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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insight

다테노이 가즈에 지음 | 예문



이케아 insight

다테노이 가즈에 지음

예문 / 2014년 12월 / 232쪽 / 13,000원





1. 갈아입는 가구의 등장 (History)



혁신의 시작

잉바르 캄프라드, 그를 설명하는 말은 간단하다. ‘이케아 왕국의 제왕’이 그것이다. 이케아의 핵심 비전과 초창기 성공 과정은 온전히 캄프라드 개인의 역량에 의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캄프라드는 1926년 스웨덴 남부의 가난한 지역인 스몰란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는 독일에서 온 이민자로, 그들 가족은 아군나리드 마을에서 멀지 않은 엘름타리드 농장에서 살았다. 이민자 출신으로 척박한 땅에 정착하여 생활고를 겪기도 한 터라 그의 할머니는 절약정신이 강했고, 또 온 가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카리스마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캄프라드는 할머니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한편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기차역 부근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꼬마 잉바르는 외할아버지의 상점에서 놀이 삼아 곧잘 심부름을 하곤 했다. 오늘날 구두쇠 갑부로 명성을 날리는 캄프라드의 절약정신은 친할머니에게서, 철저한 상인정신은 외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캄프라드는 다섯 살 무렵부터 이웃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았으며, 일곱 살이 되자 자전거로 더 먼 곳까지 나가 집집이 찾아다니며 이른바 방문판매를 했다. 얼마 후에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대량으로 싸게 사들인 성냥을 소량 포장해서 판매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리다매’라는 고전적 비즈니스 모델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캄프라드는 성냥에서 화초 씨앗, 연하장,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등 판매 품목을 늘리고 연필과 볼펜 같은 문방구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1943년,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직업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캄프라드는 아버지에게 상으로 받은 용돈과 자신이 그간 번 돈을 합쳐 회사를 설립했다. 등록번호 8271번, 이케아가 바로 그것이다. 회사명은 자신의 이니셜인 I와 K 그리고 자신이 자란 엘름타리드 농장의 E, 아군나리드 마을의 머리글자 A를 합쳐 만든 것이었다. 1947년까지 캄프라드는 아버지의 소개로 직장생활을 하기도 하고, 병역을 이행하는 등 겉보기에는 사업체와 무관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면으로는 계속해서 이케아의 통신판매 사업을 키워나갔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통신판매를 계속했으며, 사업 품목 또한 꾸준하게 늘려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엘름타리드 농장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사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그의 가족이 회계와 포장에 동원되었으나, 여전히 이케아는 1인 기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주문량이 많아지며 점점 보내야 할 소포 또한 많아져 농장에 1제곱미터 크기의 초소형 창고를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이케아 창고가 되었다.

시골 창고에서 글로벌 공룡기업으로

1948년 캄프라드는 집 근처의 숲 속에서 동네업자가 만드는 가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가구물품은 의자였다. 사업의 성공에 힘입어 캄프라드는 직원을 고용했고, 직판 형태로 저렴한 제품을 판매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51년, 가구 판매에서 대규모 사업의 가능성을 느낀 그는 다른 제품군을 포기하고 오로지 저가 가구 사업에 매진하기로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카탈로그 발행에 도전했다. 이것이 현재 전 세계에서 약 2억 부 이상 발행되는 이케아의 카탈로그 1호가 되는 셈이다.

카탈로그의 물품과 실제 배송된 물품의 차이는 통신판매업의 가장 큰 문제이다. 1953년, 이케아는 고객들이 직접 카탈로그의 물품을 볼 수 있는 쇼룸을 만듦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타개해나갔다. 또한 배송 과정에서의 파손 역시 큰 문제였다. 그로 인한 피해액이 만만치 않자 캄프라드와 그의 동료 룬드그렌은 조립식 가구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사실 이 아이디어의 발단은 해프닝에 가까웠다. 어느 날 룬드그렌은 카탈로그 제작을 위해 탁자를 촬영했는데, 촬영이 끝나고 탁자를 다시 포장하던 중 부피가 너무 큰 것에 불편을 느꼈다. 그는 포장을 간편하게 하도록 즉석에서 다리를 떼어냈고,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1953년 이케아 카탈로그에 ‘막스’라는 이름의 조립식 탁자를 등장시켰다. ‘플랫 팩’으로 불리는 이케아의 독특한 배송 시스템의 시초가 된 순간이었다. 캄프라드는 고객을 설득하는 데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캄프라드는 소비자들에게 직판 형식으로 ‘싸고’ 물건을 직접 볼 수 있으므로 ‘믿을 수 있고’ 조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파손 위험이 적어 ‘온전한 물품을’ 받아 볼 수 있다는 점을 어필했다. 그는 철저히 고객 지향의 사고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매력적인 어휘로 홍보할 줄 알았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케아는 스웨덴 내에서 합리적인 저가 가구업체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58년에는 스웨덴 교외의 엘름홀트에 이케아 1호점을 오픈하면서 홈퍼니싱 기업으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이케아 1호점은 당시에도 이미 북유럽 최대 규모의 가구점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카탈로그 발행 수는 50만 부를 넘어섰고 카탈로그로 물건을 본 사람들은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차를 몰고 엘름홀트의 전시장을 찾았다. 1962년에는 스톡홀름에 이케아 2호점이 문을 열었다. 넓은 주차장을 갖춘 대형 슈퍼마켓 같은 가구 매장이 등장한 것이다.

