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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이력서

피터 반햄 지음 | 이터



CEO의 이력서

피터 반햄 지음

이터 / 2017년 6월 / 334쪽 / 16,000원





‘시련’이라는 이름의 경력



진정한 북극 찾기 ? 베인앤컴퍼니 CEO의 이야기

가라앉는 배에서 해야 할 당신의 선택: 한 남성이 베인앤컴퍼니의 회장실로 들어가며 자신의 파트너인 오릿 가디쉬에게 말했다. “다른 데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어요.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난 수개월 동안 매니저와 파트너들이 대거 베인앤컴퍼니를 떠났다. 채무 부실관리, 불투명한 경영 구조, 무너진 평판 등이 한데 뒤엉킨 탓이다. 당시 가디쉬는 회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파트너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 앞에 서 있는 이 남성은 퇴사 대열에 합류할 다음 타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다른 회사에서 받은 스카우트 조건을 본사에 이야기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몇 개를 지나 아래쪽 홀에서도 한 젊은 컨설턴트가 자기 미래에 대해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불과 6개월 전 GM의 ‘미래 인재 육성’ 프로그램에서 이직해온 미시건 주 출신의 데이비드 케니는 베인앤컴퍼니가 자신에게 보다 많은 산업 분야를 배우게 해주고, 더 넓은 세상을 볼 기회를 제공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GM에 있을 때보다 유일하게 더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곤 파산 분야 밖에 없어 보였다. 가디쉬와 케니는 어떻게 했을까?

열일곱의 군인 소녀, 하버드에 가다: 가디쉬는 1948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해서 의무복무를 해야 했다. 그녀는 이 군복무를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녀는 군복무를 마친 후 헤브루대학에 진학해 전공인 심리학과 부전공인 인문지리학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녀는 최고 우등생이었고, 학계에 머물 계획이었다. 그래서 학사학위 취득 후 교수가 되고자 석사와 박사학위 취득 과정을 모색했다. 하지만 일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을 알아보다가 미국에서 입학은 아주 까다롭지만 복수학위 취득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하나 알게 되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석ㆍ박사 통합 과정이었다. 대학 시절의 뛰어난 성적 덕분에 가디쉬는 하버드대에 합격했고, 심지어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1977년 MBA를 끝낼 무렵, 가디쉬의 성적은 상위 5% 내에 들었다. 그녀는 MBA 2년 과정은 마치고 4년 과정의 박사학위 프로그램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계에 남고 싶지는 않았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배웠던 사례 정밀분석을 좋아하게 된 그녀는 대기업보다는 컨설팅에서 직장 경력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최선의 선택은 컨설팅업계의 선도자였던 맥킨지앤컴퍼니(이하 맥킨지)나 보스턴의 강력한 경쟁업체인 BCG에 입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당돌한 신세대는 1973년에 설립된 베인앤컴퍼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베인은 테네시 주 출신으로 BCG의 부사장을 역임한 빌 베인이 설립했다. 당시 베인의 업무 방식은 컨설팅업계의 관행을 깨는 것이었다. 베인은 각 한 업계에서 한 고객사하고만 일했다. 보고서는 고객사의 CEO에게 직접 전달했다. 또한 ‘보고서가 아니라 성과를 낸다’는 공언을 보여주기 위해 지분이나 여타 다양한 성공 보수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컨설팅을 제공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객사가 실행하도록 도왔다는 점이다. 가디쉬는 이 같은 업무 개념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결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베인은 가디쉬에게 흥미로운 직위를 주었고 그녀는 베인에서 제시한 직책을 받아들였다. 사무실이 둘뿐인 소규모였지만 급성장 중이었던 베인에서 그녀는 지식을 듬뿍 흡입했다. 그리고 그녀의 회사 동료들도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그 중에는 미트 롬니도 있었다.

