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센트 마화텅
렁후 지음 | 큰나무
텐센트 마화텅
렁후 지음
큰나무 / 2016년 6월 / 320쪽 / 15,000원
그린 다이아몬드 시대 “크게 소리치며 뛰어들다”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엔지니어
새로운 길을 찾다: 어려서부터 천문학자를 꿈꾸어왔던 마화텅은 대학에 진학하면 천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어울리던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이 대부분 지리교사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컴퓨터를 전공하기로 선택했다. 컴퓨터 분야로 뛰어든 마화텅은 대학 졸업 후 무선통신호출업체인 룬쉰통신발전에 입사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마화텅은 곧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개발팀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마화텅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개발 팀장이었던 그는 회사를 위해 미래를 내다보고 다양한 건의를 했지만 번번이 묵살되었다. 마화텅은 마침내 보다 큰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자 결심했다.
1998년 10월, 마화텅은 정식으로 사직서를 내고 룬쉰을 떠났다. 1998년은 중국의 인터넷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해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용감하게 인터넷 기업을 창업했고, 이 새로운 전쟁터에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마화텅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가 처음 선택한 방향은 호출과 네트워크였다. 지난 5년 동안 룬쉰에서 일하고 인터넷에 심취해 전문가적 경험을 쌓았던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지식과 경험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갖춘 마화텅은 호출과 네트워크 방면에서 사업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고난과 시련의 창업 여정
시련에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전진하라: 마화텅이 창업의 뜻을 밝히자 어머니 황후이칭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아들이 알게 모르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 마천수는 아들의 창업을 크게 찬성하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11월, 마화텅은 장즈둥과 ‘선전텐센트컴퓨터시스템유한공사’의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텐센트의 중국명은 ‘텅쉰’이다. ‘텅(?)’은 마화텅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동시에 ‘비약’의 뜻을 담고 있다. ‘쉰(迅)’은 그가 이전에 몸담았던 룬쉰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창업 당시 텐센트는 아주 작은 회사였다. 창업 멤버 다섯 명은 선전의 몇 평 되지도 않는 작은 사무실 안에 모여 복작거리며 일했다.
처음에는 인터넷을 호출서비스와 연계해 무선인터넷 호출시스템을 내놓을 생각이었기에 선전텔레콤, 선전유니콤 등 호출서비스 업체와 접촉해 협업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바람에 정작 마화텅이 가장 몰입해 있었던 IM(Instant Messaging)개발은 뒤로 밀리고 말았다. 당시 텐센트는 자본 100만 위안에 10여 명의 직원뿐이었기에 자신들만의 IM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고 개발하기에는 자금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나래주의(拿來主義, 외래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는 방식)’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시 중국 IT 업계는 전반적으로 모방이 많았다. 창업에 뜻이 있는 IT 업계 인사들은 인기 있는 외국 소프트웨어의 ‘중국어판’을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다보니 중국에 인터넷이 퍼지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외국 소프트웨어를 복제한 사례가 수없이 많았다. 텐센트의 OICQ(Open ICQ) 역시 친구 찾기 및 온라인 메신저 프로그램인 ICQ (“I Seek You”)를 모방한 것이었다.
1999년 2월 11일, 드디어 텐센트의 OICQ 서비스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의 OICQ와 지금의 QQ는 크게 다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OICQ는 특별히 새로운 기능을 더한 것도 없는 ICQ의 중국어판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텐센트는 이후 오랫동안 ‘카피캣(copycat)’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OICQ는 서비스 초기에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제 마화텅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소프트웨어로 돈을 버는가?’였다. 마화텅과 동료들은 OICQ를 구매해줄 기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마화텅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모든 시련과 좌절은 일시적일 뿐이라며 주어진 일을 끝까지 충실하게 하다 보면 새로운 기회와 행운이 올 거라고 믿었다.
떠오르는 OICQ에 속 터지는 ICQ: 1999년 8월부터 9월까지 텐센트는 AOL로부터 경고장 두 통을 받았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ICQ는 AOL(America Online, Inc.)의 지식재산이다. 텐센트가 1998년 11월 7일에 등록한 oicp.net과 1999년 1월 26일 등록한 oicq.com의 도메인 이름에 ICQ를 포함한 것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행위이다. 따라서 텐센트가 두 가지 도메인 oicp.net, oicq.com을 모두 AOL에 무상으로 이전해야 한다.” 결국 법정에서 만난 양측 변호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다. 결과는 텐센트의 패배였다. 판결문에 따라 텐센트는 oicp.net과 oicq.com을 모두 AOL에 이전해야 했다. 소송에서 패배했지만 천만다행으로 OICQ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다. 마화텅도 도메인을 이전하고 새로운 상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크게 속상해하지 않았다. 그는 OICQ의 명칭을 바꾸는 것에 대해 사용자들에게 공지하고, 모든 과정을 매우 조용하게 처리했다. 아주 예민한 사용자들만 그 작은 변화를 눈치 챘을 뿐이었다.
