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사람이 전부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 중앙경제평론사
사업은 사람이 전부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중앙경제평론사 / 2015년 10월 / 256쪽 / 13,000원
1장 사람을 쓰다
사람을 쓰는 건 공적인 일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기업이 있다. 작게는 개인 상점부터, 크게는 수십만 명의 직원이 소속된 대기업까지 업종도, 규모도 다양하다. 그중 국가나 지자체가 출자한 기업을 ‘공기업’으로, 그 외 민간기업이나 상점을 ‘사기업’으로 부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형태상, 혹은 법적으로는 사기업이라 해도 ‘본질적으로는’ 이들 전부를 공기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모든 기업이 공공을 위해, 또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마을의 채소가게를 예로 들어보자. 기본적으로 채소가게의 비즈니스는 운영 당사자의 생계를 위해 이뤄진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마을 사람들은 채소가게가 있음으로써 ‘언제든, 쉽게, 필요한’ 채소를 구할 수 있다. 만일 채소가게가 없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재배하든, 아니면 어딘가의 농가까지 직접 사러 가야만 한다. 어느 쪽이든 오늘날의 도시 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만큼의 수고와 시간이 소요된다. 이를 금전으로 환산할 경우 상당히 비싼 채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채소가게의 비즈니스는 어떤 면에서 가게 주인의 생계를 위해 이뤄진다고 볼 수 있지만, 보다 큰 관점에서 보면 마을 사람들이 찾는 채소를 보다 저렴하고 편리하게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공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채소가게는 사기업이면서, 동시에 공기업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처럼 영세한 채소가게라 할지라도 공공 기업, 소위 ‘사회의 공기(公器)’라 할 수 있다. 하물며 거액의 자본을 모아 다수의 임직원을 안고 사업하는 대기업은 형태상으로 주식회사, 사기업일지라도 그 본질 속에는 ‘세상의 것, 사회의 공기’라는 요소가 담겨 있다. ‘사람을 쓴다’는 의미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기업은 사회의 공기’라는 인식, 즉 ‘기업의 공공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인식 없이는 사람의 재능을 제대로 살려 쓸 수 없다.
상호 간의 비즈니스로 이뤄진 사업은 단지 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켜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세상에 공헌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일, 자신의 비즈니스가 갖는 존재의의가 있다. 경영자는 바로 이런 점을 반드시 자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기업이 공기’라는 인식을 가지면, 그 기업 활동에 사람을 쓰는 것도 모두 공적인 일이 된다. 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람을 쓰는 게 아니라, 세상에 보다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협력을 구하는 것이다.
수만 명이 일하는 대기업에는 실로 다양한 직종이 있다. 그 어떤 업무도 혼자 다 할 수는 없다. 모두 다 그 기업이 사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과정 중 필요한 일들이다. 그 필요한 일들을 위해 기업이 사람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상으로는 경영자가 사람을 고용하고 상사가 부하를 써도, 실제로는 기업으로서의 공적인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필요한 일을 분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회사의 직책 구조는 조직 전체가 보다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 형태상 사용자와 피사용자의 입장으로 치환된 데 지나지 않는다. 이와 별개로 사람을 쓰는 건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을 위한 일이다.
