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비전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리더의 비전
신동준 지음
미다스북스 / 2017년 4월 / 384쪽 / 15,000원
세계를 지배할 표준을 마련하라 - 중국(China)을 설계한 진시황
세계를 관통하는 비전을 찾아라: [거대한 중국을 장악한 방법, 제왕정 / 진시황의 제왕정을 가능하게 한 승상 이사] 중국처럼 방대한 지역과 많은 사람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 체제가 필요한데,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체제가 바로 ‘제왕정(제왕정치)’이며, 역사상 이를 최초로 실현한 인물은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최초로 천하통일에 성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왕정’을 확립한 데는 법가인 이사의 공이 컸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출신인데, 당대의 이름난 선비 순자를 찾아가 제왕의 통치술을 배웠고, 여불위의 천거로 진시황에 의해 타국 출신의 자문관인 객경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237년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류돼 상국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진나라의 대신들이 진시황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지금 진나라로 들어와 벼슬하는 타국 출신 모두 그들의 군주를 위해 유세하면서 진나라 군신을 이간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내쫓아야 합니다.” 이에 진시황은 ‘축객령’을 내려, 타국 출신으로 진나라에 들어와 벼슬을 살고 있는 ‘기려지신’과 ‘유세객’ 모두 추방했는데, 당시 ‘객경’으로 있던 이사는 쫓겨 가는 와중에 「간축객서」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간축객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듣건대 ‘태산은 모든 토양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같이 크게 되고, 강과 바다는 작은 시냇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렇게 깊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은 백성들의 귀의를 두루 받아들이면서 덕정을 널리 펼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버려도 적국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지금 대왕은 찾아온 빈객을 물리쳐 다른 제후들이 업적을 쌓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적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양식을 집어준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목적에만 집중하고 사족은 신경쓰지 마라] 진시황은「간축객서」를 읽고 ‘축객령’을 거두었고 이사를 다시 곁에 두었다. 이사는 복직하자마자 건의했다. “진나라가 천하를 도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진나라의 힘으로 6국을 무찌르는 것은 마치 먼지를 터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왜 천하를 도모하지 않은 채 다른 나라들이 다시 부강해지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려는 것입니까? 6국이 다시 합종하여 일어나면 어찌합니까? 그때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어찌 하는 것이 좋겠소?” “유세객에게 금옥을 가지고 가 몰래 유세하게 하십시오. 제후국의 명사들 중 매수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재물을 후하게 주어 결속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정정당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때문에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앞당겨진 것은 사실이다. 이사의 건의는 현대 선거전의 ‘마타도어’나 ‘흑색선전’과 유사하며, 이사의 계책은 되도록 피를 적게 흘리며 빨리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하통일에 이어 제국을 표준화하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제나라를 병탄하여 마침내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다. 이는 이사의 ‘마타도어’ 계책을 좇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직후 곧바로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이룬 공덕이 전설적인 삼황과 오제를 능가한다고 여겨 스스로 ‘짐’이라 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죽은 뒤 생전의 행적을 가지고 평하여 정하는 것이 시호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아들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다. 금후 시법(諡法)을 없앤다. 짐은 첫 번째 황제인 시황제이니 후세는 순차로 2세와 3세가 된다.” 이때 처음으로 ‘황제’ 칭호가 등장했다.
당시 진시황이 가장 고민한 것은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민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를 조정회의에 부쳤다. 승상 왕관을 비롯한 대다수 관원이 봉건제를 다시 채택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사가 이를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왕조가 제후로 봉한 사람들 중에서 자제(子弟)와 동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은 소원하게 돼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원수같이 했습니다. 군현제를 도입해야만 천하를 아주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천하인 모두 다른 뜻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봉건제를 부활시키는 것은 주왕조의 전철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왕의 명에 의해 천하를 일사불란하게 다스리는 ‘제왕정’의 첫 등장이었다.
‘제왕정’은 문자와 법제도의 통일을 전제로 하는데, 공식 문자는 이사가 고안한 ‘소전’이 채택되었다. 또한 문자의 통일과 더불어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도 이루어졌다. 교통제도의 통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수레 폭의 통일에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여러 나라는 모두 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레의 폭을 다르게 했다. 그것이 적국의 수레를 파손 혹은 전복시키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수레의 폭을 모두 6척으로 규격화했는데, 이를 ‘동궤(同軌)’라고 한다. 진제국은 ‘동궤’에 따른 도로망의 개설로 중앙의 명을 빠르게 하달해서 지방을 강력히 통제할 수 있었다.