2001년 3월 25일, 새로운 ‘0325 버전’을 출시하며 펭귄은 그동안의 정식 명칭이었던 ‘OICQ2000’이 아닌 ‘QQ2000’으로 바꾸었다. 왜 QQ였을까? AOL이 텐센트에 소송을 걸기 전부터 사용자들은 이미 OICQ를 QQ로 부르고 있었다. 좀 더 쉽게 발음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텐센트는 아예 QQ를 OICQ의 새로운 이름으로 결정했다. 그러면 사용자들의 습관과 일치하므로 거부감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QQ는 단순하고, 입에 잘 붙어야 한다는 브랜드 네이밍 법칙에도 부합했다. OICQ를 QQ로 과감하게 바꾼 것은 매우 탁월한 전략이었다. 마화텅은 도메인 소송에서 승소한 AOL이 이제 지적재산권에 관한 소송을 걸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전에 OICQ를 QQ로 바꾸면 소송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사용자들이 OICQ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을 크게 불편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사용자들은 이것이 일종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 아닐까?
새로운 이름과 더불어 QQ에는 몇 가지 기능이 더해졌다. 사용자들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아바타였다. 사용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예쁜 아바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아바타 저작권 문제도 해결됐다. 초기에 텐센트는 유명만화의 주인공 캐릭터인 도널드 덕, 가필드, 피카추 등을 무단으로 사용했는데 AOL과의 치열한 소송을 겪은 후 마화텅은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것은 전부 없앴다. OICQ는 떠났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 생긴 QQ는 더 강하고, 중국에 꼭 맞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QQ는 마화텅과 텐센트에 더 큰 발전의 길을 열어주었다.
블랙 다이아몬드 시대 “폭풍 속에서도 두려움이란 없다”
자본시장의 남극여우
적자에서 흑자로: 2000년 봄, QQ의 동시 접속자 수가 1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2001년 8월, 텐센트가 마침내 확실한 수익창출 모델을 찾으면서 마화텅은 어느 정도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텐센트는 광동 지역에서 QQ를 통해 PC와 모바일 간 사용자 소통이 가능하도록 광둥모바일과 협약을 맺고 인터넷과 모바일을 연결했다. 컴퓨터에서는 QQ로, 모바일에서는 문자메시지 프로그램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 기능은 모바일 시대의 사용자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광둥모바일과의 합작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텐센트는 그동안 계속되던 적자를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특히 그해에 인터넷과 모바일에서의 경쟁이 치열했음에도 매우 빠른 속도로 시장의 50%를 점유했다. 일단 물꼬가 트이자 다른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마화텅은 계속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했다. 텐센트는 컴퓨터용 메신저 사업 외에 광고, 모바일 메신저, QQ 유료회원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다양한 사업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준 것은 뜻밖에도 QQ 브랜드의 아웃소싱 사업이었다. 마화텅은 귀여운 QQ의 펭귄 캐릭터를 제공하고 저작료로 이윤의 10%를 받았다. QQ 펭귄 캐릭터는 당시 인기 있었던 헬로 키티보다 2배나 많은 저작료를 벌어들였다. 마화텅은 이 작은 펭귄이 벌어다주는 돈을 보면서 이전에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분야에서 생각지도 못한 황금을 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차 텐센트는 QQ 관련 상품을 내놓으며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판매를 이어갔다. QQ는 단순한 메신저 프로그램에서 일종의 문화코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QQ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곧이어 ‘네트워크 연애’, ‘네트워크 친구’ 같은 신조어가 출현하기도 했다. 텐센트는 광고 유치 사업에서도 크게 성장했다. 2000년 8월, QQ의 뉴스코너에 처음으로 배너광고가 등장했다. 이후 3개월 동안 텐센트가 유치한 광고가 크게 늘어났다. 2000년 12월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텐센트는 광고만으로 150만 위안을 벌어들였다. 인터넷 버블이 꺼져 가는 불황이기는 했지만 2001년 2월에 광고량이 절반으로 감소한 것 외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으며 3월부터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사람들은 이 작은 펭귄이 한 발, 한 발 걸어서 어느새 높이 올라간 것을 보고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기적을 일으켰지?’, ‘QQ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정답은 무척 단순했다. 바로 텐센트가 저가 정책을 취한 것이다. 광고 한 건당 텐센트가 받는 비용은 9만 위안으로 일주일 동안 약 1,000만 명에게 노출이 보장되었다. 이것은 모두 QQ가 많은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텐센트는 2001년에 순이익 1,022만 위안을 달성하고, 다음해인 2002년에는 전년도보다 10배 이상 많은 1억 4,400만 위안의 순이익을 올렸다. 또 2003년에는 전년도의 2배가량인 3억 3,800만 위안까지 끌어올렸다. 2004년에는 더 크게 성장했다. 이해에 텐센트는 매출액이 11억 4,400만 위안에 달했으며 순이익으로 4억 4,600만 위안을 벌어들였다. 마화텅은 그제야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동안은 혹시라도 다시 자금이 바닥나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니게 될까봐, 한 푼,한 푼 신중하게 사용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세운 기업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업이 성장하면서 마화텅은 네티즌의 주목을 받는 IT 인사가 되었고, 각종 부호 순위에 이름을 올리며 중국 경제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하더라도 마화텅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매일 저녁 컴퓨터를 켜고 QQ의 접속자 수를 보거나 서버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하루가 마무리된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오늘날 마화텅은 만인의 주목을 받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높은 안목과 지혜를 보고 갈채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영광스럽고 휘황찬란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시련과 좌절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핑크 다이아몬드 시대 “사랑받고 또 사랑받으리”
최고가 된 펭귄
위챗의 성공: 2011년 1월 21일 텐센트가 처음 선보인 위챗(WeChat, 인스턴트 모바일 메신저)은 스마트 기기 전용 메신저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스마트 기기 애플리케이션과 마찬가지로 통신업체와 기기의 컨트롤 시스템을 넘어서 무선 인터넷을 통해 빠른 속도로 정보를 송수신한다. 위챗은 데이터 소모가 적으며 흔들기나 드리프트 보틀 등의 재미있는 서비스 플러그인이 포함되어 사용자들을 매료시켰다. 위챗은 나오자마자 수많은 모바일 기기사용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더니 2012년 3월 29일에 사용자 수 1억을 돌파했다. 출시 433일만의 쾌거였다!
