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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장악한 현대자동차의 품질경영을 배우다

박상복 지음 | 터닝포인트



세계를 장악한 현대자동차의 품질경영을 배우다

박상복 지음

터닝포인트 / 2018년 11월 / 252쪽 / 15,000원





품질의 첫 단추부터 다시 점검하다



한국의 자부심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또한 한국 자동차 산업의 거름이 될 테니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1977년,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에게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이다. 당시 스나이더 대사는 정주영 회장에게 자동차 독자개발의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이것은 나의 사명이다!”라는 말로 쐐기를 박으며 현대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표현했다.

조랑말의 출격: 1967년 설립한 현대자동차는 미국의 ‘빅3’ 자동차 제조회사 중 하나인 포드자동차와 기술계약을 맺고 포드의 모델을 조립 생산하며 자동차 제조와 관련된 노하우들을 익혀나갔다. 이후 경영적인 측면에서 의견이 충돌하자 포드와 결별하고, 1973년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 엔진 및 트랜스미션 부문의 기술제휴를 맺어 한국 최초의 독자 모델인 포니를 개발하게 된다. 비록 제품 디자인이나 주요 기술력은 외국에 의존한 상태였지만 메이커 자체의 고유 모델을 개발하고 생산한 것은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다. 포니는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는데, 세련된 디자인과 우수한 기술력을 인정받아 전 세계 자동차 전문지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이어 1976년부터는 국내 판매에 들어갔고, 첫해에 1만 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국내 시장에서의 호응에 자신감을 얻은 포니는 같은 해 에콰도르에 5대를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ㆍ중동 등 해외로 시장을 넓혀나갔다.

현대차는 1982년 ‘포니2’를 출시하고, 다음 해에는 캐나다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간다. 1985년에는 ‘포니2’가 캐나다 자동차 시장의 7%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독자 모델을 개발한 지 10년이 되던 1985년에 미국 현지법인(HMA; Hyundai Motor America)을 설립하고, 포니 엑셀(수출명 ‘엑셀’)을 개발해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시장에 진출한다. 저렴한 비용으로 괜찮은 승용차를 구입하려는 미국의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에게 엑셀의 가격이나 성능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당시 현대차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차’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미국 방송국에 텔레비전 광고까지 내보냈다. 이는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만을 기억하는 미국인들에겐 실로 놀라운 일이었고, 우리 교민들에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출시 첫해에 엑셀은 단일차종으로 17만 대의 판매를 달성하며, 《포춘》 지의 ‘Best Product Top 10’에 선정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또 이듬해에는 26만 대를 판매하는 등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3년 연속으로 수입소형차 부문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 진출 5년 만인 1991년에는 누적 판매 100만 대를 기록하며 미국 자동차 시장의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갔다. 현대차가 이뤄낸 이 놀라운 성과에 미국 메이커들뿐만 아니라 일본 메이커인 혼다와 도요타 역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차의 데뷔전은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거침없는 질주에 그만 엔진이 과열되고 만 것이다.

현대조크를 아시나요?: 미국시장 진출 초기에 엑셀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컸다지만 사실은 품질이나 디자인에 비해 가격이 매우 착하니 ‘이 정도면 됐어’라며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차의 착한 가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고객들이 현대차를 산 후 초기 2~3년이 지나면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변속기가 고장 났다. 심지어 주행 중에 차가 멈추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다. 문짝이 뒤틀어지고, 비가 새고, 페인트가 벗겨지는 등 불안하고 불편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현대차는 차가 고장이 나도 수리를 받을 곳이 제대로 없고, 간단한 부품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인들이 현대차를 두고 ‘일회용 자동차’라고 했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공중파 방송의 유명 토크쇼에서는 현대차를 단골메뉴로 올리며 조롱하기 시작했고 언론들은 ‘조만간 현대차는 미국에서 철수한다’고 전망하기까지 했다. 현대차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은 저조한 판매로 이어졌다. 급기야는 미국에서 현대차를 몰아내자는 여론까지 형성됐다. 미국 진출과 동시에 박수세례를 받으며 천국을 맛봤던 현대차로서는 이보다 더한 지옥이 없었다.

저품질, 악순환의 늪에서 현대차를 구하라

1990년대, 미국시장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저품질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만 현대차는 도망치지 않았다. 현대차의 수장인 정몽구 회장은 결코 미국시장 장악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1999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며 규모를 키웠고, 2000년에는 ‘고객중심의 품질경영으로의 전환’을 선포하며 내실을 다져나갔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탑 메이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품질혁신이 필수임을 깨닫고 전사를 한 방향으로 이끌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지난 2015년 퇴임한 신종운 부회장이다. 정몽구 회장은 품질에 대한 신종운 부회장의 철학과 전략을 전적으로 믿고 지원했다. 신종운 부회장은 ‘품질의 저승사자’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차 품질확보를 위해서라면 티끌만 한 결함도 용납하지 않았다.

