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화웨이 쇼크

에바 더우 지음 | 생각의힘


화웨이 쇼크

에바 더우 지음

생각의힘 / 2025년 7월 / 584쪽 / 32,000원





1부



책방 주인 - 런의 가족 (1937~1968년)


런모쉰은 ‘양서(良書)’를 팔았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영웅적 행동이 절실했던 시기에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할 수단을 찾았다. 그들은 ‘진보 서점’, ‘개척 서점’ 같은 이름을 생각했지만 결국 ‘7월 7일 서점’으로 정했다. 런모쉰은 본업 외에도 일본과의 전쟁을 지원하는 국민당 군수 공장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1939년 하반기에 ‘7월 7일 서점’은 국민당의 지시로 폐쇄되었다. 런모쉰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합류할 생각으로 옌안으로 가려 했지만 도로들이 봉쇄되어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산을 넘고 또 넘어 이웃한 성 구이저우로 갔다. 교사로 일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런모쉰은 구이저우에서 청위안자오라는 17살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명랑했고 숫자에 능했다. 두 사람은 결혼했고, 청위안자오는 곧 임신을 했다. 1944년 10월에 아들이 태어나자, 두 사람은 아기 이름을 런정페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한참 뒤 런모쉰은 소수민족 학생들을 위한 사범학교인 두윈민족사범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1963년에 런정페이는 충칭건축공정학원(나중에 충칭대학교와 합친다)에 입학했다. 그리고 1966년 5월 14일, 아침에 눈을 뜬 학생들 앞에 모든 수업을 사흘간 중단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마오쩌둥은 노동자의 적이 공산당을 좀먹고 있다며 이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문화혁명’의 시작이었다. 런정페이는 한편으로 두려움, 또 한편으로는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참고로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배경이 좋지 못했기에 홍위병에 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책에 파묻혔다. 수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했고, 외국어 3가지를 독학으로 익혔다.

런정페이는 1968년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전공은 난방, 가스 공급 및 환기 공학이었다. 런이 졸업하던 해에 마오쩌둥은 ‘상산하향운동’을 시행했는데, 수백만 명의 도시 청년들을 시골로 보내 농민들과 함께 노동하며 재교육을 받게 하는 조치였다. 도시 청년들은 몇 년 동안 옥수수를 심고, 감자를 캐는 등 농사일을 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도시로 돌아가지 못했다. 귀환 허락이 떨어졌지만 이미 시골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런정페이도 농촌 노동에 투입되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구이저우성은 베트남 국경에서 아주 가까웠고, 이미 몇 해 전부터 마오쩌둥은 미국과 싸우는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 포탄, 탱크, 무선 송신기, 전화기 등을 하노이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구이저우의 구릉들은 하늘로부터 좋은 엄폐물이 되었기에 중국군은 그곳에 굴을 파고 비밀 공군 기지와 위장한 공장을 건설했다. 덕분에 런은 대학을 졸업한 뒤 익숙한 구이저우의 구릉에 배치되었고, 감자를 캐거나 철강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비밀 군사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비밀기지의 암호명은 011이었다.

동굴 속의 공장 - 런의 군대 시절 (1968~1982년)


런정페이가 011 기지로 온 것은 대학을 마친 1968년 이후였다. 결핍과 격동의 10대를 보낸 그는 아버지를 닮은 다부진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항상 우울해 보였고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두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평생의 성벽으로 굳어졌다. 문화혁명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고 있었지만 런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정치적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과학적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장, 바로 군대였다.

