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탄생
월터 A. 프리드만 지음 | 말글빛냄
1장 자영 행상인이 전국을 순회하다1818년 제임스 길드는 21세의 나이에 고향 버몬트를 떠나 행상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70달러 짜리 은행 수표로 짐 보따리 하나와 몇 가지 물건을 샀다. 19세기 말, 많은 사람들이 공장 노동을 피하려고 출장 세일즈맨이 된 것처럼 그 역시 버몬트 농장의 고된 농사일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행상인들은 농부를 비롯한 구매자들의 신뢰부터 얻는 게 첫째였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행상인들은 마을에 와서 차례차례 장사를 하고 난 다음 떠나버리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세기의 방문 세일즈맨들과는 달리, 유명 회사를 대표하거나 브랜드 상품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행상인들은 잠재 고객을 자주 만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 대면하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장사를 할 뿐, 구매자가 물건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 일어날 미래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파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거래를 했던 이런 행상인들의 목표는, 이후 19세기 말, 때로는 같은 고객을 수년 동안 몇 번이고 방문하면서 판매를 하던 세일즈맨들과는 달랐다.
독립혁명 후 몇 년 동안, 미국인들은 점점 더 새로운 비즈니스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했고 해외무역의 범위도 확대되면서 멀리로는 중국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점차 운송과 통신수단도 발전해 나갔다. 운하는 1820~1930년대에 화물을 운반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제조품, 수입품, 서적을 파는 행상인들은 초창기 미국의 시장 혁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들은 농촌 지역, 연안지방의 산골 오지, 도시를 한데 묶는 네트워크 역할을 했다. 행상인과 직공 출신의 기업가들은 시골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파트너와 같았다. 이들은 농부와 도시 사람들에게 제조품을 가져다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장 문화라는 것까지 소개했다. 이들이 가져 온 단추나 옷감, 빗자루, 의자, 시계, 책, 그림, 각종 장식품 등 모든 제품들은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미국 역사의 초기에는 다양한 행상인과 보따리상들이 있었고 이들의 업적은 현대 세일즈맨의 정신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예부터 굳건히 뿌리를 내린 종교가 없고 정당간의 경쟁이 치열한 나라에서 판매와 선전, 아이디어의 설파는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순회 전도사들은 자기 변혁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며 사람들을 고무했는데, 이는 특허약품 외판원이나 자기 계발서를 파는 외판원들이 택할 법한 주제였다. 복음주의적 판매 모델은 세일즈맨들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빈번한 거절에 대해 강철과도 같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목표를 향해 부단하게 전진하는 열의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판매를 일종의 종교적 또는 영혼의 귀의로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오히려 판매를 더욱 세속적으로 접근하도록 했다. 1923년 소어스타인 베블렌은 상업적 세일즈맨십의 뿌리가 복음주의적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믿음에 대한 선동적인 선전은 모든 기독교계의 홍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장엄하고 대담하면서도, 가장 수지가 맞는 사업이다."
양철 식기, 시계, 책, 피뢰침, 여타 물건들을 갖고 다니며 판매하는 행상인들에게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초창기 미국은 운하와 철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교통 및 통신수단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선적된 물건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았고 운송 도중에 손상을 입었다. 물건을 발송하고 수령하는 어려움도 한몫 했지만 연방 통화가 넉넉하지 못하여 장사가 제한을 받았다. 이로 인해 판매자든 구매자든, 장사에 관여하는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물물교환이나 신용으로 거래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행상인들의 또 다른 문제는 주 정부와 군 단위의 행정 조직에서 장사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다. 이동 장사꾼들이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지역 상점주들이 주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한 것이다.
