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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1인 CEO이다

이태철 지음 | 성안당
우리는 누구나 1인 CEO이다



이태철 지음

성안당 / 2019년 5월 / 284쪽 / 15,000원



목표의 힘을 믿어라



전문가가 되기까지 참고 견뎌라



(주)태양트레이, 한강자동차운전전문학원, 강남 영동새마을금고 등 네 개 계열사를 둔 회장 이재창은 1964년, 15살에 단돈 500원을 가지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해 가스용접 부문에서 금메달을 따 기술력을 인정받은 후에 모은 ‘종잣돈’으로 1972년 태양공업사를 세웠다. 그리고 1991년부터 2006년까지 4회 연속 강남구의회의원에 당선되어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1995년 강남 영동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으면서도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는 등 뜨거운 열정으로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삶: 이재창 회장은 험한 인생 속에서도 목표를 달성하는 습관이 철저하게 몸에 밴 사람이다. 그는 1949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무척 가난해서 중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였다. 13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경북 영주에 있는 어느 공업사에서 용접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곧바로 집을 떠나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을 배웠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쫓겨나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린 나이에 물을 기르고, 연탄불을 갈고, 청소를 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받아 집에 오더라도 땔감을 마련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1964년 그는 공업사에서 3년간 일하고 받은 300원과 나무를 해서 모은 200원을 합친 단돈 5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에 있는 태산공업사에서 용접 일을 시작하였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며 월급 600원씩을 받고 일을 하였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월급을 모으는 재미와 용접기술을 배우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회상한다.

상경한 지 5년이 되던 해인 1969년, 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해 가스용접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문이 나면서 공장에 일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자신이 가져가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내 사업을 한다.”고 결심하였다. “직장 생활로 한 달 월급 받아봐야 얼마 안 되잖아요. 당시 삼천리자전거 등 큰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어요, 그러나 거기 가도 ‘월급쟁이’잖아요. 그래서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다 거절했어요. 용접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면서 남이 못한다는 용접은 전부 다 우리 쪽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아무리 가격을 많이 불러도 깎지를 못해요. 다른 데서는 못하니까. 예를 들면 부품 하나가 부러져 용접을 못하게 되면 버려야 되잖아요. 기계를 못 쓰게 되면 손해가 몇 천만 원이 되고, 몇 억 원이 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수리비용으로 10만 원, 20만 원을 불러도 일을 맡기는 거예요. 한 달 월급은 몇 푼 안 되는데, 사실 용접 한 건만 때우면 한 달 월급이 되는 거예요.”

그는 계속해서 사업을 위한 ‘종잣돈’을 어떻게 마련하게 되었는지 말을 이었다.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안 할아버지 한 분의 소개로 아내가 남양주 밤섬 유원지에 있는 매점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아내를 도와 매점에서 일했어요. 정말 하루에 몇 시간도 못 자고 일했어요. 월급을 타면 90%를 예금했고, 쌀은 고향 집과 처가에서 한 가마니씩 가져다 먹었죠. 그리고 장사해서 번 돈과 예금한 돈을 모아서 마침내 16평짜리 공장을 세내어 내 사업을 시작했어요. 순전히 있는 돈으로만 시작했어요. 그게 밑천이 돼서 이렇게 큰 재산을 일구게 되었어요.”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일하라: 그는 기업 경영을 하면서 늘 배움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마흔이 넘은 1989년부터 매년 숭실대학교, 서울대학교 최고위과정 등에 등록해 배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1991년에는 지방의회의원에도 도전하여 강남구 의원에 당선되었다. “1995년도에 강남구 의장을 했어요. 다들 좋은 대학 나왔는데 나는 초등학교만 나왔으니 중졸과 고졸 검정고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에서 피가 터지도록 공부했어요. 그리고 1999년 대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어요.”

