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차를 타는 CEO
브라이언 스쿠다모어 지음 | 예미
청소차를 타는 CEO
브라이언 스쿠다모어 지음
예미 / 2019년 6월 / 216쪽 / 14,000원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하기
나는 7살 때 비로소 아버지가 생겼다. 의학도였던 찰스 스쿠다모어 씨가 나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주례 목사님 앞에서 “I do(네)”, “I do(네)” 하고 몇 번 대답하더니 두 분은 부부가 되었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어머니는 새 남편을 얻었고, 나는 엉겁결에 새 아버지가 생겼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둘이 살던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아버지가 공부하던 캐나다의 밴쿠버로 이사했다. 갑자기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된 것이다.
캐나다에서 나는 7살밖에 안 된 미국인 꼬마였다. 어린 마음에도 거기서 새로 만난 캐나다인 친구들과 친해지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문제는 내 노력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틈만 나면 그들을 웃기려고 노력했다. 주목받으려는 노력도 지나쳤다. 어느새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리저리 자극하고 울고 웃기는데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충고하건대, 독자들이 내 입장에 처해 있다면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또래의 아이들과 친해지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심리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나의 지나친 노력은 그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나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 뿐, 그들이 나와 어울리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터득하는 데는 6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학급의 광대 노릇을 하면서도, 방해꾼 내지는 트러블 메이커 취급을 받던 세월 동안을 견뎌낸 나름대로 방법이 있었다. 집을 도피처로 삼아 쉬는 시간마다 집으로 도망친 것이다. 겨냥만 잘하면, 집에서 던진 돌로 학교 유리창을 깰 수 있을 정도로 집과 학교가 가까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빠져나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시작종이 울리는 것에 맞춰서 교실에 들어갔다. 집에서 유리창 밖으로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나를 괴롭히거나 시비를 걸 만한 녀석들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총알같이 뛰어서 교실로 돌아왔다.
하굣길은 좀 더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하굣길에 잘못 걸려 얻어맞은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은밀한 탈출구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위해 교문으로 향할 때 나는 일단 도서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부단히 교문 쪽을 살피다가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집 바로 뒤편으로 난 샛문을 통해 귀가했다.
은밀한 탈출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그 일들 가운데는 나에게도 기분 좋고 도움 될 만한 것들도 많았다). 요리, 스키, 여행, 새로운 언어 배우기, 멘토 되기, 코치 되기, 아이들과 놀기 등. 유용하고 안전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없다면, 피하려 하지 말고 과감하게 부딪쳐야 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떤 것에 몸을 던져 정면 돌파할 만한 “열정”이 기적처럼 내 안에서 생겨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일단 방향을 정하고 과감하게 부딪쳐라. 일단 온몸을 던져 뛰어들면 열정이 생겨날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 나는 스스로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광대 노릇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열차가 레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듯이, 마치 어둠 속에서 방향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듯이, 혼자 터널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를 들으며 헤매듯이 그 일에만 집착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농담을 좋아하고 가끔 친구들을 상대로 장난도 잘 친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안다. 내가 던진 농담으로 인해 상대방이 상처받는 일은 지금은 없다.
두 번 자퇴하다
나의 경력 가운데 남과 다른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학년까지 수업은 충실히 마쳤지만, 졸업장은 얻지 못했다.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매우 놀랐다.
