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경영
창융파, 우진쉰 지음 | 오씨이오(OCEO)
이타경영
창융파, 우쥔쉰 지음
오씨이오(OCEO) / 2018년 11월 / 202쪽 / 13,000원
마주해야 이길 수 있다 - 선장이 꿈이었던 소년 항해사
열여덟, 처음 배에 오르다: 1944년 초, 18살이던 나는 키슈마루 호에 견습생 신분으로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나는 ‘남일본기선 주식회사’의 선박부 사무원이었는데, 회사 규정상 모든 사무원은 반드시 배에 올라 일정 기간 근무를 해야 했다. 처음 배를 타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지룽에서 출발해 다음 날 가오슝에 도착해 하루 정박한 후, 하이난다오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배에 오르자 일본인 와타베 사무장은 내게 가오슝에 도착하기 전까지 ‘적하목록’을 18부 만들라고 했다. 당시는 복사기가 없던 때라 먹지를 놓고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한 번에 완성할 수 있는 양은 힘껏 눌러 써도 3~4장 정도였다. 총 18부를 만들어야 하니 최소 네 번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룽에서 출발하자마자 갑자기 풍랑이 거세졌다. 심한 뱃멀미로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구토가 계속되면서 나중에는 제대로 앉아 있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하룻밤 헛고생의 교훈: 계속 토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떤 때는 입도 미처 틀어막지 못해서 쓰고 있던 적하목록 위에 토사물을 다 쏟아내기도 했다. 그래도 와타베 사무장이 가끔씩 내 방에 들러 “급하게 할 필요 없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라고 말해 주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괴로워도 반드시 맡은 임무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수건 한 장을 머리에 둘러 세게 묶고는 모든 에너지를 끌어 올려 그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적하목록 18부 정도는 보통 2시간이면 작성할 수 있다. 하지만 심한 뱃멀미에 시달려가며 간신히 완성한 후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새 동이 터 있었다. 잠시 후, 배가 가오슝 항에 도착했다. 헌병, 이민국, 세관, 해상경찰이 화물을 검사하기 위해 우리 배에 올랐고 와타베 사무장은 내가 만든 적하목록 4부를 제출했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에 쓰는 건가 싶어 사무장에게 물었다. “사무장님, 나머지 14부는 어디에 제출할까요?” “남은 건 그냥 태워버리게!” 사무장의 대답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잠시 멍하다가 불쑥 화가 치솟았다. 몸을 휙 돌린 채 속으로 온갖 욕을 웅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사무장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래, 기분이 엉망이지? 필요도 없는 적하목록을 뭐 하러 여러 부 만들었나 싶겠지.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야.” “저를 위해서요?” “그렇게 일에 집중해야 뱃멀미를 견딜 수 있고 앞으로 배 생활도 쉬워지거든. 괴로운 하룻밤을 지냈으니 앞으로는 훨씬 나을 걸세. 그러니 이제 그만 화 풀어. 다 자네 잘되라고 그런 거라니까!” 그 말은 정말이었다. 이후 가오슝에서 하이난다오로 가는 기나긴 여정 중에 나는 크게 뱃멀미를 하지 않았다. 다음 몇 주 동안 나는 하루하루 바다 위 생활에 적응했다. 이후 나는 1년 정도 더 배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며 와타베 사무장을 롤 모델 삼아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사업이란 끝없는 ‘돌파’다 - 중고선 한 척으로 에버그린 해운을 키워내다
해운동맹과의 전면승부: 나는 18살에 처음 배에 올랐고, 후에 선장이 되었으며, 35살에는 지인과 함께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42살에는 혼자 힘으로 에버그린 해운을 세웠으며 그 후로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나의 사업은 언제나 의심과 굴욕, 조롱 속에서 성장했다. 1968년에 에버그린 해운을 설립했을 때, 근해 해운업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다시 말해 원양 해운만이 살 길이었다. 