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지도를 넓힌 사람들
박상주 지음 | 예미
부의 지도를 넓힌 사람들
박상주 지음
예미 / 2018년 5월 / 374쪽 / 16,000원
카리브해의 전력왕 - 최상민ㆍ도미니카공화국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찾아
‘카리브해의 전력왕’으로 불리는 최상민(42) ESD 사장은 1993년 17살 때 부모님, 동생과 함께 도미니카공화국에 이민을 갔다. 올해로 이민 25년째로 접어드는 최 사장은 에스파뇰라 섬에 멋진 엘도라도를 건설하고 있는데, 도미니카와 아이티를 무대로 발전소 건설과 운영, 부품과 서비스 공급, 그리고 배전망 개선사업 등으로 연간 40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최고의 전력회사를 목표로
최상민 사장이 아이티 총리공관에 들어섰다. 아이티 총리의 비서실장인 살림 수칼과 전력청 부청장인 라파엘 두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 사장이 테이블에 합류하자 수칼 실장이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는 ESD(Enterprise Specialized in Development)와 아이티 전력청 간 전력공급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앞으로 ESD는 아이티 남부에 있는 제레미와 서부의 라 고나베 섬에 전기를 공급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이어 최 사장과 두켄스 부청장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2004년 11월 발전기 부품 및 서비스 사업으로 출발한 ESD가 전기를 생산하고 이를 판매까지 하는 전력회사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8일 안에 발전소 엔진을 살려내겠습니다
최 사장은 무슨 재주로 아이티 정부로부터 전력공급 사업까지 떠맡는 위치까지 올랐을까. 이에 대해 최 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저기 창문 밖을 보세요. 아이티와 베네수엘라, 쿠바 국기가 게양대에서 나란히 펄럭이고 있지요. 지금 저희가 운영하고 있는 3개의 발전소(북부, 중부 그리고 남부지역)는 세 나라가 협력해서 건설한 겁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원조해준 석유를 팔아 발전소 건설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쿠바에서는 발전소 건설과 운영을 맡았지요. 그때 쿠바 전력청이 발전소 엔진으로 채택한 제품이 바로 현대중공업의 ‘힘센 엔진’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터졌습니다. 2009년 8월 북부 캡 헤이션 발전소의 엔진 8대가 모두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겁니다. 아이티 북부지방에 전기공급이 전면 중단되는 대형사고였어요.”
5일 동안 전기가 끊겼고,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화들짝 놀란 르네 프레발 당시 아이티 대통령이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 현대중공업 관계자 두 명도 호출을 당했다. 최사장이 말을 이었다. “당시 저는 현대중공업 관계자들의 통역으로 참석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는 현대중공업 발전기 부품을 공급하고 정비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거든요. 아이티 대통령궁 각료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30여 명이 쫙 앉아 있더라고요. 회의를 주재한 프레발 대통령과 총리, 건설장관, 재무장관, 전력청장 등 아이티 각료들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대사와 쿠바 대사, 쿠바 전력청장 등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어요. 하나같이 거물급들이었지요.”
대책 없는 갑론을박과 책임공방이 이어졌다. 최 사장은 오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쿠바 사람들이 발전소 유지 및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최 사장은 그 자리에서 폭탄제안을 한다. 자신이 발전소 엔진을 살려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최 사장이 말을 이었다. “8일간의 말미를 주면 발전소 엔진을 살려내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라파엘 전력청장이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그러더라고요. 한번 믿고 맡겨달라고 했지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고요.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회의장에서 나와 이야기를 했더니 무모한 약속을 했다고 펄쩍 뛰더라고요.”
하지만 ESD의 기술진은 약속대로 죽어 있던 엔진 8대를 모두 살려냈다. 짐작했던 대로 엔진에 무슨 큰 이상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해줘야 하는 부품을 바꿔주지 않거나 헐거워진 볼트나 너트 등을 조이지 않아서 발생한 고장들이었다. 최 사장이 말했다. “엔진 구석구석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을 하고 나니까 씽씽 잘 돌아가더라고요. 결국 약속했던 기한보다 하루 빠른 7일 만에 복구를 해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 정부 사람들은 물론 쿠바와 베네수엘라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더라고요. 라파엘 아이티 전력청장이 그때 3만 7000달러를 건네주면서 고맙다고 치하를 해주었습니다.”
