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가 가져야 할 단 한 가지 습관
스즈키 도시후미 지음 | 오씨이오(OCEO)
경영자가 가져야 할 단 한 가지 습관
스즈키 도시후미 지음
OCEO / 2016년 8월 / 172쪽 / 12,000원
‘상식’을 부정하라
내 일의 원점
사실 나는 유통업에 관심이 없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일이기에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2013년 기준 총 매출 9조 엔(약 102조 원)이 넘는 일본 유통 그룹 세븐&아이홀딩스의 경영자가 되어 회사를 이끌어온 것을 보면 인간의 운명은 참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나는 다양한 일을 경험해 왔고, 매번 내가 뛰어든 세계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 일을 대충대충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매사에 철저하게 임했고, 주위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일에도 과감히 도전해왔다. 내 인생은 이런 일들의 반복이었고, 나의 현재는 그 연장선에 놓인 결과이다. 그러니 치열하게 일과 마주하는 하루하루를 보내온 경험이야말로 내 일의 ‘원점’이다.
기묘한 운명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한 1956년 4월, 대형 출판도매회인 도쿄출판판매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서점에서 반품되어 오는 책을 분류하여 출판사로 보내는 ‘반품 담당’이나 직접 책을 사러 오는 근처 서점 관계자들을 응대하는 ‘서점 판매 담당’ 업무를 처리하며 출판사명이나 서적 및 잡지의 특징을 파악하는 수습 기간을 거쳤다. 입사한 지 반년 후에 ‘출판과학연구소’에 배속되었는데, 이곳에서 보낸 하루하루는 훗날 내가 경영자로서 업무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출판과학연구소는 출판업계의 근대화를 꾀하기 위해 도쿄출판판매가 설립한 조사 기관이었다. 주된 업무는 어떤 분야의 출판물이 어느 정도 세상에 나오고, 어떤 독자에게 읽히며, 독자는 어떤 출판물을 원하는지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출판업계에는 통계다운 동계가 거의 없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제로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나는 통계학과 심리학, 경영을 바라보는 그 두 축의 관점에 대해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다. 낮에는 독자를 인터뷰한 후 그 결과를 통계 처리하여 정리하고, 밤에는 대학교수를 초빙하여 통계학과 심리학 강의를 들었다. 데이터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통계학이 필요했고, 객관적인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유도질문을 삼가는 등의 심리학 지식도 필요했다. 통계학과 심리학을 업무에 활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덕분에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안목이 생겼고, 미세한 데이터의 변화도 놓치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 생각할 수 있는 습관이 생겨났다. ‘소비사회는 경제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의 관점으로도 파악해야 한다.’는 나의 지론 또한 심리 파악의 중요성을 배웠기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출판과학연구소는 나에게 ‘숨겨진 대학원’과 같은 존재였다.
그 다음에는 홍보과에 근무하며 《신간 뉴스》라는 격주 간행 홍보지 편집업무를 담당했다. 신간목록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책자여서 도서 소개글을 정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내가 담당하기 전에는 발행 부수가 고작 5,000부 정도밖에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책자였다. 회사에서는 독서가를 대상으로 하는 홍보지 정도로 인식하고 있어 광고비를 늘려 증쇄할 생각도 없었고, 자연히 발행 부수가 늘어날 전망도 없었다. 매번 힘들게 책자를 만들지만 홍보효과를 거두기도 어렵고, 협력해준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어려우며, 회사에서의 입지도 매우 좁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발행 부수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회사가 투자할 만한 아이템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신간 목록 홍보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이 담긴 책자로 만들어 유료로 판매하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 화두를 책으로 하되 폭넓은 분야의 인물들을 결합시켜 참신하면서도 재미있는 내용의 ‘읽을거리’가 있는 책자로 만든다면 독서가들은 물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직속 상사에게 《신간 뉴스》를 이런 방식으로 변화시켜 유료화해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의 내 직속상사는 오랫동안 고수해온 방식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니 내 의견에 찬성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옆 부서에서 근무하던 기획실장이 사장에게 이야기를 해준 덕에 임원들 앞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저명한 작가와 여배우의 대담 같은 참신한 기획을 늘린 《신(新) 신간 뉴스》가 탄생했다. 새로운 시도가 늘 그렇듯 이후의 생활에는 뿌듯함과 고단함이 함께했다. 나는 혼자서 기획, 편집, 취재, 집필, 제작 등 몇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충만한 하루하루였지만, 당시 서른을 앞두고 있던 나는 회사의 간판이 아닌 내 힘만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독립하여 활약하는 많은 작가와 저명인들을 만나다 보니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평론가인 오야 소이치 씨의 문하생들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스폰서 후보로는 이토요카도 (1920년에 세워진 일본 유통업체, 대형할인점, 슈퍼마켓, 백화점, 레스토랑 등을 운영한다.)가 떠올랐다. 1년 전쯤 내가 전직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상담해주었던 친구가 이토요카도 거래처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람 좀 구해달라는 이토요카도 직원의 말을 듣고 나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인연의 고리를 따라 스폰서 건 협상을 위해 소개 받은 이토요카도 본부 직원을 찾아갔다. 이것이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참 기묘한 운명이다.
