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신인철 지음 | 빈티지하우스
나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나이키에서 배웠다
신인철 지음
빈티지하우스 / 2020년 7월 / 420쪽 / 18,000원
세상 모든 곳의 MBA내 어머니는 건강체에 만능 스포츠우먼이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수영을 마치고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 쓰러지셨다. 이 무렵 내겐 계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입사 후 바로 MBA 진학 준비에 착수했는데, 당시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저녁 9시 30분까지 귀가해서는 씻고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3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새벽 1시에 일어나 4시까지 월, 수, 금요일은 어학 테스트인 토플을 준비하고, 화, 목, 토요일은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MBA 입학을 위해 필수적인 시험인 GMAT를 준비했다. 이후 잠깐 허리를 좀 폈다가 새벽 4시부터 30분간은 오답노트를 작성했다. 이후 30분간 출근 준비를 한 뒤, 5시 21분에 집 앞 구의역에서 출발하는 2호선 첫차를 타고 강남역 IKE이익훈 어학원으로 갔다. 6시에 학원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30분 정도 기출단어 중심으로 영어단어 공부를 한 뒤, 1시간 50분간 토플 종합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는 뛰어서 사무실에 출근하면 대략 8시 40분쯤이 되었다. 오전 업무를 본 뒤 아침에 사온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GMAT 과목 중 수리영어 문제를 집중적으로 풀었다. 그리고 오후 일과를 본 뒤 9시 30분까지 퇴근하고 10시에 잠들었다 그렇게 1년하고 6개월을 살아냈다.’
그 결과 꽤 괜찮은 미국 MBA에 진학할 수 있을만한 토플과 GMAT 점수를 확보했고, 그 성적표들을 들고 막 “엄마, 저 유학 다녀올게요!”라고 말하려는 즈음에 엄마가 쓰러져버리신 거였다. 그런 엄마를 두고 유학을 다녀오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학 포기하자. 그리고 MBA가 별거야? 지난 1년 반 공부한 것처럼만 하면 독학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책은 구해서 읽으면 되고 케이스 스터디거리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널려있고…. 토론이 필요한 건 대학 교수든 기업체 회장이든 찾아가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면 될 거 아냐. 또 커리큘럼은 인터넷에 다 떠 있잖아.’
그렇게 하여 상위 10개 MBA의 커리큘럼을 참고하여 나만을 위한 2년, 4학기 분량의 커리큘럼 시간표를 완성했다. 다음은 각 과목별로 공부 방법을 정하는 일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더 간단했다. 해당 과목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 그들에게 편지를 적어 보냈는데, 어느 교수님은 학습에 필요한 도서와 논문을 추천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수업에 사용했던 케이스 스터디 자료집을 페덱스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그런 세계적인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다시 2년, 4학기를 더 공부했다. 그런 그 동안의 공부를 통해 내가 습득한 놀라운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 학습해야 할 콘텐츠,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뽑아내는 능력이다.
덕분에, 20년간 취미 삼아 방문했던 전 세계 수백 군데의 미술관들로부터 경영학적 지식과 교훈을 뽑아내 『미술관 옆 MBA』라는 책을 집필했고, 동양고전 『중용』을 갖고도 비슷한 작업을 해서 『중용의 연장통』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관련 내용을 기업체 등에 강연할 수 있었으며, 비슷한 작업을 통해 국내는 물론 중화권을 포함해 스물 하고 몇 권 더 되는 책들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촉을 새로운 곳에 꽂으려 한다. 30여 년간 내 마음속 최고의 운동화였고, 마이클 잭슨, 코카콜라와 함께 우리 일상에 늘 함께하면서도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이름, 나이키가 그 주인공이다.
나이키 히스토리 - 그 대단한 운동화 회사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본격적으로 나이키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필 나이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난 그는 달리기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학교 코치의 눈에 띈 그는 육상부로 유명했던 클리블랜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중거리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고, 지역 명문이자 강한 육상팀을 보유했던 오리건대학교에 진학해서도 그는 계속 육상 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사실 이게 맞는 것일 수도…) 나이트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육상 훈련과 대회 출전을 병행하면서도 1959년 오리건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프랭크 쉴렌버거 교수의 ‘소규모 창업론’이었다. 평생토록 트랙 위에서 경쟁자보다 단 1초라도 먼저 결승점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살았던 그에게,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승점을 정하고, 트랙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기업가의 삶에 대한 강의는 감동 그 자체였다.
