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문
허영호 지음 | 올림
청정문
허영호 지음
올림 / 2014년 9월 / 255쪽 / 13,000원
1 준비 안 된 경영자의 길 - 3가지 전환점
국민 드라마 <여로>와의 인연
1970년대 초 대한민국의 저녁을 조용하게 만든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KBS 일일 연속극 <여로>다. 시청률을 조사하지 않는 시대였지만 방송국 자체 추측으로 70%가 넘었을 거라 하니 말 그대로 국민드라마인 셈이다. 전 국민을 웃고 울게 했던 이 드라마는 내 삶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당시 나는 서울대 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 지냈는데 저녁만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TV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마을에는 TV를 보유한 집이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저녁마다 몰려든 사람들은 작은 흑백 TV 앞에서 숨을 죽이고 브라운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내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앞으로 우리나라 각 가정에 TV를 보급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를 계기로 나는 대학 졸업 후 경북 구미에 자리 잡은 TV 생산 공장(금성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입사 지망생들은 서울과 경인 지역을 선호했지만 나는 과감히 지방 근무를 선택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의 선택은 바람직했던 것 같다.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운다는 것은 제조업 종사자에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그 덕분인지 나는 훗날 최고 경영자로 활동하면서도 현장과의 거리감이 전혀 없었다. 현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후배들에게 현장 근무를 추천한다.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조직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일찍 공장 근무 경험을 쌓으라고 권한다. 물론 쉬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훗날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고 확신한다.
경쟁자를 뛰어넘는 작은 차이
30세가 되는 1981년 초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처음 접한 도쿄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최첨단 제품이 즐비한 상점, 조밀하게 망을 형성한 지하철 등 여러 면에서 부러웠다. 나의 일과 관련된 소재와 부품 그리고 첨단 기술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컬러 TV 방송이 막 시작했고, TV 수출이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그런데 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매우 높아 일본에서의 부품 조달이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당시 우리 회사는 교토에 본사를 둔 M사에서 부품을 수입했다. 이 부품 조달이 원활하지 못하면 완제품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도 M사에서 같은 부품을 수입했다. 다행히 나는 부품 물량 확보 면에서 늘 경쟁사보다 상대적 우위를 점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비즈니스에서는 물건을 사는 쪽이 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판매하는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는 늘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업무를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도 신경을 썼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 회사의 부품 수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나의 실무 파트너가 요구했던 자료는 해당 부품의 향후 3개월 수요 예측 정보와 당월 필요 물량, 주간 단위 수요, 재고 정보 등이었다. 회사의 생산 계획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상대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본사와 공장의 실무자들과 끈질기게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상대가 필요로 하는 예측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그들의 일을 대신해주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상호 신뢰가 형성되었고, 그만큼 경쟁업체보다 물량 확보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현장으로 찾아가는 포용의 리더십
6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TV 제조 공장으로 복귀했다. 거기서 몇 년을 근무한 뒤 다시 본사로 발령을 받았다. 2년이 지난 후 CEO의 부름을 받았다. 나를 TV 사업부의 공장장으로 인사발령을 내겠다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 겨우 만 40세, 입사 15년 차에 불과했다. 기쁘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그 큰 조직의 수장으로 간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현지 공장에는 입사 선배들이 수두룩하게 단위 조직 책임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조직을 쥐고 흔들기에는 몹시 버거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공장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품질 문제와 노사분규의 여파로 현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 나의 강점을 살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구성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며 진정성 있는 포용의 리더십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양팔을 벌려 상대를 내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포용이 아니라, 일이 진행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의 발길을 옮겨감으로써 포용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일례로 나는 퇴근길에 이따금 정문 수위실에 들러 주야로 공장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일에 대한 열정과 애환을 듣고 격려하며 그들의 얼굴에 흐뭇한 기운이 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더욱 힘을 내는 것이었다. 현장으로 찾아가는 포용의 리더십은 육체적으로 다소 힘들고 시간도 적잖이 많이 든다. 또한 리더 자신의 진정성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만큼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리더를 믿고 따르게 하는 길이다.