사용자들은 위챗의 음성메시지 기능을 사용하면 스마트폰이 마치 소형 무전기처럼 변신하는 것에 열광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신업체들은 안 그래도 SMS(단문 메시지)와 MMS 사업이 서산에 지는 해 같은 마당에 설상가상으로 위챗이 나타나 음성통화까지 위협하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 위챗은 정말 거대한 충격이었다. 오늘날 위챗은 모바일 메신저 업계에서 사용자 수 4억을 자랑하는 ‘최강자’로 자리 잡았다. 모바일 인터넷 업계에서 성공을 꿈꾸는 창업자들에게 위챗은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다. 아마 시장에서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위챗은 창업가, 스타트업 기업들을 받아들여 그들이 사용자를 위해 다양한 상품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장이 되었다. 이처럼 폐쇄에서 개방으로 형식을 전환하자 애플리케이션 제작자들은 다가올 변화에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마화텅이 말하는 개방은 절대적 의미라기보다 관용적인 마음가짐으로 플랫폼을 건립해 인터넷 내부에 흩어진 각종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다. 위챗은 모바일 메신저뿐만 아니라 4억에 달하는 사용자를 보유한 ‘모바일 집합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제공하는 내용이 독창적이고 풍부하다면 위챗 안에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유명세를 누릴 수 있다. 한 마디로 위챗은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에 비유할 수 있다. 만약 사용자가 이 요리들에 만족하지 못하면 전부 없애고 다시 차릴 수도 있다. 위챗이 현재의 애플리케이션 중 절반 이상을 사라지게 만들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위챗은 더 많은 콘텐츠를 받아들여서 사용자들이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더 다양하고 전문적으로 각 사용자에게 적합한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텐센트가 아직 구글 글래스 같은 상품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마화텅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진화된 형태의 ‘Q봇’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위챗, QQ, Q봇이 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영향력은 마화텅 본인조차도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퍼플 다이아몬드 시대 “최고의 자리에서 호령하다”
MSN과의 한판 승부
호랑이를 기르다: 마화텅의 작은 펭귄이 중국 인터넷 업계의 새로운 별로 떠오를 무렵, 외국의 메신저 하나가 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바로 MSN이다. MSN은 마이크로소프트 MS가 세운 인터넷 콘텐츠 제공업체로 1995년 8월 24일에 ‘윈도우95’가 출시되면서 처음 등장했다. MSN은 채팅, 동영상, 이메일 수신알림 등 다양한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마화텅의 QQ와 비교했을 때 MSN의 가장 큰 장점은 윈도우와 완벽하게 결합한 것이었다. 덕분에 사용자는 MSN을 설치하면서 하드디스크 용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90년대에는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작았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장점이었다.
2001년 10월, MS는 다시 중국어 버전 MS Explorer 소프트웨어를 출시했다. 그리고 이제껏 해온 것처럼 중국 네티즌에 맞춰 수정한 MSN 중문판 사이트의 링크를 걸었다. 이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던 MSN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빠르게 자라 어느덧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마화텅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그 나무의 아래에 서 있는 꼴이었다. 가장 큰 ‘적수’가 줄곧 그의 곁에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MSN은 매우 머리가 좋았다. 그들은 메신저를 네티즌의 컴퓨터 안에 ‘심어두고’ 일부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온실 속에서 천천히 ‘양분’을 흡수한 MSN은 한참 동안 에너지를 축적하더니 어느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야말로 ‘늦게 뛰어들어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적을 상대할 때 한 걸음 양보하여 그 우열을 살핀 뒤에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단번에 적을 제압하는 전략)’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