 사회에서는 상인이 통치 계급이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상인들은 금전과 재산이 풍족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향유할 수는 있었으나 결코 ‘고귀한’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별별 수단을 동원해서 신분 상승을 꾀했다. 관직에 있는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거나 거금으로 관직을 사기도 하였다. 상인들은 왜 이토록 사인(士人) 내지 임인(任人)이 되려고 애썼을까?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전통적인 중국 사회가 철저한 관료 사회로 모든 것이 관의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금전이 아무리 많아도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지만, 권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학과 상업이 결합된 유상이 생겨나고, 독특한 유교적 색채가 짙은 상인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군상(軍商)의 특권


군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군대(軍隊)를 상대로 하거나 전쟁의 발발에 응하여 장사를 하는 이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군인이 직접 장사를 하는 경우이다. 어느 사회이든 총기와 화기는 특수 상품으로 분류되어 일반 상인은 취급하지 못했다. 총·화기 거래는 정부로부터 특별히 허가를 받거나 특권을 가진 자만이 취급할 수 있었다.

의상(義商), 간상(奸商), 평상(平商)


상인을 도덕적 측면에서 구분하면 의상, 간상, 평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의상이란 도덕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에 있는 상인이며 보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1) ‘의로서 이를 얻는다’라는 태도를 견지한다. (2) 자선 사업을 벌여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 (3) 교육 사업을 한다. (4) 국가 건설과 국방을 위해 자금을 댄다.

한편 간상은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다. 그들의 상행위는 오로지 이익만을 탐하는 것이었고 이익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도 있었다. 상(商)이 없으면 간(奸)도 없다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의상과 간상 이외의 상인을 총칭해 평상이라 부른다.

경영 규모와 조직 형태로 나누어 보면…


상인을 자본이나 경영 규모의 대소로 구분하면 거상, 중간상인, 소상인으로 나뉘며, 조직 형태로 분류하면 산상(散商)과 상방으로 나눌 수 있다. 산상은 흩어져서 개인행동을 하며, 상인 조직에 참가하지 않고 다른 상인들과의 제휴도 일체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산상들의 경제력은 미약했다. 반면 상방은 조직적인 상인 단체로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이 필요하면 긴밀히 단결하는 특성이 있다.



제3장 억압받았던 상인들



사회의 ‘말석(末席)’이었던 상인


봉건 사회에서 상인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사대부 계층은 물론 농민에도 미치지 못했던 상인의 사회적 지위는 말 그대로 ‘말석’이었다. 그러나 상인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계층이고 사실 역사적 지위를 놓고 보면 다른 어떤 사회 계층과 비교해도 결코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먼저 역대 왕조가 제정했던 상업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중농억상(重農抑商)이었다. 이것은 농업을 중시하면서 상업의 발전을 경시하고 억제하는 정책이다. 중국 고대의 많은 왕조들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중농경상(重農輕商), 중본억말(重本抑末), 강본약말(强本弱末, 근본을 강화하고 말단을 누른다) 등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춘추전국 시대의 이회, 상앙, 순자, 한비자 등이 대표적으로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농업은 의식을 해결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대본(大本)이나, 사치품의 생산이나 유통은 그 두 번째 내지 세 번째라는 것이었다. 상인이 늘면 농업에 종사할 노동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상업의 발전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었다.

진한 시대에는 억상 정책이 한발 더 나아가 제도화되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상인과 그 딸린 무리를 변경의 노역에 종사하도록 명하는 조례를 내렸다. 또한, 한대에서는 ‘상업해국해농론(商業害國害農論)’이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상인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송대에 와서도 억상 정책은 이어졌다. 차인법(茶引法), 매박법(買朴法) 등으로 차와 술의 전매 정책이 추진됨과 동시에 중소 상인이 폭리를 취할 수 없도록 하는 중과세가 부과되었다. 이런 경향은 명청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조정은 관상, 관청과 결탁해 주요한 상품을 독점하는 한편, 중소 상인을 배제하고 공격했다.

상인을 억압했던 이유


역대의 상인은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 계층이 아니었으며, 봉건적 생산 양식하에서 자신들의 이윤만을 획득했다. 지배 계급은 상업이 발전하면 지배 계급의 소비욕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지배 계층의 수입원을 빼앗기거나 착취 기반 자체를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억상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억상 정책은 중농주의를 기반으로 하는데, 봉건 시대 중국의 농업은 소규모로 자연주의 경제와 조화를 이루었다.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 농산물을 생산하고, 수공업품을 만들었다. 소규모 농업에 가내적 소규모 가축 사육이 결합된 농업 형태가 수천 년 중국 역사의 변함없는 생산 양식이었다. 그런데 이 자급자족에 의한 소농 경영은 상품 경제와 상업 발전을 저해하였다.

사회적 조건으로도 중국 봉건 사회에서는 토지가 오랜 세월 동안 봉건적 착취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지주 계급은 이를 유지시키려 했으며, 역대의 통치자들도 거듭하여 중본억말(重本抑末) 정책을 고수했다. 즉 상업이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를 와해시켜 봉건적 경제 기반을 붕괴하지 못하도록 반대했고, 소농의 가내적 수공업이 시장 경제로 발전하는 것 또한 제한했던 것이다.



제4장 상인들의 결속



활기찼던 명대의 경제


중국 상인에 대해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단단한 결속력이다. 그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공동 조직인 방회(會)는 지금까지도 화교 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인에 의한 방회 조직을 상방이라 하는데 방 내지 방회는 서로 돕는 동업자 단체를 가리킨다. 상방은 당에서 송에 걸칠 무렵 출현했으나, 명청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명나라 초기 통치자들은 무엇보다 강력한 정권의 확립을 지향했고 생산에 유효한 조치를 차례로 시행하여 산업의 회복과 발전이 눈에 띄었다. 황폐화된 토지를 개발하고, 유민화된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책에 힘입어 호수가 1,600만 호, 인구 6,140만 명(100년 전보다 650만 증가)에 달했다.

수공업 생산도 회복되어 방직, 요업, 제철, 제염, 조선의 기술이 발전하고 제철 연료가 목재에서 석탄으로 바뀌어 용광로에서 하루 6회, 철 2백 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생산력의 향상은 농업과 수공업의 분리를 자연스럽게 진행시켜, 농민 중 수공업만 전문적으로 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상품 경제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원거리 판매망에 의한 남북 교류도 성행하면서 면, 담배, 기름 등 상품 작물의 면적이 증가하였고 수공업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명대의 시장은 계속 확대되었는데 이는 명 왕조의 상업 장려 정책이 커다란 몫을 하였다. 이렇게 생산이 확대되고 상품 수량이 증가하게 되자 상업 자본은 비약적으로 거대해지고 상인 수도 격증했다. 그러자 상인들은 이에 대한 대책과 더불어 고급 관료들의 간섭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많은 상업 자본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상방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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