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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세계 1위의 비밀

린훙원 지음 | 생각의힘


TSMC, 세계 1위의 비밀

린훙원 지음

생각의힘 / 2024년 11월 / 496쪽 / 25,800원





1부 배치와 전략



모든 단계가 옳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_ 빛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현재 타이완 반도체 산업은 타이완섬의 중앙산맥처럼 우뚝 선 채 조용히 타이완을 지키며 세계 무대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이것은 타이완이 처음부터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훗날 세계를 놀라게 할 거대한 산업의 기초를 다져놓은 덕분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큰 역할을 했고, 모든 갈림길마다 최고의 판단과 선택이 이루어졌다. 우선 타이완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이렇게 성공했는가 하는 문제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각 단계마다 옳은 선택을 했고, 각 단계가 끊김 없이 이어지며 마치 순조롭게 바통터치를 하듯 산업이 연속성 있게 발전했다.

1단계: RCA의 기술 라이센싱_
1976년 3월 타이완 정부는 미국의 반도체 기업 RCA를 기술이전 대상으로 선택했다. RCA는 기술이전료 250만 달러와 기술사용료 100만 달러에 공업기술연구원과 10년간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타이완 정부는 공업기술연구원의 전자기술자문위원회(TAC)가 모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TAC가 내린 세 가지 옳은 결정이 훗날 타이완 IC산업 발전에 기반을 닦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첫 번째 결정은 CMOS(상보성 금속 산화막 반도체) 공정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TAC는 미래의 전자제품이 경량화, 초박화, 소형화, 휴대성 강화 추세로 나아가고 절전 기능도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하에 CMOS를 선택했다. 두 번째 결정은 IC(Integrated Circuit; 집적회로) 제조의 전 공정 기술을 모두 이전받기로 한 것이다. 1976년 4월 타이완의 1기 교육생 13명이 미국 RCA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총 40여 명이 교육을 받았고, 그들이 훗날 타이완 IC 산업을 이끄는 중요한 인재가 되었다. 세 번째 결정은 RCA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은 뒤 타이완공업기술연구원에 양산을 목표로 3인치 웨이퍼를 월 1만 개씩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시범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공업기술연구원에서 3개월간 양산을 진행한 결과 RCA를 능가하는 생산수율을 낼 수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였다.

TAC의 이 세 가지 결정으로 타이완은 당시 가장 앞선 미국의 IC 기술을 그대로 타이완으로 옮겨놓았다. 당시 타이완 정부가 350만 달러(약 1억 4,000만 타이완달러)의 기술사용료를 지출해 오늘날 5조 타이완달러 규모의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으므로 매우 값진 투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2단계: 기술이전으로 UMC가 탄생하다_
공업기술연구원의 시범공장에서 몇 년 동안 RCA 기술을 충분히 연마한 후 그 기술을 다시 민간기업에 이전하면서 반도체 산업 발전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기술이전을 받은 1호 기업은 1980년에 설립된 UMC였다. 하지만 이 무렵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4인치 웨이퍼 공장이 양산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UMC는 공업기술연구원의 3인치 웨이퍼가 아닌 4인치 웨이퍼를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결정으로 UMC는 생산능력이 크게 확대되고, 7마이크로미터에서 2마이크로미터까지 기술이 향상되었으며 제조원가도 크게 절감했다. 1983년 공장이 정식 양산 체제에 돌입한 이듬해에 미국에서 칩 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UMC는 그 수혜를 입으며 1984년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또한 UMC는 공업기술연구원에서 파생된 중요한 분야인 제품 설계를 맡았다. 이 역시 나중에 UMC에서 많은 IC 설계업체들이 분리되어 나오면서 타이완이 IC 설계 산업에서 중요한 지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3단계: TSMC의 설립,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탄생_
1984년 공업기술연구원 산하 전자공업연구소가 VLSI(초대형 집적회로) 육성프로젝트에 착수한 뒤 1987년에 TSMC가 파생되었다. 이로써 타이완 반도체 산업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오늘날의 세계적인 지위를 갖게 되는 본격 궤도에 올라섰다.

공업기술연구원장인 모리스 창이 직접 시장에 뛰어들어 TSMC 회장에 취임했을 뿐 아니라, 공업기술연구원의 시범공장 책임자였던 쩡판청을 비롯해 100명 넘는 엔지니어가 TSMC로 이동했다. 공업기술연구원의 6인치 VLSI 공장도 TSMC에 임대해 주었다. 이 밖에도 TSMC는 필립스의 지분출자(지분율 27.5퍼센트)와 기술출자를 받아내 필립스의 핵심 특허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순수한 파운드리 서비스를 위주로 하는 TSMC의 탄생으로 타이완 IC 산업망의 수직적 분업 방식이 더 분명해졌다. 전체 IC 산업도 설계, 제조부터 패키징 및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산업망이 구축되어 각 분야마다 글로벌 시장에서 왕성하게 활로를 개척했다. 2021년 타이완 파운드리 산업은 전 세계 시장의 64퍼센트를 차지했는데, 그중 TSMC의 점유율은 53퍼센트로 독점적이었고, 7나노 이상 최첨단 공정은 TSMC가 거의 시장을 독점했다.

