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버거킹

제임스 휘트먼 맥라모어 지음 | 예미


버거킹



제임스 W. 맥라모어 지음

예미 / 2021년 9월 / 431쪽 / 20,000원



훗날 와퍼를 만들 아이 / 인생의 출발선에서


한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 행동, 그리고 가치관은 어떤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 것일까? 나는 유년기의 발달상황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유년기는 사람의 삶의 우선순위가 정립되고, 가치관이 결정되고, 각자의 사고방식이 형성되는 시기다. 내 경우도 가족을 포함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 유년기에 만들어졌다. 나는 3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21살 때 돌아가셨지만, 그들을 통해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받는 인도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은 나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내게 삶의 목적의식을 심어주었다.

나는 1926년에 뉴욕시에서 태어났고, 다섯 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개월 후인 1931년 9월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센트럴밸리의 공립학교에 8년간 다니면서 나는 지역행사나 다양한 학교행사에서 대중 앞에 나가 연설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대중연설이 다른 의사소통기술을 발달시키는 재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그때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성공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늘 즐거움을 느꼈고,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런 만큼 그들도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으며, 실제로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며 항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경쟁심도 있었다.

한편 1938년 외할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은 비극이었는데, 이제 우리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나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고로 아버지는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분이었고, 당연히 내가 최고의 교육을 받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1939년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마운트헤르몬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40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웨스트홀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음식과 관련하여 내 생애 처음으로 한 일은 약 600명의 소년과 교직원들의 식사준비를 돕는 것이었고, 나는 그 일을 무척이나 즐겼다. 그리고 1942년, 나는 다음 학기의 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대학 진학 준비를 하면서 나는 앞으로의 삶을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한 경력을 쌓는 데 초점을 맞춰 설계하기로 했고, 내 수준에 맞으면서도 사업가라는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교육을 제공해줄 대학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비즈니스 훈련 프로그램으로 호텔경영학교 프로그램이 있어, 나는 그 과정에 입학 지원을 하고 합격했다. 이후 대학교에서 낸시 니콜이라는 마이애미 출신의 여학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결국 나의 아내가 되었다.

YMCA와 콜로니얼인


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전망 좋은 직장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던 델라웨어주 월밍턴에 있는 YMCA로부터 식당 부문 책임자를 구하고 있다며 방문해달라는 편지를 받았고, 1947년 8월 방문해 보니 급여는 한 달 267달러로 박봉이었지만,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받아들였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월밍턴 YMCA의 식당운영은 엉망이었다. 식당 근무경험이 전혀 없었던 내가 보아도 재고 관리는 전혀 안 되고 있었고, 직원들은 의욕이 없어 보였으며, 식당운영의 목표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창고에 쌓여 있는 엄청난 재고를 소진하는 일이었고, 가장 좋은 방법은 식욕을 돋우는 음식을 만들어 최대한 싸게 파는 것이었다. 아무튼 YMCA에서의 경험은 인력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적절한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한편 YMCA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길 건너편의 토들하우스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그 식당은 24시간 내내 손님으로 북적였다. 참고로 그 식당은 빠른 주문 처리를 내세운 즉석요리 중심의 식당이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던 1949년 무렵에는 이미 이러한 형태의 음식점 체인이 여러 개 등장해 영업망을 구축하고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토들하우스의 운영방식을 벤치마킹하면 그들 못지않은 경쟁력을 갖춘 식당을 운영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 토들하우스 옆 건물이 비어 있어 나는 월 300달러 정도에 임대했다.

그리고 1949년 여름과 가을 내내 매장을 설계하고, 공사하고, 여러 준비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식당 이름을 ‘콜로니얼인’으로 정하고, 또 YMCA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일했던 오드리 리더를 지배인으로 채용해 1950년 1월 4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꾸준히 잘 되었다.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 와플, 계란, 팬케이크, 안심스테이크, 커피, 그 밖의 여러 즉석요리가 콜로니얼인의 유명한 메뉴가 되었고, 꽤 괜찮은 식당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가 벌인 첫 번째 사업에서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된 성취감은 더 대단한 것이었다.

