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넘어졌다면, 일어나라!

니토리 아키오 지음 | 서울문화사



넘어졌다면, 일어나라!



니토리 아키오 지음

서울문화사 / 2016년 7월 / 387쪽 / 15,800원



공부를 싫어하는 열등생



[사할린에서 태어난 아이 / 암거래 쌀로 버티다] 나는 1944년에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참전했고, 전쟁에서 패한 뒤에는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태평양전쟁 후 사할린 땅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7년 어머니와 우리는 귀국해 삿포로에 사는 외갓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에야 그 집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다른 귀국자 주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곧 목수 일에 뛰어들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아버지는 조그만 회사를 세웠다. 콘크리트 제품을 만들고, 주택 기초공사를 하는 토목 회사였다. 어머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암거래 쌀장사를 시작했다.

[가혹한 유년기 / 왕따 당하는 아이] 내가 유년기를 보낸 1940년대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게 절박했던 때라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실수하면 반드시 꾸짖었고, 항상 매질이 따랐다. 몸이 아프고 열이 나도 집안일은 계속 도와야 했다. 학교생활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고, 나는 공부도 못했다.

가수가 되려 했던 청년



[주산 대회 우승]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부터 내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주산만큼은 잘했고, 500명이 참가하는 대회에 나가 1위도 했다. 이즈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셨다. “넌 느려 터지고 둔해. 그러니까 성공하려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든가.”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머리가 좀 나쁘면 어떠냐? 명문대 나온 우수한 인재를 고용하면 될 거 아니냐?” 나는 이 말을 새겨 두고 오늘날까지 실천하고 있다.

[단기대학과 헌팅] 1962년, 삿포로 단기대학(우리나라의 전문대학과 비슷함)에 간신히 들어갔다.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고, 가라데부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은 그런대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수업료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편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게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 후 헌팅을 잘하기로 소문난 친구를 찾아가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2년 동안 착실히 배우고 연습했다.

[가수를 꿈꾸다] 사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내 꿈은 가수였다. 늘 레코드를 틀어 놓고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심히 연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삿포로에서 열리는 ‘NHK 노래자랑’에 출전하게 되었다. 나는 목청껏 부르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한 옥타브가 엇나가고 말았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그냥 계속 부르려는데, 한 소절이 끝나자마자 ‘땡’ 하고 불합격 종소리가 울렸다.

[컨닝으로 명문대 합격? / 깡패 아르바이트] 단기대학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대학 생활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도 점점 커졌다. 그래서 홋카이가쿠엔 대학에 편입 시험을 보고 1964년 드디어 염원하던 홋카이가쿠엔 대학 경제학부의 학생이 되었다. 명문대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안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는 아는 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주로 하는 일은 밀린 외상값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대학 다니며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야구부와 유도부 친구들이었다. 방학 때면 이 친구들과 아버지 회사 일을 도왔는데, 나는 집을 짓기 전 기초공사의 감독을 맡아 현장을 돌아다녔다. 체육 동아리 친구들은 돈을 벌면서 체력을 단련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해 주었다. 이들이 부지런히 힘을 쏟자 공사는 척척 진행되었다. 이때 감독인 내가 받은 돈은 회사원 평균 월급의 1.5배 정도였다.

되는 일이 없던 시절



[가출과 광고 회사 취직] 1966년 홋카이가쿠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니토리 콘크리트 공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어마 안 된 그해 7월에 맹장염에 걸렸다. 그런데 수술이 늦어 유착이 일어나는 바람에 회복도 늦어졌다. 의사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며 쉬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집에서 놀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냐. 그냥 일해라” 하고 압박을 가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쌀 배달을 나간 사이를 틈타 짐을 싸서 가출했다. 가출한 직후 우선 삿포로 시내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 친구가 쓰는 다락방에 잠시 빌붙어 지냈다. 하지만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숙소까지 제공해 주는 직장을 알아보고 도쿄에 본사를 둔 광고 회사 ‘교에이쿄교’에 입사했다.

[쓸모없는 영업사원 / 광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다] 중소기업들로부터 광고를 따오기로 하고 6개월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한 달에 50만 엔의 광고를 따오는 것이 최하 기준선이었다. 그런데 나는 첫 달부터 한 번도 그 기준을 채우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났다. 결국 나는 해고당했다. 광고 회사에서 해고당한 후 이력서를 들고 대여섯 군데 회사를 돌아다녔지만, 취직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만둔 광고 회사의 소장을 다시 찾아가 “무슨 일이든 맡겨 주십시오” 하고 매달렸다. 소장은 마지못해 다시 받아 주었고, 나는 수금, 버스 광고판 디자인, 스티커 붙이기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일은 못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싹싹하다는 이유로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숙소에서 저녁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면 선배들이 나를 주점에 데려갔다. 이렇게 노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거짓말과 유치장 / 1년 만에 집으로] 광고 회사에 다시 들어가 6개월 동안은 정말 재미있게 지냈다. 하지만 영업 실적은 역시나 형편없었다. 다시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 후 예닐곱 개 회사의 면접을 보았지만 모두 불합격이었다. 삿포로 시내를 힘없이 건들거리며 걷다가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니토리 콘크리트 공업의 전무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형편없이 살래? 직장이 없으면 내가 하는 일이라도 도와라.” 나는 그 길로 회사에 복귀했다. 나는 삼촌이 맡은 아사히카와 시 수도 공사의 현장감독 조수가 되기로 했다.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좋았지만, 집에는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년 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평소 잘 안 드시는 술을 마시고 계셨다. 아사히카와 시에서 감독 조수를 하며 측량 같은 기술도 배웠다. 두 달 후 다키가와 시에서 수도 공사를 하게 되자, 10명 정도 인부들과 함께 하는 현장의 감독을 맡기로 했다.