1962년에 경영학 석사를 마친 후 공인회계사 겸 포틀랜드주립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던 나이트의 석사 논문 주제는〈일본의 카메라가 독일의 카메라에게 했듯이(경쟁하고, 넘어섰듯이) 일본의 운동화도 독일의 운동화에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일단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오니츠카타이거 본사를 찾아가 자신을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딜러 중 한 명이라고 허풍을 떤 뒤 오니츠카타이거의 판권을 달라고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미국 전역에 대한 독점 판권을 취득한 그는 1964년 블루리본스포츠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거창해서 창업이지, 일본에서 보내준 물건을 받아다가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에 지나지 않았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고정관념 탓에 초기에는 판매에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나이트가 들여온 질 좋은 일제 운동화는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첫해 8,000달러를 벌어들인 그들은 2년 뒤에 첫 번째 단독 매장을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열게 되었고, 그 성장 속도는 이후 그들 스스로가 무섭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나이트와 동업자들, 그리고 블루리본스포츠는 독자적인 브랜드의 신발을 조금씩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을 눈치 챈 오니츠카타이거는 계약 위반을 들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먼저 계약 해지를 선언하고 1971년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세운 회사로 변신했다. 그 회사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학습하게 될 나이키다.
나이키의 현장 증시 제품 전략 -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와플 팬으로 신발을 굽다 현재 나이키의 밑창은 고성능 컴퓨터를 활용해 정교하게 디자인되고, 실제 제품화에 앞서 첨단 3D 프린터를 활용해 시제품을 만든다. 그 뒤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실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만족할만한 데이터 값을 얻은 제품만이 대량생산되어 시장에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첫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런 대단한’ 나이키의 밑창은 ‘누군가의 집’ 주방에서 시작됐다. 1970년 어느 아침이었다.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던 나이키의 공동창업자 빌 보워만의 눈에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보워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내의 손에 들려있던 주방기구를 빌려달라고 해서는 그 길로 회사 작업실로 뛰어갔다. 그 무렵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신발 밑창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단거리 선수들은 폭발적인 가속도를 내기 위해 스타트 후 최초 열 걸음 이상은 발에 엄청난 부하가 걸릴 정도로 내딛어야 했고, 장거리 선수는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발에 무리를 가하며 뛰어야 했는데, 이들에게 보다 완벽한 쿠션을 주고 싶었던 보워만은 온갖 종류의 소재로 이런저런 디자인의 밑창을 만들어봤지만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아내의 손에 쥐어진 주방도구, 바로 와플을 만드는 무쇠 팬을 발견한 것이었다.
보워만은 아내에게 빌려온 와플 팬을 틀 삼아 여러 가지 소재를 녹여 부어 밑창을 만들어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냥 평범한 밑창 소재를 발 모양으로 잘라서 만든 밑창에 비해 올록볼록한 와플 팬에 재료를 부은 뒤 굳혀서 만든 밑창은 훨씬 덜 미끄러웠고, 발에 가해지는 충격도 훨씬 덜했다. 몇 가지 소재를 더 구해 실험을 거친 뒤 밑창의 모양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밑창은 이후 나이키에서 출시된 대부분의 신발에 장착되었다.
나이키의 역사는 곧 중력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1979년 당시, 나사 엔지니어 출신 신발 개발자였던 프랭크 루디는 인체, 특히 발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온갖 소재들을 사용해서 이리 겹쳐보고 저리 더해봤지만 원하는 수준의 충격 흡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충격을 흡수하는 소재들은 많았지만 그 재질이 대부분 말랑말랑해서 그 소재로 만든 밑창을 달고 조금만 오래 달려도 밑창이 찢어지거나 내려앉아 두께가 반으로 줄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루디는 풍선을 깔고 앉으면 푹신푹신한 기분이 드는 것에서 착안하여 ‘탄성이 좋은 튜브 안에 공기를 주입한 뒤 밀봉해서 충격을 가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험대로라면 충격을 흡수 분산한 뒤 다시 원상대로 복귀할 것이며, 그것을 신발의 밑창으로 사용한다면 원하는 수준의 쿠셔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루디는 곧바로 시제품 제작에 착수했다. 질긴 비닐로 튜브를 만든 뒤, 그 안에 질소 가스를 충전시키고 입구를 밀봉하는 방식으로 밑창을 제작했다.
