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CEO
레이 크록 지음 | 오씨이오(OCEO)
로켓CEO
레이 크록 지음
OCEO / 2016년 11월 / 348쪽 / 15,000원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내 인생을 이끈 두 가지 원칙: 나는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도, 문제를 책임지는 것도 각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철학을 좋아하는 것은 실제로 살아갈 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시절 아내와 어린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주일 내내 종이컵을 팔면서 부업으로 피아노까지 쳐야 했던 시절이나 백만장자가 된 지금이나 이 원칙은 틀린 적이 없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 또한 내가 한결같이 지켜왔던 원칙이다. 릴리튤립컵 회사에서 17년 동안 종이컵을 팔며 나는 영업 조직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기회를 찾았다. 여섯 개의 회전축으로 밀크셰이크를 만들어내는 멀티믹서라는 기계가 내겐 기회로 보였다. 물론 후한 보수와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독립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아내는 영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금세 자리를 잡았고 아내의 두려운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작은 시골 식당이 터뜨린 대박: 어느 날 멀티믹서를 찾는 묘한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의 믹서를 사고 싶습니다.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의 맥도널드 형제한테 있는 것과 똑같은 거 말이에요.” 몹시 궁금해졌다. 맥도널드 형제는 누구지? 여러 곳에 똑같은 믹서들을 팔았는데 왜 하필 맥도널드 형제네 멀티믹서야?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몇 가지 확인해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맥도널드가 가지고 있는 믹서는 한 대가 아니었다. 샌버너디노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조용한 소도시였는데 그 시골구석에서 여덟 대의 믹서로 한 번에 셰이크를 40잔씩 만들어내다니……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그곳 대리점에서 의례적인 방문을 마치고 5.5평(약 18제곱미터) 남짓한 대지 모퉁이에 팔각형의 작은 건물이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양의 드라이브인 식당이었다. 11시 개장 시간이 가까워오고 종업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근처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그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울 즈음 차들이 속속 도착했고 곧 줄이 이어졌다. 오래지 않아 주차장이 가득 찼고, 주문 창구로 향했던 사람들은 햄버거가 든 종이 가방을 들고 차로 돌아왔다.
그날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차로 돌아와서 인파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 2시 30분쯤 되어 건물로 들어가 맥 맥도널드와 딕 맥도널드 형제에게 내 소개를 했다. 그들은 나를 ‘미스터 멀티믹서’라고 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밤 맥도널드 형제가 설명한 시스템은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업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황금을 낳는 프렌치프라이 / “그럼 저는 어때요?”: 나는 다음날도 맥도널드를 찾아 전날보다 훨씬 더 자세히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불판을 맡은 직원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패티를 어떻게 뒤집고 누르는지, 특히 프렌치프라이의 조리 과정에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맥도널드 형제가 성공의 비결이라고 자랑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나간 후 맥, 딕 형제와 만나 내가 말했다. “이런 식의 식당을 더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너무 힘이 들 것 같아요.” 딕 맥도널드가 반대했다. “우리 대신 식당을 열어줄 사람을 어디서 찾겠어요?” “저는 어때요?”
사업에서 완벽함은 당연함이다
나의 맥도널드를 세우기까지 / 잃어버린 천상의 맛: 내 대답에 두 형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생기를 띠며 이 제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우리는 형제의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를 썼다. 대화를 나누면서 맥도널드 형제가 다른 드라이브인 식당 열 군데에 영업권을 주었다고 했다. 그중 두 곳이 애리조나에 있었다. 나는 그 매장들에는 지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미국 전역에 형제의 식당을 본뜬 프랜차이즈 지점을 낼 권한을 갖기로 했다. 계약에 따르면 가맹점 총 매출의 1.9퍼센트가 내 몫이었다. 형제는 그 1.9퍼센트에서 0.5퍼센트를 받기로 했다. 계약서에는 가맹 계약을 맺을 때마다 내가 지원비 950달러를 청구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 돈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에 꼭 맞는 식당을 지어줄 땅 주인을 찾는 데 들어가게 된다.
우선 첫 번째 맥도널드 매장을 지을 부지를 찾아서 건물을 올려야 했다. 첫 매장은 이후 다른 매장의 표본이 될 곳이기에 부지 선정이 그만큼 중요했다. 다행히 첫 매장에 나와 절반씩 투자하기로 한 아트 제이콥스의 도움으로 아주 적당한 부지를 발견했다. 데스플레인스라는 그곳은 집에서 차로 7분 도착하는 거리였다. 한편 이 새로운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사위가 에드 맥러키였다. 에드는 구직 중이었고 특히 외식업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는 내가 뽑고 싶은 직원의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내 첫 매장의 매니저로 채용했다.
1955년 4월 15일, 첫 매장의 문을 열었다. 맥도널드 형제의 매니저였던 아트 벤더가 데스플레인스로 와서 나와 에드를 도와주었다. 시련의 결정체라 할 만한 과정이었지만, 이 경험은 다른 매장을 여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아트 벤더는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하며 캘리포니아 지역의 매장을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 미시간과 플로리다에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에드도 마찬가지이다. 수익은 처음부터 발생했지만 완전히 자리를 잡고 운영이 안정화될 때까지 거의 1년이 걸렸다.
