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파이 플레이
스벤 칼손, 요나스 레이욘휘부드 지음 | 비즈니스북스
스포티파이 플레이
스벤 칼손, 요나스 레이욘휘부드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20년 11월 / 400쪽 / 18,000원
시작 ? 음악을 해방시킨다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노동자들의 도시 록스베드의 컴퓨터 신동 다니엘 에크는 스톨홀름 외곽의 록스베드에서 성장했다. 에크는 청소년 시절에 지역 밴드 몇 곳에서 활동했는데, 음악에서 뛰어났던 그가 더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컴퓨터였다. 그는 9세부터 코딩을 시작했고, 11세 때 이렇게 말했다. “난 빌 게이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예요!” 이후 에크는 동네 레크리에이션 센터장인 리키가 컴퓨터를 설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자신이 이런 일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점차 동네에서 가장 어린 IT 개발자가 되어 갔다.
중학생 때부터 프로그래밍으로 돈을 벌다 / 파일 공유 서비스, 냅스터의 충격: 점차 록스베드에서는 홈페이지를 만들 때면 다들 에크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홈페이지에 누군가 방문할 때마다 숫자가 매겨지는 계산기를 프로그래밍해 놓았는데, 얼마 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그 계산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9년 에크는 록스베드 중학교를 졸업하고, 순드뷔베리의 IT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1학년일 때 냅스터가 세상에 나왔는데, 그는 문득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전 세계의 음악을 무료로 다운로드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이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종교와 같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그때 그는 “냅스터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인터넷 서비스일 거야.”라는 기록을 남겼다.
구글에 이력서를 보낸 16세 에크: 16세가 된 에크는 구글에 이력서를 보냈다. 구글에서는 이력서를 보내주어서 고맙다면서 졸업하고 난 뒤에 다시 연락하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구글의 답변에 에크는 자신만의 검색 엔진을 만드는 시도를 했다. 2학년이 된 에크는 거의 전업으로 일했다. 인터넷 컨설팅사이자 포털 사이트인 스프레이의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경매 사이트인 트라데라에서 임시직 기술 담당 이사로서 일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IT 컨설턴트로 일하며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닷컴 버블의 붕괴와 아이튠즈의 탄생 다니엘 에크와의 인연의 시작: 에크는 구글과 어깨를 견주는 무언가를 개발하고 싶었으나, 일단 야이야(Jajja)라는 인터넷 기업에 일자리를 구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야이야의 고객은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 자신의 기업이 가장 상위에 보이기를 원했는데, 에크는 이 업무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지만 일 처리는 잘했다. 한편 직장 일과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록스베드에 있는 어머니의 옛 아파트에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후 에크가 22세가 되었을 때 어느 투자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가상의 아바타에 옷을 입히는 사이트가 있는데 기술 담당 이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에크는 2005년 가을 어느 날 스타돌의 회장인 마티아스 미크셰를 만나게 된다.
비밀스러운 창업 아이디어 창업자들의 첫 만남: 2003년 3월에 IT 거품이 꺼지고 난 뒤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마르틴 로렌손은 펠릭스 항외와 동업으로 트레이드더블로(Tradedoubler)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는 제휴 마케팅을 중점으로 하는 곳으로 반(半)자동 광고를 판매했다. 트레이드더블러의 소프트웨어는 소비자의 행위를 따라가며 광고주는 노출 결과에 따라 광고비를 지불했다. 에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년이 지난 2005년이었는데, 에크 역시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에크는 애드버티고(Advertigo)라고 명명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몇 명의 프로그래머에게 맡겼는데, 이 시스템은 광고주가 의뢰한 광고에 가장 적합한 온라인 배너 자리를 찾아 주었다. 에크는 이 사업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트레이드더블러 본사를 찾았고, 에크와 로렌손은 이때 처음 만났다. 14세라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은 거침없이 대화했고, 더 친해졌다. 이후 에크는 P2P 기술을 활용한 사업 아이디어를 그와 공유했고 로렌손은 이를 현실화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로렌손이 트레이드더블러를 상장시켜 주식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만 했다.
프로그래머로 재능을 꽃피우다: 마티아스 미크셰와의 면접 인터뷰를 치른 몇 달 뒤, 에크는 스타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의 훌륭한 작업 덕분에 스타돌의 이용자는 가파르게 증가했고, 몇 달 만에 스타돌은 10~17세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큰 인터넷 쇼핑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 시작했으며, 미크셰는 갑자기 스톡홀름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타트업 기업인이 되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성공에도 에크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사업을 할 궁리를 했다. 뜻을 모은 동료들 가운데는 27세의 사업 발전 담당 이사인 헨릭 토스텐손, 예술 감독 크리스티안 빌손이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에크가 데려가고 싶었던 동료는 비상한 프로그래머인 안드레아스 엔이었다.