행상인들의 생활이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흥정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 직업을 깎아 내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물건을 판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판매기술이란 기만과 사기, 갈등을 일으키는 쓸모없는 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일즈맨이 조장하는 과소비가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즉, 사람들이 과소비 때문에 산책이나 독서, 대화와 같은 삶의 주된 기쁨들에서 멀어져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장 마크 트웨인, 『그랜트 회고록』을 팔다남북전쟁 이후에는 더욱 전문화된 외판원들이 물건을 팔러 다녔다. 이들은 농부들이 일하는 현장을 찾아가거나 상점을 떠나서 판매를 했다. 판매란 인간의 행위와 행동 규범, 예의 등과 같이 관례로 대변되는 일련의 비형식적 규칙 속을 항해하는 능력이다. 외판원들은 사람들끼리 상호 작용을 하는 공통의 관습에 통달해야 하고 또 그것을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제조업체나 고용주들이 외판원의 재치에 덜 의존하면서 체계적인 방식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고용주들은 세일즈맨들을 위하여 세일즈 각본을 제공했다. 이 세일즈 각본은 외판원의 판매기술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었다. 각본은 외판원들이 농부들의 의구심과 저항감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제작되었는데, 이 각본을 통해 세일즈맨들이 지닌 판매의 심리학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세일즈 각본은 세일즈맨들이 판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쓰여진 자기 발견적 도구였다. 그러나 이 각본은 오히려 판매란 힘든 노동이고, 정답을 그저 외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판매원은 또 다른 무언가, 이를테면 활력이나 자신감과 열정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판매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판매원은 명령을 따르는 '병사'가 되어야 하며,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자',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도록 만드는 존재여야 했다. 따라서 판매원의 어조는 지루해서도 안되며 활기가 넘쳐야 한다. 이는 판매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판매원은 서투르거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여서도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의 영향력이 주도적일 수 있도록 하라'고 세일즈 각본은 충고한다. 설득은 교묘한 술책이며 몸짓과 뉘앙스도 매우 중요하다. 순간의 떨림이나 망설임과 같은 작은 행동도 세일즈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19세기에 있었던 가장 성공적인 대규모 판매 캠페인을 펼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창작 활동을 하던 초기 30년 동안은 예약 판매 방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저서를 팔았다. 마크 트웨인은 단순히 은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책을 마케팅하는 데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는 제작비용과 삽화에 주의를 기울였고, 최종 완성본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최소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트웨인의 조카 찰스 웹스터가 트웨인의 몇몇 작품을 총판하는 일을 했고,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외판 전략에 대하여 가끔씩 편지를 써서 조언했다. 마침내 마크 트웨인은 조카와 함께 1884년 하트포드에 직접 출판사를 차렸고 출판사명은 조카의 이름을 따 웹스터로 했다.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그랜트 장군의 『회고록 Momoirs』이었다. 판매 캠페인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886년 초, 그랜트의 회고록은 미국 내에서 32만 5천 질의 판매고를 올렸고 수익의 대부분은 그랜트의 미망인에게 돌아갔다.
한편 웰든의 『탁발승의 20년』은 자신이 피뢰침 외판원, 서적 외판원, 방물장수로 일했던 시절을 자찬하는 책이었다. 책의 제목으로 탁발승을 택한 것도 동양의 정신적인 풍요와 신비주의를 내비치려는 의도였다. 그가 기술하고 있는 탁발승은 상품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아도 언제든지 물건에 대해 좋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컬었다. 이 책들은 즉석에서 물건을 팔 수 있는 방법들을 정의하고 있는데 의문의 여지가 남도록 질문을 할 것, 말할 때에는 일화를 들려주면서 잠재 고객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할 것, 다양한 가격을 언급하면서 구매욕을 부추길 것, 호기심이 생기도록 물건을 직접 들었다 놓았다 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1910년대에서 1920년대에 고조된 판매에 대한 관심이 물건을 파는 방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끊임없는 획득과 시샘의 사이클 안에서 이웃과 이웃들끼리 계속해서 경쟁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3장 출장 판매원, 전국 시장을 개척하다외판원과 서적 외판원들이 농부들에게 여러 가지 세일즈 기법을 실험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부류의 세일즈맨들이 전국을 횡단하고 있었다. 지방을 담당하는 판매원, 출장 판매원, 방문 판매원으로 불리는 이들은 대형 도매상에 고용된 사람들로 수당을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일했다. 이들은 사업가를 대상으로 물건을 팔았고 전략도 색다른 것을 선호했다. 이들은 일회성 매매 거래의 심리학적 측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고객과의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들도 잡화 외판원들처럼 현대의 세일즈맨십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솜씨 좋은 판매란 속임수가 아니라 고객과의 신뢰가 바탕이 되며, 신뢰는 오랜 시간에 걸친 거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세일즈맨십이란 출장 판매원들에게는 여전히 상품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이었다.
19세기 중반의 도매상들과 이들이 고용한 방문 판매원들은 여러 가지 상품을 하나로 묶어서 유통하는 것이 전문이었다. 이를테면 옷감이나 식료 잡화, 철물, 술, 페인트 및 유약 등과 같은 품목들을 묶어서 팔았다. 이런 품목들을 취급한 세일즈맨들은 으레 특정 지역에서 이 모든 제품들을 팔았는데 그 품목수가 수백에서 심지어는 수천 가지였다. 출장 판매원이 고객을 방문하는 횟수는 판매원이 취급한 상품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식품이나 잡화를 파는 판매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약품 및 기타 제약 관련 상품을 취급한 판매원들은 두 달에 한 번, 옷감 판매원들은 일 년에 두서너 번, 구두와 가죽 제품 판매원들은 1년에 두 번 정도 고객을 방문했다. 순회 판매원들은 제품이 작을 경우 이 가게 저 가게로 견본을 들고 다녔으며 호텔 방을 전시실로 꾸미기도 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자 19세기 말에는 많은 호텔들이 방문 판매원 전용의 룸을 마련하게 되었다.