그는 2000년에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행정학 석사도 취득하였다. 또한 그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4회 연속 강남구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그러나 지방의원이 ‘명예직’에서 ‘유급직’으로 바뀌면서 그는 더 이상 지방의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지방의원이 명예직이었으면 계속 출마했을 거예요. 월급을 받지 않고 하는 것이 봉사잖아요. 급여를 받고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어서 더 이상 출마하지 않았어요. 구의원들과 지역주민들이 내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구의회 의장을 4번이나 했어요.” 아울러 그는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한번 세운 목표나 맡은 과업은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 번에 가려고 하지 마라: 그는 강남 영동새마을금고 이사장도 맡고 있다. 1995년 지역사회에 있는 새마을금고가 폐업 직전까지 갔다. 새마을금고중앙회에서 폐업하기로 한 것이다. 출자금이 30억 원이었는데, 적자가 3억 원이었다. 수신 잔고도 거의 바닥나 있었다. 새마을금고를 살리기 위해 그가 직접 나섰다. 새마을금고 수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마을금고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야 하였다. 규정을 바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14층 빌딩을 ‘자산’으로 등록하였다. 또한 직원들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 ‘개인담보’를 설정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마을금고에 돈을 맡기면 틀림없다! 금고에 자산이 충분하니 도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뢰’가 회원들에게 싹트기 시작하였다. “내가 동네 구의원이다 보니. 내가 맡아서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살리고 싶어서 살린 게 아니라 새마을금고가 폐업하면 주민들 3,000여 명이 피해를 입잖아요. 20년은 명예직, 무보수로 일했어요. 직원은 10명이고 지금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하면서도 그의 ‘성실함’은 변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고객들을 만나고 설득하면서 새마을금고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은행은 9시에 시작하잖아요. 우리는 매일 아침 7시에 나가 8시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저녁에는 손님이 오는 시간까지 일했어요. 가게를 돌아다니며 하루 세끼를 먹었어요. 많은 사람이 감동해서 우리 회원이 되었어요. 회원이 2만 명으로 늘었어요. 적자 난 걸 3년 만에 다 메꾸고, 199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배당을 주고 있어요. 현재 자산 1,000억 원, 공제 1,500억 원, 총 2,500억 원입니다. 자체 건물도 있고, 이제는 안전합니다.”

그는 한번 설정한 목표는 반드시 완수하였다. “한번 마음먹은 목표는 밤잠을 줄이면서 열정을 다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어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직원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그가 직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효율적인 ‘업무처리시스템’ 구축을 통해 회사 대표, 구의원, 새마을금고 이사장 및 대학생 등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불꽃 열정으로 타오르다



뜨거운 열정으로 온몸을 던져라



(주)우드메탈 대표이사 김춘수는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업을 시작해서는 두 번의 화재와 한 번의 부도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넘어질 때마다 주변에서 그를 도와주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래처를 쉽게 바꾸지 않은 두텁게 쌓은 ‘신용’ 덕분이다. 우드메탈은 20~30대 가구 브랜드를 지향하고 있다. 우드와 메탈의 감성이 조화를 이룬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가치이다.

먹고살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춘수 대표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고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군대를 제대한 후 집에 돌아왔지만 큰 형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백방으로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한 설렁탕 집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살 집마저 없어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제대 후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설렁탕 집에서 주방 일을 하시면서 식당에서 숙식하시는 것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그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복학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982년 의료기기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였다. 그곳에서 6개월을 일하다가 컴퓨터용 책상을 생산하는 가구회사 사장을 만나 가구영업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하루에 100여 곳 넘는 가구 도ㆍ소매점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하였다. 회사 사장은 열심히 일하고 ‘높은 성과’를 내는 그를 무척 아꼈다. “구두가 해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월 매출액을 종전보다 세 배 이상 끌어올렸어요.”

1984년 마침내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공장장과 생산부 직원 등 모두 3명이 동업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본도 부족하고 서로의 업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다. 동업 2년 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동업이 잘되면 자기 탓이고, 안 되면 남의 탓이잖아요. 안 될 때 서로 상대방 잘못으로 떠넘기고, 싸우다 보니 동업이 유지될 수 없었어요.”

세 번 넘어져도 네 번 일어서다: 1986년 그의 나이 31살에 세운상가에 사무실을 내고 협진기업사를 창업하였다. 창업 자금은 250만 원이 전부였다. 경기도 남양주에 300평 규모의 공장을 임대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모자라 생산설비는 들여놓지 못하고 창고로 썼다. 당시 초등학교와 중ㆍ고교에 컴퓨터 교육 바람이 불면서 외주 제작한 ‘컴퓨터용 책상’이 인기리에 팔려 나갔다. 직원이 30여 명으로 늘고 월 매출액도 1억 원대를 넘어섰다. 그는 창업하고 난 후에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1990년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자체 공장을 마련하였다. 더욱 잘나가기 시작하였다.