다음 해, 우리는 중고선 한 척을 구입해서 극동과 중동을 잇는 정기 노선을 개설할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노선은 이 지역 해운동맹이 이미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일본, 유럽의 대형 해운업체들이 참여한 이들 동맹은 외부업체가 비집고 들어오려는 기미만 보여도 똘똘 뭉쳐 철저하게 봉쇄했다. 당시는 대만 경제가 구조 전환을 거쳐 무역을 크게 확대, 전개할 때였다. 그런데 해운동맹 소속 업체들은 일본에서 먼저 화물을 채우고 공간이 남으면 대만 화물을 실어주는 방식으로만 운영했다. 게다가 운임도 비싼 편이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만약 해운동맹의 횡포에 겁먹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떼지 못한다면 영원히 근해에서만 맴돌아야 할 터였고, 그래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 와중에 회사 내에서도 여러 문제가 불거졌다. 운영 중인 배 3척이 돌아가며 고장 나거나 충돌, 화재 사고를 겪는 등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나와 직원 40명은 이를 악물고 일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금 유동 문제도 만만치 않아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부에서는 가격 할인을 무기로 매섭게 공격을 해왔다. 해운동맹과 힘든 싸움을 계속하며 상처가 심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통증을 참고 버티면서 더 좋은 서비스와 합리적인 운임을 고수하는 것만이 수였다.
그렇게 우리는 험난한 전쟁터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버텼고, 마침내 죽기 살기로 해운동맹의 봉쇄를 뚫고 극동-중동 노선을 간신히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향후 회사가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직항 서비스와 합리적인 운임을 내세우며 극동-중남미 노선(카리브 해 지역)을 추가로 개척했다. 원양 항로 두 개를 연달아 확보하여 난공불락이라는 해운동맹의 봉쇄를 돌파한 것이다. 이렇게 밤낮으로 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 해운업계의 동향과 발전 방향을 늘 염두에 두었는데, 어느새 새로운 파도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바로 ‘컨테이너화’였다.
컨테이너화에 사활을 걸다: 197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 무렵 ‘컨테이너화’라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직감했다. 당시 우리는 원양 항로 개척으로 세계 해운업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상태였다. 업계 선두 자리를 노리는 두 번째 돌파구로서 우리는 즉각 컨테이너화에 착수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일본 종합상사 마루베니에 투자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외부 투자를 담당하는 사토 부장은 만날 때마다 거만한 태도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믿습니까? 이런 사업을 감당할 능력은 있어요? 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다행히 선박부 호사카 부장이 관심을 보이며 호의적으로 나왔다. 그는 창융파를 한번 밀어줘보자고 임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마루베니 상사는 에버그린에 투자를 결정했다. 에버그린은 다른 이들보다 늘 앞서 걸었기 때문에 거울로 삼을 만한 대상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 힘으로 ‘전면 컨테이너화’라는 대대적인 전환을 이뤄내야 했다. 에버그린은 우선 600TEU급 S형 풀컨테이너선 4척을 건조해 극동-미 동안 정기 컨테이너 노선을 개설했다. 그리고 1975년 7월 17일, 에버그린의 풀컨테이너선 에버스프링 호가 첫 출항하면서 대만 해운 역사상 최초로 컨테이너 해운이 시작되었다.
100년의 카르텔을 깨고 유럽 노선을 열다: 어느새 에버그린의 배는 미국, 중남미, 중동, 지중해 등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되었다. 이제 세 번째 돌파구를 찾을 때였다. 바로 극동-유럽 노선이었다. 이 노선을 장악한 해운동맹은 FEFC로, 1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탄탄한 동맹이었다. FEFC는 운임이 비싼 데다가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화주들의 원성을 샀다. 하지만 화주 입장에서는 물류가 확보되어야 사업을 할 수 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FEFC는 일본에 특히 호의적이어서 대만 화주는 일본 화주가 선택하고 남은 공간을 어떻게든 주워서 써야 했다. 나는 여기에서 에버그린의 기회를 엿보았다.
