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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배우는 경영 전략

석산 지음 | 북카라반
고구려에서 배우는 경영 전략

석산 지음

북카라반 / 2018년 7월 / 304쪽 / 14,000원



고구려인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상상의 공동체 형성하기

꿈은 단기적인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인 목적이다. 개인의 목적이 개인이 평생 추구해야 할 신념이라면 조직의 목적은 조직이 존재하는 한 추구해야 할 가치다. 조직의 꿈인 비가시적인 목적이 가시적인 목표를 움직여야 조직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 주몽 이후 고구려가 창건 목적을 잊지 않을 때는 어떤 강적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망각한 왕이 들어설 때는 나라가 퇴보했다. 이를 미리 내다본 고구려 건국 세력이 세팅해둔 상징이 주몽신화와 삼족오였다. 이 두 가지가 고구려의 존립 목적인 다물 정신을 꾸준히 상기시키고 고취시켰다. 다물 정신이란 옛 조선의 땅과 정신을 다 물려받는 나라가 되겠다는 각오라 할 수 있다. 먼저 주몽신화를 살펴보자.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아리수(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아리따운 아가씨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인연을 맺는다. 그녀는 강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였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화백이 크게 노해 유화를 쫓아낸다. 정처 없이 헤매던 유화를 동부여의 금와왕이 발견하고 궁중으로 데려간다. 그 뒤 유화가 큰 알을 낳자 불길하다며 알을 버렸는데 태양이 언제나 알을 비추어주었고 공중의 새와 들짐승들까지도 정성스럽게 알을 지켜주었다. 금와왕이 알을 깨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자 유화에게 돌려준다. 유화가 알을 따뜻하게 품어주자 주몽이 태어났다. 7세쯤 주몽이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화살 하나로 꿰뚫었다. 동부여 백성들은 주몽을 존경하기 시작했고 금와왕의 아들들은 시기하기 시작했다. 주몽이 20세가 되자 어머니 유화가 불렀다. “왕자들이 너를 해칠 궁리를 하고 있으니 이곳을 떠나 큰일을 도모하라.” 이른 새벽 주몽이 도망친 것을 안 왕자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다. 엄사수 앞에 이르러 주몽이 외쳤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다.” 그러자 무수한 물고기와 자라 떼들이 올라와 강물 위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주몽은 무사히 강을 건너 고구려를 건국한다.

이 신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일자(日子) 고주몽’이다. 고조선이 해체되면서 해모수가 부여(북부여)를 세웠고, 여기서 나온 무리를 중심으로 금와가 동부여를 세웠다. 그 해모수의 아들이 주몽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해 있다. 바로 고조선은 태양의 나라이고 이를 계승한 사람이 주몽이며, 그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주몽신화는 700년 고구려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호출되었다. 주몽 사후 400년이 지난 광개토대왕비에도 주몽신화가 각인되어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신화적 상징인 삼족오 역시 주몽신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주몽을 탄생시킨 태양 안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 이 삼족오신화는 동이족이 고조선에 전래했다. 태양에 아른거리는 흑점을 세 발 달린 까마귀로 본 것이다.

주몽 등 고구려 설계자들은 고구려의 꿈을 상기시켜준 상징으로 주몽신화와 삼족오신화를 설정해놓았다. 조직의 역동적인 힘은 물리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그들을 하나 되게 묶어주는 관념과 어떤 이미지, 즉 특유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조직이 곧 ‘상상의 공동체’다. 조직의 역동적인 롱런 여부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고구려는 룰메이커였다



창조적 파괴

미리 정해진 틀을 따라가는 것이 룰테이커(rule taker)다. 이들은 결코 크리에이터가 될 수 없다. 룰메이커(rule maker)가 되어야만 기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물론 많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이를 무릅쓸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고구려의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는 중원과 북방, 그리고 한반도의 교차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숙명적으로 다양한 유목민족들과 교섭해야 했다. 그래서 고구려는 백제, 신라, 일본과 중국, 돌궐 말갈 등 북방민족들과 다각도로 관계를 맺으며 서진정책과 남진정책을 번갈아 전개했다. 주몽 때부터 고구려는 주변과는 다른 룰을 세우며 성장해나갔다. 고구려는 일단, 주변 국가들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중국의 정책을 거부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원 중심의 국제질서를 여러 차례 고구려 중심으로 변경시켰다. 당시 동북아 질서의 주요 변수는 중국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선비, 거란, 돌궐, 유연, 말갈 등 북방민족들의 관계였다. 특히 광개토대왕 때처럼 고구려가 북방민족을 주도할 때 중원은 국제정치에서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전락했다. 북방민족도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했지만 고구려는 화전양면작전으로 이들을 관리했다. 북방 민족들이 약할 때는 고구려와 수ㆍ당 간의 전쟁 때처럼 고구려의 용병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은 강해지면 중원 진출을 시도했고 그 전에 반드시 고구려와 제휴해야만 했다.

