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CEO
이시자카 노리코 지음 | 오씨이오(OCEO)
반딧불이 CEO
이시자카 노리코 지음
OCEO / 2018년 3월 / 208쪽 / 13,000원
풋내기 여사장, 남자들의 회사에 뛰어들다
동네북이 된 회사: 1999년 2월 1일에 방영된 보도 프로그램이 도코로자와의 ‘다이옥신 소동’에 불을 붙인 후, 비난은 근처 잡목림에 입주해 있던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들을 향해 번져나갔다. 사이타마 현에는 도코로자와 시, 가와고에 시, 사야마 시, 미요시 정에 걸쳐 ‘구누기야마’라는 잡목림이 펼쳐져 있는데, 이시자카산업은 이곳 잡목림 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로, 소각로를 3기나 보유하고 있었다. 다이옥신 보도가 전파를 탄 이후, 공장 주변에는 ‘이시자카산업 반대!’, ‘이시자카는 이 마을에서 나가라!’라고 적힌 현수막이 여러 장 내걸렸다.
그런데 실상 창업자인 아버지는 소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97년에 이미 선구적인 안목으로 다이옥신이 배출되지 않는 새 소각로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어느 산업폐기물 처리업체가 어떤 소각로를 사용해서 어떻게 폐기물을 처리하는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주민들은 먼저 다이옥신에 관한 대책을 세운 우리 회사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다이옥신 대책을 세우지 않은 회사라면 반대운동만으로도 얼마든지 소각로 가동을 중단시킬 수 있지만, 이시자카산업은 달랐기 때문이다. 소각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주민들의 증오는 더 크게 타올랐고, 우리 회사를 겨냥한 반대운동의 집중포화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장실로 가서 말했다. “아버지……. 일이 너무 커졌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주변의 다른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들 중에는 문을 닫거나 이전을 결정하는 곳도 있었다. “어떡하긴. 계속해야지.”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무뚝뚝했지만 힘이 한풀 꺾여 있었다. “아버지, 왜 이 회사를 만드셨어요?” 한참을 묵묵히 있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농사짓는 집에서 태어났는데 형제도 많고, 고등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어.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생선 가게에 들어가 일을 배웠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이 어찌나 고되던지,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택시 기사가 되든 장거리 운전기사가 되든 해야겠다고.” 아버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자 좀 더 안정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큰맘 먹고 덤프트럭을 샀지. 날마다 건축 현장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오다이바에 있는 쓰레기 매립지로 실어 날랐어. 그런데 말이야. 아침 대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100대가 넘는 덤프트럭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거야. 덤프트럭들은 쓰레기를 그곳에 내려놓고 돌아갔지. 끝도 없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어릴 적 일들이 생각났다. 당시 아버지는 주로 비계 해체 작업을 맡았는데, 회사가 순조롭게 커나갔던 듯하다. “날이면 날마다 해체한 폐자재를 매립지로 실어 날랐지. 그런데 그중에는 쓸 만한 것들이 꽤 많았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게다가 언제까지 쓰레기 버리는 일로 먹고살 수 있겠니? 그런 시대는 곧 끝날 거라고, 앞으로는 재활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지. 떠돌지 않고 한곳에 터를 잡겠다고 결심했다. 너희들에게 안정된 삶을 주고 싶었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어. 그런 마음으로 이 회사를 세웠지.”
서른 살의 여사장, 난폭한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들다 / ‘쓰레기장 딸’의 결심: 아버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의 다른 잡음들이 일제히 멈추는 느낌이었다. 나는 장녀였고, 당시 자녀들 가운데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을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불쑥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 제게 회사를 물려주세요!” 놀란 아버지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라며 내 제안을 단번에 물리쳤다.