사업에서 완벽함은 당연함이다: 매장을 열고 수익이 생기기 시작하자 기운이 났다. 이 장소가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애매한 입지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장사는 잘됐고 나는 사업을 확장해 다른 곳에 가맹점을 낼 준비를 시작했다. 첫 번째 가맹 점주는 롤링그린 클럽의 로커 룸에서 찾았고, 골프 친구들 여러 명이 맥도널드를 운영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사업 전체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렸다. 그것이 맥도널드 형제의 기만 때문이었는지 우둔함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 맥도널드 형제가 이름을 빌려준 가게들이 열 곳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양측이 그 점을 양해했다. 그 밖의 미국 전역에 대한 권리는 내게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내게 밝히지 않은 계약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도 내 집과 사무실, 그리고 내 첫 번째 모델 매장이 있는 일리노이 주 쿡카운티 지역에 매장을 열 권리를 프레즐랙아이스크림사에 넘겼던 것이다. 나는 프레즐랙으로부터 그 권리를 사들이는 데 2만 5,000달러가 들었다. 프레즐랙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맥도널드 형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고의든 아니든 나를 완전히 바보 취급한 것이다.
일을 맡긴다는 건 권한까지 맡긴다는 것
속도로 승부를 걸다: 해리 손번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나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매장을 오픈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관건은 속도였다. 속도를 더 높이지 않으면 맥도널드 형제에게서 받는 가맹점 지원비 950달러는 새 건물을 짓고, 운영을 시작하여 매출의 1.9퍼센트를 수수료로 받기도 전에 이런저런 경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터였다. 게다가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가맹점을 짓는 속도를 높일 유일한 길은 도움을 줄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고용했다. 그가 재정 문제를 맡고 준(멀티믹서 사업을 할 때 회계업무를 위해 고용한 준 마르티노)이 사무실을 운영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업의 진행과 새 사업 개발을 책임지면 되겠다는 그림이 그려졌다.
동업자에게서 이익을 구하지 말라: 이 시기에 내가 내린 한 가지 기본적인 결정은 프랜차이즈 시스템과 그 발전 방향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로 회사가 공급업자가 되는 방식으로 가맹점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공급업자가 되면 그의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보다는 그에게 팔아야 할 것에 더 관심을 쏟게 된다.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 질이 조금 떨어지는 제품을 대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가맹점은 손해를 볼 것이고 결국 그 손해는 우리에게 돌아온다.
내가 사업 초반에 결정해서 오랫동안 실천한 또 하나의 원칙은 맥도널드 매장에 공중전화, 주크박스, 자동판매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맹점 운영자들은 이런 기계에서 얻는 가외 소득에 유혹을 느꼈다. 그래서 내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이런 기계들로 인해 매장 자체에 수입을 가져다주지 않는 방문객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처음으로 가맹권을 판매한 곳은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 로스앤젤레스, 리시다였다.
맥도널드다운 맥도널드를 만들기 위해: 일과가 끝나면 나는 해리, 준과 함께 사무실이나 우리 집에서 계획에 없던 회의를 자주 하곤 했다. 한번은 해리가 말했다. “은행 융자로 사업을 꽤 잘해 나가고 있지만 금융 업계에서 위상을 키우려면 대형 기관 투자자를 끌어들여야 할 겁니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고 해리는 보험회사들과 접촉했다.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곳은 시카고의 올아메리칸 생명보험이었다. 해리는 연이어 역시 시카고에 있는 센트럴스탠더드라이프와의 계약에도 성공했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탄력을 받아 순조롭게 사업을 키워나갔다. 한편 1956년 여름과 가을 동안 워키건을 비롯해 우리가 오픈한 여러 매장을 운영하며 절실하게 느낀 것은, 본부에 매장 운영을 총괄 감독할 인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가맹점을 계약할 때마다 숙련된 인력을 제공해서 그곳 직원들을 교육하고 맥도널드 시스템이 매장에 안착하도록 도와야 했다.
사업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적재적소에 놓은 인재들: 프레드 터너가 바로 가맹점 운영 관리자로 내가 점찍어 놓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프레드는 1957년 1월 우리 사무실에 왔다. 우리가 전국에 스물다섯 개의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한 해였다. 그는 그 모든 매장의 일에 일일이 관여했다. ‘스테인리스의 마법사’로 불리던 라이트너 이퀴브먼트사의 담당자 짐 신들러와 일리노에레인지사의 영업사원 사이그 차코우도 마찬가지였다. 짐과 사이그는 마치 우리 회사에 직접 속한 사람들처럼 일을 했다.
불같은 리더, 얼음 같은 리더: 사람들이 내게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떤 방법으로 경영진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적절한 사람을 요직에 앉힌 것이 우리 조직의 성공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해리 손번의 경영 스타일은 나와 다르다. 해리는 차분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지만, 직원들의 활기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유형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열의를 불어넣고, 그들이 일에 미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다. 해리와 나는 이렇게 여러 면에서 딴판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장점을 이어 붙여서 서로의 차이를 통해 더 견고해졌다.
