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의 진실
김태흥 지음 | 올림
감정노동의 진실
김태흥 지음
올림 / 2014년 5월 / 232쪽 / 13,000원
나도 사람이다 - 감정노동의 현실
감정노동자를 죽이는 ‘블랙컨슈머’
최근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이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대한항공 미국행 항공기 내에서 벌어진 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소위 ‘라면상무’ 사건이라고 불린 이 사건에 뒤이어 모 베이커리 회장님의 호텔 도어맨 폭행 사건, 모 분유회사 영업사원의 대리점 사장에 대한 욕설 사건 등이 터지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감정노동의 문제를 남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급기야 감정노동 문제는 갑과 을의 문제로까지 비화하면서 언론은 물론 정치권과 청와대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각종 서비스업 현장에서 감정노동자들이 고객에게 꼼짝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인격적 모독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교묘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돈이나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전국 유명 백화점을 돌면서 사지도 않은 물건을 환불해달라는 방식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돈을 뜯어낸 3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힌 사례가 있다. 임산부를 사칭한 이 여성은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 수입의류 매장에서 사지도 않은 양말을 들이밀며 “양말과 함께 세탁한 고급 속옷에 물이 들었다”고 주장해 양말 세 켤레 값 2만 원, 속옷 값 16만 원, 왕복 차비 8만 원, 정신적 피해보상비 50만 원 등 80여만 원을 뜯어낸 혐의였다. 이 여성은 매장 측이 영수증을 요구하면 “임신 8주인데 이럴 수 있느냐?”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매장 측이 강경하게 나오면 화장실에서 피 묻은 화장지를 들고 와서는 “당신네 불친절 때문에 하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황한 백화점 측은 이미지 악화를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여성이 요구하는 금액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은 같은 수법으로 전국 주요 대도시 백화점을 돌며 총 25차례에 걸쳐 1,000여만 원을 뜯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담당 직원들은 감정적으로 완전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만다. 욕을 먹고, 인격적 모독을 당해도 끝까지 저자세로 죄송하다며 빌어야 한다. 본인의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이런 경우 육체적ㆍ감정적으로 완전 탈진하여 회사에 다닐 의욕도, 살아갈 희망도 사라져버릴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다. 여기에 기업이 입는 손해는 또 얼마나 클까? 금전적 손해부터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이미지 추락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수십, 수백억 원의 광고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같은 블랙컨슈머 문제는 사실 기업이 감정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데서 발생하는 자가당착적 귀결이다. 얼마 전 발생한 삼성전자 AS센터 직원의 자살 사건은 감정노동자를 기업의 소모품으로 여기다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으로 이미지가 전락해버린 대표적 사례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그런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들도 사람이다 - 감정노동의 감정자본주의화
감정노동은 어떻게 감정자본주의가 되었는가
1993년 11월 17일, 호주를 방문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시드니에서 구상했다는 이른바 ‘세계화’를 요란하게 발표했다. 세계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찾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세계화가 고질병인 쌍둥이 적자를 세계시장 개방을 통해 해소하려는 미국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국제 금융그룹들의 신자유주의 계책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핵심 원인은 김영삼 정부가 막무가내로 추진한 금융규제 해제와 시장개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임기 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국이 가입 조건으로 제시한 시장규제 철폐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세계화와 양털 깎기: 국제 금융그룹들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경제 불황을 조작한다. 그들의 전문 용어로 ‘양털 깎기(fleecing the flock)’라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신용대출을 확대함으로써 거품을 조장한다.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주식시장도 미친 듯이 활황이 된다. 사람들은 부동산 광풍ㆍ주식 광풍에 눈이 멀어 은행 빚을 끌어댄다. 그런 다음 갑자기 통화량을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 폭락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량자산의 가격이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로 폭락하기를 기다려 헐값에 사들인다. 잘 자란 양털을 깎기 시작하는 것이다. - 『화폐전쟁』 148쪽
지금도 미국은 출구전략이라는 미명하에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자국의 경제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세계 경제를 불안하게 만들어 자국의 이익을 취하는 전형적인 양털 깎기다. 대우자동차가 GM에 헐값에 넘어간 사례가 대표적이다. 15~20조 원 이상 가는 회사가 단돈 1조 5,000억 원에 팔린 것이다. 세계화는 우리나라 재벌들에게도 커다란 기회를 제공했다. 삼성 스마트폰 10대 중 8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생산된다. 대기업은 엄청나게 성장하는데 국내 고용은 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세계화에 있었던 것이다. 20~30대의 취직난과 40~50대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상시 퇴출, 그리고 1,00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또한 세계화에서 시작되었다.