1978년에 현대차에 입사한 신종운 부회장은 입사 초기에 서울 본사의 해외영업본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3년여가 지난 뒤 그는 울산 공장의 해외정비 기술교육과로 자원해서 내려갔고 그곳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비교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혁신, 교육부터 시작한다: 현대차가 해외시장에 진출했던 초기에는 제품은 물론이고 정비망, 정비기술 등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흡했다. 잦은 고장과 불량도 문제였지만 그것을 정비할 정비센터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기껏 찾아간 정비센터에서 정비기술까지 허술하다고 느껴지면 소비자의 불만은 극에 달한다. 신 부회장은 해외 정비기술의 품질을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육을 해야 합니다.” 신 부회장이 사원이었을 때 세계 전역의 현대차 대리점과 딜러, 서비스 매니저 그리고 정비사들을 대상으로 정비기술 및 마인드 교육을 할 것을 제안했다. 말단사원의 느닷없는 제안에 상사가 발끈했지만 어렵사리 상사를 설득해 모든 것을 신 부회장 자신이 맡아서 추진해나갔다.

품질이 떨어지는 차를 팔았으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은 최고 품질의 차를 만들지 못하지만 고장 난 차를 다시 잘 달릴 수 있도록 고쳐줄 수는 있었다. 어렵다고 한숨만 내쉬기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야 했고, 신 부회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것을 해나갔다. 좌충우돌의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신 부회장이 주최한 정비교육은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전장의 중심에서 조용한 혁신을 준비하다

야심 차게 진출한 미국시장에서의 혹평은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제품 자체의 품질을 개선시키려면 그만한 기술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장은 메이커가 기술을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현대차는 능력 있는 엔지니어 직원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신종운 부회장 역시 1991년에 미국 현지법인으로 발령이 났다. 신 부회장은 일개 차장, 그것도 제품 개발이나 생산이 아닌 정비 관리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고장 난 차를 팔았으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못난 내 자식, 일단 책임부터 진다: “그래, 우선은 고장 난 차들을 쉽게 고쳐줄 수 있는 장비부터 개발해야겠어.” 미국 주재 근무를 시작한 신종운 부회장은 제일 먼저 진단장비의 개발부터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진 자동차 메이커들도 해내지 못한 새로운 진단장비 ‘HDS(Hyundai Diagnostic System)’를 개발해냈다. HDS는 미국의 자동차 진단장비분야에서 해마다 1등을 차지했고 글로벌 탑 메이커들이 HDS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현대차 미국 판매법인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미국 주재 기간 동안 신 부회장은 중역급의 정비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다방면에서 해외 정비의 품질개선을 꾀했다. 신 부회장은 항공대를 다니며 이미 항공기의 블랙박스에 대해 접해보았던 터라 HDS를 활용해 세계 최초로 차량용 블랙박스도 어렵지 않게 개발해냈다. 블랙박스의 개발로 이제 더 정확하고 신속한 차량 정비가 가능하게 되었고 차량의 상태를 원격으로도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시만 해도 아주 획기적인 시도였다. 물론 ‘현대차는 나쁜 차’라는 시장의 이미지를 지우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었지만 이처럼 최선을 다한 현대차의 노력에 고객들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니들이 현대차를 타봤어?: “중고차 값이 똥값인데 누가 우리 현대차를 사려고 하겠어요?” 차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중고차 가격이다. 1990년대 초 미국시장에서 현대차의 판매가 바닥을 헤맸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낮은 중고차 가격이었다. 품질이 낮다는 인식 때문에 현대차의 중고차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도 적었지만 그 가격도 아주 형편없었다. 말 그대로 똥값을 받고 팔아야 할 상황이니 누가 신차를 구입하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중고차 값을 올려야죠!” 신 부회장은 미국의 중고차 잔존가치 평가사인 ALG(Automotive Lease Guide)를 찾아가 현대차의 중고차 값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신 부회장은 깨끗하게 세차하고 정비한 빨간 엑셀을 타고 ALG로 찾아갔다. ALG는 예상대로 무관심과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당신들이 우리 현대차를 타봤나요?” “아니요. 안 타봤습니다.” “직접 타보지도 않고 어떻게 중고차 가치를 매깁니까!” 신 부회장은 차를 두고 갈 테니 6개월이든 1년이든 타보고 난 후 현대차의 중고차 가치를 다시 평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신 부회장이 억울해하며 열변을 토해도 ALG 관계자는 끝까지 무반응이었다. ‘당신네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현대차를 나쁘게 평가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신 부회장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후 신 부회장은 중고차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중고차인증제도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중고차를 사러 온 고객의 입장에선 자신이 사려는 차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중고차 딜러의 말만 믿고 샀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미국에 진출한 경쟁사들은 이미 중고차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중고차가 들어오면 메이커가 자동차를 모두 정비를 하고, 도색은 물론 청소까지 말끔히 한다. 이렇게 완벽한 정비와 점검이 끝난 후 차량은 중고차 시장에 나가게 된다. 이때, 1년, 5년, 10년 등 각 기간에 따른 자동차 메이커의 품질보증서를 패키지로 묶어서 팔면 새로운 수익창출도 가능하다. 신 부회장은 서둘러 중고차인증제 프로그램을 추진해나갔다. 예상했던 대로 성과가 좋았다. 물론 한순간에 현대차를 ‘품질 좋은 착한 차’로 바꿔놓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언젠가는 현대차가 글로벌 탑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신 부회장은 조롱과 혼란의 중심에서 조용한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타협은 없다, 오직 품질이다



