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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마케팅하다

이봉구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세계를 마케팅하라

이봉구 지음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11월 / 313쪽 / 13,000원



01. 서른 청년, 세계로 나가다



30년 해외주재의 첫 임지 - 영국


1970년대 정부는 수출산업을 적극 육성하기 위하여 국가가 지정하는 종합상사 제도를 도입했다. 삼성, 현대 등 굴지의 그룹들이 종합상사 자격을 획득했고 다른 대기업들도 종합상사 자격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건설과 운송업에 주력하던 D그룹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 D그룹은 해외지사를 설치하여 수출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경력직원을 모집했다. 나는 이에 응시해 경력사원으로 입사했고, 런던 지사 개설요원으로 발령받았다. 나는 물론이고 주위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직장인들은 해외주재원을 간절히 희망했다. 해외근무를 하면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 지사로 발령받으면 선택된 인간이라고 할 정도로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남북 대치, 외환 부족, 폐쇄적인 정부 시책으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출국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해외주재원으로 선발되면 상공부에 가서 면접을 보고 거기서 통과해야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상공부 담당관은 나에게 영어는 얼마나 잘하느냐, 어떻게 입사 6개월밖에 안 되는 과장대리가 런던으로 발령을 받았느냐 등등 사주와의 관계를 의심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시 여권발급을 신청하면 관할 경찰서 정보과에서 면담 및 신청자 자택을 직접 방문하여 조회를 했고, 경찰의 신원조회 및 결격사유가 없어야만 여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또한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하는 보안 교육을 받고 교육필증을 휴대해야 출국이 가능했다. 국내 운전면허와 국제 운전면허 취득을 부랴부랴 준비했고, 한글과 영문 타자도 배웠다. 이는 해외주재원으로 가기 위한 필수 사항이었다. 나는 환송 나온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타는 비행기였다. 그렇게 해외주재원으로 첫 발을 내딛은 후 지금까지 10개국에서 11회의 해외주재원 생활을 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랜 비행 끝에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런던지사장인 남 소장이 맞아 주었다. 차창 너머로 눈에 들어오는 런던 교외의 들판과 고풍스런 건물을 보니 런던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나는 지사 근처에 있는 5층 고옥의 1층에 숙소를 얻었다. 가구, 식기, TV 등 모든 비품이 임차료에 포함되어 있어서 바로 입주하여 생활할 수 있는 집이었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인근의 코인 세탁소를 이용했고 밥을 지어 먹고 설거지하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려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해결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거나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가서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신설 지사의 경우 정착, 영업개발, 행정 업무, 경비 정리 등 많은 일들이 매일 같이 쏟아졌다. 본사의 지시사항을 처리하다 보면 새벽까지도 사무실을 떠나지 못할 때도 많았다.

런던 생활을 시작한 후 얼마 후의 일이었다. 우리 회사의 C 회장이 중동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귀국하는 길에 런던에서 이틀 체류한다는 연락이 왔다. 남 소장은 나에게 회장의 영접을 위한 준비를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첫째, 중형 롤스로이스 검정색 차를 임대하고 나이 지긋한 운전사를 선정해야 했다. 나이 든 운전기사가 검정색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면 품위도 있고 운전도 안전하게 한다고 했다. 둘째, 회장 도착 시 호텔 도어맨이 90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서양 문지기는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법을 모르니 팁을 듬뿍 주면 따를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다. 셋째, 숙박카드는 인적 사항을 미리 기재하여 회장은 서명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그밖에도 회장이 직접 문을 여닫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교육도 받았다. 회장이 머물 스위트룸 거실 탁자 위에 각종 신문과 잡지, 과일 등도 준비해야 했다. 남 소장의 열성적이고 세련된 영접을 보면서 풋내기인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총수를 위한 의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아프리카, 해외건설 역사의 머리말을 써라 - 카메룬

D그룹 영국주재원을 하던 나는 K기업으로 회사를 옮겼다. 당시 K기업은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정유공장 건설 공사를 수주했기 때문에 이곳에 파견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코디네이터라는 임무를 맡았다. 최고 책임자인 현장 소장에 대한 자문 및 통역, 공사를 맡긴 회사와의 업무 협상, 현지 관청 섭외 등이 주된 임무였다.

