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세계사
이재규 지음 | 사과나무
경영의 세계사
이재규 지음
사과나무 / 2017년 12월 / 356쪽 / 15,000원
고대와 중세 시대 - 근면과 약탈 그리고 체념
먹을 것을 찾아 나선 굶주린 동물, 인간
수렵ㆍ농경시대의 전쟁은 ‘땅따먹기 경쟁’: 올림픽의 캐치프레이즈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라는 세 단어는 수렵채집 시대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때는 힘세고, 빨리 달리고, 나무 위로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이 살아남기에 유리했다. 따라서 수렵채집 사회의 승자는 당연히 육체적으로 강한 자였다. 그러므로 수렵채집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육체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수렵채집 사회 다음의 사회는 농경사회이다. 육체적으로는 다소 능력이 떨어지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짐승과 싸우는 대신 짐승의 새끼를 잡아서 기르고, 열매를 따러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는 대신 씨앗을 받아 주변 토지에 뿌리고 가을에 그것을 거두어서 먹고사는, 다시 말해 농경문화를 기초로 하는 사회다.
한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의 크기는 수렵채집활동과 농업활동 사이에 차이가 있다. 채집수렵을 위해서는 1인당 평균 10㎢의 토지가 필요했다. 반면 건조지 농경에는 1인당 평균 500㎡가 필요했다. 여기서 건조지를 관개농지로 바꾸면 1인당 평균 100㎡면 충분했다. 즉,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다소 여유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생업을 위한 노동을 제외한 여가시간에는 생존과는 관계없는 장식품을 만들었다. 그것이 역사상 최초의 예술행위였다. 동굴벽화나 암각화 등이 그 좋은 예다. 농경사회의 승리자는 당연히 농사지을 토지를 많이 갖고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수렵채집 시대와 농경시대의 전쟁이란, 수렵과 채집과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땅따먹기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과 협동과 교환 - 이브가 애덤에게 준 사과는 최초의 교환거래였다: 인류의 조상은 처음에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다 차츰 여유가 생겨서, 먹고 사용하고 남는 것을 나중을 위해 모아두거나 서로 바꾸어 먹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상거래, 즉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무기, 생산도구, 장신구, 가축, 옷감, 곡물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후 화폐가 등장하면서 화폐가 교환의 수단이 되었다.
약탈이 더 쉬웠다: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좋은 곳에 농경민족이 생겨나고 촌락을 형성하자, 수렵채집 사회의 후예 격인 유목민족들은 사냥보다는 농경민족이 생산한 곡식과 가축을 빼앗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약탈을 시작한다. 농경민족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성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한다. 그것이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바빌론이다. 인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수렵채집 사회와 농업사회의 주요 생산요소는 당연히 ‘토지와 노동’ 그리고 ‘약탈’이었다.
기원전 6세기 리디아의 왕 크로수스는 세계 최초로 동전을 제작하여 이를 통용되는 화폐로 사용함으로써 물물교환을 대신하여 상거래를 하도록 했다. 따라서 리디아는 실제보다 훨씬 더 부유한 국가로 인식되었다. 부유한 이웃을 둔 가난한 사람은 더 열심히 일하자는 의욕을 갖기보다는 이웃에 대한 질투와 부유한 이웃을 빼앗으려는 약탈심리를 발달시킨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여서 기원전 546년 리디아는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역사는 부유한 문명국가가 가난한 야만족에게 망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 리디아의 사례는 국가의 생존은 부국(富國)만으로는 안 되고, 강병(强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국강병이란 그런 뜻이다.
중세를 떠받치는 두 기둥 - 교회와 기사
봉건제와 기독교: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유럽 역사의 주요 무대는 지중해에서 유럽 대륙으로 옮겨간다. 이제 그리스 로마 문명의 헬레니즘, 기독교 문명의 헤브라이즘, 여기에 게르만 문명이 합쳐지면서 중세는 봉건사회를 형성한다. 봉건사회는 폐쇄적인 농업 경제에서 번성한 문명의 한 형태이다. 제후와 기사는 영주에게서 받은 봉토를 보유하고, 그 대가로 영주에게 각종 의무와 봉사를 한다. 요컨대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두 제도는 봉건제도와 기독교였다.
중세사회의 꽃 - 기사: 수렵채집 사회, 농업사회, 산업사회라고 부르는 구분 기준은 무엇인가? 그 경우 각 사회의 노동력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수렵채집 사회는 사냥꾼, 농업사회는 농부, 산업사회는 육체노동자가 중심 노동력이었다. 중세사회의 중심 노동력은 여전히 농부였다. 그러나 중세사회에는 다른 사회와는 다른 또 하나의 독특한 노동력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사였다. 말을 탄 중무장 기사는 국가의 통제를 넘어선 자율적인 권력이었다.
