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말리는 마케팅 전쟁 이야기
로버트 F. 하틀리 지음 | 아인앤컴퍼니
서언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배우고자 노력한다. 특히 특정 기업의 경험은 얼마든지 다른 기업에서,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패한 기업의 경우 실패의 요인은 무엇이었으며, 성공한 기업의 경우,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성공과 실패요인을 비교·평가·분석해 보면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적절한 결정을 내려서 성공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Part I. 마케팅 전쟁
PC 전쟁 - 델 컴퓨터 VS. 게이트웨이21세기 전후 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바로 PC 메이커들 간의 그야말로 피 튀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02년에 시작된 저가 PC를 대표하는 두 개 기업 창업자들 간의 치열한 싸움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델 컴퓨터(Dell Computer)의 마이클 델과 게이트웨이(Gateway)의 테드 웨이트이다.
PC 시장이 대위기를 맞았던 2001년, 델의 수입은 2.6% 상승했다. 당시 PC 산업의 성장률이 -14%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성장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5월 3일에 끝나는 분기에 델은 총매출 80억 달러에 4억5천7백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는 델이 그 전에 기록했던 수익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경쟁기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델의 경쟁기업들의 상황을 보면, 한 때 PC업계를 지배했던 컴팩(Compaq)의 경우, 주가가 주당 50달러에서 10달러 미만으로 떨어지는 아픔을 겪다가 결국에는 휴렛팩커드에 합병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물론 이런 쇠락의 가장 큰 이유는 델의 공략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이트웨이는 절벽에서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상황이며, 고가 PC 시장을 지배하던 실리콘 그래픽스(Silicon Graphics, SGI)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는 델에 엄청난 시장을 내줘야 했다. 유일하게 IBM만이 델의 경쟁력과 맞서고 있는데, 이는 IBM의 대형 메인프레임과 서비스 위주 비즈니스가 델과 직접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침체는 오히려 델에게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행운의 기회로 작용했다. 최근 4년 동안 델의 세계 PC 시장점유율은 8%에서 15%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점유율 상승은 델이 저가전략을 더욱 강화하면서 고비용 위주의 라이벌 기업들에게 압박을 가한 덕분으로 해석된다.
휴렛팩커드는 2002년 5월 컴팩을 인수했을 때 델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PC 메이커로 부상했다. 그러나 HP는 이 정상의 자리를 오래 지켜내지 못했다. 델은 HP와 컴팩의 합병으로 인한 혼란기를 시장점유율 상승기간으로 잘 활용했다. HP와 컴팩의 합병 얘기가 나돌면서 이 두 업체의 고객들은 합병으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델은 이 합병으로 인해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할까 우려하는 기업고객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공략을 개시했다. 특히 PC와 대형 컴퓨터시스템(서버)을 구입하는 기업고객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가을, 델은 HP를 밀어내고 다시 세계 PC 시장의 정상 자리를 되찾았다. 당시 HP가 선적한 PC 수는 500만대였던 데 반해 델이 선적한 PC 수는 520만 대였다.
델은 PC 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프린터업계의 제2인자인 렉스마크(Lexmark)와 손을 잡고 HP의 아성인 프린터 분야에도 도전장을 던졌다. 잘 알다시피 HP는 오랫동안 프린터산업을 지배해 왔다. 특히 프린터 리필 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많은 기업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분야이다. 만일 델이 HP의 고수익시장에 성공적으로 침투할 수 있다면, HP는 델에게 PC 시장의 상당 부분을 내어준 후, 아성인 프린터 시장까지도 내주어야 하는 쓴 맛을 볼 수도 있다.
게이트웨이는 델의 가장 직접적인 경쟁기업이다. 두 회사는 똑같이 PC를 고객들에게 전화나 인터넷으로 직접 판매하고 있으며,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로 PC를 디자인해 주고 있다. 두 기업 간에 차이가 있다면, 게이트웨이의 경우 수백 개의 '게이트웨이 컨트리' 매장이 있어, 고객들이 실제로 매장에서 PC를 평가해 보고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객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이트웨이는 가격경쟁력에서 델에게 밀렸다. 그리하여 게이트웨이는 2001년 60억 달러의 매출에 10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하며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IT산업이 하향길을 걷게 되면서 게이트웨이의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했으며, 델과 힘겨운 가격전쟁을 벌여야 했다. 웨이트는 인력을 10% 감축하는 긴축경영체제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회사는 유럽과 아시아 등 해외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인력을 25% 더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게이트웨이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001년의 7.4%에서 2002년에는 5.6%로 하락하고 말았다.