빠른 시일 내에 공사를 개시하기 위해 선발대로 출국했다. 파리를 거쳐 카메룬의 두알라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쏟아지는 아프리카 열대의 밤은 칠흑이었다. 비행기 문을 열자 훅 하는 열기와 함께 더운 습기가 밀려들어 왔다. 호텔에 도착하자 로비의 바에 앉아 있던 흑인 여자들이 '치노(중국인이라는 뜻)' 하면서 큰 소리로 불러댔다. 호텔방에 올라가 보니 에어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여기저기 모기가 날아다녀 모기약을 뿌려야 했다. 미지근한 물로 지친 몸의 열기를 씻고 삐걱거리는 나무침대에 잠을 청했다. 아프리카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튿날 차를 타고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프랑스 원청사 간부의 안내를 받아서 팜나무 숲속에 위치한 임시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몇 주 후에 도착할 우리 근로자들이 쓸 숙소와 사무실을 짓는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과제였다. 숙소 건설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통역을 겸한 나는 혼자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이때부터 나는 현지에서 자연스레 유명 인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이름이 '리(Lee)'라고 하면 '브루스 리'와 형제냐고 되묻고, 쿵푸가 몇 단이고 시범을 보여줄 수는 없는지 관심을 보였다. 가끔 브루스 리와 형제간이라고 농담하면서 현지인과의 서먹함을 없애기도 하고, 쿵푸 동작을 취해 보이며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들이 동양인은 곧 중국인이라 여기는 것을 보면서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위상을 실감했다. 현지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는 그들이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숙소를 짓는 데 우리를 도와줄 현지인이 필요했다. 사람을 뽑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근마을에서 현지인들이 20명 정도 몰려들었다. 그들은 숲속을 다닐 때 길이 50~70cm 정도의 낡고 무딘 칼을 들고 다녔다.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앞으로 줄을 서라고 소리쳤다. 5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높은 곳의 가지는 장대 낫을 써야 하고 낮은 가지는 칼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장대 낫을 구해오라고 하자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장대 낫을 들고 되돌아 왔다. 나는 제일 먼저 도착한 가냘프지만 훤칠한 체구의 청년을 작업반장으로 임명해서 숲의 가지치기 일을 맡겼다.

가지치기 일이 끝나자 나는 작업반장으로 일을 맡았던 젊은 친구에게 현지 안내와 잡무를 맡기기로 하고 현지인 근로자 1호로 채용했다. 그는 채용된 후에도 아주 성실하게 일했다. 사람의 운명은 어쩌면 순간적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그 청년은 나중에 현지인 일반 근로자들을 관리하는 노무관리부서에서 근무했고, 현지인 노동자의 대표가 되어 최장기 근속자가 되었다. 마을에서 성공한 젊은이가 된 것이다. 밀림을 드나들면서 풀과 나무나 베는 신세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성실한 태도와 근면함, 열정이 그를 외국회사의 간부사원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는 장대 낫을 들고 제일 먼저 뛰어온 그 순간의 행동이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지의 나라, 해결사로 나서라 - 방글라데시

K사를 그만두고 현대종합상사에 경력 공채로 입사한 나는 1983년 방글라데시 다카 지사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방글라데시 철도청이 발주한 철도 객차 120량 국제 입찰은 한국 철도차량 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객차를 수출하는 기회였다. 응찰국가는 헝가리, 인도, 폴란드, 한국(우리 회사와 D사) 순이었다. 수출대금은 10년 연불 상환의 공급자 금융 조건이었는데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의 지급보증서와 철도청 발행 약속어음을 상환문서로 받게 되어 있었다. 철도청의 기술 및 가격 조건 평가 부서는 수도인 다카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걸리는 항구 도시 치타공에 있었다. 상위기관인 철도청 본부는 다카의 교통부 소속이었는데, 교통부 장관은 현역 해군참모총장 칸 제독이었다.

