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처럼 대담하라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조조처럼 대담하라
신동준 지음
미다스북스 / 2016년 8월 / 392쪽 / 15,000원
대담하게 생각하라
과감하게 ‘적도 스카우트하라’
적군도 스카우트하는 대담한 인재등용: ① 적의 부대를 아군의 최정예부대로 만들다. 조조가 황건적을 좇아 제북까지 이르러 황건적이 궁지에 몰렸다. 마침 항복한 황건적 30여 만 명을 비롯해 남녀 1백여 만 명을 거두어들인 뒤 이들 가운데 정예군을 선발해서 자신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청주병이다. 이들은 조조군의 최정예부대로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선봉에 나서 수훈을 세웠다. 조조의 군대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확산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들 ‘청주병’의 편제에 있었다.
조조의 이런 조치는 원소 및 공손찬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조 역시 황건적의 침공에 대해 단호히 대처했으나 원소나 공손찬과 같이 잔혹하게 살해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원소는 흑산적 우독을 토벌하면서 5일 동안 포위 공격해 이들을 깨뜨린 뒤 우독을 비롯한 무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좌자장팔 등을 진압할 때는 남은 모두의 목을 베었다. 유석과 청우각 등을 격파할 때 역시 수만 명의 목을 베었다. 공손찬도 청주와 서주의 황건적을 동광에서 격파한 뒤 3만여 명을 죽였다. 황건적이 황하를 넘어 도주하자 공손찬은 일부러 반쯤 넘어왔을 때 공격을 가해 또 다시 수만 명을 몰살했다.
그러나 조조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조의 이런 특성을 놓치고 있다. 조조는 당시 천하대세의 흐름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혼란으로 군벌의 난립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세력을 확대키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조조가 황건적과 흑산적 등의 농민봉기군들의 투항을 적극 유도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이를 두고 중국 초대 사회과학원장을 지낸 곽밀약이 평한다. “조조는 비록 황건군을 공격해 초기 대업의 기초로 삼았으나 나아가 황건군을 이어받아 이를 운동조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황건군으로 청주병을 구성한 것이 그의 무력적 기반이 됐다.”
② 농민봉기군을 천하통일의 원동력으로 만들다. 가치평가를 떠나서 곽밀약은 조조가 농민봉기군을 적극 활용해 천하통일의 추동력으로 삼은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당시 농민봉기군을 세력 확대의 기반으로 삼은 것 자체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선구적인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당시 원소를 비롯한 군벌들은 모두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력을 적극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에 원소와 공손찬은 유주와 기주에서 혼전을 벌이고, 원술은 남양에 웅거하며 황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조조는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군벌 간의 쟁투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모든 능력을 발휘해 살아남아야 최후의 승리를 기약할 수 있었다.
조조는 우선 원술을 격파해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는 조조가 군벌들과의 쟁투에서 처음으로 거둔 전과였다. 당시 원술은 조조에게 잇단 참패를 당했음에도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 양주와 서주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고 재기를 노린 게 그렇다. 조조는 원술과의 싸움에서 속전속결을 구사했다. 신속하게 군사를 몰아가 원술 군대의 선봉을 깨뜨리고, 곧바로 주력 부대를 포위해 타격을 가했다. 연이어 둑을 무너뜨려 적이 머무는 성에 수공을 가하고, 다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급박한 추격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원술의 군대는 일방적으로 패배해 멀리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당시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고 있던 원술과의 접전을 승리로 이끈 결과 자신의 세력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역대 왕조의 말기에 빚어진 혼란기 때마다 토벌대상인 반란군이 관군의 일부 내지 주축세력으로 변신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수호지』가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문학작품이다. 20세기 초 장개석이 마적단에서 출발해 힘을 키워 만주 일대의 군벌로 성장한 장작림 세력을 끌어들여 북벌을 성사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조조가 ‘청주병’을 편제한 것을 흉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한때의 적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조조와 같은 대담한 배포와 아량이 필요하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불분명한 현대의 경제전쟁에서는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 ‘적도 스카우트할 수 있는 마인드’가 절실하다.