‘원대한 구상’보다 ‘단순한 세부사항’에 집중하라: 사람들은 내가 52세가 되어서야 맥도널드를 시작했고 하룻밤 사이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곤 한다. 하지만 나는 연예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수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력하다가 때를 만나 큰 성공을 거둔다. 내가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는 것은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30년에 걸친 긴긴 밤이 있었다. 한편 프레드와 일하는 것은 항상 편했다. 그도 나처럼 세부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세부적인 것을 완벽하게 만들기 전에는 절대 규모가 큰 아이디어로 넘어가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 방법이 훨씬 융통성 있는 접근이다.
추진력을 견딘 로켓만이 날아오를 수 있다
위기를 통해 단단해지다: 전화기 너머 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시 클렘 보어가 소유한 여덟 개의 부지에 맥도널드 건물을 짓고 있었다. 건설 단계는 저마다 달랐다. 그런데 열성적으로 계속 상황을 보고하던 보어가 갑자기 소식이 뜸해졌고 이내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 해리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화를 했다. “레이, 회사가 정말 심각한 곤경에 처한 것 같습니다.” “설마…… 클렘 보어야?” “짐작하셨군요. 그가 빌려준 땅에 우선변제권(다른 일반 채권자보다 보증금을 우선 변제 받을 수 있는 권리)을 설정하고 공사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그 망할 놈이 그 땅에 전혀 권리가 없었다는 겁니다. 땅 주인들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액수가 얼마나 되는 거야?” “적어도 40만 달러는 될 거예요. 레이, 저한테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아이디어가 있어요. 맥도널드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자들에게서 돈을 융통할 수 있을 겁니다. 30만 달러는 가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해리 블랜차드라는 사람이 있어요. 블랜차드라면 우리를 구해줄 만한 자금이 있을 거예요.”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공급업자들은 우리가 성공하면 더불어 이익을 얻고 우리가 실패하면 덩달아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다. 나는 해리에게 일을 추진하라고 지시했고, 그는 기적 같은 성과를 일궈냈다. 보어가 일으킨 이 사건은, 전력을 다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역경을 통해 오히려 단련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바로 이 무렵 밀턴 골드스탠트라는 보험 영업사원이 해리에게 접근했다. 그는 존핸콕 생명보험사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 일을 주선하는 대가로 수수료와 회사의 주식을 요구했다. 나는 주식을 넘기는 것에 반대했지만 해리는 어떻게든 이 계약을 성사시켜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결국 골드스탠트는 리 스택이란 이름의 나이 든 신사를 데려왔고, 스택의 도움으로 해리는 존핸콕에서 10여 건의 융자를 받아냈다.
한편 자금 조달에 대해 논의하는 도중에 열 개 정도의 매장을 하나의 회사로 만들어 운영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렇게 하면 맥도널드 형제가 계약 불이행을 문제 삼더라도 안정된 수입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몸집을 줄이고 회사의 매장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운영할 수도 있었다. 매장을 묶어 회사로 만드는 데는 엄청난 자금이 들어갔다. 하지만 해리는 리 스택의 도움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해리는 세 개의 보험회사로부터 150만 달러를 차용하는 대가로 우리 주식의 22.5퍼센트를 양도하자는 제안을 최종적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많은 회의 끝에 내가 가진 주식의 22.5퍼센트, 해리 주식의 22.5퍼센트, 준 마르티노 주식의 22.5퍼센트를 내놓기로 결정했다. 그 융자금은 1960년대, 로켓과도 같았던 맥도널드의 성장에 불을 붙였다.
최고의 이익은 통장이 아닌 고객의 얼굴에 있다: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 5년 동안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혈압이 오른다. 막막한 상황의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맥도널드 형제와 나는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다. 나는 맥도널드를 가장 크고 좋은 회사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만족했다. 더 이상의 위험이나 부담에 시달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한번은 프레드 터너를 보내 맥도널드 형제가 초기에 운영권을 준 캘리포니아 매장들을 둘러보도록 했다. 터너는 너무나 엉망인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돌아왔다. ‘순정’ 맥도널드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형제가 운영하는 샌버너디노 매장뿐이었다. 다른 매장은 피자, 부리토와 같은 메뉴를 내고 있었다. 햄버거의 질이 떨어지는 매장도 많았다.
이렇게 다른 매장들이 형편없이 운영되는데도 형제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맥도널드 형제와 계약을 맺은 가맹점들은 대량 구매들을 하거나 함께 광고를 하는 일에도 협조하려 들지 않았다. 한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참는 것뿐이었다. 편협한 시각으로 볼 때는 오로지 통장에 찍히는 현금만 이익으로 보게 된다. 하지만 이익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을 띤다. 그중 최고의 이익은 바로 고객의 얼굴에 떠오르는 만족의 미소이다. 그 미소는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그가 다시 우리 가게를 찾을 것이란 뜻이고 어쩌면 친구를 데려올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