방문 판매원을 위해 쓰인 안내서는 여행을 순조롭게 하고 유통 일정을 짜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출장 판매원들의 판매 기술에 관한 책들도 다수 출간되었다. 이런 책들은 대개 은퇴한 출장 판매원들이 현장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 책들은 세일즈맨의 삶을 지루한 농장 일이나 공장 일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방문 판매원이 묘사하는 시장 역시 경험으로 쌓은 지식과 인간관계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형태의 상점 주인들을 만났다. 또 기차나 호텔에서 밤을 보내면서 방문 판매직에 대한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판매란 긍정적인 사고를 유지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내와 열정이 요구되는 직종이었다.
1879년 미국 경제에서 제조품의 약 70%가 도매상을 통해 유통되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제조업체들이 소매상이나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이 수치는 떨어진다. 판매원들이 사라지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19세기 말, 통신판매 회사들이 도매상이 차지하던 위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류 도매상들은 몽고메리 워드나 시어스 뢰벅과 같은 통신판매 회사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백화점도 제조업자들에게서 물건을 직접 구매하며 출장 판매원의 실적을 깎아 먹었다. 그러나 방문 판매 직종이 쇠퇴하게 된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제조업체들이 도매상에 의존하게 된 것보다는 상품을 직접 유통한 것과 관계가 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대량 생산과 브랜드 상품에 대한 마케팅이 더욱 활성화됨에 따라 방문 판매원과 이들 고용주들의 비중도 크게 줄어든 것이다. 상점 주인들은 브랜드 가치가 없는 제품을 사느니 전국 규모의 잡지에 광고도 실리고 손님들도 잘 알고 있는 특정 브랜드 제품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4장 하인즈 사, '57종류'를 표어로 정하다19세기 말, 철저하게 관리된 더욱 새롭고 더욱 공격적인 형태의 세일즈 기법이 부상하게 되었다. 대량으로 상품을 생산하게 된 제조기업들은 자사의 정예 세일즈맨들을 채용하기 시작했고 최초의 현대적 영업망을 구축했다. 여기서 '현대'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들이 세일즈맨을 활용한 방식이 향후 수십 년 동안 다른 기업들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미국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미국 경제는 대규모 제조기업들의 부상에 탄력을 받아 빠르게 변했다. 어떤 회사들은 중소기업에서 시작하여 20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대규모 제조기업들의 판매 전략은 도매상을 방문하는 판매원들의 전략과는 달랐다. 이들은 자사 세일즈 인력의 활동을 생산 스케줄과 연계했고, 제품을 상표가 없는 채로 내놓지 않고 브랜드를 달아서 팔았다. 제조기업들은 브랜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도매상들이 취급하던 수많은 상표 없는 제품과 자사 제품들을 차별화 할 수 있었다.
대규모 제조기업들은 자사 제품뿐만 아니라, 자사의 세일즈맨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브랜드화'했다. 대량 생산 기업들은 출판사들이 상세한 안내서를 배포했던 방식으로 자세한 세일즈 매뉴얼을 제공했고, 동시에 세일즈맨들에게 유니폼도 제공했다. 회사명이나 브랜드는 세일즈맨이 아닌 회사를 대표했기 때문에 세일즈맨의 정체성 확립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세일즈맨들은 원자재를 입수하는 단계에서부터 제품의 판매로 이어지는 커다란 운영체계 안으로 통합된 것이다. 대기업의 세일즈 관리 시스템은 세일즈맨이 물건을 파는 당시에만 책임을 지던 관행뿐만 아니라 세일즈맨의 외양 자체도 바꿔 놓았다. 이들 고용주들은 세일즈맨이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갖도록 권장했다. 그리하여 회사를 대표하는 세일즈맨들을 전형적으로 뚱뚱하던 방문 판매원들과 확연하게 차별화시켰다.
당대의 주도적 기업가였던 헨리 존 하인즈는 영업 인력과 마케팅 캠페인을 펼쳐서 자신이 꾸려나가던 작은 야채 행상업을 국제적인 기업으로 키워냈다. 하인즈는 회사의 표어로 '57종류'라는 말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단지 숫자의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한다. 당시 하인즈 사가 생산 중이던 제품은 57가지가 훨씬 넘었다. 하인즈는 자사 세일즈맨들에게, 상점의 재고를 늘릴만한 품목은 강요하지 말고 상점주들에게 신용을 얻어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거래 관계를 쌓는 것에 열중하라고 강조한다. 또 하인즈 사의 세일즈맨들은 전문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려고 노력했다. 1898년 각 지점에 소속된 세일즈맨들이 공식석상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을 때 모두 검은 양복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유능한 세일즈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소매상이나 상점 그리고 고객의 요구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다. "물건을 팔지 말고 너라는 사람을 팔아라."라는 말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즈음에 유행하던 영업사원들의 슬로건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기업의 기업가들은 광고 게시판, 브랜드 홍보, 사은품과 같은 다양한 판촉용 유인 장치를 활용하게 된다. 대규모로 진행된 몇몇 선전 활동은 전국으로 배포되는 잡지에 광고를 실어서 판매원들의 영업 활동과 함께 동시에 진행되었다. 관리자들은 판매원들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