때론 계약서 위에 찍는 도장보다 눈도장이 더 확실한 보증 역할을 해준다. 눈도장은 약발이 오래 지속되는 신용장 역할을 한다. 아이티와 쿠바, 베네수엘라 세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끙끙거리던 고민거리를 한 방에 해결한 최 사장은 그때부터 아이티 정부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게 된다.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
최 사장은 20대 중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도미니카 지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코트라 사무실에서 현대중공업의 정병옥 부장을 만나게 된다. 2000년 7월쯤의 일이었다. 정 부장은 현대중공업에서 개발한 ‘PPS’ 이동식 발전기, 즉 ‘힘센 엔진’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장을 나왔다고 했다. 최 사장이 말했다. “당시 저희 부모님이 산토도밍고에서 ‘아리랑 식당’이란 한식당을 하실 때였습니다. 정 부장님이 산토도밍고에 머무는 동안 우리 집에서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씩 하게 됐지요. 그 자리에서 정 부장님이 여러 차례 ‘힘센 엔진’이 얼마나 좋은 건지 쭉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순수 국내기술로 제작했다며 아주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해 10월 도미니카 회사인 ‘EGE Haina’에서 150MW짜리 발전소 입찰을 공고했고, 현대중공업은 참여했지만 아쉽게도 공사를 따내지 못했다. 그 입찰 과정에서 최 사장은 현대중공업과 ‘EGE Haina’ 사이에서 연락처 역할을 했는데, 자연스럽게 귀동냥 지식이 쌓이기 시작했다. ‘힘센 엔진’이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시장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최 사장은 2001년 3월 울산 현대중공업을 찾아가 ‘힘센 엔진’ 대리점권을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판매 에이전트십을 따냈다. 그 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고, 2001년 11월 마침내 그 첫 결실(도미니카에서 1.7MW짜리 ‘힘센 엔진’ 두 대 판매)을 거두었다.
막다른 골목에서도 길이 열리는 것이 인생
1993년 5월 최 사장네 가족은 도미니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 사장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해 9월 부모님은 한국 봉제공장에 다니는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음식장사가 먹힐 거라는 판단을 하고, 산토도밍고 27번가에 한국 음식점 ‘아리랑’을 개업했고, 그 곳에서 최 사장은 점심때부터 밤늦게까지 식당 일을 도왔다. 최 사장이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느냐, 학교를 가야지, 이게 부모님을 돕는 게 아니다. 공부해라. 당시엔 기분이 나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유학을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돈도 없고, 최 사장이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으면 미국 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 온 한 손님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잔뜩 술에 취한 그 손님은 자신이 지금은 미국에서 조그마한 주택 수리업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한때 사업을 크게 하다가 쫄딱 망했노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최 사장은 그 손님이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공부하러 미국에 갔다가 보호자가 없어서 돌아온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선뜻 자기가 보호자 역할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뜻밖의 은인 덕에 최 사장은 1994년 말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최 사장은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수잔 웨그너 고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수잔 웨그너 고교에서 다시 축구를 시작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학교 대표선수로 뛰던 왕년의 실력이 다시 살아나면서 최 사장은 금방 팀의 주전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최 사장의 축구 실력은 미국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의 문까지 열어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외국인에게는 장학금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 사장은 결국 컬럼비아 대학을 포기하고 만다. 대신 한 학기당 등록금이 3500달러인 뉴욕시립대를 택하고, 1996년 9월 뉴욕시립대 바루치 칼리지의 회계학과에 입학했다.
닫힌 사회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그 뒤 최 사장은 대학 졸업 후 자신이 꾸려나가게 될 삶의 모습에 대해 회의가 들어 뉴욕시립대 3학년을 마친 시점인 1999년 6월 학교를 그만둔다. 월스트리트에서 화이트칼라로 봉급쟁이 생활을 하는 자신의 미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토도밍고로 돌아와 최 사장이 처음 시작한 일은 ‘시멘트 목재’로 불리는 인조목 사업이었다. 나뭇결 모양의 시멘트 목재를 이용해 벤치나 바닥재 등을 설치하는 사업이었다. 최 사장은 1년 동안 5개 골프장의 벤치와 안내표지 등을 설치하는 공사를 맡아서 했다. 산토도밍고 시내의 도로 표지봉 공사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이 짓거리 하려고 대학을 그만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최 사장이 말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상을 배워야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바로 코트라입니다. 서류정리와 통역, 시장조사 등 코트라에서 시키는 일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귀동냥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눈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사업에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한편으로 이제 그만하면 시장에 대한 공부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4년 11월 드디어 ESD 간판을 내걸었다. 발전기와 엔진 부품 판매 및 수리 등을 하는 사업이었는데, 발전기 사업은 수력이나 화력, 원자력 등 대형 발전소를 건설할 여건이 안 되는 카리브해 연안 지역에서 아주 유망한 사업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 사장의 판단은 적중했다. ESD의 매출은 2005년 50만 달러, 2006년 180만 달러, 2012년 3400만 달러로 수직상승했다. 발전기 사업을 벌이다 보니 배전과 토목 등 다른 부가사업들까지 엮이면서 가파른 성장을 한 것이었다. 최 사장은 한국과 미국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꿈을 도미니카에서 실현하고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빡빡한 경쟁사회인 한국이나 미국과는 달리 도미니카와 아이티 등 카리브해 지역은 그의 꿈을 마음껏 그려 넣을 수 있는 하얀 도화지였다. 최 사장이 지금 카리브라는 도화지 위에 그리는 그림은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초일류기업 ESD이다.