그런데 이토요카도 담당자에게 프로덕션 설립 이야기를 꺼냈더니 선뜻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왔다. 사내 인쇄물을 편집하면서 프로덕션을 설립할 수 있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나는 과감히 전직을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입사하고 나니 ‘프로덕션 이야기는 나중 이야기’라며 말이 180도 달라졌다. 당시는 대형 슈퍼마켓이 성장하던 시대로, 회사는 그저 일손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이렇듯 내 유통업 인생은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라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의도치 않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 형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출판판매의 동료들에게 원망의 소리를 들어가며 힘겹게 한 전직이었다.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상황과 조건이 적절치 않더라도 어떻게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일 아니던가. ‘인생에서 해서 안 될 일은 없으리라, 해야 할 일을 착실히 해가다 보면 길이 열리리라.’ 믿으며 한 발을 내디뎠다.
초우량기업과의 만남
당시 이토요카도는 유통 선진국인 미국의 최신 흐름을 읽고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해마다 직원들의 해외 연수를 추진했다. 매해 수차례에 걸쳐 60~70명의 인원이 약 열흘간의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나도 책임자의 신분으로 동행했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를 지나다가 잠시 쉬려고 도로변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렀다. 슈퍼마켓을 작게 만든 듯한 그 가게는 핫도그나 커피 같은 식품은 물론 칫솔, 치약, 비누 등의 잡화까지 판매하고 있어 만물상 같아 보였다. 이것이 세븐일레븐과의 첫 만남이었는데, 당시에 받은 인상은 ‘미국에도 이렇게 작은 가게가 있구나!’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귀국 후 조사를 통해 그 작은 가게가 작은 ‘편의점’이라 불리는 체인이고, 사우스랜드가 그런 편의점을 북미에서만 4,000개나 거느린 초우량기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사우스랜드에는 무언가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것 같았다. 세븐일레븐을 일본에 들여오면 일본의 소형 상점이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대형마트와 중소소매점이 공존공영하는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우스랜드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편의점 탄생
1973년 11월 30일에 정식 조인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랜드 트레이닝센터에서 실시되는 연수에 참여했다. 하지만 막상 연수를 듣고는 충격을 받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뿐이었다.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후 받아 든 두툼한 매뉴얼 책자를 보고는 정신이 멍해졌다. 스물일곱 권에 달하는 매뉴얼을 모두 번역해서 읽어봐도 편의점 운영에 관한 기초적인 내용만 실려 있을 뿐 기대했던 마케팅이나 물류 등에 관한 경영 노하우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회계시스템 정도만 쓸 만했다. 분명 운영에 관한 체계적인 노하우가 있어 이를 일본에 들여오기만 하면 통하리라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게 내 잘못된 믿음이었던 것이다.
연수 사흘째에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지만, 사원들에게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절대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계약 열흘 전인 11월 20일, 이미 이토요카도 내에 사원 열다섯 명 규모의 새 회사 요쿠세븐(훗날 세븐일레븐재팬으로 개칭)을 설립한 뒤였다. 이토 마사토시 사장은 “경영의 진두지휘는 말을 꺼낸 자네가 맡게!”라며 내게 새 회사를 맡겼고, 나는 하룻밤 고민한 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본금 일부는 요쿠세븐 임원들이 저금을 털거나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개인적으로 출자했다. 새로운 사업에 책임감을 갖기 위해서였다.
요쿠세븐의 사원을 모으는 데는 고생 좀 했다. 사내외의 맹렬한 반대 속에서 시작하는 신사업이다 보니 새롭게 도전해보겠다고 손을 드는 사원이 거의 없었다. 또 창업 의식을 철저히 갖기 위해 새 회사 사원의 급료나 취업 조건을 이토요카도 사원의 조건보다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토요카도에서 새 회사로 옮기는 경우도 출향(出向, 모기업에 적을 두고 자회사나 관련 회사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전적(轉籍, 근로자를 퇴직시키고 자회사, 관계회사 등에 재취업시키는 것)의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이토요카도에서는 몇 명만 전적했고 나머지는 신문광고로 모집해야 했다. 대부분이 소매업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들이었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우스랜드의 경영매뉴얼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이상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 손으로 ‘일본최초의 편의점 체인’을 구축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1호점은 세븐일레븐 간판을 달고 독립적으로 장사하는 프랜차이즈 형태로 추진하기로 했다. 노하우를 직접 익히기 위해서라도 처음 몇 점포는 직영점으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소형상점과 대형마트의 공존공영’, ‘기존 소매점의 활성화’라는 세븐일레븐의 창업목적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프랜차이즈 형태로 진행해야 한다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렇게 하여 1974년 5월 15일, 일본 최초의 편의점인 세븐일레븐 도요스점을 오픈했다. 준비기간은 3개월이 걸렸다. 야마모토 씨의 가게를 빠른 속도로 새롭게 고치는 한편 그에게 편의점 운영 노하우를 가르치기 위한 연수를 시행하는 등 분주한 하루하루를 함께 보낸 끝에 맞이한 오픈이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지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상점이라는 데 끌려 많은 손님이 찾아주었다. 첫 손님은 남성이었는데, 800엔(약 9,000원)짜리 선글라스를 사주었던 그 손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븐일레븐, 좋은 느낌’, ‘열려 있어 다행이야!’