준비되지 않은 CEO 데뷔전
1999년 대표이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구미에 위치한 작은 계열사인 LG마이크론의 CEO로 가라는 인사명령이었다. 부임해보니 회사 사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의 명암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전까지 LG마이크론은 아주 잘나가는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채에 600억 원을 잘못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것이 문제였다. 전임 대표이사와 재경 담당 임원이 사퇴했고, 그 빈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제조업의 속성을 무시한 결과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CEO 데뷔전은 성공적이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조직원과 혼연일체가 되어 위기를 극복했고, 더 나아가 2000년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지만 부임 초기에는 기업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다. 구성원들과 상황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나는 제3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진단한 결과를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기로 했다. 외부 컨설팅사에 회사의 현실 전반에 대한 진단을 의뢰했다. 진단 결과에 대한 컨설턴트의 발표 날이 다가왔다. 나는 폐교한 시골 초등학교의 교실을 개조한 기업 연수원에 간부들을 모두 집결시켰다. 그리고 확대나 과장 없이 위기에 처한 회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표 내용을 접한 구성원들의 충격은 생각보다 큰 듯했다. 컨설턴트의 발표가 끝나고 내가 마무리를 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2개의 화두를 던졌다. 하나는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줄 사람은 없다. 우리가 벌어서 빚을 갚고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단 결과에서 보듯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는 현실은 쉽고 간단하게 해결될 사항이 결코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참가자들에게 2개의 길을 제시하고 어느 쪽을 택할지 의견을 물었다. “이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여러분께서 외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컨설턴트의 힘을 빌릴 것이고, 우리 스스로 극복해나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만장일치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것이었다. 그 열의를 보면서 나는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가슴 찡하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2 무엇이 조직을 강하게 하는가 - 더불어 경쟁
백지 상태에서 새 출발
LG마이크론을 정상화시키고 한숨을 돌리자 이번에는 LG이노텍의 부품 사업 부문을 맡게 되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 회사 상황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연이은 손실에 일부 과잉 투자까지 겹치면서 부채비율이 매우 높았다. 조직 분위기는 엉망이었고 구성원들의 근무 태도 역시 복지부동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필요할까? 나는 나 혼자 하는 외로운 경영이 아니라 구성원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나는 부임 3개월이 되는 시점에 단위 조직 리더들과 함께 현실 인식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했다. “우리는 지금 제품력, 품질 공정 능력, 생산성 그리고 제품 모델 라인업과 타이밍을 놓치고 뒷북이나 치는 신제품 등 눈에 보이는 하드(hard)한 측면에서의 취약함과 이들을 움직이는 소프트(soft)한 측면에서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머리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해달라. 이제 한 가지씩,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낸다는 각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단위 조직 리더에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여러분의 자발적 참여다. 회사를 거듭나게 할 동지가 필요하다. 여기 모인 리더 전원이 동지가 된다면 그보다 더 신명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야 할 일도, 방법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업무에 임하는 자세다. 이제는 선배 탓, 전임자 탓으로 돌리지 말고 전적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행이 중요하다. 첫째도 실행, 둘째도 실행, 셋째도 실행이다. 해봐야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는 것이다. 눈치만 보면서 기다리지 말고, 오기와 독기를 살려 적극 달라붙어야 한다.” 이처럼 조직 책임자들과 현실 인식을 공유하고 본격적인 혁신활동에 들어갔다.
이기는 경영은 어떻게 가능한가
LG이노텍에서 나는 첫 활동으로 식당 환경 개선부터 실시했다. 아무리 회사 살림이 어려워도 구성원들의 식사 환경 개선이 시급했다. 두 번째로 비즈니스 환경을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먼저 연구소의 환경을 정비하여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공장 정문에 위치한 안내실도 재정비했다. 고객들이 찾아주고 우리도 활발하게 외부를 향해 뛸 수 있는 여건을 갖추자는 생각이었다. 식당과 비즈니스 환경 개선은 작은 실천에 불과했지만,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열린 참여와 관계 맺기를 통해 복지부동의 분위기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가 어렵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물어보았다. 그 결과 3가지 이유가 도출되었다. ‘사장이 자주 바뀌어서’, ‘투자를 안 해서’, ‘사내외 교육 기회가 없어서’ 등이었다. 내 탓이나 우리 탓에 대한 언급은 없고 모두 남의 탓이었다. 나는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사장이 자주 바뀌어도 잘 되는 회사’, ‘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 ‘교육을 많이 하는 회사’ 이 세 가지를 갖춘 회사를 만드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선포했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인식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실행의 주체가 구성원 개개인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다.