그런데 내 앞에서는 딱 잘라 말했지만 아버지도 틀림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리라. 며칠 뒤,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하고 싶으면 해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명해봐. 1년의 시간을 주마.” 그렇게 서른 살이 되던 2002년, 나는 ‘사장’ 직함을 받았다.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일단은 ‘임시 사장’으로서 1년간의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나는 사장이 되자마자 ‘탈 산업폐기물 업체’를 목표로 내세웠다. ‘쓰레기장’이라고 멸시당하면서 업계에서 차별받는 일은 이제 끝내겠다고,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답지 않은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150억 원짜리 소각로를 해체하다: 그래서 내린 첫 번째 결단이 ‘소각로 처분’이었다. 당시 소각로를 통해 얻는 매출은 전체의 70퍼센트에 달했기에, 소각로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칫 회사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향한 반대운동이 잦아들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무거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자신이 일군 이시자카의 상징과도 같은 소각로를 스스로 부수고 소각을 포기함으로써 회사가 잔존하는 쪽을 택했다. 나와 아버지는 곧바로 주민 측 변호인단을 찾아가 소각로를 처분할 테니 재판 청구를 취하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1개월 후, 소각로 해체가 시작됐고, 1998년에만 해도 64로였던 소각로는 어느새 7로로 줄었고, 그 7로마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세 가지 경영 이념: ‘탈 산업폐기물 업체’를 목표로 내세운 후, 나는 회사에 필요한 뭔가가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경영 이념’이었다. 아버지의 경우, 자신이 살아 있는 경영 이념이었으니 문자화해서 사내에 공유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이틀 후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겸허한 마음, 긍정적인 자세, 노력과 봉사.’ 솔직히 내가 기대했던 그럴듯한 경영 이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이념이 있었기에 난국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시 사장의 첫 번째 임무, 위탁처를 찾아라!: 임시 사장으로서 처음 맡은 임무는 폐기물 위탁처를 찾는 것이었다. 소각로를 해체하면 폐기물을 처분할 수 없으므로 그 전에 서둘러 위탁처를 찾아야 했다. 위탁처를 선정하고, 가격을 협상해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을 모두 나 혼자 해내야 했다. 약 스무 군데 회사를 방문했고 그중 11개 사와 거래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우리 회사에서 처리하던 폐기물을 대신 받아줄 위탁처를 무사히 결정지었다. 나는 ‘임시 사장’으로서 첫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
새로운 설비 도입을 위해 바위를 두드리다 / 기적을 일으킨 한마디: 나는 곧이어 모든 설비가 건물 내부에 위치한 ‘독립형 전천후 종합 설비’ 도입에 착수했다. 당시 이시자카산업의 건물은 공사 현장을 방불케 했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산업폐기물 처리업체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없었다. 나는 세련된 본사 건물과 깨끗하고 스마트한 공장 설비, 잘 가꾼 예쁜 정원을 갖추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은 투자액이 40억 엔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만약 실패하면 이시자카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내 생각을 아버지에게 전하자 다음과 같은 회의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지금 주민 반대운동이 한창인데, 관공서가 개발 허가를 내줄 리 없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탈 산업폐기물 업체’를 실현하려면 신형 설비가 꼭 필요했다. 나는 관공서를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침내 2002년, 개발 허가가 떨어졌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만약 우리를 도와준 관공서 직원과 사이타마 현 지사가 아니었다면 허가를 받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의 이시자카산업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임시 사장에서 정식 사장으로: 나는 임시 사장이었던 1년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내달렸다. 새로운 공장 설비의 개발 허가를 받아낸 뒤에는, 세 가지 ISO(국제 표준화 기구) 통합 인증을 취득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숨 가쁘게 흐르고 2003년 새해를 맞았다. 회장인 아버지는 신년회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여러분, 작년에 우리 회사는 소각 중단을 결정하면서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습니다. 어려운 난국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노리코 사장 덕분입니다. 노리코 사장이 정말로 최선을 다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시절 이후로 아버지께 칭찬을 들은 기억이라곤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기쁨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어느 순간 더 좋은 회사, 더 건강한 회사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 개발 허가를 받은 지 3년 만에 새 설비가 완공되었다. 나는 어느덧 ‘임시’라는 꼬리표를 떼고 정식 사장이 되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버지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내가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방향을 제시하면, 장인 기질을 타고난 아버지는 바로 설계도부터 그리곤 했다. 물론 아버지가 만든 것들이 모두 완벽하지는 않아서, 개중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어쨌든 갓 부임한 2대 사장인 나로서는 아버지가 내리는 결정에 참견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만든 것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아버지가 반대를 한 적도 많았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마지막에 모든 책임을 지는 이는 바로 아버지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예스’를 부르는 아침 15분간의 의식: 대표권이 아버지에게 있는 상태에서 사장 업무를 보는 건 쉽지 않았다. 최종 결재 단계에서 아버지가 “안 돼!”라고 하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군말 없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사장이 된 후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마다 그것이 어떤 일인지, 왜 필요한지를 아버지에게 설명하느라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대화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내가 사장이 된 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켰던 그 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침 8시 30분부터 15분 동안에 끝낸다.’ 