FEFC에 속하지 않은 업체가 노선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약 세 달가량 온갖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 세 달을 버티면 성공이고, 그 안에 무너지면 끝이었다. 실제로 이 기간에 FEFC 쪽 사람이 와서 생각을 접으라고 경고한 일도 있었다. 또 에버그린 선박이 15일에 출발하면 그들은 앞뒤 날짜인 14일과 16일에 배를 띄웠고, 에버그린의 운임이 200이라면 그들은 100으로 낮추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적이 강하게 나올수록 더 힘껏 일어서는 기질이었다. 유럽 노선을 두고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초강수를 두었다. 1,200TEU급 V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직접 직원들을 이끌고 유럽으로 날아갔고, 거의 2개월 동안 현지 상황을 샅샅이 살폈다. 또 각지의 화주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에버그린의 도전을 반기면서도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말했다. “제 인격과 에버그린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저는 절대 물러서지 않습니다. 지금 운영 중인 미국, 중동, 중남미 노선도 전부 필사의 각오로 얻어낸 성과입니다.” 그러자 오랫동안 FEFC의 기세에 눌려 눈치만 보던 화주들은 나를 응원하며 구체적인 방법에도 동의했다. 화주들의 지지를 얻은 후부터 FEFC의 경고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그동안 FEFC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대만 화주들은 에버그린의 등장을 크게 반기며 마음 편히 운송을 맡겼다. 덕분에 우리는 1,200TEU급 V형 컨테이너선을 가뿐히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1979년 마침내 극동-유럽 정기 노선을 개설하면서 에버그린은 100여 년간 이어온 FEFC의 카르텔을 깨뜨린 최초의 기업이 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점으로 작용했다. 에버그린은 기세를 몰아 일본 해운 시장까지 점령했고 대서양 노선을 여는 데 성공했다.
‘미쉐린의 날개’가 되다: 유럽 노선을 개설할 때는 대만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화주까지 모두들 두 팔 벌려 우리를 반겼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유럽에서 다시 아시아로 돌아올 때는 갈 때만큼 화물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회사가 있었는데, 바로 미쉐린이었다. 유명 타이어 생산기업인 미쉐린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사업을 펼쳐보려고 구체적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하지만 물류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타이어가 다른 화물에 비해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무거운 탓에 FEFC 소속 업체들이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충성 고객이 되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확실한 밸러스트(ballast)를 확보하고 나니 FEFC도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미쉐린의 해운업체’라는 이름으로 더욱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5대양 전체를 누비다: 1984년은 에버그린이 네 번째 또 하나의 돌파구를 열고 한 단계 성장을 이룬 해다. ‘동서 양방향으로 왕복하는 세계일주 노선’이라는 목표를 위해 우리는 G형 풀컨테이너선 24대를 건조했다. 물론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고, 그 결과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다. 컨테이너화를 결심하고 단 10년 만인 1985년에 에버그린은 세계 최초로 5대양 전체에서 배를 운행하는 해운업체로 부상했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조건이나 환경이 일시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감정을 흔들 수는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다. 나아갈 길에 확신을 가진 사람은 흔들림 없이 자신을 다스리며 현실을 묵묵히 바꿔나간다. 에버그린이 업계의 의심과 조롱 속에서도 끊임없이 돌파를 시도하고 성공한 데는 조금의 요행도 작용하지 않았다. 강철 같은 의지, 그치지 않는 땀으로 오롯이 맞바꾼 결과다.
모두의 이익은 혼자만의 이익보다 강력하다 - ‘이타 경영’의 원칙을 확립하다
‘너 죽고 나 사는’ 사업이란 없다: 나는 사업에서 쌍방의 이윤을 두루 살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업은 우세한 한쪽이 전부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세계가 아니다. 반드시 각자의 목적을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기억하라. 사업은 이기(利己)가 아니라 이타(利他)다!