인재가 세상을 지배한다
‘최고의 무기’는 인재의 능력
급변하는 상황에선 더욱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현실을 공략하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나 지구촌 시대로 변한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많은 인재들과 함께해야 한다. 게다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예측하기 어려운 모든 상황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조가 ‘반(反) 동탁’을 기치로 병사를 일으킨 이래 죽을 때까지 인재를 모으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건안 15년인 210년 조조가 발포한 「구현령」은 21세기 현재까지 리더라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인재발굴의 전형적인 사례’다. 「구현령」의 핵심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허물이 있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다. 주나라 건국 당시 강태공으로 불리는 여상은 주문왕을 위수 강가에서 만날 때까지 궁핍하게 살며 낚시로 소일했다. 주문왕은 여상을 만나 곧바로 그를 국사로 삼고 마침내 건국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능력이 있는 자를 등용하는 것으로 가능하지만,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오직 덕이 있는 자까지 두어야 하는 것이다.
지속적 승리를 위한 원칙 - ‘끈임 없는 인재관리’: 건안 18년인 213년 조조는 위공으로 작위가 올라가 백관을 신설해야 했고 따라서 인재의 선발 및 충원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때 조조는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을 내렸다. 재능과 덕행을 모두 갖춘 인재를 찾기는 어려우니 한쪽으로 치우친 단점이 있을지라도 인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이전에 인재를 널리 천거토록 촉구한 「구현령」보다 훨씬 진전된 것으로 재덕을 겸비한 인재는 매우 희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찰한 결과다. 조조는 어느 한쪽이 부족한 것을 이유로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를 선포한 것이다.
“품행에 구애받지 말고 재능이 있으면 추천하라!”: 인재를 향한 조조의 열정은 그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더욱 강화되었다. 건안 21년인 216년 5월, 그는 위공에서 다시 위왕으로 작위가 올라갔다. 이듬해인 건안 22년인 217년 4월, 천자의 깃발을 세우고 출입할 때 경필을 할 수 있는 특권까지 인정받았다. 경필은 미리 앞서 가며 길을 치우는 등 부분적인 계엄을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보다 많은 인재들이 필요하게 됐다. 이해 8월, 조조는 「거현물구품행령」을 내렸다. 품행에 구애받지 말고 재능만 있으면 무조건 천거하라고 독려한 것이다. 「거현물구품행령」이 나오게 된 근원은 말할 것도 없이 조조의 위나라가 장차 한나라를 대신해 새로운 왕조로 들어설 것임을 예고한 데 있다. 당시 조조가 빠짐없이 천거해야 할 인재로 거론한 유형은 모두 5종류이다.
첫째, 출신이 미천해도 나라를 흥하게 만들 만한 경륜과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은나라 때의 이윤과 부열이 그들이다. 이윤은 비록 노예 출신이나 탕왕을 도와 하나라를 멸한 개국공신이다. 부열은 본래 은나라의 노비 출신이었다. 은나라왕 무정은 부열을 발탁해 재상으로 삼음으로써 은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었다.
둘째, 비록 적이라도 나라의 패업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환공을 춘추시대의 첫 패자로 만든 관중이다. 그는 일찍이 제환공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날려 제환공의 허리띠를 맞춘 인물이다. 제환공은 포숙아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재상으로 삼음으로써 마침내 춘추시대의 첫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셋째, 명성은 높지 않아도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출중한 인물이다. 한나라의 건국 공신인 소하와 조참이 그들이다. 소하는 당초 패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유방을 좇아 천하평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유방이 항우와 다툴 때 군량 등을 제때 공급한 공을 인정받아 논공행상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 인물로 도가를 활용해 한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진 인물이다. 소하와 조참 모두 오랫동안 명재상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넷째,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의 냉소를 받았으나 끝내 왕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한신과 진평이 그들이다. 한신은 집이 가난해 늘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던 젊은 시절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당한 바 있어 저자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그는 이를 개의치 않았고 유방을 도와 천하평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다섯째, 비록 어질지 못하고 불효하기는 하나 용병술에 뛰어난 인물이다. 전국시대의 오기가 그런 인물이다. 오기는 노나라의 장수가 되기 위해 제나라 출신 처를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관직을 구하기 위해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모친이 사망했을 때도 상례에 참석하지 않아 불효한 자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노나라에서 벼슬할 때는 제나라를 대파하고, 위나라에서 벼슬을 할 때는 진나라의 5개성을 공략하는 공을 세웠다. 또 초나라에서 벼슬할 때는 법령을 엄히 해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진과 채를 합병하고, 3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정벌해 제후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삼국시대 당시 대대적으로 인재를 모으고 발탁한 건 조조뿐: 삼국시대 당시 조조처럼 공개적으로 인재를 모은 사람은 없다. 그는 생전에 모두 3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인재를 모았다. 「구현령」과 「취사물폐편단령」, 「거현물구품행령」이 그것이다. 이들 포고령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오직 재능만 있으면 과감히 발탁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擧)’ 원칙이다. 조조가 난세의 시기에 득인(得人)에서 우위를 점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삼국시대 당시 이를 행한 사람은 오직 조조밖에 없었다. 유비는 군자 흉내를 내며 왕도를 내세운 까닭에 근본적으로 이를 행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기차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유비 측이 늘 인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유다. 손권 역시 유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재를 보유하기는 했으나 조조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당대의 인재들이 대부분 현지에 뿌리를 내린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칼’과 ‘붓’으로 실행력을 완비하라
실행력 있는 결단을 습관화하라
실행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결단은 무의미하다: 동탁이 왕실을 앞세워 천하를 거머쥐었을 때 조조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조정의 적으로 몰릴 위험을 무릎 쓰고 대항하는 길이다.