세븐일레븐은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해가며 한 계단 한 계단 성장해나갔다. 창업 2년째에는 마침내 100개 점포 오픈에 성공했는데, 미국의 사우스랜드가 25년 걸려 해낸 일을 우리는 2년 만에 해낼 수 있었다. 100개 점포를 돌파한 후에는 잇달아 ‘세븐일레븐, 좋은 느낌’, ‘열려 있어 다행이야!’ 같은 CM 속 광고 문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편의점’이라는 명칭 대신 ‘심야 슈퍼마켓’이라 부르며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세븐일레븐은 연일 화제를 낳았다. 그 결과 가맹하려는 개인상점들이 점점 늘어났다. 마침 편의점의 일매출이 일반 개인상점보다 순조롭게 늘어나던 추세라 오너가 된 세븐일레븐 1호점의 주인공 야마모토 씨를 좇아 가맹점을 연 사람도 많았다. 당시 점주들은 하나같이 CM에 등장하는 광고 문구처럼 고객에게 “열려 있어 다행이에요.”라는 감사 인사를 받은 경험이 장사를 해나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모두가 반대하는 일은 성공한다
나의 경영철학
일본에 ‘편의점’이라는 말도 없던 시대에 시작한 세븐일레븐은 모든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당연히 주위의 반대도 많았다. 돌아보니 내가 적극 추진해온 일들은 대부분 전례가 없는 일들이었고, 그런 까닭에 언제나 주위의 반대 속에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때마다 반대를 물리치고 전진해왔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주위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은 성공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나 찬성하는 사업은 단순 경쟁에 빠져 잘 안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을 안목 있게 판단해 신중하게 펼쳐나가야 한다. 기준과 신념 없이 주위 사람들이 찬성한다거나 유행한다는 이유만으로 경영전략과 방침을 세워 실행하려 든다면 백이면 백 실패하고 만다. 내가 지금까지 추진해온 새로운 사업은 대부분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례가 없거나 실현해 나갈 때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고생할 게 뻔하니까’, ‘전례도 없는 걸 보니 돈이 안 벌릴게 뻔하니까’ 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매사를 기업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류이다. 도전해야 할 사업인지 아닌지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판단할 수 없다. 우선은 고객의 시점에서 ‘고객 니즈에 맞는지’ 여부를 끝까지 생각하며 치밀하게 따져 봐야 하고, 일단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결정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경영철학이다.
쇼핑을 넘어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2001년에 설립한 주식회사 아이와이뱅크은행(현 세븐은행)도 주위사람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던 사업이었다. 세븐일레븐은 고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해마다 만 명 규모의 ‘내점고객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면 이를 30년 이상 지속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1990년 후반부터 ‘은행에 가지 않고 가까운 편의점에서 ATM을 이용하고 싶다’는 고객의 요청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븐일레븐은 1987년 에 업계 최초로 편의점에서 공공요금 수납대행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이 역시 고객들의 니즈가 변화한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공공요금 수납대행 서비스로 고객의 입장에서는 금융기관과 편의점의 거리가 그만큼 좁혀져 이제 ATM을 이용하고 싶다는 요청까지 들어온 것이다.
ATM을 설치하려면 은행 면허가 꼭 필요했다. 따라서 ATM을 편의점에 설치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기존의 금융기관과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은행측과의 논의는 쉽게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고객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는 은행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평일과 주말에 은행수수료가 다른 게 납득이 되지 않아 은행측에 조정을 요구했으나 은행은 그게 업계의 상식이라며 관행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세븐일레븐은 독자적으로 ATM을 설치하기 위해 은행 면허를 따는 방향을 선택하고 1999년 11월, 금융감독청에 ‘은행설립취지서’를 제출했다. 금융업계로부터 반대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힘든 여정의 시작이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
편의점에 ATM을 설치한다는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한 기간까지 합치면 이미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러 가지 장애나 간섭 때문에 프로젝트 진행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몸과 마음 또한 점차 피폐해져갔다. 유통업에서 은행업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었기에 회사 안팎에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그렇게 돈이 벌고 싶냐?’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는 사원들에게도 전해졌고, 부정적인 분위기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