에버그린은 1970년대에 컨테이너 부서를 설립했지만 대형 컨테이너를 제작할 돈도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유명했던 글로벌 컨테이너 회사와 합작을 추진했다. 협상은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다. 시간만 끌다가 일이 틀어질 판이었다. 나는 에버그린의 협상팀장과 문제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격을 약간 조정했다. 그리고 팀장과 함께 협상장으로 들어가서 담담한 목소리로 상대측에 말했다. “이 사업으로 여러분이 얼마만큼 벌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나는 파트너의 주머니에 손을 넣을 사람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이 숫자(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제대로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양측은 즉각 계약서에 서명하고 합작을 추진했다. 사업 협상에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래처가 성공해야 내가 성장한다: 1970년대에 중동 무역이 시작되었다. 지역 해운동맹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대만 화주들은 우리가 카르텔을 깨고 정기 노선을 개설하자 크게 환영하며 화물을 맡겼다. 물론 초기에는 이윤이 거의 없는 시멘트, 철근, 건축자재 등의 저가 일반 화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운업 자체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중동 무역상에게 대만 화주들의 물건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서 중동 무역이 활성화되도록 힘을 보탰다. 중동 무역상이 대만에 물건을 사러 오면 관심을 보일만한 제조업체의 리스트를 제공하고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다퉁전자기계의 경우, 아예 우리가 영업사원으로 나서서 중동 측 주문서를 가져다주고 그 화물을 수송했다. 이후 대만의 중동 무역은 점점 크고 폭넓게 발전했으며 우리도 새로운 배를 투입해서 그 성장을 뒷받침했다. 에버그린이 사업을 방해하는 각종 장애물을 알아서 치워주니 대만 화주들은 물류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사업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충분한 공간과 합리적인 가격, 앞서가는 서비스를 철칙으로 화주들과 상부상조하며 동반 성장의 길을 걸었다.
‘블루 오션’은 디테일에서 태어난다 - 대만 최초의 민간 항공기 ‘에바 항공’을 설립하다
에바 항공, 이륙 준비를 완료하다: 1989년, 마침내 대만 하늘이 민간 기업에도 개방되었다. 우리 그룹은 즉각 바다에 이어 하늘에서도 사업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에바 항공 설립을 준비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었다. 남들은 슬슬 은퇴 후 삶을 준비할 시기였다. 하지만 나는 밤낮으로 항공 분야 서적을 읽고 복잡한 항공업을 연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36억 달러를 들여 미국 보잉사와 맥도넬더글라스에 비행기 스물여섯 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곳을 수차례 방문해 직접 작업복을 착용하고 공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행기 제작의 실무를 확인, 또 확인했다. 또 GE를 방문해서 비행기 엔진 설계 및 제조에 관해서도 배웠다. 내가 그렇게까지 한 것은 중대한 사업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성격 탓도 있었다. 나는 뭘 하든 철저하게 직접 배우고, 숙련될 때까지 익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비행기를 제작하는 도중에도 좌석 배열, 실내 인테리어 등을 놓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시트커버 원단을 발견하면 당장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비행기가 최종 완성되어 납품되기 전까지 수도 없는 수정, 개선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바 항공은 이륙 준비를 완료했다.
줄자 들고 다니는 회장님: 나는 유독 ‘디테일’에 집착한다. 지금도 사무실의 채광, 방향, 동선, 책상 배치 하나까지 전부 꼼꼼히 살핀다. 그룹 내 각 계열사를 둘러볼 때면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내들고 책상 사이의 거리, 창문까지의 거리를 재고 확인한다. 그런데 디테일을 중시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까다롭다는 소리마저 듣는 이 성격은 아마도 젊은 시절에 굳어진 것 같다. 에버그린 해운을 설립하기 전에 지인과 손잡고 연 해운회사에서 나는 일본 중고선 구입과 선박 관리를 책임졌는데, 최대한 상태가 양호한 중고선을 구하기 위해 작업복을 입고 분주히 뛰어다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