기사는 자신이 다스리는 봉토에 대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지배했다. 이런 경향은 급속도로 확산되어, 중세사회의 여러 조직들은 교황이나 국왕 같은 중앙의 권력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만 충성하고 세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담하지 않았다. 기사제도가 발전하면서 기독교도로서 이상적인 기사상도 널리 퍼졌다. 교회를 존경하고, 영주와 주군에게 충성하며, 개인의 명예를 지키는 이상적인 기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런 이상형에 가까운 기사들이 나타난 것은 11세기 말 유럽 기독교 지역의 기사들이 성지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모였던 십자군전쟁 때였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이전 시대 - 신대륙과 인간의 발견
르네상스 시대의 가족기업과 기업가정신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꽃피운 것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는 수십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혼돈의 땅이어서, 전제군주들과 도시국가의 지배자들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 이탈리아에서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유럽의 상업 및 금융의 중심지였다. 피렌체에는 72개의 은행과 어음 중개소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중 메디치 가문이 가장 번창했다. 당시 메디치 은행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환전 업무였다.
또 메디치 은행은 공신력과 각국에 퍼져 있는 지점망을 바탕으로 상인들에게 금과 은 같은 금속 화폐가 아닌 환어음을 유통시켰다. 무역상들이 금이나 은 같은 화폐를 들고 다니면서 무역을 할 경우 무겁기도 하고 해적이나 도적에게 약탈당할 위험이 많았지만, 은행이 발행한 교환증서인 환어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은행은 환어음을 통해 엄청난 수수료 수입을 올렸다.
메디치 은행의 또 하나 중요한 업무는 오늘날 은행의 주요 역할인 대출업무였다. 돈이 필요한 일반인들에게 보석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단순한 전당포 업무로 모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제 무역상에게는 물론이고, 프랑스와 영국의 국왕, 그리고 교황에게까지 대출을 해주었다. 대출에는 돈을 받지 못할 위험성이 뒤따랐고, 따라서 이자는 엄청나게 높았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당포 대출의 경우 연 40~60%의 높은 이자를 부과했고, 권력자에 대한 대출 또한 높은 이자를 붙였다. 이런 높은 이자는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큰돈을 떼일 경우에는 은행 존립 자체가 위협받기도 했다.
부의 사회 환원은 르네상스의 원인이 되었다: 1419년부터 메디치은행의 설립자인 지오반니는 부의 사회 환원을 시작했다. 자비를 들여 빈민구제소를 짓고 운영기금을 내놓았다. 지오반니는 아들 코시모 역시 부의 사회 환원과 학문의 진흥에 힘을 쏟았다. 많은 교회, 수도원, 병원, 복지시설을 짓거나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다. 또 코시모는 학자들도 후원했고 스스로도 학문을 사랑했다.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는 이자를 받는 행위를 고리대금업이라 규정하고 일종의 죄악으로 취급했다. 코시모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만나 개인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사하고, 또한 은행업도 지속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교황은 코시모가 산 마르코 수도원 건축기금을 기부하면 그 대가로 모든 죄를 사하는 칙령을 발표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선’이라는 방법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은 갈등을 해결한 것이다. 코시모는 그 방법을 맘껏 활용했다.
이러한 대타협 이후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명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수많은 교회 건축물을 짓게 된다. 이에 따라 건축물을 장식하는 다양한 예술품들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는 곧 르네상스로 연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메디치 가문의 예술에 대한 투자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위대한 로렌초’로 불리는 그는 르네상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도자이자 시인으로서 메디치 가문을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로렌초가 피렌체를 통치하던 시절부터 메디치 은행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은행의 런던 지점은 장미전쟁 때 잘못된 편에 투자했고, 1470년 에드워드 4세가 왕좌에서 쫓겨나고 일시적으로 헨리 6세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 때 메디치 은행 런던지점은 파산했다. 밀라노와 브뤼지에 있던 지점들도 도산했고 리옹, 로마, 나폴리에 있던 지점들도 파산 직전에 놓였다. 이 모두가 로렌초의 잘못은 아니었다. 도시 경제력의 변화에 따라 피렌체가 국제금융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492년 로렌초가 죽은 그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바야흐로 이탈리아를 통하지 않는 신항로가 확보됨에 따라 동방무역의 주도권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넘어간다.