스웨덴 시골 마을의 작은 창고에서 출발한 이케아는 이후 순조롭게 매장을 늘리면서 스웨덴 국내를 벗어나 북유럽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이케아의 성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직원과 매장의 숫자라 하겠다. 이케아에서는 직원들을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의미를 담아 ‘코워커’로 부르는데, 1959년 100명에 불과했던 이케아의 코워커는 1985년에는 만 명으로 늘었고 1999년에는 5만 명, 2006년에는 10만 명을 돌파했다. 지금은 연간 총 매출이 285억 유로에 달하며 세계 27개국에 315곳의 직영점과 약 13만 5천 명의 코워커를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2013년 기준). 열일곱 소년의 1인 기업이 13만 명이 넘는 직원과 함께 세계로 뻗어가는 글로벌 공룡기업이 된 것이다.

북유럽발 상상 초월 가구점의 공습

이케아는 1963년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1963년에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최초의 해외 매장을 오픈했고, 1969년에는 덴마크에 진출했다. 1973년에는 북유럽을 넘어 스위스 취리히에, 그 이듬해에는 독일로 진출했다. ‘스웨덴에서 온 상상 초월 가구점’이라는 슬로건으로 저렴한 가격을 홍보하며 뮌헨에 첫 매장을 오픈한 이케아는 저렴한 가격과 적절한 광고, 마케팅 그리고 혁신 이미지, 신속한 매장 오픈에 힘입어 조기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 그리고 독일 진출 5년 만에 매장은 열 곳으로 늘어났다.

독일 진출은 이케아에게 뜻밖의 선물도 안겨주었다. 모국인 스웨덴에서 합리적인 저가 가구점으로 인기를 얻은 이케아가 젊고 역동적이며 변화 지향적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이다. 저렴하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가구는, 비싸고 한 번 마련하면 평생 그 자리를 차지하는 기존 가구와 대비되었다. 이케아는 직접 조립함으로써 가구를 만드는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계급에 상관없이 구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케아는 어느새 진보적인 젊은 세대의 유행이 되었다. 이후 1975년 호주를 비롯해 캐나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헝가리, 체코와 폴란드, 스페인 순으로 거의 매년 해외 매장을 개척해나갔다.

1999년, 이케아는 시장 개척보다 진출한 시장에서의 성장에 치중하는 전략을 세우고 공격적인 가격 인하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꾀했다. 당해낼 수 없는 가격은 후발 업체들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이케아의 강점 중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로의 진출은 이케아에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9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러시아에 진출한다는 자체가 부담이기도 했다. 많은 고민 끝에 이케아는 조만간 러시아 경제가 안정되리라 예측하고 진출을 결정했다. 그러나 리스크를 줄일 방도를 찾아야 했기에, 입지가 좋은 곳에 매장을 세우기로 하고 쇼핑센터를 만들었다. 이케아 매장이 자체 수익을 낼 때까지 쇼핑센터에서 수익을 창출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2000년, 모스크바에서 매장 오픈을 하자마자 이케아 제품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모스크바에 오픈한 첫 매장에는 매년 450여만 명의 고객이 방문한다. 1998년 이케아는 중국 시장에도 진출해 상하이에 첫 매장을 열었고 1999년에는 베이징에 매장을 오픈했다. 이케아 입장에서 중국은 소비 시장으로도 중요하지만 생산 시장으로도 매우 중요한 국가이다. 전 세계에서 팔리는 이케아 제품의 22퍼센트가 바로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구에 대한 인식을 뒤집다

가구에 대한 인식은 국가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케아는 유럽 시장을 벗어난 초기에 이러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고전했다. 이를테면 미국인들은 가구는 두고두고 오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케아는 이러한 미국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가구는 수시로 바꾸는 것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2002년 방송된 이케아의 램프 광고는 미국인들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 광고는 침대 옆 램프를 버리는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버리려는) 램프 때문에 당신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미쳤기 때문이죠. 램프에는 감정이 없고, 새것이 훨씬 좋습니다.” ‘가구는 가구일 뿐이다, 버리고 새로 사라’고 말하는 이 광고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광고를 본 미국인들은 오랜 세월 함께해온 물건을 새롭게 보았다. 애착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물건은 객관적으로 낡았고 이미 기능도 많이 상실했다. ‘이케아에서 불과 몇십 달러에 새로 살 수 있는데 왜 바보처럼 망설이는가?’ 이것이 이케아의 메시지였다. 보는 이의 허를 찌르는 이 60초짜리 광고가 방영되는 기간 중 이케아의 매출은 8퍼센트가량 상승했다.