일찍이 동북아 정세는 고구려-북중국-신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남중국-왜가 동맹을 맺은 동서 대립 구도였다. 그러다가 6세기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신라와 동서로 연결하며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수나라가 패배해 중국 대륙은 일대 혼란에 빠졌고 수나라는 멸망했다. 이처럼 고구려가 왕성할 때 중원은 힘을 잃었고 고구려가 약해질 때만 중원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정리되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자체적인 룰메이커로 중국과 꾸준히 대결했다. 고구려는 룰메이커로서 전형적인 기업가 정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다



고구려와 중국의 천하관 충돌

천하를 어떻게 보느냐가 천하관이다. 일종의 세계관이지만, 천부적 소명감 같은 것까지 내포되어 있어서 세계관보다 훨씬 근원적이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고구려 왕의 존재 의미에서 비롯된다. 개국 시조 주몽은 태양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도 태양의 후예가 된다. 그래서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도 고구려의 천하관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은택흡우황천 위무불피사해 恩澤洽于皇天 威武拂被四海

(은택이 황천에 골고루 미치고, 위엄은 사해에 떨치셨다.)



황천은 하늘이고 사해는 온 세상이다. 광개토대왕의 위무가 온 세상과 하늘까지 두루 도달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왕이 곧 천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고구려와 인접해 용호상박의 다툼을 벌이던 중국도 이와 대응한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로부터 자국 황제를 주몽처럼 하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라 칭했다. 이런 중국의 천하관을 한 무제 때 동중서가 중화주의로 정립한다.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중에서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것이다. 중원을 중심으로 놓고 변방을 주변으로 수렴하는 차별적 구도를 설정하고, 변방의 이민족에게 한나라 중심으로 군신의 예의를 다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이 때문에 고구려와 한나라는 물과 기름처럼 상극이 되어야만 했다. 한나라는 결국 고구려를 꺾지 못한 후유증 속에 멸망했다. 그 후 400년 정도 남북조시대의 혼란이 지속되는데 수나라가 중국 역사상 세 번째로 통일을 이룬다. 이 시기의 고구려 왕이 26대 영양왕(재위 590~618)이다. 중원을 정리한 수 문제가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돌궐과 고구려를 주목했다. 우선 고구려의 지형과 내부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 사신을 수차례 보냈다. 영양왕도 사신을 보내 수나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말갈족, 거란족과 연대를 강화했고 수나라에 위협적이던 돌궐과도 좋은 관계를 모색했다. 그런 가운데 수나라도 말갈과 거란을 포섭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영양왕이 598년 말갈 기병 1만 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요서를 선제공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수나라 문제가 길길이 날뛰며 30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했다. 하지만 마침 장마가 시작된 데다가 보급선마저 고구려군에게 차단당했다. 게다가 수나라 수군까지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의 탁월한 전략에 말려들어 상당수가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 1차 고ㆍ수 전쟁 후 중국이 고구려를 두려워해서 교역을 재개하는 등 양국 사이에 십 수 년간 소강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나 문제 이후 양제가 즉위하며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며 대제국을 이루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의 첫 목표는 당연히 고구려 정벌이었다. 결국 2차 고ㆍ수 전쟁이 터졌지만 을지문덕에게 대패하고 만다. 다시 전열을 정비해 3차 고ㆍ수 전쟁을 벌였지만 요동성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후에도 네 번째로 고구려를 공격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내분 상태에 접어든 자국 사정 등으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수 양제는 618년 피살되었다. 이를 지켜보며 고구려를 재건하는 데 동분서주하던 영양왕도 같은 해 9월 승하했다.

기존의 패권국가는 신흥강대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간주해 전쟁이 일어나곤 한다. 우리 고대사에서도 먼저 동북아 패권을 차지한 고조선에 한나라가 도전했고, 당시 한나라에 고구려가 도전했다. 특히 정복 전쟁이 주요 사업인 고대국가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두 나라가 양립하기는 불가능했다.

두 왕의 상반된 비전

한 시대의 숙적이었던 수 양제와 고구려 영양왕이 똑같은 천하관을 품고 같은 해에 죽었다. 그 후 고구려와 중국은 어떤 관계로 나아갔을까?

수나라를 정복한 당나라는 중화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이에 비해 영양왕을 승계한 27대 영류왕의 천하관은 흔들리고 만다. 리더의 천하관이 다르면 대외 대응 전략도 다르게 나타난다. 영양왕과 영류왕이 중국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수나라로부터 위협을 감지한 영양왕은 전쟁에 대비해 말갈족, 거란족, 돌궐족과 안정적 관계를 모색했다. 서북의 북제가 모체인 수나라가 고구려와 인접한 동북의 북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북제의 유민들은 수나라에 악감정이 있었다.