허우적거리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다. 실제로 젊은 나이에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디뎌놓고 보니 배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가끔 사업가로 시작한 처음 몇 년을 돌이켜보며 내가 저지른 실수를 메모해보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도 생각해본다. 만일 지금 비즈니스 세계에 첫발을 내딛기를 머뭇거리는 젊은이나 이제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청년이 있다면,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항상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1951년 2월, 가족과 함께 마이애미를 찾았다. 당시 장인인 니콜 박사는 오랜 세월을 지냈던 마이애미 시내를 떠나 브리켈가에 ‘550빌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었다. 니콜 박사는 1층에는 식당을 임대할 생각이라며, 나에게 그곳에서 식당을 열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그때 마이애미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 그 구실을 찾던 차였기 때문에,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지도 않은 채 550빌딩에 식당을 차리기로 결심하고 1층의 절반을 임차하는 계약을 마쳤고, 임대차계약서에 서명하고 나서 이 장소, 이 위치에는 어떤 형태의 음식점을 여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쯤 문을 열어 저녁 7시쯤 문을 닫고, 아침 메뉴와 점심, 저녁 메뉴를 모두 팔기로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문을 열기로 했다. 계획은 간단해 보였지만 이로 인해 나의 삶은 굉장히 복잡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월밍턴으로 돌아가서 우선 콜로니얼인의 경영을 믿고 맡길 적임자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농장을 파는 일이었다. 이는 농장의 구매자가 나타날 때까지 낸시와 아이들이 월밍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식당의 설계가 끝난 5월에 먼저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개업 시점을 초가을로 잡고 필요한 집기 등을 주문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준비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개업 준비를 위해 다시 돌아온 5월의 마이애미의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2월에 처음 봤을 때 마이애미 식당들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마이애미는 휴양도시여서 성수기와 비수기가 확연히 다른 도시라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더욱 신중하고 분석적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몇 달이 걸리기는 했지만 낸시로부터 농장이 팔렸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7월에 월밍턴으로 가서 우리 식구와 물건을 싣고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리고 8월 초에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정식 오픈했다.

그러자 5월 이후 나를 괴롭혔던 두려움과 걱정거리는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개업은 했으나 매출은 거의 없었고, 고객을 끌기 위한 나의 초기 판촉활동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다행히 1951년 12월이 되자 개업 후 첫 성수기가 시작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간절히 기다려온 관광객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성수기는 2월까지 계속되었고 엉망이 된 대차대조표를 복구해줄 매출과 이익이 발생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 콜로니얼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경영을 맡겨놓은 매니저는 원래의 간단했던 음식 서비스의 개념과 맞지 않는 여러 다른 품목을 추가함으로써 운영과 서비스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체계적인 운영으로 주문을 거의 즉시 처리해주는 햄버거 전문식당이라는 원래의 이미지가 퇴색하고 말았다. 매출감소와 함께 수익도 떨어졌다. 나는 내가 믿고 맡겼던 경영자가 초래한 문제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한편 내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행운은 바로 빌 빌로호카라는 젊은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빌은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호텔식당경영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였는데, 어느 날 우리 식당으로 불쑥 들어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를 부지배인으로 고용했고, 그는 처음부터 맡은 일을 아주 잘 해 냈다. 한편 콜로니얼인의 경영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즈음, 나는 빌에게 월밍턴으로 가서 콜로니얼인을 맡아 매각 작업을 진행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 했다. 그렇게 하여 빌과 함께 월밍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매니저를 해고하고 빌을 책임자로 앉혔고, 콜로니얼인이 아주 괜찮은 관리자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빌은 콜로니얼인 매각 작업을 마무리한 후 마이애미로 돌아와 나와 다시 재회했다.

한편 1954년에 접어들어 나는 당시 막 알게 된 데이비드(데이브) 에저튼과 함께 인스타버거킹(Insta-Burger King) 사업의 가능성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이브가 보여준 열정과 구상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기려면 지금 잘 운영되고 있는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팔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해 봄, 그 식당을 사겠다고 돈을 마련해 온 사람이 바로 빌 빌로호카였다. 콜로니얼인과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의 매각으로 나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창업