웨이트는 관심을 델과의 경쟁에서 애플컴퓨터와의 경쟁으로 돌렸다. 만일 가격면에서 델과 경쟁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애플을 공략하자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2002년 8월 26일, 그는 애플의 iMac과 성능은 비슷하면서도 가격은 400달러나 저렴한 Profile 4라는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고 애플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수년 동안 웨이트는 게이트웨이를 컬트 브랜드(게이트웨이를 얼룩무늬 홀스타인 젖소의 이미지로, 정직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브랜드로 인식되기를 바라면서)로 만들고자 노력을 했다. 그는 특히 애플에게는 애플 매니아들이 있는 것을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게이트웨이도 애플처럼 컬트 브랜드로 변모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게이트웨이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게이트웨이의 델과의 가격전쟁은 힘겹기만 했다. 가격을 낮추다 보니 기업구조가 흔들렸고, 시장점유율은 하락했으며 수익이 증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2002년 6월 30일에 종료된 분기에는 총매출 10억 달러에 6,1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는데, 이 손실은 전년에 비해 3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이제 많은 분석가들은 게이트웨이의 형편없는 실적을 비난하고 있으며, 기관투자가협회는 게이트웨이를 실적저조기업 명단에 추가시켰다.
Part II. 위대한 컴백
구사일생으로 회생한 컨티넨털항공1994년에 고든 베튠은 보잉을 떠나 컨티넨털의 대표이사 및 COO(Chief Operating Officer; 최고운영책임자)에 취임했다. 그의 앞에는 끝도 없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컨티넨털은 경기침체 속에서 두 번의 도산위기를 넘기는 동안 막대한 부채와 고객서비스에 대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외형상으로는 미국 5대 항공사였지만, 컨티넨털은 미연방 교통부가 평가한 품질관리지표에서 미국에서 최악인 10대 항공사에 속해 있었다. 다음은 항공사의 품질 평가 지표이다.·정시운항률(정해진 스케줄에서 15분 안에 출발하는 비율)
·승객 1천 명당 짐 분실 항의 숫자
·승객 10만 명당 불만 승객 숫자
·본인 의사에 반해서 탑승이 거부된 사례 (예를 들어, 지나치게 많은 승객에게 표를 팔아 승객이 비행기표를 가지고도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한 경우나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 경우)
COO로 취임한 그 해 10월, 베튠은 CEO가 되었다. 컨티넨털항공의 조종석에 앉게 된 것이다. 그는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 그는 '정시에 운항하는 조종사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정시운항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으며, 아울러 짐 분실이나 기타 문제로 고객이 불만을 터뜨리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미연방 교통부 품질관리지표 최악 기업군에 포함되어 있던 컨티넨털은 1996년에는 위의 4가지 지표에서 모두 서비스가 세 번째로 좋은 기업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렇게 회사가 달라지자 고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특히 비즈니스 고객들의 복귀가 눈에 띄게 늘어나 전체 승객 중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4년에 32.2%에서 1996년에는 42.8%로 증가했다. 그 결과 1996년 5월 컨티넨털항공은 5백 마일 이상의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선정되어 J. D. Power Award라는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컨티넨털은 이어 1997년에도 같은 상을 받아 똑같은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최초의 항공사가 되었다. 영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7년 1월에는 미국 항공산업 관련 최고의 잡지인《에어 트랜스포트 월드》가 선정한 '올해의 항공사'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으며, 1997년 1월에《비즈니스 위크》에서는 베튠을 1996년의 최고경영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베튠의 이러한 노력은 사내 분위기를 일신했고, 다음 수치를 보면 직원들이 새로운 변화에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균 임금 25% 상승
·병가율 29% 이상 감소
·퇴사율 45% 감소
·근로자 보상요구율 51% 감소
·직장 사고발생률 54% 감소
이렇게 직원들과 경영진 간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대고객서비스도 자연스럽게 개선되어 갔고, 이는 매출 및 수익증가로 이어졌다.
*고든은 어떻게 컨티넨털을 살렸을까?-인간적인 경영 요소 도입 : 혼수상태에 빠져 다 죽어가는 컨티넨털항공을 살리기 위해 고든 베튠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인간적인 요소이다. 사장실을 개방하였고, 회사에 팽배해 있는 불신풍조를 쫓아내기 위해 팀워크를 강조했다. 그는 직원 모두가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파일럿에게만 적용하던 정시운항보너스제도를 모든 직원들에게 확대했다. 그는 직원들의 판단은 무시하고 서류에만 얽매이게 하는 직원관리장부를 태워 없앴다. 그는 과거의 흔적을 없애고 새로운 정책에 따라 행동하자는 증거로 비행기에 새로 페인트칠을 했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려는 베튠의 노력은 직원과 고객 모두를 감동시켰다. 무엇보다 직원들과의 열린 대화는 상하관계 개선과 팀워크 고취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튠은 뉴스레터, 늘 업데이트된 게시판, 이메일, 음성메일, 그리고 전세계 작업장에 설치되어 있는 전자게시판을 통해 직원들과 정보를 공유하려고 애썼다.