타이완 반도체 산업의 창업 열기가 점점 고조되자 국내의 각 대학들도 전자, 전기, 재료 등 반도체 관련 학과를 잇달아 개설해 많은 인력을 제공했고, 각 웨이퍼 제조업체와 IC 설계 업체들도 해외에서 전문가를 대거 영입해 IC 산업의 실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세 단계를 거치며 타이완 반도체는 0에서 1로 올라서 산업의 기초를 다졌고, 이후 다시 1에서 100까지 올라가며 산업의 기적을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타이완 정부부터 민간기업까지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이름 없는 영웅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반도체 섬이 눈부신 광채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제조업을 서비스업으로 삼아야 높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_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우리 집이 바로 당신의 집입니다 아니, 당신 집보다 더 편안한 곳입니다: TSMC를 설립할 때 모리스 창은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이 말했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따랐다. 고객의 수요를 출발점으로 삼아 고객이 자기 집처럼 느끼는 반도체 회사를 만들고(국민의), 고객의 수요에 맞춰 경영하고(국민에 의한), 성공의 결실을 고객과 함께 누린다는(국민을 위한) 목표를 세웠다. TSMC의 성공은 이 세 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리스 창의 입장에서 국민은 곧 고객이다. 고객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고객에게 필요한 제품,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모리스 창이 창업하기 전에 그의 친구가 IC 업체를 창업하려고 하는데 직접 웨이퍼 공장을 짓자니 거액의 투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위탁생산하는 웨이퍼 공장을 물색해 제조를 맡기고 자신은 IC 설계만 했더니 투자 유치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해 모리스 창은 IC 업계에 위탁생산 수요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전문적인 파운드리 사업의 발전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리고 TSMC는 고객에게 서비스하기 위한 파운드리 사업을 구상하고, 고객이 TSMC의 공장을 마치 자신의 웨이퍼 공장처럼 이용할 수 있게 만들기로 했다.

TSMC의 주 고객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인텔, 모토로라 등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들이었다. 모리스 창은 TSMC를 설립하는 날부터 단 한 번도 인텔을 경쟁자로 대하지 않았고, 인텔의 주문을 따내는 데만 주력했다. TSMC는 ‘고객이 가장 만족하는 위탁생산 공장’으로 포지셔닝하고 자체적으로 제조공장을 보유하지 않은 IC 설계 기업, 이른바 팹리스(Fabless)를 고객사로 유치했다. TSMC는 고객의 집과 같은 가상의 공장을 만들어놓고, 고객이 패스워드를 입력하기만 하면 언제든 TSMC가 제공하는 시스템에 접속해 현재 웨이퍼 생산 상황을 조회할 수 있게 했다. 페덱스 고객이 자기 우편물의 배송 상황을 조회하듯이 자신이 발주한 웨이퍼가 현재 TSMC의 어느 공장에서 어떤 공정을 진행 중인지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TSMC의 엔지니어가 고객사의 직원처럼 고객의 어려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고객이 전화 한 통만 하면 TSMC의 엔지니어가 알라딘 램프 속 지니처럼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니 고객의 입장에서는 직접 공장을 지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나았다. 이런 서비스 덕분에 고객은 최신 공정이 있으면 TSMC에 주문하고, 해결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도 TSMC에 맡겼다. 그때마다 TSMC의 엔지니어가 척척 해결해주었으므로 기존에 생산 공장이 있었는데도 공장을 처분하고 TSMC에 주문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고객들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TSMC의 문을 두드렸다. 급히 출하해야 하는 물량이 있으면 먼저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고, 더 급할 때는 긴급발주를 신청해 먼저 생산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면 TSMC는 신속하게 내부 생산라인 스케줄을 수정해 고객이 빠르게 출하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동시에, 다른 고객의 주문에 영향을 미치거나 기업 간 이해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했다. 이렇게 힘든 발주를 처리하기 위해 TSMC 엔지니어들은 항상 바쁘게 일한다. 물론 이런 긴급발주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받는다.