사람을 얻는 마음의 눈을 가져라 - 평민 출신으로 황제가 된 유방
마음의 눈으로 인재를 알아보라: [누구와든 소통하는 지도자 유방] 명문 귀족 출신 항우가 지고, 평민 출신 유방이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릇의 차이다. 항우는 자신의 신분 및 재능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했다. 전쟁에 나가면 연이어 승리하는 데다 힘과 재능, 출신가문 등 모든 면에서 유방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우는 자만심에 빠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우를 범하고 말았다. 참모를 업신여기고 변화무쌍한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난세의 영웅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대기(大器)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방은 서민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귀족 출신인 항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유방만의 장점이기도 했다. 이는 난세에 귀족의 풍모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방은 백성을 비롯한 신하들과 끝없이 소통하고 그들의 요구와 조언을 경청했다. 덕분에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을 세워 최초로 평민 출신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 원성을 사지 마라] 기원전 208년 유방은 ‘입관’하기 위해 그 길목인 완성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방은 완성을 우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량이 만류했다. “지금 완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완성의 군사가 우리의 뒤를 치고 함양의 군사는 우리의 앞을 막게 됩니다. 극히 위험합니다.” 이에 다시 말머리를 돌린 유방은 결국 완성을 손에 넣었다.
뒷걱정을 없앤 그는 파죽지세로 무관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그는 입관 당시 휘하 장병들로 하여금 지나는 마을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게 했다. 원문은 ‘무득약로’로 표현했다. 노략을 금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사기』「고조본기」는 ‘진나라 백성이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했다. 참고로 당시의 난세에서는 장악한 마을의 재물과 여인을 취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휘하의 장병들에게 엄격하게 그것을 금지했다. 이는 유방이 백성들의 마음조차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는 백성의 증오를 사거나 경멸을 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를 삼가면 설령 다른 비행이 있을지라도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게 된다. 군주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탐욕을 부려 백성의 재산과 부녀자를 빼앗는 데 있다. 대다수 백성은 군주가 자신들의 재산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한 대략 자족하며 살아가지만, 소수의 야심 많은 귀족들은 그렇지 않다. 군주는 늘 이들을 경계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자비로운 처사로 마음부터 사로잡아라] 유방의 군대는 무관을 통해 곧바로 서북쪽에 있는 요관을 향해 진격했다. 요관은 관중의 동쪽 대문으로 지형이 험준했다. 유방이 정면 돌파하려고 하자 장량이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진나라 병사가 많으니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5만 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소문을 내고, 산 위에 깃발을 세워 허장성세를 보이십시오. 후에 사람을 시켜 황금으로 항복을 권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이대로 하자 과연 요관의 문이 열렸다.
유방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양의 도성에 가까운 패상에 주둔했다. 얼마 뒤 2세 황제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진왕 자영이 조고를 죽이고 궁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유방의 휘하 장수들은 함양에 입성하자마자 부고(府庫)로 달려가 보물을 나눠 가졌다. 유방도 함양의 화려한 궁전과 여인에 넋을 빼앗겼다. 번쾌가 가서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장량이 다시 간곡히 간한 뒤에야 비로소 군사를 돌려 패상으로 향했다. 이때 유방은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은 ‘법3장’을 선언했다.
“부로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에 시달린 지 오래되었소. 그간 조정을 비난한 자들은 멸족의 화를 당했고, 모여서 의론을 주고받은 자들은 저잣거리에서 처형을 당했소. 나는 제후들과 가장 먼저 관중에 입관하는 자가 왕이 되기로 약조했소. 내가 응당 관중의 왕이 될 것이오. 지금 부로들에게 법령 세 가지만 약조하려 하오.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그에 준하는 형을 가한다.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진나라의 나머지 법령은 모두 폐지해 관민이 이전처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할 것이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부로들을 위해 해로움을 없애고자 한 것이지, 포학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시오. 내가 파상으로 돌아가 주둔하려고 한 것은 단지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약조를 확정하려던 것일 뿐이오.” 그리고 이를 모든 현과 향 및 읍을 돌아다니며 알리게 했다. 이는 유방이 진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후의 승부처에서 승리를 거둬라 - 결정적 기회를 움켜쥔 수문제 양견
리더에게 망설임은 최대의 적이다: [‘위험한 이빨’을 숨기고 권력의 중심에 서다] 북주 황실 입장에서 위험한 인물이었던 양견이 ‘보정대신’이 되어 대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제 우문빈의 총신인 정역과 유방(劉昉, 한고제 劉邦이 아님)의 지지 덕분이었다. 우문빈은 병이 나 자리에 누운 뒤 오래도록 낫지 않자 유방과 안지의를 불렀다. 후사를 당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병상 앞으로 다가갔을 때, 우문빈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유방은 곁에 있는 8세의 어린 우문연을 보고 이대로는 계속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곧 정역과 밀모했다.
[돌다리도 한번은 두드려라] 얼마 후 우문빈이 곧 죽을 것이라고 판단한 유방과 정역이 양견을 궁으로 부른 뒤 ‘보정대신’에 임명하고자 하는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양견이 손을 내저으며 고사했다. 대임을 떠맡을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황한 유방이 격한 어조로 압박했다. “공이 받아들이면 곧바로 그리하겠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보정’의 자리에 오를 것이오.” 양견은 유방의 말을 듣고는 이같이 대답했다. “조정의 명을 받들어 궁중에 머물며 시질하겠소.”