-고객을 돌아오게 만든 마케팅전략 : 기존의 경영방침은 무조건 경비절감에 맞춰져 있던 반면, 베튠은 더 나은 서비스를 통한 더 나은 상품의 제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시 말해, 정시운항, 승객 짐 분실사고 예방 등 고객 편의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을 만족시킨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한편 베튠은 승객들의 수요가 많은 곳, 다시 말해 '승객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 위주로 항로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마일리지 프로그램도 조정되었다. 베튠은 한 발 더 나아가 여행사, 사업 파트너, 그리고 고객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앞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며 돌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컨티넨털항공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현격하게 개선되었고, 과거의 악명도 잊혀져갔다.
*오랫동안 뿌리박힌 나쁜 이미지도 신속하게 불식시킬 수 있다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일관성 없는 전략은 안된다
*노사관계에 있어 적대적인 접근은 피해야 한다
*저가에만 의존하여 경쟁하는 것은 위험하다
Part III. 실패한 위기관리
무심한 위기관리와 책임회피로 야기된 재앙, 파이어스톤/포드제조업체의 부주의로 인한 제품결함은 고객의 부상, 심하면 사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업의 명예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위기를 가져온다.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뿐만 아니라, 윤리적·사회적으로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나아가 법적으로 소송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특히 제조업체가 문제가 있음을 알고도 이를 은폐했거나 부정했을 경우,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포드와 파이어스톤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들의 인연은 1895년, 하비 파이어스톤이 헨리 포드가 만든 최초의 자동차에 타이어를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1906년에 파이어스톤 타이어 앤 러버(Firestone Tire & Rubber Company)는 포드 자동차의 대량생산 자동차에 타이어를 공급하는 최초의 정식계약을 맺게 되었고, 이때 맺은 계약은 몇 십 년 동안 유지되었다.
포드와 이 타이어제조업체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99년에 사우디아라비아 및 인근 국가들에서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후 포드가 이들 국가에서 익스플로러의 타이어를 교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사고의 원인은, 타이어가 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했으며, 타이어에 제대로 공기가 주입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분석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발생한 이 사고들은 미국 당국에는 보고되지 않았고, 그 결과 이 사고들은 매스컴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매스컴의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된 것은 2000년 초 휴스턴에서 파이어스톤의 ATX 타이어의 트레드가 분리되는 사고들이 발생하고 고속도로 교통안전관리공단이 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다는 TV 발표가 있고 나서부터이다. 그 해 5월, 미국에서도 4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고속도로 교통안전관리공단은 조사범위를 4천700만 개의 ATX, ATX Ⅱ, 그리고 윌더니스 타이어로 확대했다.
2000년 8월, 사망자 수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압력과 소송이 증가하자, 파이어스톤측은 트레드 분리를 이유로 자발적으로 직경 15인치 타이어 1,440만 개를 회수했다. 트레드 분리로 인한 사고의 주요 근원지는 일리노이주 디캐터공장이었다. 포드와 파이어스톤은 이 유형의 타이어를 다른 타이어로 교체해 주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그렇게 많이 교체를 해주고도 여전히 650만 개가 길거리를 굴러다닌다는 사실이었다. 소비자단체들은 파이어스톤의 다른 종류 타이어를 장착한 익스플로러도 타이어 분리로 인한 전복사고의 가능성이 높다며 좀더 광범위한 리콜을 요청하였다.
2000년 12월, 파이어스톤은 포드의 모델 익스플로러 자체의 결함 때문에 트레드 분리가 일어나고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나는 것이라며 포드를 비난하는 발표를 했다. 그러자 2001년 4월 20일, 포드는 파이어스톤의 생산공정상의 결함이 주요 원인이라고 반박하는 보고서를 고속도로 교통안전관리공단에 제출했다. 2001년 5월, 포드는 더 이상 파이어스톤 타이어의 안전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포드 자동차에 장착된 파이어스톤의 윌더니스 AT 타이어 1,300만 개를 모두 교체하겠다고 발표한다. 2001년 5월 21일, 파이어스톤의 CEO 존 램프는 포드가 포드 자동차 자체의 안전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지 않고 모든 책임을 파이어스톤에게만 돌리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돌연 포드와 95년간 계속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전 몇 달 동안 양측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트레드가 분리되는 현상이 포드 익스플로러의 경우 동일 타이어를 장착한 레인저 픽업트럭보다 10배나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