GM의 장학생이 컨설턴트가 되기까지: 데이비드 케니는 1961년 미시간 주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우선 미디어 혁명이 있었다. 그가 갓난아기였던 당시 처음으로 미국 가정의 약 50% 이상이 TV를 소유하게 되었고, 1969년 당시 여덟 살이던 케니는 닐 암스트롱이 지구 역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것을 보았다. 그다음에는 자동차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심장부인 미시간 주는 이 같은 변화를 그 어느 곳보다도 생생하게 실감한 곳이었다. 어린 케니에게 이 같은 변화는 인생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케니는 말했다. “전 달 착륙에 매료됐고, 대학의 과학 교육이 새로운 문을 열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주립학교의 장학금을 알아봤지만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과학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했고, GM을 위해 일하던 인력 스카우트 담당자인 톰 쉴즈의 눈에 띄었어요. 그는 학교로 찾아왔고, 제게 관심을 보였으며, 저를 GM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1970년대 말 GM은 충격에 직면해 있었다. 1979년의 에너지 위기가 촉발되었다. 미국의 유가는 하늘로 치솟았고 자동차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그래도 GM은 여전히 새로운 인재를 필요로 했고 젊은 전문가들을 회사로 끌어들여야 했다. 케니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GM 연구소(GMI, 일종의 산학연계교육기관) 입학이 허락되었다. 전액 장학금에다 비록 작은 액수이긴 했지만 급여까지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케니는 GM에서 좋은 경력을 쌓으며 1984년 GMI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GM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1986년에 GM에 복귀해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경영대학원에서 느꼈던 흥분은 사라졌다. “저는 앞날을 이렇게 전망했습니다. ‘내가 정말로 일을 열심히 하면 부서장이 되든지 CEO가 되겠지’라고요. 하지만 그게 더 이상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컨설턴트에 대한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1987년 봄 케니는 이직할 때라고 결심하고, 자신에게 문화적으로 잘 맞는 회사를 찾았다. “저는 다른 컨설팅업체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맥킨지였죠. 좀 더 유명한 곳이었어요. GM이 고객사였죠. 하지만 엘리트들이 다니는 회사였고, 제 이력으로는 입사하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베인이 케니에게는 더 어울리는 회사처럼 보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는 1987년 여름 베인에 합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케니가 입사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베인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위기의 베인호, 탈출과 잔류의 기로에 서다: 베인이 당시 곤경에 처하게 된 정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베인의 ‘1업계 1고객’ 방식이 역효과를 냈다. 둘째, 맥킨지나 BCG 같은 경쟁사들이 베인의 독특한 고객 접근법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베인의 매출을 위협했다. 셋째, 여전히 창업자들이 지배하는 베인의 조직구조와 지분이 내분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베인은 공식적으로 파트너십 형태의 주식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파트너들이 자금 마련을 위해 지분을 매각하기 시작하자 베인은 부채가 늘었다. 이는 베인에게 부담이 되었고, 매출 압박은 더 심해졌다. 이것이 케니와 가디쉬가 처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인적 배경도 다르고 회사에서의 이력도 달랐지만, 각자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잔류할 것이냐 이직할 것이냐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베인이 거의 파산 일보직전까지 도달했을 때 회사를 살리려는 마지막 노력으로 베인의 지도부는 롬니에게 CEO로 복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그는 베인 출신의 개인투자자로 변모해 있었다. 롬니는 기꺼이 수락했다. 1991년 1월 새로운 CEO로 발표된 롬니는 베인앤컴퍼니의 우리사주제도 계획을 구조조정하려는 노력을 감독하고 재정적 투명성과 소유권을 확대하는 새로운 경영 구조를 시행했다. 그는 회사에서 지나치게 많은 자금을 회수해 간 베인과 다른 초창기 주주들을 회사로 다시 자금을 돌려놓게 만들었고, 미국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포함한 채권자들을 설득해 대금 완납 규모 축소 요청을 관철시켰다.

회사와 세 사람에게 이것은 전환점이었다. “CEO가 된 롬니는 대형 고객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케니는 말했다.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객의 재정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롬니는 저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차례 만났고, 그는 언제나 ‘고객들에게 집중하게, 구조조정은 신경 쓰지 말고, 고객들과 자네의 팀에만 집중하라는 말이네’라고 말했죠.” 가디쉬 역시 똑같은 일을 했다. 고객들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번 장의 시작 부분에서 그녀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 파트너들이 외부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본 후 그녀는 자신이 본보기로 나서야 할 때라고 결심했다. “저는 헤드헌터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더 이상 러브콜을 받기 싫습니다. 최소한 2년은 더 머무를 생각이에요.” 가디쉬의 계획은 성공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와서 “정말로 헤드헌터들과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나요?”라고 말했다. “그럼요.” 가다쉬는 말했다. 그리고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 형태의 리더십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초점을 맞췄고, 헤드헌터들과의 접촉을 그만둔 후에 직원들은 그것이 회사의 상황에 도움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1992년 하늘은 다시 맑게 개었고 재정적 위기는 사라졌다. 이후 파트너로 베인에 계속 머무른 롬니는 개인투자자의 지위로 돌아가고 회사의 지휘권을 두 사람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베인앤컴퍼니의 새로운 상징이 된 가디쉬는 회사의 ‘진북(True North, 眞北)’을 가리킬 나침반을 골랐다. 그것은 고객이었다. “안개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진북이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케니가 말했다. “베인에서는 우리의 진북은 바로 고객이었죠. 돈이 아니고요.”

케니와 가디쉬의 이야기에서 취할 수 있는 교훈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돈이나 명예가 아닌 직감에 충실하라 ? 가디쉬외 케니가 베인을 선택한 것은 단지 돈이나 경력 전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인이 내세우는 가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② ‘진북’을 찾아라 ? 케니의 가디쉬의 경우 그들이 직업적인 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일하던 회사가 파산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가장 큰 불확실성의 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역경을 헤쳐 나갔고, 결국 회사와 함께 안개에서 빠져나왔다. 그들 두 사람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북’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방향을 따라가야 할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경우 ‘진북’은 회사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의 제공이었다.