나는 이 15분 내에 전날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을 설명했다. 되도록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알기 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예스’인지 ‘노’인지만 구분하면 된다. 설령 ‘노’라는 답이 돌아와도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부연 설명을 달지 않았다. 대신 뭐가 문제인지 돌아보고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러자 시간이 흐를수록 ‘예스’라는 대답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닻을 풀고 개혁의 항로에 오르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이제 네가 대표권을 가져가라.”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제약 없이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물론 기뻤지만, 마침내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대표권을 양도받은 후, 연대 보증인으로서 내 서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떠안는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 중압감을 대신 짊어진 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셈이다. 그 울타리가 있었기에 나는 사장으로서 회사를 차근차근 바꿔나갈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앞날을 내다본 아버지의 전략이었다면, 아버지는 경영자로서 날카로운 혜안을 지닌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량 사원들을 최고의 인재로 변화시키다
‘공공의 적’을 자처하다: 조직의 개혁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개혁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사원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나를 향한 직원들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일개 사원이었던 사장 딸이, 지역 주민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어수선한 틈을 타 느닷없이 사장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쟤가 현장 일을 뭘 알겠어?’ 하는 불신과 불만의 기색이 사내에 역력했다.
하지만 나의 역할은 사원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모든 사원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어떻게든 회사를 바꿔나가야 했다. ‘탈 산업폐기물 업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면 설령 사원들에게 반감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주저 말고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사원들이 특히 크게 반발했던 일은 직원 휴게실을 없앤 것이었다. 당시 공장 주위에는 사원들이 휴게실로 사용하는 가건물이 여섯 채 있었는데, 현장을 돌 때마다 휴게실에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만화책이며 도색잡지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바닥에는 빈 담뱃갑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사원들의 아지트를 습격하다: 근무 시간은 저녁 6시까지였지만 5시만 되면 휴게실에 불이 들어왔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심정으로 휴게실 문을 열면 매번 대여섯 명이 모여 앉아 노닥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휴게실을 한 곳으로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원들이 자꾸 무기력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날마다 휴게실을 돌며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 또한 나로서는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회사는 저녁 6시까지 일하는 조건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5시부터 텔레비전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게 일상입니다. 이제부터 휴게실을 한 곳으로 축소해 정상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사 곳곳에서는 당연히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하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된 규칙들도 보강하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업무 중 흡연 금지, 안전모 착용 의무화, 술에 취한 채 출근하는 행위 금지, 업무 중 샌들 착용 금지 등의 규칙을 반드시 준수하도록 했다. 사원들에게 강조한 또 한 가지는 ‘인사’였다. 아침 조례 때마다 나는 전 직원들 앞에서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선창하고, 모두들 복창하도록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따라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의 불만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타협하는 원칙이란 없다 / 반년 만에 직원의 40퍼센트가 떠나다: 경영자가 회사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면 규칙이나 규율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규칙을 지킬 마음이 없는 직원이라면 회사를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근무 시간에 노는 직원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일할 생각이 없으면 회사를 나가세요!” 나는 기본적인 원칙을 두고 타협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내가 사장이 된 지 반년 만에 전체 사원의 40퍼센트가 사표를 냈다. 덕분에 나는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55세였던 평균 연령은 순식간에 35세로 내려갔다. 우리 회사의 현재 직원 수는 135명이며, 대부분은 당시의 사태 이후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초보 사장과 불량 직원들, ISO 인증에 도전하다: 처음 아버지에게 ISO 인증을 취득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실을 바꾸지 못할 바에야 아예 시작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내가 이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컨설턴트가 ‘ISO 3종 통합 경영시스템’에 대해 알려주며 “통합 경영시스템의 인증을 취득한다면 업계 최초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통합 경영시스템이란 품질경영시스템(ISO 9001), 환경경영시스템(ISO 14001), 안전경영시스템(OHSAS 18001)을 통합하여 운영하는 경영 체계를 말한다. 컨설턴트의 말을 듣자마자 ‘그래, 이거면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는 ‘국내 최초’, ‘업계 최초’와 같이 전례가 없는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래? 그럼 한번 해봐!” 하고 승낙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