나는 자주 치타공에 출장을 가서 기술 평가 담당부서를 방문하거나 고위간부를 은밀히 만나서 우리회사에 불리한 평가 내용을 제거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경쟁사의 동향을 파악해 대응책을 수립해 나갔다. 입찰 평가에 의하면 폴란드, 헝가리, 인도 회사에 이어 우리 회사가 4위이고 5위는 국내 경쟁사인 D사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런데 폴란드, 헝가리, 인도 회사는 기술 심사에서 탈락이 확실하기 때문에 D사는 우리를 탈락시키기만 하면 낙찰받을 수 있다는 전략으로 우리를 집요하게 험담하는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해외 공급 실적이 없는 우리 회사의 객차가 납품될 경우에 안정성에 대한 담보가 어려울 것이므로, 평가 보고서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철도청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철도청 내부의 협조 인사를 통해 그 서신의 사본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즉시 한국 대사를 면담하여 국내 회사끼리의 비방 행위를 제지해 줄 것을 건의하고 D사의 서신 사본을 증거로 제시했다. 대사관은 외무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상공부에 통지하여 D사에게 과당 경쟁 행위를 중단하도록 요청했다. 사실 우리 회사나 D사나 사상 최초의 객차 수출 기회이므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일대 격전이었다. 수주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침내 방글라데시 철도청이 우리 회사를 낙찰사로 최종 결정했다는 정보를 갖고 본사로 돌아오자 사장이 나에게 방글라데시 국가 신용도가 낮으니 수주 물량을 절반으로 줄일 것을 요청했다.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전량 수주가 최선이지만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주재국의 신용도가 약하고 상환에 대한 불안감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철도청은 계약물량을 반으로 줄이려는 우리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하여 6백만 불의 철도 객차 60량의 수주에 성공하게 되었고 호텔방에서 밤새 계약서를 타이핑하며 계약을 준비했다. 대한민국 최초 객차 수출이라는 기록뿐 아니라 내가 직접 계약서에 서명한 최대 금액 수주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10년이 지난 후 방글라데시 철도청이 연불금융의 상환을 차질 없이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국제 입찰에서 모든 응찰사들은 수주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때로는 자국 정부의 전략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고 현지국의 고위층을 포섭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동원한다. 입찰기관의 주요 인사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경쟁사의 제안서류를 빼내 오거나 평가서의 내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극비의 공작을 추진하기도 한다. 극한적인 경쟁에서 승리하는 과정은 험난하고 때로는 비겁하기도 하지만, 승리자에게는 그런 것들이 한낱 추억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국제 입찰에서 2등은 없다. 금메달만 메달로 인정받을 뿐이다.

Art 대한민국의 미래를 배워라 - 프랑스

방글라데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나는 파리로 부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현대종합상사는 파리 지사가 없었기 때문에 현대중공업의 파리 지사에서 곁방살이로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유럽 순방 때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을 수행하여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전에 연락을 받은 우리는 호텔 스위트룸을 확보하고, 나는 회장의 식사준비와 스위트룸 정리, 본사나 다른 지사에서 들어오는 팩스 보고서 접수, 필요한 물품의 구입, 빨래 등 허드렛일을 하기로 하였다. 4월 중순 전두환 대통령이 프랑스를 공식 방문하는 날이 돌아왔다. 회장 일행이 탄 버스가 호텔에 도착하였고 나는 현대중공업 파리사무소의 L 지사장과 함께 호텔 정문에서 회장을 맞이하였다.