런의 말에 의하면, 그는 처음 2년은 요리사로 일했다.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배관공으로 일했고, 그다음에 기술자로 승진했다. 시간이 남을 때 그는 독학으로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통신 기술과 관련된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통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난 요즘의 도시 이주 노동자처럼 평범한 건설 노동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화웨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런의 과거 군대 경력을 마치 원죄처럼 취급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화웨이와 중국 정부와 당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두고 별별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참고로 미국 상무부에서 국제 기술 문제를 담당했던 제임스 루이스는 그 때문에 1990년대 후반부터 워싱턴의 당국자들이 화웨이를 색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의문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예전 고용주와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가?” 루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화웨이는 그동안 런의 군 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화웨이의 한 임원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에 나가 제출한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스터 런의 군 복무와 중국의 신호 정보(SIGINT)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화웨이는 런정페이가 011 기지에서 근무한 것은 제2국가건설위원회 제3국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011 공장 건물을 건설했지만 실제로 군 소속은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일할 당시 미스터 런은 군인 신분이 아니었다.” 화웨이의 진술서는 그렇게 얘기한다.

화웨이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화웨이와 중국 정부의 관계를 이해할 때 런정페이의 군 경력은 핵심 요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화웨이의 사업적 이해관계는 중국의 이해관계와 여러 면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이는데, 그것도 런이 기술자로 일하던 그의 군 초기 시절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런정페이의 군대 경험이 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화웨이에 군대식 문화를 끌어들여 신병훈련소 같은 시설에서 신입 사원들을 교육하면서 그들에게 규율과 개인적 희생을 강조했다. 또 연설할 때 군대와 관련된 비유와 전투 사례를 언급하고,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는 여전히 군인 같은 태도와 거동을 유지했다.

한편 대학 졸업 후 어느 날 런은 멍쥔이라는 젊은 여성을 소개받았다. 쓰촨성 부성장 멍동보의 딸인 멍쥔은 충칭의 의과대학생이었다. 문화혁명이라는 격변은 하나의 거대한 평형장치 기능을 했다. 평소 같으면 작은 마을 학교의 교장 아들이 부성장의 딸과 결혼하는 일은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아버지가 노동수용소에 있는 상황에서 런정페이와 멍쥔은 서로 사랑을 가꾸기 시작했다. 런의 동생들은 모래를 파고 철도를 놓는 등 고된 노동을 하는 처지였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 때는 돈을 모아 조촐한 예물을 준비했다. 1972년, 런과 멍쥔은 첫 아이를 출산했다. 멍완저우였다.

새로운 시작 - 중국 경제 개혁의 시작 (1976~1984년)


1976년 9월 9일, 그날 런과 멍 가문의 운명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오후 4시에 중국 전역의 라디오에서 마오쩌둥이 서거했다는 숙연한 발표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지 않아 마오의 아내 장칭과 그 측근들이 체포되었다. 문화혁명이 끝난 것이다. 런정페이의 아버지 런모쉰과 장인인 멍동보에게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했다. 두 사람 모두 노동수용소에서 몹쓸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런모쉰은 66살이었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전성기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런정페이의 장인 멍동보는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나 쓰촨성 부성장으로 복직했다. 그때 쓰촨성은 중국 개혁의 중심지로 주목 받고 있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중국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권력을 잡은 덩은 마오쩌둥 무리의 작당과 정치적 마녀사냥은 잘못된 무리수였으며,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서구식 자본주의라고 믿었다. 덩은 자신의 고향 쓰촨성에서 이를 실험하기로 하고, 앞머리가 V자형 헤어라인에 우울해 보이는 표정의 신임 당서기 자오쯔양에게 그 지휘를 맡겼다.