품질이 아니다, 제품이다

2003년 미쉘린 메이나드가 쓴 『디트로이트의 종말』에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3’로 불리는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몰락이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2009년 3월부터 크라이슬러와 GM이 차례로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빅3의 몰락은 미국 제일의 자동차 생산도시였던 디트로이트의 종말을 가져왔다. 메이나드는 미국 빅3의 몰락 원인을 ‘품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애국심으로 자국 메이커의 차를 샀던 미국 소비자들 덕분에 1980년대에는 큰 성공을 맛봤다. 1등의 영광을 맛봤던 그들은 자만심에 빠져 고객의 니즈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시장의 변화조차 읽지 못했다. 이렇듯 품질을 소홀히 여긴 빅3의 몰락은 세계 모든 자동차 메이커들에게, 품질을 등한시하고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강력한 경고가 됐다.

품질, 관리가 아닌 경영이다: 미국 주재시절, 현대차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을 현장에서 만나게 된 신 부회장은 자신이 지금껏 생각했던 품질의 개념과 미국의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품질의 개념에 큰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이전까지의 품질은 제품의 기능적인 면에만 제한돼 있었다. 그런데 미국시장에서는 제품 품질 외에도 디자인 품질, 성능 품질, IT 품질, 심지어 소비자가 느끼는 감성의 영역까지도 품질이라 정의했다. 결국 신 부회장은 품질관리가 아닌 품질경영만이 제품의 완성이고,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비라는 자신의 영역에서부터 이러한 깨달음을 적용시켜 나갔다.

2002년 신 부회장은 품질총괄본부의 경영실장으로 발탁돼 본격적으로 품질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그동안 계획해 왔던 품질경영에 대해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한다. 기존의 개발자 중심, 생산자 중심의 품질에서 벗어나 시장 중심, 고객 중심의 품질경영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리고 현대기아차 고유의 전사적 품질경영시스템인 GQMS(Global Quality Management System)를 개발한다.

숨을 곳이 없다, 모두 오픈하라: GQMS는 한마디로 제품의 품질문제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임직원 모두가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GQMS를 통해 품질문제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추적 관리되기 때문에 품질문제가 발생하면 관련 부서 및 협력사들이 신속하게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그 과정 및 결과를 모든 임직원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다. 덕분에 네 책임이니, 내 책임이니 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던 고약한 태도들이 사라지고 보다 정확하고 스피디한 품질개선이 가능해졌다. 정몽구 회장은 자신의 경영철학인 투명경영, ‘품질경영’을 제대로 녹여낸 GQMS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 이사의 직급이었던 신 부회장이 시스템 개발을 위해 전사적 협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정몽구 회장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던 덕분이다.

티끌 하나도 그냥 내보내지 않는다

2002년, ‘5년 뒤 도요타를 따라잡는다’는 발칙한 선언을 했을 때부터 현대기아차는 무결점 자동차의 생산을 목표로 했다. 나사 하나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글로벌 시장에 재도전한 것이다. 무결점의 차를 만들기 위해 현대차는 시각부터 달리하기로 했다. 과거 현대차는 품질문제가 발생하면 부랴부랴 개선을 하며 품질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런 사후품질개선의 접근방식은 아무리 빨라도 결국 늦다. 제품이 시장에 나가기 이전에 모든 결함을 잡아낸다면 비용도 절감되고 고객의 만족감도 커진다. 현대차는 사후품질이 아닌 선행품질로 시각을 전환하고 양산 전에 모든 결함을 잡아낸다는 각오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우리에겐 하이비스가 있다: “결함을 가진 차는 단 한 대도 공장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생산자 입장에선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람인 이상 실수도 하기 마련이니 100%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서의 실수와 오류를 잡아내고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계이다. “사람이 못하면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지요.” 신 부회장은 미국 주재시절부터 HDS와 차량용 블랙박스를 개발하는 등 품질의 확보를 위해 기계를 적극 활용했다. 귀국 후에는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등에서 근무하며 현장 작업자들의 숙련도와 완성도를 높여줄 장치 역시 기계를 통한 보완임을 절감했다. 즉, 사람과 기계가 힘을 합친다면 제품의 품질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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