빅 두리안의 속살로 뛰어든 한국인 - 이호덕ㆍ인도네시아
천상의 과일 두리안을 닮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두리안을 닮은 나라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 속살로 들어갈수록 진가를 드러낸다. 40여 년 전 인도네시아의 속살 속으로 뛰어든 인물이 있다. 부동산 종합개발 기업인 ‘로얄 수마트라’와 의료기기 유통 및 특수장비 판매회사인 ‘메디슨 자야리야’를 경영하고 있는 이호덕(69) 회장이다. 로얄 수마트라는 아파트와 주택단지, 골프장 건설과 택지개발 등 부동산 개발과 분양을 하면서 연 1500만~2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병원 의료기기와 특수장비를 판매하는 메디슨 자야리야는 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칼리만탄 섬 밀림 속으로
이 회장은 1949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5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고, 능주북초등학교와 광주북중학을 거쳐 광주일고에 진학했다. 명문 광주일고에서 상위권 성적이었지만 서울대 시험에 두 번 고배를 마셨다. 낙방을 한 뒤 친구 자취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에게 세계무대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깨우침을 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고흥 출신 정치인이었던 월파 서민호 의원이었다. 이 회장이 말했다. “1969년 겨울 서민호 의원이 고향 선후배들을 모아놓고 식사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저도 참석을 했습니다. 서 의원이 서울대 낙방 후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저를 보시더니 앞으로 동남아를 주목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이상하게도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한국외대 말레이ㆍ인도네시아어(마인어)학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였어요.”
1975년 봄 이 회장은 대학 졸업과 결혼, 취업(경남기업) 세 가지를 동시에 하게 된다. 입사한 지 석 달 만인 1975년 6월, 이 회장은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땅을 밟게 되는데, 그는 칼리만탄(말레이시아 이름으로는 보르네오) 섬의 현장근무를 자원했다. 편안한 자카르타 사무소에서 근무를 할 수도 있었지만 현장의 일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남기업은 칼리만탄 섬에서 10만㏊ 규모의 벌목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 회장이 일을 시작한 곳은 칼리만탄 동부해안에 있는 작은 섬 타라칸이었다. ‘산판’으로 불리는 벌목현장은 타라칸에서 강줄기를 따라 스피드보트로 6시간 이상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오지였다.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속에는 독충과 맹수가 우글거렸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젊은 이 회장은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참고로 197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 현지에 파견된 직원들 중 현지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나마 경남기업 인도네시아 지사에는 이 회장과 함께 마인어 어학자원으로 선발된 입사동기 두 명이 함께 발령을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 1년도 채 안 돼 사직을 하고 말았다. 인도네시아 현지인 직원들 및 거래처 사람들과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이 회장만 남게 된 셈이었다.
입사 4년 만에 만들어낸 샐러리맨 신화
이호덕 회장이 인도네시아 근무를 시작한 지 2년을 조금 넘어선 즈음인 1977년 8월, 본사 자매회사였던 건원기업의 이영재 회장이 칼리만탄 산판 현장을 전격 방문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회장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드는 일은 당시 말단 사원이었던 이호덕 총무에게 떨어졌고, 이 총무는 밤을 새면서 산판 현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사무소장이 업무 브리핑을 시작했다. 참고로 이 회장은 현장경험이 많은 전문경영인이어서, 브리핑 중간에 구체적이며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자 현장소장이 제대로 답변을 못 하고 쩔쩔매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이 총무는 문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의장 문이 열리더니 이 총무를 들어오라고 했다. 이 회장이 자료를 만든 담당자를 호출했던 것이다. 회의장에 들어간 이 총무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척척 대답을 내놓았고, 최고경영자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이후 1977년 말 정기인사에서 말단 사원이었던 이 총무는 대리 진급과 함께 타라칸 사무소장 직무대행으로 발령을 받았다. 충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리가 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과장으로 진급을 하면서 정식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지 2년 만인 1979년 3월, 그는 다시 차장으로 승진을 하면서 인도네시아 본부 사무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꿈틀거리는 가능성
인도네시아 근무 경험이 짧았기 때문에 현지인들을 통솔하기 힘들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소장은 칼리만탄 섬의 타라칸 현장사무소 생활을 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현지인들에게 말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솔선수범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그들을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그러자 조직은 금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하는 동안 점점 꿈틀거리는 인도네시아 시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품은 광대한 영토와 2억 5000여만 명의 인구, 동남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지정학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활기차게 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모습이 가슴에 들어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직장인이라는 굴레가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본사의 훈령을 받아 일을 하는 월급쟁이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구상대로 사업을 일으켜보고 싶은 욕망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981년 겨울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