영양왕은 이를 십분 활용해 고도의 첩보 전략을 수행했다. 그러자 수나라도 고구려를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어 수시로 사신을 보내 정탐을 시도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수나라 사신들을 한적한 곳에 머물게 하고 감시자를 세워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치열한 첩보전을 통해 수나라가 최신 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빼내기 위해 태자를 수나라의 태부까지 밀파해 기술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말갈 기병을 거느리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해 수나라의 말갈포섭정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역사서를 편찬하게 해서 고구려인들에게 국가의 천하관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에 비해 당나라와 맞서야 했던 영류왕은 전혀 다른 대응을 한다. 고구려에 패전한 후유증에 헤매던 수나라는 당나라를 세운 이연, 이세민 부자에게 멸망했다. 당이 건립되던 해에 영류왕도 즉위했다. 당 고조가 즉위한 이듬해 사신을 보내고, 그 후 매년 사신과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를 다독였다. 당나라에서 고ㆍ수 전쟁의 포로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자 1만 명을 송환했다. 또한 젊은이들을 당나라 문화를 배우라며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등극했고 돌궐의 국왕까지 사로잡았다. 당 태종을 크게 의식한 영류왕은 당 태종의 집권을 축하한다며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까지 바쳤다.

최고 군사기밀인 지형도를 당나라에 내주었다는 것은 영류왕이 고구려의 천하관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앞으로 당나라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고ㆍ수 전쟁의 승전 기념물인 경관(수나라 전사자의 뼈로 만든 탑)마저 허물었다. 꾸준히 저자세로 나오는 영류왕을 바라보는 당 태종은 고구려 왕이 저 정도라면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 보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고구려는 원래 한사군의 영토가 아니더냐. 내가 군사를 내어 요동을 친다면 반드시 국력을 기울여 반발할 것이다. 그때 산동반도에서 수군을 동원해 바다 건너 평양으로 가면 된다.”

영류왕은 당 태종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는 고구려의 저자세에 만족할 수 없었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해야만 했다. 이런 정황을 지켜보던 고구려의 강경파들이 반발한 것이 ‘연개소문의 정변’이다.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하는 영류왕을 제거하고 고구려의 근본인 천하관을 유지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영류왕 시대는 리더의 비전이 조직의 정체성과 다를 때 조직이 겪는 혼돈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리더는 항시 우리 조직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 바람직한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리더와 구성원이 서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곧 조직 발전의 기초인 것이다.

당 태종, “두 번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지 마라”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88일 만의 승리

중원에 당나라가 들어선 618년 9월에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죽고 그의 이복동생 건무가 27대 영류왕으로 즉위하면서 선왕과는 달리 북수남진(北守南進)정책을 편다. 이때 을지문덕이 북진남수(北進南守)를 주장하다가 파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국 강경파인 연개소문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가 되어 중앙 정치무대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얼마 후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집권자가 되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북진남수정책으로의 회귀를 뜻했다. 이를 빌미로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당 태종은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투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로만 편성했다. 육군 6만 명과 해군 4만 3,000명, 전함 500척으로 편성하고 육군 총사령관에 이세적을, 해군 총사령관에 장량을 임명했다. 각 부대에 고구려의 성을 공략할 최신 무기 발차도 구비했다. 과연 수나라 군대보다 응집력이 강한 당나라 병사들은 초반부터 고구려 여러 성을 차례로 함락했다. 그렇게 승기를 잡으며 드디어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간판격인 요동성에 도착했다. 수나라 100만 대군이 저지당했던 요동성을 바라보며 당 태종은 직접 흙가마니를 나르고 성 아래 물을 채워놓은 참호를 병사들과 함께 메웠다. 당나라군이 발차를 동원해 거대한 돌을 쏘아 성의 한쪽 벽을 무너뜨리면 고구려 병사들이 다시 성을 쌓아올렸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데 12일째 마침 요동성 쪽으로 강풍이 불자 태종이 화공을 명령해 요동성을 태웠다. 그 여세를 몰아 백암성으로 향했는데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했다. 당나라의 기세 앞에 다른 성들도 차례차례 무너져가는 가운데 당나라군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당군이 도착해보니 안시성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요새 중의 요새였다. 남녀노소 합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안시성을 마침내 당나라의 정예군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해진에게 15만 명의 구원군을 주어 돕도록 했다. 그러나 구원군은 당 태종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고연수와 고해진은 당 태종에게 항복하고 벼슬을 받았다.

이제 안시성은 완벽하게 고립무원의 성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성주 양만춘과 군사들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완강하게 저항했다. 당군은 안시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한 후 매월 5~6회 공격했다. 발차로 성을 파괴하면 성안의 고구려인들이 목책을 세워 막기를 반복했다. 이렇듯 양쪽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래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침내 당 태종이 새로운 계책을 냈다.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라. 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보고 보이는 대로 다 죽이면 된다.” 그날부터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안시성 동남쪽에 밤낮없이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구려군도 성 위에 흙을 퍼부어 성을 더 높였다. 드디어 성보다 훨씬 높은 토성이 쌓아졌다.

태종이 토산 수비대장으로 도종을 임명했다. 도종은 부하 부복애에게 병사들을 데리고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 고구려를 감시하라고 했다. 그런데 부복애가 자리를 비운 사이 토산의 한 쪽이 붕괴되며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그 틈을 타 고구려 병사들이 몰려나와 토산을 점령해버렸다. 잔뜩 화가 난 당 태종이 그 자리에서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 탈환을 위해 사흘 밤낮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참호를 파서 서로 연결하고 그 속에 숨어서 불을 던지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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