오늘날 이케아는 보다 광범위한 이미지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에게 집은 개성 표출의 수단이 되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케아는 카탈로그를 통해 이케아 물건을 사용하면 집이 얼마나 깔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2000년대 이후 이케아 카탈로그는 홈 스타일링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모님처럼 살지 마세요”라는 광고는 이케아가 중국 베이징 매장을 오픈하면서 전개한 것이다. 이케아는 진보, 혁신, 젊음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케아를 이용한 홈 스타일링은 당신이 합리적이며 세련되고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케아 물건으로 집을 채우고 있다면, 당신은 전 세계적인 체인징 룸 제너레이션(집 안을 통째로 바꾸는 세대라는 뜻)이 된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부모 세대와 당신을 차별화시킨다.’ ‘이케아는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까지 판매한다.’ 이것이 바로 신흥 시장에서 이케아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2. 버리는 경영 (Strategy)



많이 팔릴수록 저렴해진다

이케아의 핵심 전략은 ‘놀라울 만치 저렴하고, 멋진 디자인과 훌륭한 기능을 갖춘 상품’이면서 ‘경쟁사와 가격 차를 벌여 소비자에게 이득이 되는 상품’을 개발해서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는 캄프라드가 쓴 『어느 가구 상인의 유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아름답고 기능적인 가구와 집기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용 절감에 대한 인식은 캄프라드의 첫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성냥팔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개당 1외레가 안 되는 가격에 성냥 100개를 구매한 후, 마진을 붙여 한 개비에 2~5외레를 받고 팔았다. 이때 캄프라드는 싼 가격으로 물건을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으면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일곱 살도 안 된 나이에 ‘비용 절감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저가 정책이 상당한 경쟁력이 된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이다. 이후 캄프라드가 가구를 판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도 뛰어났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애초 이케아가 홈퍼니싱 사업에 진출하게 된 계기 자체가 ‘저가 정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단순히 가격으로만 경쟁하면 품질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캄프라드는 싼 게 비지떡인 상품으로는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저렴한 가격의 물건이 가격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용성 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길 바랐다.

이케아식 실용 정책: 이케아의 전략에서 실용성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즉, 4~5년은 쓸 정도의 내구성을 갖춤으로써 저렴한 가격에 비해 만족스러운 품질을 선사(소비자의 입장)하는 동시에, 언제든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사는 소비의 선순환을 일으킨다(공급자의 입장)는 의미의 ‘실용’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구매력에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을 위한 더 좋은 생활을 만든다’는 이케아의 비전은 서민들도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최대한 시장을 확대하자는 방침을 나타낸다. 이케아가 주 고객층으로 여기는 것은 결코 부유층이 아니다. 그들의 타깃은 매우 분명하다. 고가의 가구를 살 여력이 없으며, 대개의 경우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즉 렌트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1차 고객층이다. 그들은 저렴한 가격에 산 물건을 몇 년 동안 사용할 것이다. 전셋집 계약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이사할 때 산 이케아 가구도 대충 그 수명을 다한다. 설사 망가지더라도 그들은 ‘그 가격에 이 정도면 충분히 썼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망가지거나 충분히(!) 사용한 이케아 가구를 거리낌 없이 버리고 새로운 이케아 가구를 사러 간다.

그런가 하면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 홈 스타일링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철마다 소파나 옷장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침대 커버나 쿠션 커버 정도로도 집 안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건마다 가격표가 붙은, 세련된 카탈로그는 이렇게 사람들을 유혹한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가요? 4.99달러짜리 쿠션 커버만 바꿔도 집 안 분위기가 달라질 거예요!’ 이처럼 저렴한 물건을 거듭해 사는 소비자들 덕분에 이케아는 더욱 저렴한 가격에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케아는 물가에 역행하는 보기 드문 브랜드로, 빌리 책장의 경우 30년 전에 비해 가격은 오히려 15퍼센트 저렴해졌다. 많이 팔린 만큼 저렴해지므로 소비자들은 이케아가 투명한 가격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믿는다. 이케아의 고객층은 한마디로 전 세계 소비자들이다. 어떤 경제 상황에서도 ‘값싸고 기능적인 제품’에는 보편적인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보편적인 수요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리먼 쇼크처럼 세계적인 불황이 발생했을 때도 이케아는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뺄셈형 발상: 숨 막히는 가격의 비밀

이케아의 상품 개발 과정을 보면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가격부터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가격이면 소비자가 저렴하다고 느낄지 고민하고 나서야 소재와 물류 관리, 인건비, 운송비 등 생산 공정의 모든 요소를 꼼꼼히 따지면서 상품을 개발한다. 다시 말해, 비용을 모두 더한 뒤 이윤을 내려면 이 정도 가격에 팔아야 한다는 식의 덧셈형 발상이 아니다. 이케아재팬에서 지금까지 150엔에 팔던 머그컵을 100엔으로 낮추려면 어떤 비용을 빼야 한다는 식의 뺄셈형 발상인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판매의 선순환: 이케아에서 ‘저렴한 가격’은 강력한 경쟁력이자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업 전략으로 꼽힌다. 인기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면 비용을 더 낮출 수 있으므로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고 저렴한 가격은 다시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규모의 경제가 가진 이점을 활용한 대량생산과 대량판매가 이케아의 장기이며 실제로도 인기상품들은 몇 번씩 가격 인하를 단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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