자오쯔양의 부관이었던 멍동보는 쓰촨성의 집단농장을 전부 해체하고 개인 농지를 복원하는 작업을 도왔다. 1980년에 그들은 급진적인 실험에 착수해 쓰촨성의 공장 여러 곳을 개인 소유로 운영케 하여, 자체적으로 회계 관리를 하고 세금을 낸 후 남은 수익금은 가질 수 있게 했다. 우선 대상은 면직공장, 시계 제조업체, 인쇄소였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자 외국인 방문객들이 꾸준히 늘어났다. 한편 화웨이를 창업할 당시 런정페이가 멍가(家)로부터 정치적 인맥의 도움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런정페이와 멍쥔은 회사를 창업할 무렵에 이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멍가의 지위는 닫혀 있을 뻔한 정치적 문을 젊은 런에게 열어줬고, 그가 대담한 꿈을 품을 여지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심혈을 기울인 끝에 런은 1977년에 정밀 공기압 발생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덩샤오핑은 곧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나섰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런의 발명 소식은 국영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동안 런은 가족의 불온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승진과 수상에서 번번이 탈락했었다. 덩이 집권하자 이제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978년 3월, 중국에서 처음으로 전국과학대회가 열렸을 때, 33세의 런도 초청을 받았다. 그는 참석한 6,000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1978년의 전국과학대회는 런의 경력에 하나의 전환점으로, 이를 계기로 런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경제특구 - 화웨이의 기원 (1980~1989년)


1980년대 초, 중국 남부 해안에 거대한 건설 구역이 들어서고 있었다. 중국은 웅대한 자본주의 실험에 시동을 걸었는데, 그 출발점은 선전이었다. 새로 조성되는 신도시 선전 경제특구(SEZ)의 면적은 326제곱킬로미터로 필라델피아와 비슷한 크기였다. 런은 남해석유선전개발서비스주식회사라는 곳에 일자리를 얻었는데, 국영기업인 남해석유공사의 자회사였다. 남해석유공사는 남중국해 근해의 원유 시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선전 셔코우에 현대식 항구를 건설 중이었다. 런이 이 회사에서 일했던 기간은 짧았고 두드러지는 부분도 없었다. 이 회사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한편 그 무렵 런은 가정사로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내 멍쥔과의 관계가 틀어져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런이 이런저런 일로 방황하자 선전 과학기술국의 누군가가 그에게 창업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런은 화웨이 테크놀로지(Huawei Technologies Co.)를 설립했다. 런의 나이 42세일 때였다. 참고로 1987년 2월에 선전은 시범 프로그램을 통해 ‘민지옌(民間, 풀자면 ‘인민들 사이에서’)’ 개인 기술 기업의 설립을 합법화했는데, 런정페이는 1987년 9월 15일에 화웨이를 민지옌 회사로 설립했다. 자신과 다른 투자자 5명(선전개발계획국 소속 장샹양, 선전 석유화학 회사의 회계사 우후이칭, 선전 국영 중국여행사 무역부 매니저 첸진양, 주하이 텔레콤 설립자 셴딩싱, 선전싼쟝전자 설립자 메이중싱)이 2만 1,000위안씩 출자해 만든 회사였다. 초기 화웨이는 자체 제품이 없었다. 다른 회사들과 계약을 맺어 간단한 전화교환기나 화재경보기 외에 몇 가지 제품을 조립해 판매했다.

그런데 런이 초기 투자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게 있었다. 언제까지고 위탁제조업체로 남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런은 전화교환기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엔지니어를 찾기 위해 1988년 우한을 찾았다. 그곳에 있는 화중대에는 전화교환기를 잘 아는 교수가 있어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화중대의 저우 교수는 사용자의 전화요금을 도표화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는데, 저우 교수의 연구실에 갔을 때 런은 그곳에서 22살의 대학원생을 만났다. 이름은 궈핑이라 했다. 궈핑은 남부 해안의 선전 경제특구에 각별한 호기심을 보였고, 그의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런은 그를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궈핑은 화웨이에서의 인턴십 계약서에 선뜻 서명했다.