본격적인 창업 준비 / 천재 개발자 엔의 합류: 2005년 11월 8일 트레이드더블러의 주식이 스톡홀름에서 거래되기 시작했고, 로렌손은 9,600만 크로나(약 125억 원)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항외는 지분을 두 배 더 소유했기에 대박이 났다. 얼마 뒤 에크와 로렌손은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기업명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고 ‘스포티파이’라고 지었다. 그 후 항외도 에크와 로렌손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새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되기로 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에크와 로렌손은 2006년 4월 1일에 스포티파이를 설립했고 두 사람은 공동 소유주가 되었다. 이후 에크는 스타돌의 후임자인 엔을 찾아가 스포티파이와 함께하자고 했고, 그렇게 엔은 스포티파이의 첫 번째 기술 담당 이사가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기술로 실현시키다 뮤토렌트를 만든 토렌트 기술의 1인자: 스포티파이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로렌손의 경험과 대자본, 둘째는 사업에 대한 에크의 통찰력, 셋째는 스웨덴 최고의 개발자들을 모은 엔의 능력이었다. 자신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려는 자리에서 에크와 로렌손은 음악 그리고 어쩌면 영상의 유통이 가능한 토렌트에 기반한 법적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했는데, 당시 스웨덴에서 토렌트 기술의 1인자는 루드비히 스트리게우스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일 공유 프로그램 중 하나인 뮤토렌트를 직접 만든 25세의 해커였다. 로렌손은 고향 출신 사업가 니클라스 이바손(ATI의 유럽 지사장)에게 부탁하여 스트리게우스를 만나는데 성공했고, 에크와 로렌손은 높은 액수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뮤토렌트를 팔라고 제안했다. 한편 뮤토렌트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국적의 구애자들이 있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마침내 스트리게우스는 스포티파이를 선택했다.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스웨덴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2006년 10월 중순에 모든 거래가 완료되었다. 스포티파이는 스트리게우스에게 현금과 주식을 지불했고, 스트리게우스는 스포티파이의 네 번째 소유주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스포티파이로 직장을 옮겼다. 이후 이바손은 ATI를 떠나 스포티파이와 함께했는데, 이후 그는 음반사와의 절망적인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뮤토렌트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스포티파이가 스트리밍 기업을 만들어 나가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버퍼링 없는 플레이어를 향한 도전: 에크가 엔에게 전달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스포티파이의 플레이어는 번개처럼 빨라야 하고. 시장의 다른 서비스들처럼 해킹당해서도 안 되며, 음악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야 한다.’ 플레이어는 토렌트 기술에 기반해야 했다. 사용자가 음악을 들을 때 노래 파일을 조각내어 네트워크로 접속된 컴퓨터들에서 한꺼번에 다운받게 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스포티파이는 파이러트 베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아티스트와 음반사에 광고 수익을 배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스포티파이 웹 사이트에는 초창기부터 “우리 서비스는 광고 수익으로 운영되므로 사용자 여러분은 어떤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공지가 있었다.
베타 버전이 출시되다: 2007년 3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첫 번째 계정을 등록하라는 창이 뜨자 엔은 스포티파이의 첫 번째 계정을 갖게 되었다. 곧이어 더 많은 계정이 스포티파이에 만들어졌다. 이후 마케팅 담당 이사인 소피아 벤츠가 광고라든지 언론사 홍보를 맡아 진행했다. 스포티파이는 음악 마니아들을 공략하게 설계되었다. 음악을 찾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고, 아티스트와 앨범을 따로 분리하거나 아티스트와 앨범을 한꺼번에 볼 수도 있었다. 음악은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재생되었고 컴퓨터의 캐시 메모리에 암호화되어 저장되었다. 사용자는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음악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파일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2007년 4월에 드디어 스포티파이의 베타 버전이 출시되었다.
스포티파이, 드디어 투자를 받다 2007년 6월에 에크는 투자사들에게 제품을 보여 주기 위해 에센셜웹 콘퍼런스가 열리는 런던으로 갔다. 콘퍼런스가 종료된 이틀 뒤, 애플은 최초의 아이폰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스포티파이는 아직 베타 버전에 불과했고, 오로지 데스크톱에서만 존재했다. 한편 고향인 스톡홀름에서는 로렌손이 재원을 백방으로 구했다. 패르손(한때 로렌손이 근무했던 셀 벤처스의 사장)도 무진 애를 썼다. 다행히 여름에 네 개의 대형 음반사 가운데 두 개가 북유럽 지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저작권을 주는 데 동의했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8년 8월 27일, 스포티파이는 룩셈부르크에서 이른바 A라운드로 등록되었다. 노스존은 8천만 크로나(약 105억 원)가 넘는 자금을 투자해서 에크와 로렌손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스포티파이의 소유주가 되었다. 크리앤둠은 네 번째, 바로 그다음은 항외였다. 스포티파이 전체는 5억 4,900만 크로나(약 720억 원)로 평가되었다.