둘째, 산속으로 숨어들어 백이와 숙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동탁 정권에 가담해 새 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조조는 세 번째 길을 책한 채옹과는 달리 첫 번째 길을 택했다. 원소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엄중했다. 객관적으로 동탁의 세력과 비교할 때 조조와 원소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때문에 동탁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퇴군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도 원소는 동탁군의 반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답답해 한 조조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곧바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으나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시 조조는 왜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주장을 펼친 것일까? 그는 동탁군의 무차별적인 노략질로 민심이 등을 돌리고 있는 이때야말로 동탁의 무리를 일거에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런 판단이 타당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가장 염려한 것은 장차 동탁이 장안을 기반으로 안정을 되찾아 천하에 군림하는 상황이었다. 이 경우 자신을 포함한 ‘반 동탁’세력은 모두 ‘조정의 적’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반 동탁’ 연합군의 수장으로 추대된 원소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조조가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단독으로 진격한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릇 모든 종류의 거사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이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때는 가차 없이 결단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결단한 뒤 신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 『손자병법』을 비롯한 병서가 하나같이 때가 왔을 때 신속히 병력을 이동시켜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른바 ‘병귀신속(兵貴神速)’을 역설한 이유다.
기회를 승리(목표 달성)로 연결하는 방법: 한헌제가 이곽과 곽사의 추격을 벗어나 유랑하고 있을 때 원소는 한헌제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때 조조의 책사 순욱은 조조에게 천자인 한헌제를 맞아들이는 것이 바로 대순(大順), 대략(大略), 대덕(大德)에 해당한다고 역설했다. 주상을 맞이해 백성의 바람을 따르는 것이 시의를 좇는 대순이며, 지공(至公,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으로 천하 사람을 심복시키는 것이 대략이고, 대의를 널리 일으켜 천하영재를 부르는 것이 대덕이라는 것이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한헌제를 맞이했다. 이로써 한헌제는 조조의 비호를 받게 되었지만 사실상 조조의 인질이 된 것이다. 일거에 천하를 호령한 근본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는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올라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원소는 우물쭈물하며 이를 결행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여기서 갈렸다. 결정적인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가, 그런 기회가 오면 반드시 과감하게 기회를 맞이해야 하는 법이다.
난세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꽉 거머쥐는 자가 결국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 조조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가 조금만 더 생존했다면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었을 것이다. 난세의 정도가 심할수록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위기 속에 항상 기회는 존재하는 법이다. 기회를 찾아서 과감한 도전을 해야 한다. 2002년 BBC가 영국인 1백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100명’가운데 뉴턴과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피 한 방울 없이’ 승리하라!
최상의 승리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적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 조조가 새롭게 편제해 펴낸 『손자약해』는 현존 『손자병법』의 원본이다. 모두 13편으로, 「시계」, 「작전」, 「모공」, 「화공」, 「용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의 모든 상황을 간명한 문체로 체계화한 것이 특징이다. 『손자약해』는 21세기인 현재까지 인간경영의 보고로 간주되고 있다. 인사의 성패 등 국가경영뿐만 아니라 사적인 차원의 인간관계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21세기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 『손자약해』의 지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손자약해』를 비롯한 병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기에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은 채 적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이른바 부전굴인(不戰屈人)에 있다. 그러나 실전에서 ‘부전굴인’은 대부분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압도적인 무력적 우위를 점하기 전에는 상대가 쉽게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압도적인 무력적 지위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미국이 월남에서 철수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한 게 그렇다. 한편 초한전 당시 한신은 병서에 나오는 배수진을 역이용해 대승을 거뒀다. 병서에서 말하는 이치를 실제 상황에 대입해 가장 적합한 해답을 찾은 결과다. 『손자병법』「모공」은 그 이유를 이같이 설명해놓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울지라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 적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