[힘, 스모, 화투, 술로 승부하다] 뜨내기 인부들을 다스려 가며 다키가와 시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기쁨도 잠시였다.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눈발이 흩날리는 밤 현상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불길한 마음에 마시던 술을 팽개치고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직원 숙소에서 불이 나 몽따 타 버리고 재만 남아 있었다. 일단 현장을 해산하기로 했고, 감독인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모두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가업을 포기하다 / 가구점을 창업하다] 망연자실한 상태로 며칠을 지내다가 삿포로의 본가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가 내 앞날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회사가 매년 적자라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할 것 같다. 이쪽은 장래성이 없다. 네 앞길을 찾아봐라.” 마침 니토리 콘크리트 공업이 소유한 30평짜리 건물이 있었다. 어머니는 차라리 우리가 그곳에서 장사를 해 보자고 하셨다. 가게 주변에는 주민들의 의식주와 관련된 가게들도 많았다. 그런데 유독 가구점만 보이지 않았다. 1967년 12월 드디어 니토리 1호점이 삿포로 시에서 문을 열었다.

[이미지를 우선으로, 간판에는 거짓말을] 가구점 이름은 ‘니토리 가구 도매 센터 북지점’이었다. ‘도매’는 물건 값이 싸다는 이미지, ‘센터’는 매장이 크고 종류도 많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또 다른 곳에 본점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북지점’이란 말도 넣었다. 전단지를 돌렸을 뿐인데, 처음엔 꽤 팔렸다. 하지만 개점 후 1주일 정도가 지나자 손님이 확 줄었고, 4개월이 지나도 매출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나는 가게 2층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돈을 못 버니 먹는 것도 변변치 않아 결국 영양실조 상태가 되어 시력이 나빠지고 각기병 증세가 나타났다.

[여덟 번의 맞선 끝에 만난 아내] 그런 궁상스런 내 모습에 어머니가 결혼을 하라고 재촉했고, 결국 나는 여덟 번째 맞선을 본 모모요와 1968년 결혼을 했다. 아내는 애교 있고 붙임성도 좋았다. 게다가 통솔력도 있었다. 가구점의 채산이 맞으려면 연매출이 700만 엔은 되어야 했다. 그런데 개업 초기 연매출은 500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모요가 판매에 나서면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 1년 후 매출은 1,000만 엔으로, 그 다음해에는 1,500만 엔까지 늘어났다. 덕분에 나는 배달과 물건 구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역할 분담이 니토리 가구 1호점을 성장시킨 가장 큰 비결이었다.

[거짓으로 받아 낸 융자] 니토리 가구 1호점의 경영이 궤도에 오르자 경영이 재미있어지고, 사업을 키우고 싶은 의욕이 샘솟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니토리 콘크리트 공업 소유지에 2호점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당장 1,500만 엔 정도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니토리의 신용 상태로는 은행의 대출이 불가능해, 신용금고에 대출을 받아 1971년 니토리 2호점을 열었다. 250평 규모의 홋카이도 최초 창고형 가구 매장이었다. 2호점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높은 이자가 아까웠기 때문에 신용금고에서 빌린 돈은 2년 만에 다 갚아 버렸다.

[지푸라기라고 붙잡고 싶은 마음] 1972년도에 자본금 3,000만 엔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주식은 가족들이 적당히 나누어 가졌다. 주식회사를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홋카이도에 가구 매장이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니토리 2호점으로부터 500미터 떨어진 곳에 들어선 1,200평 규모의 가구점이었다. 손님들은 니토리보다 네다섯 배는 넓은 이 매장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구업 협회의 한 컨설턴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내게 동업자 50여 명이 함께하는 미국 가구점 시찰에 참석하도록 권했다. 참석 비용은 40만 엔이었다. 회사 사정을 생각하면 무리한 일이었지만, 나는 참가했다. 하와이를 경유해서 미국 서해안에 내렸다. 시어즈 백화점 가구 매장과 가구 전문 체인점 래빗 등을 둘러보았다. 매장이든 쇼룸이든 가는 곳마다 충격을 받았다. 옷장이나 서랍장이 따로 놓인 경우는 없었다. 모두 벽장처럼 설치된 커다란 장 안에 편리한 구조로 들어가 있었다. 옷장 문을 닫으면 벽과 매끈하게 조화를 이루어 방 안이 넓고 깔끔해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미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사람은 누구나 같아. 언젠가 일본인들도 지금 이 곳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원하게 될 거야.’ 그 다음부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귀중한 정보였다.