경쟁 ? 애플과의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되다
모든 음악이 무료인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 애플을 흔들다: 2008년 10월 7일에 마케팅 담당 이사인 벤츠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돌렸다. 스포티파이가 출시되었으며 매달 99크로나(약 1만 3,000원)를 지불하면 프리미엄 계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0월 말에 스웨덴 일간지〈다겐스 뉘헤테르〉의 취재에 응하며 로렌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시장에서 최고의 뮤직 플레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2년이나 3년 안에 2천만 명이 이용하게 될 겁니다.” 사실 스포티파이가 이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는 꼬박 4년이 걸렸다. 로렌손은 인터뷰를 하면서 스포티파이가 무료 서비스라서 불같이 성장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스포티파이는 2008년 스웨덴에서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2009년에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모바일 앱으로 언제 어디서든 / 애플 앱 스토어의 승인이 통과된 밤: 스포티파이가 정식으로 출시된 다음 에크는 이제 모바일 앱을 개발할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 프로젝트를 이끌 적임자는 구스타브 쇠데스트룀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는 에크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참고로 스포티파이의 경쟁사가 이미 모바일 스트리밍(노키아는 ‘음악을 갖춘 노키아’, 소니 에릭손은 ‘플레이 나우 아레나’)을 제공 중이었다. 그러나 에크의 경쟁 상대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는 애플과 경쟁하고 싶었다. 아이팟이 기능하는 곳에서 스포티파이의 모바일 앱이 기능하게 하고 싶었다. 마침내 2009년 7월말에 스포티파이는 애플 스토어에 스포티파이 모바일 앱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8월의 어느 날 늦은 저녁, 애플 앱 스토어의 승인이 통과되었다. 이 내용은 8월 27일 세상에 공식화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계속되는 방해 공작 성공하기 위해 에크는 경쟁사들을 따돌려야만 했고, 미국에서 성공해야 했고,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세게 최고가 되어야 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스포티파이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에크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음반사와 투자자들도, 또한 잡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플은 몇몇 유럽 국가의 애플 스토어에 스포티파이의 앱을 등록해 주었다. 그러나 에크가 미국에서 음악 저작권을 해결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음악 업계에서 돌자 잡스는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왜 여러분의 음악을 무료로 줘 버리려고 하죠?” 잡스는 음반 업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저작권 합의 / 뉴욕에서 오지 않는 계약서: 2010년에 에크는 미국 시장의 음원 저작권 협상 건으로 주기적으로 뉴욕을 찾았다. 그의 목표는 유니버설 뮤직과 소니 뮤직이 함께 서명하게 하는 것과 워너 뮤직도 어떻게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었다. EMI는 이미 합류한 상태였는데, 거대 음반사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더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월에 스포티파이가 소니 뮤직과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첫 번째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한편 유니버설 뮤직과의 협상도 끝난 것처럼 보였다. 2010년 말 콘텐츠 관리 담당 이사인 파크스와 그의 팀은 뉴욕에서 음반사 대표단과 함께 계약서를 준비했다. 유니버설 뮤직 회장인 모리스가 그 조건을 승인했다고 했고, 몇 개의 서명만 하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잡스, 유니버설 뮤직을 압박하다: 유니버설 뮤직의 갑작스런 침묵은 그 뒤에 있는 소위 레이블이라고 불리는 수없이 크고 작은 음반사 그룹들이 사분오열된 사정이 있었다. 그 그룹들은 한데 뭉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잡스는 음반사 대표들에게 자주 연락을 했는데, 그들과의 대화에서 잡스는 스포티파이의 무료 계정이 음반사에 위협이 될 거라고 묘사했다. 상황상 애플이 아이튠즈의 새로운 클라우드 서비스를 세상에 소개할 때까지 잡스는 적어도 스포티파이의 미국 출시를 지연시키기를 원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스포티파이는 2011년 중반에야 미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는 협력을, 비츠와는 경쟁을 페이스북에 스포티파이를 입히다: 2011년 9월 22일 매년 페이스북이 개최하는 개발자 콘퍼런스인 F8 동안 저커버그는 넷플릭스, 훌루 그리고 스포티파이와 같은 기업과의 협력 현황을 소개했다. 한 시간여의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 얼마나 간단해졌는지를 보여 주었다. 별도로 스포티파이를 열거나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전부가 페이스북에서 한 번의 클릭으로 가능했다. 스포티파이는 미국에서 페이스북 덕분에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다. 2011년 3월에서 11월 사이에 스포티파이의 유료 계정 사용자는 10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1년 안에 스포티파이의 가치는 세 배로 뛰었다.
비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2011년 가을, 스톡홀름에 비츠의 공동 창업자며 유니버설 뮤직의 우두머리인 아이오빈이 운영 총괄 사장인 루크 우드와 몇 명의 직원을 대동하여 왔다. 그들은 새롭고 비밀스러운 스트리밍 서비스의 전문가들과 회합하려고 스톡홀름에 왔다. 참고로 비츠는 당시 미국 대중문화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헤드폰을 팔고 있었는데, 음악 업계에서 아이오빈의 지위는 계속 성장해 왔다. 아이오빈은 지금이 스포티파이를 도발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장의 틈새를 보았다. 음악 업계에 뿌리를 둔 스트리밍 서비스 가운데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것은 없었다. 2010년이기는 해도 MTV와 유사한 집결지를 건설하고 싶었다. 그들의 가이드는 3년 전에 페이스메이커를 선보이려 아이오빈을 만났던 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