이처럼 ‘사람을 쓰는 게 공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면 비로소 그 지점에 ‘하나의 신념’이 생긴다. 사람을 써서 일을 하다 보면 때때로 질책하거나 주의를 줘야 할 때가 있다. 사실 그런 일들은 듣는 입장에서도 싫고, 하는 쪽에서도 별로 내키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귀찮다는 이유로, 또 하기 싫다는 이유로 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기업은 사회의 공기이며, 사람을 쓰는 게 공적인 일’이라 생각한다면 사적인 인정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념을 가져야 할 일을 말할 때 말하고 질책해야 할 때는 질책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업이 갖는 저력도 발휘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단지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질책하거나 처우해서도 안 된다. 물론 사람인 이상 그런 일들을 완전히 없앤다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적인 감정에 좌우되지 않도록 항상 신경 쓰는 마음가짐 자체가 필요하다. 어디까지나 사회의 공기로서 기업이 가진 사명에 비춰보고, 항상 무엇이 바른지를 생각하면서 사람을 쓰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일상적으로 기르다 보면 마침내 신념을 갖고 사람을 쓸 수 있다. 가령 질책하거나 주의를 줘야 할 일이 있어도 상사가 그런 마음가짐에 입각한다면, 직원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질책하는 상사의 모습에 오히려 감복하고 하나의 인격체로서도 성장한다. 그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결국 그건 그 사람이 사심에 따라 질책하지 않고, 공적인 입장에 입각해 질책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쓸 때 이처럼 비즈니스가 공적인 일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갖는 데서 비로소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사람을 부린다는 건 사실은 괴로운 일이다
신입사원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치자. 당분간 그 사람은 소위 ‘평사원’으로 일하며 쓰임 받는 입장에 서게 된다. 쓰임 받는 입장에 있다 보면 간혹 쓰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쓰는 쪽에선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지시할 뿐이지만, 쓰임 받는 쪽에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한 뒤 뭐든 해야 한다. ‘아, 힘들어. 나도 빨리 사람을 쓰는 쪽에 서야지…….’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 사원이 점점 경험을 쌓아 다른 사람을 쓰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떨까. 지위가 올라가면 월급도 올라간다. 또 부하도 많이 생기고 역할도 커지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옛 속담에 ‘사람을 부리는 건 (편해 보여도) 사실은 괴로운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사람을 쓰는 건 겉으로 보기에 편해 보여도 여러 가지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옛 봉건시대에는 주군이 말하는 게 곧 절대적이었다. 부하처럼 쓰임 받는 입장에서는 군말 없이 그저 복종해야만 했다. 당시는 주군의 명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게 도덕처럼 간주되었다. 그래서 주군 입장에서 보면 부하가 뭐든 말만 하면 그대로 따랐으니 편해도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사람을 부리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하물며 오늘날은 민주주의 시대다. 쓰든 쓰임을 받든 그건 일단 ‘직장’이라는 공간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이며,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하다. 죽음을 불사하긴커녕 상사의 지시가 납득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거나 때론 거부하는 게 일반적인 풍조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을 쓰기가 옛날보다 더 어려워졌다.
나는 다행히도 예전부터 좋은 상사들을 만나, 말하자면 그 보호 아래서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의를 갖고 상사에게 협력해 새로운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어느 순간 많은 부하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럼 그렇게 생긴 부하들이 이전의 내가 그랬듯 성의를 갖고 협력해줬을까. 당연히 그런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주임이 왔다. 이 사람은 주임으로서 아직 경험이 일천하지만, 나라도 이 사람을 잘 따라야겠다’며 선의를 갖고 따라오는 부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하도 틀림없이 있었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게 낫다’고 아무리 지도해도 따르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번 주임은 건방져. 까다로운 데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경향이 있어. 만일 나한테 뭐라고 하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지위가 높아져도 별로 좋지 않다. 이전에는 하루 업무가 끝나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냈다’는 기쁜 마음과 만족감을 안고서 퇴근했다.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저녁에 마시는 술 한 잔도 유달리 달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르다. 나는 이렇게 하려는데 부하가 계속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 불편한 생각들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고, 저녁에 마시는 반주 한 잔으로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이처럼 지위가 오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괴로움도 있다. 이런 것들도 한 사람이 안게 되는 고민의 또 한 모습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턱대고 ‘곤란하다, 짜증난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나는 건 아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견디며, 또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제대로 사람을 쓸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단지 괴로운 상태로 끝나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나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쓰다 보면 괴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그런 감상이 짙게 든 건 긴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1945년 종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봉건적인 기풍이 남아 있었고, 사장이며 창업자인 내가 말하는 대로 사람들이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종전을 계기로 소위 ‘민주화 바람’이 불며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여기에 노동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일부에서는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에도 노조에 가입한 이들이 대세를 이뤄, 사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사람을 쓴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하지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사람을 쓴다고 생각하면 이건 틀림없이 괴로운 일이야. 하지만 생각 여하에 따라 이 사람들을 모두 내 단골고객으로 여길 수는 없을까. 만일 이들이 단골고객이라면 나는 이들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대개 단골들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쉽다. 그 무리한 이야기를 ‘무리하다’고 여기지 않고 ‘고마운 일’이라 여기는 데 바로 성공의 길이 있다. 그처럼 임직원들, 노조원들을 모두 내 단골고객으로 여긴다면 어느 정도의 무리함은 당연히 안고 가야 한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맙다고 여길 정도까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편안한 마음이 밀려들면서, 그때까지 괴롭다고 느끼던 고민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이들을 쓴다고 생각하면 ‘내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건방지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이 단골고객이라면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일종의 위로나 위안을 얻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사소한 일들이 벌어져도 크게 괴로워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을 쓰는 경우 기본적으로 ‘쓴다’는 의식 자체를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사람을 쓸 수 없다. 이와 함께 일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쓰임 받는다는 상황까지도 철저히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면 ‘사람을 쓰는 일’이 괴로운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게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위가 오를수록 그런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그건 책임자로서의 노력이자 의무나 다름없다. “사람을 쓴다는 것은 곧 쓰임을 받는 일이다.”라는 것을 잊지 말자.