시질은 군주의 곁에서 병 수발을 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선제 우문빈이 숨을 거뒀다. 유방과 정역이 곧 문서를 위조해 양견을 총지중외병마사에 임명했다. 전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대신들이 조서를 초안할 때 어정중대부 안지의만이 서명을 거부하고 반대했다. 유방과 정역은 안지의를 설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명하게 했다. 궁중 호위군사는 양견 휘하로 들어갔다.
[‘대체불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 당시 양견을 추종하던 이덕림은 양견이 지금의 총리급인 대총재, 정역이 실질적인 군사권을 장악한 대사마, 유방이 부총리에 해당하는 소총재가 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급히 양견을 찾아가 말했다. “공은 응당 대승상과 가황월, 도독중외제군사가 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황월’은 천자의 군사동원 독점권을, ‘가황월’은 이를 대행한다는 것을, ‘도독중외제군사’가 된다는 것은 군사권 장악을 말한다.
양견이 생각해 보니 이덕림의 말이 그럴듯했다. 이에 선제 우문빈의 입관이 끝난 직후, 곧바로 명을 내려 정역을 승상부의 실질 책임자인 장사, 유방을 그 밑의 사마로 삼았다. 정역과 유방은 본래 양견과 같은 반열에 서고자 했으나, 이로 인해 양견의 아래 계급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양견은 두 사람을 후대했다. 상당한 상을 내리면서 유방을 황국공, 정역을 패국공에 봉했다.
[토벌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양견] 유방과 정역은 양견을 위해 대공을 세웠다는 자부심에 득의양양하며 점차 교만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양견은 변경의 종실 왕들이 저항할까 걱정하여, 미리 만들어놓은 거짓 조서를 이용해 우문빈이 죽자마자 변경을 수비하는 5왕을 도성으로 불러 들였다. 조왕과 진왕, 월왕, 대왕, 등왕이었는데, 이들은 입경한 뒤에야 비로소 조카인 우문빈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각기 도성에 있는 왕부로 돌아가 때를 노렸다.
이들이 도성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변경의 장수들이 양견 토벌을 기치로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양견은 유방과 정역에게 명해 군사들을 감독하며 반란을 진압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방이 자신은 장수가 아니라며 거절했고, 정역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물러섰다. 양견은 크게 노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때 고영이 나서고, 이덕림이 자신의 직책을 굳건히 수행했다. 양견은 크게 기뻐하며 정신을 가다듬어 위효관과 양사언, 우문흔, 최홍도 등의 명장을 각처로 보내 반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제2의 홍문지연’이라는 함정에 빠지다 / 척살당할 위기에서 빠져나와 기회를 잡다] 당시 도성에 머물며 때를 노리던 5왕도 바쁘게 움직였다. 조왕 우문초가 양견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왕부에서 함께 주연을 갖자고 청했다. 양견은 5왕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이에 응했다. 우문초는 연회 도중 양견을 척살하려 시도했으나, 양견은 측근 원주 덕분에 몇 차례 위기를 벗어났다. 그리고 또 결정적인 순간, 우문초가 망설이는 바람에 양견은 살아서 황급하게 빠져 나왔다.
[갈고닦은 이빨을 드러내며 새 왕조를 열다] 양견은 사지를 빠져나와 희소식을 잇달아 접하게 된다. 몇 달 사이 반란군의 수괴인 상주 총관 울지형과 청주 총관 울지근, 익주 총관 왕겸이 잇달아 패배하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제 우문연의 장인이자 운주 총관 사마 소난은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황급히 남조 진나라로 망명했다. 이로써 양견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모두 사라졌다. 이빨을 숨기고 있던 양견이 마침내 북주 찬탈 작업에 나섰다. 그는 먼저 우문태의 자손인 25가문을 비롯해 효민제 무문각과 명제 우문육의 6가문, 무제 우문옹의 12가문을 제거했다. 선제 우문빈의 아들인 정제 우문연은 선양 후 피살됐다. 당시 9세였다. 마침내 581년 봄, 안팎을 모두 평정한 양견은 스스로 정제 우문연 명의의 조서를 내려 수왕의 자리를 올랐다. 양견은 얼마 후 선양의 대희극을 연출해 마침내 새 왕조인 수나라의 황제 자리에 올랐고 연호를 개황으로 바꿨다. 피할 수 없다면 망설이지 마라.
변하지 않는 핵심을 관철시켜라 - 정관지치를 이룬 최고의 성군 당태종
밖으로 확장하되 내실을 다져라: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위무제 조조 및 청나라 강희제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3명의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됐다. 그의 치세 때는 고구려와 토번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나라가 당나라에 복속했다. 그는 군사외교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와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대대적인 혁신과 부흥을 꾀했다. 아울러 이세민은 예악의 정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또, 형벌을 완화하고, 부역과 조세를 경감했다. 균전제와 부병제 등도 차질 없이 시행했는데, 이러한 그의 치세를 ‘정관지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