테스트 단계에서 튜브가 터지는 바람에 개발이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열경화성 수지가 아니라서 지나치게 단단하지도 않으면서 유사한 3차원 구조를 지니고 있어 질기고 화학약품에 잘 견디며, 신축성까지 좋은, 그러면서 값도 비싸지 않은 폴리우레탄이라는 최상의 재료를 찾아내면서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결국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러닝화인 테일윈드 제품의 밑창에 처음으로 이 쿠셔닝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밑창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공기(air)’가 들어간 ‘밑창(Sole)’이라는 뜻의 ‘에어솔(Air Sole).’이었다. 이후 40여 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쿠셔닝 시스템이자 진화를 거듭해 현재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쿠셔닝 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이키 에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포츠는 진화한다. 쿠셔닝도 함께 진화한다초기에는 뒤꿈치 부분에 작은 크기의 에어솔을, 그것도 잘 보이지 않도록 밑창 안쪽에 적용한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에어 시스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에어솔을 바깥에서 보이도록 하거나 아예 밑창 전체에 에어 시스템을 적용한 제품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진화를 거듭하던 에어 시스템은 1993년이 되자 더욱 극적으로 발전했다. 다소 납작한 형태였던 에어 튜브를 더 크게 만들고 보다 고압의 압축 공기를 밀어 넣어 쿠셔닝을 극대화시킨 맥스에어(Max Air)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1987년도에 최초의 라인업이 등장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에어맥스 제품 라인은 맥스에어 시스템을 밑창에 적용한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도 나이키가 만들어낸 제품 중 가장 히트한 제품을 꼽으면 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에어맥스95’였다. 보다 나은 쿠셔닝을 제공하기 위한 나이키의 노력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95년 나이키는 줌에어(Zoom Air)라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맥스에어가 두꺼운 튜브에 고압의 공기를 주입하다 보니 더 많은 쿠셔닝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반대로 신발이 발에 밀착되지 못하고 조금은 붕 뜬 느낌을 준다는 소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두께는 얇으면서도 충분한 쿠셔닝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기술이었다. 그 인기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96년도 미국에서 치러진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다. 줌에어를 장착한 농구화, 러닝화를 신은 미국 대표 선수들이 연일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연승 끝에 금메달을 획득하자 줌에어의 인기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줌에어가 시장에 완벽하게 안착한 1999년에는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쿠셔닝 시스템이 등장했다. 샥스(Shox)라고 불리는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개의 플라스틱 스프링이 신발의 밑창을 받치고 있는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스프링은 아니고 스프링처럼 기능할 수 있도록 탄력이 있는 소재를 기둥 모양으로 만들어 신발의 밑창을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법한 다소 이질적인 디자인 탓에 초기에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기존의 줌에어를 더한 모델들이 출시되면서 나이키 쿠셔닝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쿠셔닝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변화를 거듭하던 나이키의 쿠셔닝 시스템은 최근 들어 밑창에 별도의 시스템을 삽입하는 형태에서 밑창을 이루는 소재 자체를 변화시켜 쿠션을 제공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탄력이 좋으면서도 어느 정도 강성을 지니고 있고 무게는 가벼운 루나 라이트 폼(Luna Light Form)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발바닥의 특정 부위에 몰리는 압력을 발 전체로 고르게 퍼뜨려줌으로써 발의 부담을 줄이고 기능은 빠르게 회복시켜 주는 기술은 달을 뜻하는 라틴어인 ‘luna’에서 그 이름을 따온 이유를 설명해주듯 중력이 없다시피 한 달에서 걷는 것 같은 부드러운 쿠셔닝을 제공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신발은 공장이 아닌 운동장에서 만들어진다나이키의 신발은 공장이 아닌 운동장에서, 기술자에 의해서가 아닌 실제 신발을 신고 뛰는 운동선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신발이 운동장에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는 믿음은 필 나이트와 빌 보워만이 처음 나이키를 세웠을 때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확고하게 지켜지고 있는 나이키의 믿음이다.
나이키의 협업 전략 - 에어조던의 전설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지금이야 나이키 농구화를 신지 않는 조던, 조던이 광고 모델이 아닌 나이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대학 재학 시절만 하더라도 조던은 아디다스 농구화를 주로 신었다고 한다. 그랬던 조던이 나이키의 모델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소니 바카로라는 인물이다. 1939년 펜실베이니아 주 트래퍼드에서 태어난 그는 나이키의 농구 담당 마케터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의 주 업무는 향후 스타성이 엿보이는 농구 선수들을 발굴해 싼값에 모델로 기용하거나, 나이키의 신발을 신고 경기에 나서도록 주선하는 역할이었다.
1984년 말, 나이키의 농구화를 신길 새로운 농구 스타를 구해오라는 지시를 받은 바카로는 지시를 내린 필 나이트 회장에게 “금액은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나이트 회장은 “50만 불”이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는 그다지 큰돈이라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 스타 마케팅이나 거액의 광고비용 집행에 인색했던 나이트 회장이었기에 ‘50만 불’은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바카로가 나이트 회장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아직 학생 티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선수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마이클 조던이었다. “프로 무대에서 아직 채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선수에게 50만 불을 지불하라니….”라며 나이트 회장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바카로는 단호했다. “이 선수는 지금 지불하는 돈의 몇 배, 아니 몇백 배의 수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선수입니다. 그러니 50만 불을 몽땅 들여서라도 그와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