2장 사람을 움직이다
결점을 주위에 알려라
이 세상에는 완전무결하거나 전지전능한 사람이 없다. 정도의 차는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이며, 각각의 장점도 있는 반면 단점과 결점도 있다. 이렇듯 결점을 가진 사람끼리 의지하며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결점을 알고 보완하는 게 중요하다. 개별적으로 결점을 가진 사람이라도 다른 이가 그 결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살려준다면 완전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급적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사가 부하들의 장점을 보고 그것을 적극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부하의 단점도 알고 그것을 스스로, 혹은 다른 부하의 힘을 통해 커버해 가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어떤 결점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모여도 전체적으로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상사는 자신의 결점을 부하들에게 알리고, 그것을 이들로 하여금 보완 받는 게 중요하다. 결점 많은 상사가 혼자만의 지혜나 힘으로 일을 해나가다 보면 실패하는 경우가 반드시 나온다. 따라서 자신의 결점을 부하에게 보완 받는 데서 비로소 상사로서의 역할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하가 상사의 결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일단 상사가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파악해 부하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점을 보완 받으려 해도 어떤 점이 부족한지 모르면 제대로 커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허세나 체면 같은 게 있어 결점을 남에게 보여주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기 쉽다. 특히 그 대상이 아랫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에게 이런 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 부하가 나를 가벼이 여길지도 모른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런 점 역시 사람이 갖는 일면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걱정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자신의 결점을 낱낱이 알려주고, 이를 누군가에게 커버 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많이 배우지 못해 모르는 게 많다. 그래서 막 입사한 신입사원에게도 “자네, OOO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대개 나보다 많은 것을 공부했기 때문에 ‘OOO는 이런 뜻을 갖고 있다’고 가르쳐준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고 힐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점을 모두에게 알리고 그런 결점을 커버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가진 역량을 끌어내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몸이 약해 최전선에 나가 직접 진두지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몸이 안 좋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아는 부하들이 ‘우리 사장 대신 내가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에 전념해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경우도 많았다. 높은 산일수록 깊은 골짜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훌륭한 사람은, 그 반면에 커다란 결점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훌륭한 사람일수록 그런 자신의 결점을 제대로 알리는 데 더더욱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3장 사람을 키우다
관용과 엄격함을 두루 갖춰라
사람은 다루기 힘든 면도 있지만, 일단 교양과 덕성을 쌓고 의무 관념만 배양하면 오히려 별 노력 없이도 법이나 질서를 준수할 수 있는 합리적 존재다. 다만 현 상황에는 그런 사람들의 자율의지보다, 철저한 감시를 통해 법 위반 사례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군가를 이끌어갈 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엄격히 단속해야 할 때는 역시 권위를 갖고 단호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사회 질서도 한층 더 효과적으로 지켜질 수 있다.
석가모니는 ‘사람을 먼저 보고 법을 말하라’고 했다. 상대에 따라 꼭 감시해야만 규칙을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지시 없이 지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중, 잘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엄격히 제약을 가해 주위를 촉구할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격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관용의 모습만으로도 충분치는 않다. 역시 관용과 엄격함을 겸비했을 때 비로소 사회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확률도 커진다. 관용과 엄격함을 두루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사람을 먼저 보고 법을 말하라’, 혹은 ‘관용과 엄격함을 두루 갖춰라’ 같은 명제는 사실 사람을 쓰고 키우는 경우에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개중에는 어떤 주의나 질책 없이도, 항상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는 훌륭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다루기 힘든 면이 있다. 엄한 주의나 질책, 바꿔 말하면 어떤 종류의 무서움이라는 게 주어지지 않으면 상황을 안이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무서움이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엄히 다스리는 게 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