③ 경력을 지켜야 할 시기와 바꿔야 할 시기를 잘 파악하라 ? 진북을 찾는 일이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디쉬와 케니는 그들의 경력에서 최소한 한 번은 직장을 그만둔 적이 있다. 가디쉬는 박사 과정을 포기했고, 케니는 GM 연구소 프로그램에서 이탈했다. 그만두거나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요점은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있는 이유이다. 가디쉬가 박사학위 과정을 그만둔 것처럼 확신이 든다면 그만둬야 한다. 또는 그녀가 2년 동안 헤드헌터와 이야기를 중단했던 것처럼 직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 경우에는 퇴사하지 말고 계속 다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가디쉬와 케니가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 사람들



대학살의 나라에서 ? 하이네켄 CEO의 이야기

죽음의 도시에서 삶을 배우다: 1994년 8월, 자이레 동부의 부가부에서 가장 큰 양조회사인 하이네켄 브랄리마는 맥주를 한 병도 생산하지 않았다. 대신 수천 병의 세럼을 실은 트럭들이 회사에서 근처 도시인 고마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후투족 난민 수십만 명이 콩나물시루 같은 캠프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해 4월에 투치족에 의한 후투족 대량학살로 시작된 르완다 내전을 피해 그곳으로 왔다. 난민캠프는 위생 상태가 위태로운데다 또 하나의 재앙이 난민들에게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치사율이 50%에 이르는 콜레라의 발발이었다. 하이네켄 자이레 지사에 총지배인으로 새로 부임한 서른두 살의 장 프랑수아 반 복스미어는 며칠 전, 콩고의 수도 킨샤사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부카부 양조공장으로 날아갔다. 양조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콜레라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효과가 있었을까?

쌉싸름한 맥주 인생의 시작: 복스미어는 1961년 벨기에 익셀에서 태어났다. 브뤼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나무르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거기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의 맥주 인생이 시작된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여름 몇 달 동안 일할 인턴 자리를 찾아보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 30군데 지원한 것 같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한 군데만 합격했습니다. 앤하이저부시 인베브(ABI)였죠. 당시는 스텔라 아르투아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젊은 복스미어는 그해 여름을 가장 이국적인 맥주공장에서 보내게 된다. 가봉의 수도인 리브르빌이었다.

“졸업 후 다시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매니저 교육생 모집에 지원했죠. 다시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하이네켄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스미어에게 하이네켄 교육생은 외국에서 두 번째 일하는 것이었다. 가봉보다는 약간 덜 이국적인 하이네켄 암스테르담 양조공장에서 일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그의 일을 매우 좋아했다. 처음 6개월은 양조장에서 보내고, 다음 6개월은 회계부서, 다시 6개월은 세일즈 부서에 배치돼 식당과 바 영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6개월을 외국에서 보냈다. “카메룬에서 돌아왔을 때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당시에 벨기에는 병역이 의무였다. 예외라면 아프리카로 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르완다로 갔다.

내전의 나라, 르완다에서: 40년 동안 벨기에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르완다는 1962년에 독립한다. 그리고 주요 종족인 후투족과 투치족이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복스미어와 그의 아내는 이런 상황 속에서 르완다에 도착했다. 르완다에서는 아프리카 근무 경험이 많은 네덜란드인 막스 보림이 복스미어의 상사이자 멘토였다. 복스미어는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성공하려면 편을 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두루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는 ‘외국 회사로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가 정치 상황에서 일정 역할을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3년이 지난 뒤, 복스미어는 승진을 해 콩고로 발령을 받았다. 아직 영업 매니저였지만, 이번에는 르완다보다 몇 배로 큰 나라를 담당하는 매니저였다.

하이네켄의 세럼으로 콜레라와 맞서다: 1994년 영업 매니저로 임명된 지 1년 만에 그는 회사 역사상 최연소 총지배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참고로 1993년 3월 복스미어는 당시 하이네켄 회장인 카렐 부르스틴이 ‘아프리카 투어’를 할 때 몇몇 지역을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곳 중 한 곳이 르완다 서부의 도시 기세니였다. 그곳은 자이레 고마하고도 인접해 있다. 브루스틴과 복스미어가 르완다를 떠나고 몇 주 후 지옥이 시작됐다. 하브야리마나 대통령을 태우고 가던 비행기가 격추돼 같이 타고 가던 그의 후투족 협상자가 대통령과 동반 사망한 것이다. 누구도 공격을 했다고 나서지 않았다. 후투족 군사 지도자들은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반군을 비난했고, 후투족 사람들이 투치족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부추겼다. 살육이 처음에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지역이 기세니였다.

이후 두 종족 간 전쟁이 치역하게 전개되었다. 기세니 국경을 가로질러 자이레로 도망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고마 주변 임시 난민캠프를 가득 채웠다. 난민캠프는 열악한 위생과 영양 상태로 콜레라, 설사 등의 질병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콜레라 발발로 사망했다. 국제적인 도움은 늦거나 부족했다. 복스미어가 벨기에 집에서 르완다와 자이레 상황을 다룬 뉴스를 보고 있던 어느 여름날, 그의 처남이 말했다. “이웃 한 명이 식민지 시절 아프리카에서 의사를 했어요. 1950년대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양조공장에서 생산되는 세럼으로 콜레라하고 싸웠다고 했어요.” “가서 그 사람 만납시다!” 복스미어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 사람의 집에 도착해서 복스미어는 종이와 펜을 꺼내 그가 설명해준 재료들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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