그때의 기억은 이렇다. 대개 졸업 무렵이 되면 졸업생을 중심으로 DJ까지 동원된 큰 규모의 축하 파티가 열린다. 그런데 당시 학교운영위원회 측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르페움 홀이라는 이름의 꽤 큼직한 음악당을 빌렸다. 그리고 졸업생들은 잘 차려입고, 균형 잡힌 걸음걸이로 우아하게 무대 위에 올랐다. 허리는 기품 있게 곧게 펴고, 턱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약간 쳐든 모습으로 줄지어 걸어 나갔다. 무대 위의 고상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이든 돋보이는 시간이었다. 나도 꽤 괜찮은 정장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의 높은 분들이 수여하는 두루마리를 받았다. 나는 그것이 졸업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니 내가 12학년 수업 과정을 모두 마쳤다는 말은 적혀 있었지만, 어디에도 졸업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잠시 동안 생각하면서 냉정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좋다, 이제 나는 ‘가본 사람이 거의 없어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 오늘 졸업식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졸업장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이어서 드는 또 하나의 생각은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친구가 졸업장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대학에 가거나 진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왠지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 받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보다는 더 나이도 들고, 현명해진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졸업장을 못 받은 이유는 수시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느라 수업을 많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낯선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은 결코 탄탄대로는 아닐 것이다.”
좋아 보이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어려운 일임을 절실히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책임도 좋은 것이다. 책임과 자유라는, 둘 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두 갈래 길에서 과거의 나는 항상 자유를 선택해 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자유보다는 책임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학비를 충당할 돈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1단계: 학교 입학사무를 담당하는 사무실을 찾아가서 사정을 해 보자. “제가 한 과목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서 졸업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주신다면 모자라거나 뒤처진 부분은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2단계: 우연히 맥도날드에서 낡은 소형트럭 한 대를 보면서 학비를 벌 만한 나름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 트럭 측면에는 “마크 화물”이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도 저걸 해 보자.’
직접 트럭을 몰고 다니며 폐기물을 운반하여 모은 돈으로 1년 정도 대학 학비는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특별하지도 기발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한 생각이었다. 막상 시작하고 나니 2주일 만에 트럭이 고장 나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리는 아드레날린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 자신의 사업체를 경영하고 이것을 키워 보겠다는 흥분으로 어쩔 줄 몰라 했었다. 그러나 수리비 청구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큰 액수였다. 이것은 지금 되돌아보면 경영자로서 내가 겪은 첫 시련이었다. 그리고 내 계획을 다시 되돌아보고 점검하고 든든하게 보강할 기회였다. 결국 예상치 못한 지출을 메우기 위해 돈을 좀 더 끌어들였고, 다시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광고를 위해 광고비를 지출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대신 나와 내 사업을 알릴 수 있는 홍보성 기사가 실릴 수 있도록 언론매체를 설득하기로 했다. 나의 이 모습을 보고 여자 친구 리사는 “참 대단한 계략이군. 여름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못 구한다고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리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가장 큰 규모의 지역 신문인 《밴쿠버 프로빈스》 지의 편집국에 전화를 걸었다. “좋은 뉴스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내용이지요?” 그래도 다행히 무시하지 않고 궁금하다는 듯 대답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제가 대학 등록금을 좀 벌어 보려고 여름 시즌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일자리 찾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예 창업을 했습니다. 폐기물 운반업을 시작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The Rubbish Boys’이고, 전화번호는 738-JUNK입니다. 그리고 사업은 생각보다 잘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뜸 “축하합니다.”라고 대답하고 기자와 사진기자를 보내주었다. 다음 날 내 사업체를 소개하는 기사가 이 신문 1면에 실렸다!
갑자기 스타가 되었다.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버스 기사가 운행 중에 나의 회사 로고가 찍힌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창밖으로 신문을 흔들기도 했다. 신문사와의 전화 한 통으로 한순간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당시 신문 1면에 실린 기사를 지금도 회사의 내 사무실 벽에 잘 걸어 놓고 있다.
나는 주니어칼리지에 진학하여 학업과 사업을 병행했지만 몇 개월 만에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그 학교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느라 힘과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캐나다의 다른 지역과 퀘벡 주의 다양한 문화를 직접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몬트리올로 옮겨서 두 군데의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학업 성적도 괜찮았다.