회장을 스위트룸으로 모시고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회장이 L 지사장에게 물었다. "이곳에 주재한 지 얼마나 됐나?" 지사장은 "4년이 넘었습니다. 귀국 발령을 받아 1개월 내에 귀국할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회장이 화를 버럭 내면서 "귀국 명령이 났으면 바로 귀국할 일이지 뭐하는데 아직 있는 거야? 당장 귀국해!"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자넨 얼마 됐나?" "두 달 되었습니다." "거긴 됐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1~2분 사이에 벌어진 돌발 상황이었다.

서울에서 수행 온 비서실장이 얼마 후에 회장 방으로 올라왔고 지사장은 로비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보고했다. 비서실장은 난감해하면서 지사장은 더 이상 회장 면전에 나타나지 말고 내가 지사장을 대신해서 업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나는 이번 의전의 전면에 나서야 했다. 나는 지사장이 달고 있던 명찰(비표)을 받아 회장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출입하면서 졸지에 회장의 근접 수행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새벽 4시경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호텔로 택시를 타고 와서 나의 방에서 조식을 준비했다. 월급쟁이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이런 일까지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회장의 양말이나 내의까지 깔끔하게 세탁해 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아침식사를 순 한국식으로 준비하는 회사는 우리뿐이었다는 것을 행사 후에 알게 되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노트를 펼쳐서 냄새를 쫓으며 조기를 굽고 구운 조기를 쟁반에 얹어 복도를 지나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머쓱했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미국이 리비아를 폭격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정주영 회장이 현대그룹의 전 유럽주재원들을 런던으로 집합시킨 적이 있다. 수십 명의 유럽 주재원들이 런던 지사 대회의실에 모였고 회장을 수행한 사장단들도 함께 참석했다. 회장은 이면지와 연필을 가져오게 하고 나를 포함한 지사장들에게 한 명씩 차례대로 일어나서 소속회사, 이름, 주재기간 등 자기소개를 하게 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긴장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그는 특별한 질문 없이 이면지에 가끔 무언가 적기만 했다. 누군가의 자기소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으면 다시 크게 말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해외주재원 중 몇 명에게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룹 회장이 직접 귀국 대상자를 선정하여 발표한 만큼 바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가까이 모셨던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한 강한 인상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02. 마흔 청년 세계를 누비다



남미 시장에 대한민국을 마케팅하라 - 칠레~아르헨티나


1992년 나는 현대종합상사의 칠레 산티아고 초대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산티아고는 해발 600미터의 안데스 산맥 기슭 분지에 자리잡은 도시여서 인근 고산의 만년설을 항상 볼 수 있었다. 겨울이면 대기 오염이 심해 학교들은 긴급 임시 휴교를 했다. 서민의 삶은 윤택하지 않았지만 부자들은 거대한 저택에서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스페인어를 몰랐던 나는 택시 운전사나 상점 점원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스튜디어스 출신 아주머니를 선생님으로 정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스페인어를 공부했는데 교재는 일간 신문을 사용했고, 스페인어의 고유 발음과 어근을 달리하는 고유단어들을 중점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3개월을 공부하고 나니 조금씩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칠레 거래선과 상담을 하면서 3B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3B는 Bonito(보니또), Bueno(부에노), Barato(바라또)라는 스페인어로서 거래 성사의 3요소라고 했다. 보니또는 아름답다는 의미가 강한 미적 의미이며, 부에노는 품질이 좋다는 의미이고, 바라또는 가격이 저렴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품질 좋고 가격이 저렴하면 거래가 성사된다는 얘기다. 칠레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인지도나 브랜드 파워가 일본, 미국, 유럽 상품에 비해 많이 낮아서 거래선들은 바라또를 주장하며 거래를 유도하는 상황이 제일 많았다. 칠레 사람들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은 일본제에 맛들려 있었고, 일반 소비재는 저가 공세를 앞세운 중국제가 시장에서 판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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