사실 이 정도가 되면 TSMC는 더 이상 고객의 가상 공장이나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비스업의 마인드로 제조업을 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해 주고 TSMC도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국민에 의한’이라는 것은 국민이 국가를 다스리는 주체라는 뜻이다. TSMC의 경영도 기본적으로 그와 비슷하다. 고객이 어떤 기술을 원하고, 어떤 공정을 필요로 하며, 예산은 얼마인지 낮은 자세로 경청하고,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대리인이 되어 고객에게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준다. 고객의 수요가 유일무이한 목표인 것처럼 충실하게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고객은 항상 최첨단의 공정 기술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최고의 제품으로 시장경쟁에서 승리하길 바라기 때문에 TSMC는 최신 공정의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하고 거액을 들여 최신 웨이퍼 생산 공장을 건설한다. 새로운 서비스가 너무 비싸서 고객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까지 원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성심성의를 다해 고객에게 서비스하고 고객을 위해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문화는 타이완에 9.21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 그런 대지진이 발생했다면 직원의 안전을 위해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공장 복구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완 신주과학단지의 많은 엔지니어들은 공장 안에 있는 고객의 제품을 걱정하며 그날 밤 회사로 달려와 장비를 공장 밖으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2주 뒤 공장이 완전히 복구되었고, 한 달 뒤에는 정식 양산 체제를 회복했다. 이렇게 빠른 속도에 전 세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타이완 엔지니어의 정신이다. 미련하고 자신을 혹사하는 방식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타이완 IT 업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이다. 자기 공장을 고객의 공장처럼 만들고, 자기 엔지니어가 고객의 엔지니어처럼 일하게 하는 서비스 마인드로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족되지 못한 수요를 해결하고, 진정한 고객이 누구인지 정확히 판단하다:
마지막으로 ‘국민을 위한’이란 국민이 국가 발전의 성과를 누리게 한다는 뜻이다. TSMC는 파운드리 사업의 중심이 고객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체 제품을 내놓지도 않는 TSMC가 해마다 그렇게 많은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장비에 거액을 투자하는 것은 고객을 위한 일이다. 고객이 성공해야 TSMC도 성공할 수 있고, 고객이 성공하지 못하면 TSMC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완전한 이익공동체이므로 성과도 당연히 함께 누린다.

모든 기업이 고객과 자사의 이익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TSMC는 이 점에 있어서 매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전문적인 파운드리 기업인 TSMC만이 실현할 수 있는 목표다. 삼성, 인텔 등 자체 제품과 브랜드를 가진 다른 기업은 그럴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고객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객의 제품이 성공하지 못해야 자사의 제품 판매에 이득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므로 삼성과 인텔의 파운드리는 고객과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업이다.

결국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세 원칙은 IT 산업이든 바이오테크 산업이든, 창업을 계획하는 사람과 이미 회사를 경영하는 기업가 모두에게 훌륭한 가이드라인이자, 자신의 회사가 잘 경영되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지표다. 기술을 이용해 유용한 제품을 개발해 내고 그 제품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냄으로써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해야만 성공한 기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기업이 많다.

승계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 전성기를 열다_ 기업 승계에서 얻은 교훈


56세에 TSMC를 설립한 모리스 창은 74세인 2005년에 TSMC의 CEO직을 릭 차이에게 넘겼다. 그러나 4년 뒤 그는 다시 릭 차이에게서 CEO직을 넘겨받아 복귀했다가 2018년 마크 리우와 웨이저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정식으로 TSMC를 떠났다.

모리스 창의 첫 승계는 왜 실패했을까? CEO직을 반납하고 내려온 릭 차이의 거취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모리스 창은 복귀한 뒤 어떻게 TSMC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을까?

릭 차이는 미국 휴렛팩커드에서 근무하다가 TSMC 설립 2년 후인 1989년에 TSMC에 영입되었다. TSMC 입사 후 강한 추진력을 인정받아 부사장까지 고속 승진하며 내부에서는 ‘리틀 모리스 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5년 모리스 창은 릭 차이를 CEO에 임명했다. 그 후 4년의 임기 동안 TSMC의 실적이 꾸준히 유지되었으므로 릭 차이가 CEO직을 안정적으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자 모리스 창의 승계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경기가 급격히 위축되자 TSMC도 실적 하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자 릭 차이는 첨단 공정 40나노 설비 구매를 보류하고 실적평가제도를 통해 실적이 부진한 직원을 중심으로 전 직원의 5퍼센트를 감원했다. 갑작스럽게 해고된 직원들은 모리스 창의 자택으로 달려가 피켓을 들고 철야농성을 벌였다. ‘행복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모리스 창은 분노해 릭 차이를 밀어내고 다시 CEO직에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직원을 진심으로 대하고, 감원도 떳떳해야 한다:
모리스 창의 복귀는 TSMC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이 네 가지 있다.

첫째, 모리스 창이 다시 경영일선에 나선 것은 ‘직원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TSMC의 경영이념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근무할 때 수많은 직원을 해고했던 모리스 창은 감원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감원을 해도 떳떳하게 해야 한다면서 설득력 있는 평가시스템을 제안했다. 해고된 직원들의 철야농성 사건이 발생하자 릭 차이를 비롯한 경영진은 “평가시스템에 의해 직원들이 자진해서 회사를 떠났다”고 해명했다. 아마도 모리스 창이 릭 차이에게 회사를 승계하는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둘째, 모리스 창은 릭 차이를 교체한 실제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다만 감원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도화선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릭 차이가 CEO직을 수행하는 4년 동안 모리스 창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단기실적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분위기라든가, 공급업체를 상대로 가격을 깎는다든가, 먼저 가격을 정해 고객에게 통보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 추측일 뿐이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리스 창 본인만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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