기업가정신과 성취욕구 그리고 경제하려는 의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목적은 탐험 정신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황금 때문이었다. 그는 황금을 찾지 못하자 원주민들을 노예로 데리고 갔다. 게다가 유럽인들이 옮긴 병균 때문에 신대륙에 있던 인디언들이 거의 멸족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잉카와 마야 문명이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실패했는가? 기업가정신의 발휘라는 측면에서 보면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콜럼버스 덕분에 스페인은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했고,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탐험하고, 개발하고,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콜럼버스의 영향을 받아서 마젤란 등이 뒤따라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섰고, 신대륙의 상권을 정부와 상인들이 공동으로 장악했다. 이런 회사를 설립했던 자본가들은 특정 지역의 이권을 독점적으로 허용 받아 큰 이익을 얻었다. 콜럼버스에게 투자한 이사벨 여왕 역시 새로운 발견보다는 황금에 더 관심이 많았다.불가능해 보였던 목표가 달성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발상을 전환하는 일이다. 콜럼버스로 하여금 대서양으로 나가도록 동기를 부여한 전략적 기회는 많았다. 콜럼버스는 무턱대고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첫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유럽으로 들어오던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도자기 등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공급이 끊기게 되었다. 동방에서 들어오던 상품의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졌고,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이 필요했다. 둘째, 1305년 무렵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미지의 땅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게다가 페스트의 창궐로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면서 과학 지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맡긴다는 신학 중심의 중세사회가 과학과 사람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로 변하면서 기업가정신이 확산되었다. 셋째, 토스카넬리는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1474년에 주장했다.
이와 같은 요인들에 덧붙여, 콜럼버스의 용기와 돈벌이 그리고 출세의욕, 즉 기업가정신이 작용했다. 콜럼버스는 도중에 겪은 예상치 못한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와 끈기가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동방 진출 의지와 재정적인 지원, 즉 벤처 투자와 국가적 기업가정신이 발휘된 결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첫 번째 산업혁명 시대 - 자본생산성 혁명 : 18세기 중반~19세기 중반
이중 혁명 - 경제혁명과 정치혁명
국부론과 증기기관, 그리고 미국 독립운동: 1776년 영국에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스미스는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방식에 분업이론을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1776년은 제임스 와트와 매슈 볼턴이 개량형 증기기관을 완성하고 실제로 공장에 설치했다. 사람이나 동물의 힘 대신 처음으로 증기기관이 동력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났는데, 13년 후인 1789년 일어날 프랑스혁명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 세 사건은 각각 다른 원인으로 일어났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다. 에릭 홉스바움은 이 시기를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하여 2중 혁명의 시대로 명명했다.
첫 번째 산업혁명 시대는 자본가들이 주역이었다
산업혁명은 지식을 도구와 제조공정에 적용한 결과이다: 산업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지식의 의미 변화 때문이었다. 중세시대까지 대체로 지식은 정신을 수양하는 수단이었다. 산업사회는 기계의 등장으로 비롯되었는데, 기계는 지식이 생산도구와 결합한 결과였다. 기술(technology)이라는 용어는 장인이 가진 비밀스런 기능인 techne와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을 뜻하는 logy의 조합어이다. 1700년경부터 이후 60년 동안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1750~1800년 사이, 영국은 특허를 공개토록 하여 누구든지 지식을 도구와 제품과 제조공정에 적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새로운 기계들이 폭발적으로 발명되었고, 기술의 비밀과 폐쇄성도 끝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실용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대학들도 등장했다.
비밀스런 기능(techne, skill)에서 보편적인 원리인 기술(technology)로 넘어가는 이 거대한 변화를 기록한 성과가 바로 1751~1772년 동안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전서』이다. 당대의 석학들, 예를 들어 볼테르와 루소 등이 주요 기고자들이었다. 이 백과사전의 목적은 기존의 모든 장인들의 지식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도제가 아닌 사람들도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었다. 기술학교와 백과사전은 경험을 지식으로 바꾸고, 도제제도 대신 교과서를 만들고, 비밀주의를 공개적인 방법으로 전환시켜 지식의 응용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산업혁명, 즉 기술과 기계에 의해 사회와 문명이 전환된 밑바탕이 되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는데, 농업과 수공업 위주에서 공업과 기계를 사용하는 제조업 위주의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철도 건설과 국부유출 논쟁: 1830년 세계 최초로 영국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철도가 놓였다. 이후 조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운행되었다. 철도의 등장 후 5년 내에 서구 사회는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렸다. 철도건설 붐 때문이었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유럽의 철도 붐은 30년 동안 계속되었고, 1860년대가 되자 오늘날의 주요 철도망 대부분이 건설됐다. 철도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혁명 요소였다. 철도 덕분에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이동수단을 갖게 되었다. 역사상 왕족이나 귀족 또는 무역상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시야를 처음으로 세계로까지 확대시켰다. 철도는 산업혁명을 사실상 완성했다. 처음에는 혁명이었던 것이 일상생활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