그런데 궈핑은 일을 해보니 적성에 맞았다. 궈핑은 교환기의 원리에 금방 빠져들었고 모르는 부분을 따라잡기 위해 밤낮으로 매달렸다. 한편 런이 직접 교환기를 만들기로 했다는 얘기가 새어나가자 화웨이 투자자들은 의견이 나뉘었다. 일부는 화웨이가 도급업체로 남기를 원했다. 전후 사정은 모호하지만, 이 무렵 런의 초창기 투자자 5명 중 하나였던 셴은 화웨이에게 위탁 판매했던 BH-01 교환기의 공급을 갑자기 중단했다. 화웨이 임원 장시셍은 톈타오 교수에게 1990년 화웨이 주주총회에서 격한 갈등이 있었고, 이후 런과 투자자 사이에 더는 어떤 신뢰도 남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화웨이는 첫 번째 교환기에 BH-03라는 이름을 붙였다. 런은 셴의 BH-01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당시 중국은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법이 허술하거나 없어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국산 교환기 - 초기 R&D (1993~1994년)


1993년 화웨이는 한 번에 1만 통의 전화를 처리할 수 있는 대용량 디지털 교환기를 만들려고 했다. 이런 교환기라면 더는 호텔이나 소규모 사무실 등을 상대하지 않고, 도시 전체를 커버하는 전화 교환 센터에 직접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기존의 아날로그 교환기술 대신 디지털 교환 시스템으로 전환하려 했는데, 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0과 1로 바꿔 데이터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송하는 방식이다.

이 무렵 런은 유망한 젊은 엔지니어들로 기술팀을 꾸렸다. 특히 두 명이 두각을 나타냈다. 화웨이의 초기 R&D에 없어선 안 될 존재였던 이들은 둘 다 화중대 출신이었다. 그중 하나는 21살 청년 정바오융이었다. 궈핑이 화중대에서 그를 데려올 때부터, 런은 정을 형제처럼 대하며 ‘바오(보물)’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아꼈다. 또 다른 한 명 리이난은 1993년 여름에 화웨이에 입사한 ‘젊은 신동’이었다. 리는 선전의 과학기술국이 선정한 ‘우수 기술 노동자’로 선정되고 전국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국가가 수여하는 상을 잇달아 받았다. 런은 리를 빠르게 승진시키는 한편 거의 자식처럼 보살폈다.

한편 런과 그의 팀은 그들이 제작하려는 새로운 첨단 디지털 교환기를 자기들끼리 ‘06’으로 정해 불렀다. AT&T의 주력 교환기 No.5 교환기를 능가하는 교환기를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는 허세였다. 다른 회사의 교환기를 능가하기는커녕 그들이 만들 디지털 교환기가 제 기능이나 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한편 화웨이가 미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런정페이와 그의 팀이 교환기를 만드느라 고군분투하던 때였다. 교환기 하나 만드는 데에는 수십 개의 전문업체가 조달해 주는 부품 수천 종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 중 최고의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는 대부분이 미국에 있었다.

화웨이는 1993년 3월 4일,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래라에 랜보스 테크놀로지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제적 확장을 꾀하는 첫걸음으로, 화웨이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한다.” 화웨이의 사내 신문들은 그렇게 보도하며 덧붙였다. “랜보스는 미국의 R&D 기지로 제 역할을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기술 수준을 더 빠르게 향상시키고 국제적으로 선진 수준의 제품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화웨이가 확보한 주요 공급업체 중에는 모토로라도 있었는데, 당시 모토로라는 중국 사업을 확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홍콩에 나가 있던 모토로라의 반도체 칩 사업부 영업 임원이었던 토니 퀑은 1993년 당시 화웨이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정바오융을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 정은 퀑에게 화웨이가 04 교환기에 버금가는 경쟁 제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모토로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퀑은 정바오융의 비전과 야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퀑은 모토로라 본사를 설득해 화웨이를 우선순위 고객 명단에 올렸다. 덕분에 화웨이는 개발에 필요한 부품 샘플을 무료로 받아 신제품 출시를 앞당길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세계적인 브랜드들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결국 화웨이는 교환기의 각 전화선에 연결되는 회로인 ‘라인 카드’에 모토로라 칩을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화웨이의 승리였지만, 모토로라의 승리이기도 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