[미국 시찰에서 얻은 깨달음] 미국 시찰 중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가격이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 가구 가격이 일본의 3분의 1 정도였다. 즉, 소득이 같을 경우 미국인은 일본인보다 세 배는 더 풍요롭게 살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이런 풍요로움을 일본에서도 실현하고 싶다. 내 힘으로 월급을 3배 올려주기는 어렵지만 가구 가격을 3배 더 싸게 낮출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처음으로 니토리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이 싹텄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수첩을 꺼냈다. 미국에서 오늘날의 풍요로움이 꽃피기까지 120년이 걸렸다. 일본에서는 60년이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0년 후 나는 90살이 된다. 아무래도 90살은 자신이 없어 60년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일단 전반부 30년, 즉 60살까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 10년은 ‘매장 만들기’, 그 다음 10년은 ‘사람 만들기’, 도 다음 10년은 ‘상품 만들기’로 정했다.

[3호점을 위한 끈질긴 교섭] 나는 당장 3호점 개장을 추진했다. 삿포로 아사부 지역의 모퉁이 땅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땅은 입지 조건이 아주 좋았다. 다만 땅을 사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공불락’의 땅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땅을 공동 소유하고 있는 4명의 형제가 매각 요청에 좀처럼 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땅을 사러 갔더니 4형제 중 장남이 나왔다. 나는 땅을 왜 사려고 하는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저는 미국에서 보고 온 풍요롭고 넉넉한 생활을 일본에 전하고 싶습니다. 이 땅을 그 일을 위한 거점으로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 시찰을 하며 느낀 점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결국 장남은 고집을 꺾었고, 시간을 주면 동생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1973년 니토리 3호 아사부점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니토리 가구의 출발이었다.

[화제가 된 고릴라 광고] 아사부점은 처음 1년 동안은 초기 투자 자금이 너무 커서 예상대로 적자였다. 하지만 2년째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큰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손님을 끌어 모으려면 눈에 띄는 광고는 필수다. 그래서 만든 것이 1975년부터 시작한 고릴라 광고다.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썼다. 광고에는 암컷과 수컷 고릴라 한 쌍이 출연한다. 수컷은 파란색 팬티, 암컷은 분홍색 팬티와 브래지어를 입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옷감이 모자라 수컷의 팬티가 짧아지고 반쯤 벗겨졌다. 하지만 어딘지 야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작품에는 잠자기 전 고릴라 부부의 모습을 담아냈다. 남편 고릴라가 화장대 앞에서 크림 바르는 아내 고릴라를 바라보며 “우리 집 가구는 니토리 가구. 나는 멋진 남편 고릴라. 물론 내 아내는 미인 고릴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은 인간과 같아”라면서 아내를 침대로 데리고 들어간다. 이 광고가 나간 프로그램이 마침 시청률 높은 ‘청춘 남녀 데이트 프로그램’이었다. 광고와 프로그램의 내용이 잘 맞아 떨어진 덕분인지 고릴라 광고는 금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 후로도 나는 지점을 개장할 때마다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은 행사를 하려고 머리를 짜냈다.

[균일가로 승부하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할부 판매를 했다. 일단 가구를 배달해 주고 대금을 한 달에 한 번씩 총 3회 정도로 나누어 받았다. 당시엔 할부나 신용 판매가 널리 도입되지 않았을 때라 고객들이 좋아했고, 판매도 늘었다. 하지만 점점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야반도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꾸 계속되면, 경영이 안정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할부 판매를 그만두고, 정찰제 판매를 하기로 했다. 여전히 가구 할인 판매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이런 가격 전략은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지표로



[인생의 스승을 만나다 / 아쓰미 선생님의 가르침]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한다. 아사히키와 시에 있는 가구 공장에 계약을 맺으러 갔을 때였다. 응접실에 앉아 있다가 체인점 경영에 대한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에는 그동안 내가 고민하던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답이 나와 있었다. 그 책의 저자는 아쓰미 이치 선생님이었는데, 그는 성장 가능성이 크고 뜻을 같이 하는 기업들을 모아 체인 스토어 경영 연구 단체인 ‘페가수스 클럽’을 만들었다. 아쓰미 선생님의 책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론의 출발점은 체인점 점포수가 100개, 200개로 늘어나면서 생기는 구매력(buying power)에 있었는데, 이런 구매력은 유통업자에게 가격결정권을 주게 되고, 상품을 기획해 공장에 주문할 수도 있게 한다. 나는 페가수스 클럽에 1978년도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