노동 유연성이라는 그럴듯한 말: 신자유주의의 망령 중 하나가 노동의 유연성, 즉 고용의 유연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작명을 했을까? 바로 국제 금융그룹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냥 정리해고라고 하면 금방 알아들으니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그럴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세계화의 깃발 아래에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와 신한국당은 야당과 노동계가 반대하던 노동법 개정안을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새벽 6시에 비공개로 단독 처리했다. 신한국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ㆍ변형근로시간제ㆍ파견근로제 등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핵심적인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모두 담고 있었다. 이는 국제 금융그룹을 배후에 둔 미국과 외국 기업들 그리고 한국 재벌들이 그동안 요구해왔던 해고 규제, 노동시간 규제, 파견 규제를 없앤 것이었다. 3단계 금융자율화 계획으로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참여로 상품시장을 개방하고, 노동법 개정으로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여 자본시장-상품시장-노동시장의 모든 부분에서 자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97년 초국적 투기자본이 주도한 외환위기에 한국은 속수무책이었고, 결국 국가부도 사태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증가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렸다. 하지만 재벌들은 구제금융을 통해 그동안 부담이 되었던 부채를 모두 털어버리고 규제가 철폐된 시장에서 크게 성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30대 재벌의 자산은 4배, 매출은 5배, 순이익은 12배 넘게 커졌다. 초국적 기업들은 헐값에 나온 우리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며 십수 년 동안 배당, 자산 재매각, 임원 급여 등으로 투자금의 10배가 넘는 돈을 본국으로 가져갔다.
‘선진 외국에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다! 노동 유연성도 우리 경제가 발전하고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 필자가 기억하는 IMF 당시 사회 분위기다. 결과는? 비정규직 1,000만 명 시대가 열렸다. 2,500만 명의 취업자 중 1,000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자영업자 800만 명을 빼면 두 명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이다. 나와 우리 가족 중 누군가는 이 비정규직의 올가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파견직ㆍ아웃소싱ㆍ특수고용 노동자 등 고용의 형태도 아주 다양해졌다. 바로 이 고용의 유연성이 감정노동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서비스업의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바로 비정규직ㆍ파견직ㆍ아웃소싱 직원 또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콜센터 가운데 전국의 변태들이 전화를 해대도 상담원들에게는 먼저 끊을 권리가 없는 회사가 90%에 달한다. 이 비율은 콜센터의 아웃소싱 비율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콜센터를 직영으로 두거나 자사 직원으로 운영하는 회사는 10%에 불과하지만 먼저 전화를 끊을 권리를 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웃소싱 회사가 상담원들의 인권을 위해 전화를 끊을 권리를 줄 수 있을까? 매년 계약을 갱신하거나 경쟁입찰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최저 비용으로 최고의 고객만족을 사탕으로 내걸어야만 갑과 을의 계약관계가 유지된다. 감정노동의 심각성은 구조적인 문제이며 신자유주의의 폐해 중 하나인 것이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서 언제나 웃음과 친절로 고객들을 맞아야 하는 감정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노동 유연성의 희생자들이다. 국내 대형 마트는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합체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입점ㆍ납품 업체의 협력사원이 있고,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공급되는 용역사원도 있다. 여기에 시간제 아르바이트 종사자들이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은 채 일하고 있다. 본사가 직접 고용하여 임금을 주는 정규직 사원과 무기계약직 직원들도 있기는 하지만, 절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소수의 직영사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력을 ‘을’인 납품ㆍ입점업체로부터 지원받거나 파견업체 등을 통해 비정규 계약직으로 채용해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대형 마트가 이처럼 복잡한 고용 구조를 택하는 것은 노동자를 마음대로 줄일 수 있으면서도 고용에 대한 비용 부담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감정노동자들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처지에서 오늘도 고객 앞에서 웃음과 친절을 팔고 있다.