‘가속페달’을 밟던 그에게 1991년 3월 첫 시련이 닥쳤다. 옆 공장에서 난 불이 옮겨 붙어 공장이 전소된 것이다. “불법 건물이어서 보험도 안 들었고, 불을 낸 공장이 영세공장이다 보니 보상도 못 받았어요. 매출은 없는데 발행한 가계수표 막을 날이 다가오는 거예요. 거래 은행에서 그동안의 신용을 인정해 자금 지원을 해줘 간신히 고비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화재가 난 그 자리에 천막을 치고 기계를 들여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에서 불법 건축물이라며 굴삭기로 두 번이나 철거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공단에 입주하면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일 일이 적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남양주시 성생 공단이었다. 1993년 3월이었다. 처음에는 200평짜리 공장을 임대하였다. 이곳에서 일반 사무용 가구를 새로운 아이템으로 추가하였다. 회사가 쑥쑥 성장하였다. 화재 후 사업이 번창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1년 반만에 성생 공단 내 620평의 공장 부지를 2억 4,000만 원에 매입하였다. 1995년 7월, 공장을 짓고 5억 원을 들여 최신 설비를 들여놓았다. 그는 자체 공장을 갖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공격적인 경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신 기계를 수입해 오기도 하고, 영업직원을 늘리고 제품 광고도 늘렸다.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디자인팀’까지 두었다. 공장 신축 후 2년여 동안 무려 5억 원 정도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투자를 마무리할 때쯤 IMF 위기가 닥쳐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수금이 잘 되지 않아 1998년 7월 31일 1차 부도, 8월 2일 2차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다행히 금융권이 나서서 도와주었다.

1998년 8월 그는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에서 회사를 새로 설립하고, 상호를 (주)우드메탈로 정하였다. “우드와 메탈의 합성어로,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협력업체가 원자재 등을 외상으로 공급해주는 등 주변의 도움으로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2001년부터는 사무용 가구를 고급화하면서 매출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2003년 2월 27일 또 다시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이번에는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였다. 제품 및 원자재가 모두 불에 타버렸다. 피해액만 60억 원에 달하였다. “제품과 원자재가 시뻘건 불길에 타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망연자실했습니다. 1991년 화재 경험이 있어서, 1995년에 부지를 매입하고 공장을 지을 때는 ‘화재보험’에 반드시 가입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보험사에서 가구공장에 화재가 많이 난다고 받아 주지 않아서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충격을 심하게 받아 며칠 동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이번에도 툴툴 털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그의 재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급한 건부터 하나하나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납기가 도래한 계약 건은 납기 연장을 요청하고, 협력업체를 통해 납품을 마쳤다. 비어 있는 옆 공장을 얻어 생산을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그가 거래하던 거래처들도 설비와 원자재를 외상으로 주는 등 그의 재기를 적극 도와주었다. “거래를 하신 분들이 나를 믿어주신 건 신용이 있었기 때문이죠. 나는 다른 거래업체에서 조금 더 싸게 준다고 해서 거래처를 옮긴다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것은 사업을 시작한 이후 반드시 지키고 있는 원칙이에요. 그래서 나를 더 믿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세 번이나 위기를 맞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2005년 지금의 부지에 20억 원의 대출을 받아 다시 공장을 시작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하면 되나요? 끝까지 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어쨌든 한번 시작했으면 밀어붙여야지. 자꾸 업종을 바꾼다든가 그러면 제대로 되겠어요?”

기업경영 전략에 대하여: 우드메탈은 중소기업임에도 불구하고 2008년부터 광고를 꾸준히 하고 있다. 또한 우드메탈은 20~30대가 찾는 브랜드를 지향하고 있다. “제조업의 심각한 문제는 제조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조업은 청년들이 많아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는 공장장이 29살에 불과하고, 직원들 대부분이 20대 청년들이에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회사를 만들려고 ‘꿈나무’를 키우고 있어요.”

그는 다른 CEO에 비해 유독 어려운 고비가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해냈다. 그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사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지금 내 사업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진짜 성공은 아직 멀었어요. 사업이라고 하는 게 나 혼자 끌고 갈 수 없잖아요. 지금은 나에게 한계가 왔을 때, 다른 사람에 의해 기업이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이 업계에서 100년 이상 가는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다



이텍산업(주), 이텍네트웍스(주) 등 3개의 계열사를 둔 회장 이두식은 1994년, 맨주먹으로 회사를 창업하였다. 그는 대만의 한 고객 제의로 우연한 기회에 ‘수입상’을 시작하였다. 불굴의 의지로 제설 장비의 국산화에 성공하며 ‘제조업체’로 변신하였다. 현재 제설장비, 다목적도로관리차 등 70여 가지 이상의 다양한 특장차를 생산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 1천억 원을 돌파했다. 최근에는 미세먼지를 저감하는 ‘분진 흡입 청소차’, ‘전기 청소차’ 등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개념의 특장차’를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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