그리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와서 브리티시콜롬비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많이 알려진 대로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좋다, 여러 곳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학위를 마치고 이 학교 졸업장을 따겠다. 이제부터는 시행착오 없이 직진하자.” 브리티시콜롬비아 대학교까지 4년 동안 네 개의 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비는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서 700달러를 주고 산 낡은 포드 픽업트럭을 몰고 폐기물을 옮기며 조달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일을 놀이로 여기며 즐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수시로 고객들과 대화하며, 폐기물 수거 일정을 잡고, 내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문자를 주고받고, 그들이 업무 중에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또 차를 몰고 학교에 가는 등 정말 바쁘고 신나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내가 듣는 수업에서 강의하는 교수들치고 내가 직접 사업체를 경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먼저 그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는 거의 식빵 덩어리만큼 크고 시멘트 벽돌만큼 무거운 모토로라 핸드폰을 학생이 들고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는 모두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가끔은 수업 시간에 고객의 전화가 걸려 오는 바람에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수업을 듣는 동안에 나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도록 직원을 따로 두고 있었지만, 간혹 그 친구가 피치 못할 일로 전화를 받지 못할 경우 내 전화가 울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급히 강의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교수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면서 왜 수업을 듣다 말고 뛰어나가 전화를 받아야만 했는지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나를 무례하게 여기기보다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젊은이에 대한 성원과 연민의 시선 같았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예전에 신문기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내 사업에 대해 한참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아버지, 좋은 소식이 있어요.” 이렇게 운을 띄운 것은 아버지가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내 생각을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학을 자퇴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예 쓰레기 청소부로 나서겠다고?” 나는 확신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잘나가는 간이식 전문 의사였다. 현재의 지위와 능력의 전부를 대학에서 습득한 분이고,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 나온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아버지의 눈으로 보면, 쓰레기를 치워 몇 푼 벌어보겠다고,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고, 모험해 보겠다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젊은 아들이 왜 걱정스럽지 않았겠는가? “내 큰아들이 대학을 그만두고 아예 전업 폐기물처리업자로 나섰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기업가정신이었다. 뭔가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과감한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광기를 가진 사람들을 내 주변에 포진해 놓고 싶었다. 나는 행복하고(Happy), 뭔가에 굶주려 있고(Hungry), 열심이고(Hardworking), 몸소 실천하는(Hands-on)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를 4H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핵심 직원 다섯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있는 오두막에 함께 갔다. 그중 한 사람이 제시 코르잔이다. 그는 창업자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잊히지 않는 것은 제시와 닉 우드가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 1-800-GOT-JUNK? 라는 문신을 새기고 들어왔을 때의 충격이었다.
나는 짐 콜린스가 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을 자주 읽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모든 기업은 나름의 기업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가치관을 직원들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나는 직원들에게 짐 콜린스의 주장을 이야기했다. “짐 콜린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정직하든,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기업으로서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포스트잇 종이를 충분히 나눠준 후 “이제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회사가 무엇인지 생각나는 대로 얼마든지 적어 보세요. 대신 포스트잇 한 장에 하나씩만 적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다가 내다보이는 투명한 유리 창문에 붙였다. 그 유리창에는 무려 400개의 포스트잇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자, 이제 이것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해 봅시다.” 두 장의 포스트잇에 비슷한 단어가 중복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로 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개의 포스트잇 그룹이 만들어졌다. 한 시간쯤 만에 400개나 되는 단어들이 네 가지의 그룹으로 묶였다. 이 네 가지는 각각 다음과 같았다.
● 열정(Passion) ● 정직(Integrity) ● 프로정신(Professionalism) ● 공감(Empathy)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것이 우리 회사의 가치인 듯 합니다.” 모두가 공감했다. “PIPE는 우리 회사의 정신입니다.” PIPE는 위 네 가지 단어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앞으로는 이 네 가지의 정신에 맞지 않는 직원은 절대 뽑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열정은 전염된다
우리 회사에 홍보부서가 있다. 담당 직원의 이름은 타일러 라이트였고, 이전에 다른 곳에서 홍보 담당 업무를 전혀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타일러는 키가 매우 크고 마른 젊은이였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미디어가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갖고 기사화하도록 했는지 나름의 비법을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