이제는 감정노동의 정의가 수정되어야 한다.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과 친절조차 자본의 한 도구가 되어버린 감정자본주의가 이 시대의 현실에 맞는 정의인 것이다. 필자는 감정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고객만족을 위해 종업원의 영혼과 감정을 자본에 예속시켜 굴종을 강요하는 행위.’ 이 같은 감정노동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미래도 어둡게 하고 있다. 이제 비정규직 1,000만 명은 자동차를 살 능력도, 부동산을 살 능력도, 고가의 전자제품을 살 능력도 없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의 활력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감정노동을 부추기는 ‘고객만족 경영’: 고객만족 경영 역시 감정노동을 감정자본주의로 바꿔놓는 데 일조했다. 고객만족 경영은 기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중앙부처ㆍ공공기관ㆍ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공공기관 고객만족도’를 조사해 기관의 경영 평가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공공부문 또한 고객만족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인천공항이다. 인천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평가 받는다. 한 해 매출 1조 6,000억 원을 올렸고, 순이익만 5,100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이 숨어 있다. 인천공항공사에 소속된 6,600여 명의 직원 중 비정규직은 6,000여 명으로 87.4%에 이른다. 우리가 공항에 내려서 만나는 공항 직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라는 말이다. 인천공항공사는 이처럼 상시근무가 필요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용역업체에 하청을 주어 노동자들을 간접 고용하고 있다. 인천공항공사 노동 실태에 대한 한 연구보고서는 76%의 노동자가 고용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인천공항 직원들의 친절도는 세계적이다. 기획재정부는 “공기업 중에서 인천공항공사가 최고 등급인 ‘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으며 공기업의 95.2%가 고객만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모두가 비정규직 감정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성과다.
국내 굴지의 한 홈쇼핑업체는 업계 최초로 3년 연속 ‘고객만족 경영대상’의 종합대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홈쇼핑업체에서 고객 접점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콜센터 직원들이다. 슬픈 현실은 소비자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해소하는 최일선에 있는 그들이 모두 외주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다. 고객만족 경영대상은 바로 이 같은 감정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객만족 경영을 넘어 고객졸도 경영을 외치기 전에 그들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기업이 진정으로 고객만족을 통한 성장을 원한다면 고객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업의 성장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밀리면 죽는다 - 감정노동의 본질
밀리면 끝장이다?
감정노동 중 가장 힘든 것은 치솟는 분노를 참는 일이다. 화가 나면 우리 몸이 달라진다.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진다. 눈이 충혈되고 피가 머리로 몰린다. 독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든다. 분노의 호르몬인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온몸을 휘감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계속 참으면 소위 ‘화병’으로 발전한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뇌 속에서 분노를 담당하는 어떤 부위가 흥분했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아미그달라)라는 부위가 생존을 위한 경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분노ㆍ공포ㆍ증오ㆍ절망ㆍ폭발 등의 감정이다. 이 부위를 잘 달래주지 않으면 분노가 공포와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 지속적으로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공황장애로 고통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종종 편도체의 경고를 받는다. 진급에서 누락되었을 때, 후배가 상사가 되었을 때, 팀원들을 모두 해고했을 때 뇌가 분노하고 극도의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조직에서 뒤처지고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인간의 감정 중에서 제일 예민한 서열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검찰은 서열에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조직 중 하나다. 후배 기수가 승진해 고위직에 발령받으면 선배 기수는 모두 그만두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다. 서열이 엄격한 검찰 조직에서 후배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슬로건은 감정노동자의 심리적 서열을 노예 상태로 만들게 된다. 감정노동의 심리는 바로 서열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편도체가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우울증 같은 건강상의 문제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감정노동은 서열노동
서비스 현장은 강력한 서열 기제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고객은 왕’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왕과 왕이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고객은 왕이고 종업원은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물론 이는 물리적 서열이 아니라 심리적 서열을 말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종업원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진짜 왕 노릇을 하려는 꼴불견 손님을 만나기라도 하면 스트레스 강도가 대책 없이 올라간다.
소위 ‘진상’을 떠는 고객들은 틀림없이 자기가 속한 사회나 집단에서 서열이 엄청 낮을 가능성이 높다.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남편에게 학대받거나, 금전적으로 고통을 받는 등 서열상으로 밀려 몸과 마음이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다짜고짜 윗사람을 부르거나, 고래고래 악을 쓰며 난장판을 만들거나, 물건을 빼돌리다 걸리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식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높은 서열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작동하게 된다. 콜센터 직원들에게 성희롱을 하는 사람들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서열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광고계에서는 광고주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광고주님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상당히 자조적인 표현이다. 연간 몇십억에서 많게는 몇백억 정도의 광고비를 사용하는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서열은 주님과 노예 수준에 가깝다. 재미있는 것은 회사의 사정이 열악할수록 악성 광고주가 많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그때 서열을 깨달았다. 광고주들, 특히 악성 광고주들은 서열의 바닥에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광고회사 직원들보다 자기네들이 실질적인 서열에서 밀린다는 느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월급 수준, 사회적 인정, 일의 성격 등에서 광고회사 직원들을 부러워했으며, 이를 만회하여 상위 서열에 서기 위해 ‘갑질’을 해댔던 것이다. 그 숨겨진 서열의 심리적 기제를 알고 난 다음부터 필자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쉽지 않은 광고회사 생활을 비교적 잘해온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