데이비드 R. 에저튼 주니어는 코넬대학교 호텔경영학교 졸업 후 하워드존슨스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고, 당시 마이애미 지역을 책임지는 관리자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이애미 시내의 듀폰트플라자 구역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편 1953년까지만 해도 데이브는 데어리퀸 매장을 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953년 여름, 잭슨빌 해안의 비치대로로 차를 몰고 지나가던 중 데어리퀸 매장처럼 보이는 공사현장을 발견했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차를 멈춘 그곳에서 매장의 주인인 키스 크레이머와 매튜 번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스타버거(Insta-Burger)’라는 새로운 브랜드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햄버거를 18센트에, 밀크셰이크도 18센트에, 프렌치프라이는 10센트에, 코카콜라와 루트비어와 오렌지음료 등을 10센트에 팔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매장의 콘셉트는 셀프서비스 드라이브인 방식이었다. 두 사람 모두 외식사업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의 맥도널드 매장을 찾아가 차량 방문 고객을 위한 맥도날드 특유의 즉석 서비스 시스템을 직접 체험해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머무르는 동안 ‘인스타’라는 기계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으며, 그것이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기계라고 설명하면서, 그 기계가 마음에 쏙 들어 발명가인 조지 리드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내용은 맥도날드의 혁신적인 방식과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식당을 열고, 그 식당에 리드의 기계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들은 그들의 구상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믿었고, 리드의 인스타브로일러와 인스타 셰이크머신이 경쟁우위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리드와 체결한 계약에 의하면, 크레이머와 번스는 이 기계에 대한 최초의 지역 사업권자였고, 그들은 플로리다주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다. 계약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지역 안에서 인스타 기계와 인스타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식당이 새로 문을 열 때마다 리드는 소정의 프랜차이즈 수수료와 인스타 기계 판매이익, 가맹점주들이 내야 하는 매출의 2% 저작권사용료를 받게 되었다. 크레이머와 번스는 그들의 첫 식당 이름을 ‘인스타버거’라고 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기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한편 크레이머와 번스가 잭슨빌에 첫 번째 인스타버거 매장을 짓고 있을 때, 그들은 데이브와 지역영업권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데이브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데어리퀸 매장에서 인스타라는 이름으로 햄버거를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식당 개점이 다가올 즈음, 데이브는 그들에게 ‘인스타버거’라는 이름 대신 ‘인스타버거킹’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결국 인스타버거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매장 지붕보다 조금 높은 12피트 높이로 세워진 철탑 꼭대기에 햄버거 빵 위에 앉아 있는 왕의 형상이 설치되었다. 또 그가 앞으로 문을 여는 식당에 ‘인스타버거킹’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조지 리드와의 계약서 내용도 수정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 등장한 ‘버거킹’이라는 이름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알려진 브랜드 중 하나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데이브는 이와는 별도로 마이애미에 두 번째 인스타버거킹 드라이브인 매장을 짓기로 계약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확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자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하던 그는 마이애미로 돌아온 후 플래글러 거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하비 풀러를 찾아갔다. 하비는 마이애미에서 손꼽히는 외식업자였고, 나도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열 때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비는 데이브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지만, 아직 성공이 현실로 증명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데는 난색을 표했다. 대신에 그는 나를 찾아가 보라고 소개했다. 나와 데이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이에 친분이 쌓이면서 그는 자신의 사업에 동업자로 합류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나도 그의 생각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문제는 내가 데이브가 원하는 정도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팔아야 했고, 그 돈을 데이브와의 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내 수입원이 일단 봉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우리는 처음부터 동등한 지분을 갖는 동등한 파트너 관계로 함께 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데이브가 실제로 얼마의 투자를 했는지, 과연 이 사업이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수익성이 있는지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재무기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짐, 나는 재무서류나 금융장부 같은 건 없어요. 내가 얼마나 많은 수입이 들어왔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지출을 했는지는 알려줄 수 있고, 내 수표책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러나 정확한 손익을 말해줄 만한 대차대조표 같은 장부는 없어요.” 그래서 나는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전부 모아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회계사 휴 실링턴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몇 주 후, 실링턴은 인스타버거킹 매장에 대한 재무분석자료를 보내왔는데, 그 결과는 데이브가 추정한 바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28%쯤 수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때까지 올린 매출 대비 56%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암울해 보이는 사업에 투자하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재무보고서는 짧은 시간 동안의 영업결과만을 반영하고 있고, 창업 준비를 위해 매출이 없는 상태에서 지출된 초기투자가 많았기 때문에 손해율이 실제보다 높게 잡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