‘이기는 경영: 악착같이, 될 때까지, 끝까지!’ 많은 고심 끝에 탄생한 당시의 슬로건이다. 이기는 경영의 주체는 조직 구성원 모두였다. 그동안 만연했던 복지부동의 침체된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악착같이’는 도전적이고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열정과 피나는 노력의 의미를 담고 있다. ‘될 때까지’는 경영활동을 하다 보면 결과에 집중한 나머지 일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를 등한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자칫 간과하기 쉬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중요시하자는 것이다. ‘끝까지’는 악착같이로 표현된 목표와 될 때까지라는 과정상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마무리를 잘 하자는 것이다. 이들 구호는 우리 사업장을 방문하는 고객에게 신선하고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다수의 기업에서 이 구호를 사용하고 싶다는 문의도 많이 받았고, 실제로 사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생존을 넘어 성장으로
2001~2003년까지 3년 기간을 우리는 생존전략 단계로 설정했다. 이 기간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조직 구성원들은 패배주의에서 벗어났다. 조직의 각 부문은 복지부동의 자세에서 탈피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생존전략을 추진했던 3년 동안 회사 매출은 매년 1천억 원씩 증가하여 2003년에는 5천억 원을 돌파했다. 이 기간 동안 인원 변화는 거의 없었고, 투자도 현상 유지할 정도의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출은 물론 영업이익이 두 자리 숫자에 가까운 수준까지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조직 구성원들이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도전 매출 1조
개인이든 기업이든 어려울 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잘 헤쳐나가다가도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지거나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 여지없이 위기가 찾아온다. 씀씀이나 처신 등이 방만해지면서 가정불화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는 3년의 생존전략을 끝낸 순간이 바로 그런 위험 상태였다. 모든 구성원이 희망에 부풀어 있는 순간 나는 오히려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단기적인 반짝 성과의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를 고심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혁신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이에 대한 사전 구상과 함께 다음 단계의 큰 방향을 설정해놓은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생존전략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의 화두인 성장에 집중하여 새로운 혁신활동의 방향으로 전환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2004~2006년 3년 동안 성장전략 단계를 차근차근 진행해나갔다.
우리 회사는 1970년 출범하여 33년이 되었다. 연 매출 3천억 원을 달성하기에 꼬박 30여 년이 걸린 셈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나는 조직원들이 ‘참여 속의 성장’이라는 화두에 관심을 가질 질문을 만들었다. “30대 중반인 우리 회사의 바람직한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 질문을 놓고 여러 각도에서 논의가 이루어졌고, 바람직한 회사의 상이 도출되었는데 놀랍게도 ‘연 매출 1조 원의 회사’였다. 소수가 아니라 절대 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동안 잠재된 전체 구성원의 열망과 풀지 못했던 한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질문은 “바람직한 회사의 모습을 언제까지 달성하면 좋겠는가?”였다. 이에 대한 답도 예상을 뛰어넘은 것으로 2년 후인 2005년까지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장에 대한 우리 구성원들의 열망이 이토록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해서 결정한 성장의 정량적 목표가 ‘Y+2, 연 매출 1조 원’이었다. 그리고 2005년 우리는 연 매출 1조 원을 달성했다. 가상의 목표를 우리의 현실로 만든 것이다.
경영을 잘해도 숫자가 인격
성장전략 3년 차에 접어든 2006년, 회사의 몸집은 커져서 매출은 늘어나는데 구석구석에 현금 흐름이 정체되고 수익률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말로만 들었던 흑자도산이라는 것이 이렇게 닥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회사가 이런 지경에 처한 것은 최고 경영자인 나의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영진 사이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 있었다. ‘숫자가 인격’이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경영을 잘해도 결손을 내면 결코 이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로, 당시 나의 상황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면 아무리 괄목할 만한 외형성장을 이뤘어도 이익 실현 수준이 바닥에 근접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절박한 시기에 골프장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낙뢰 사고였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나는 의식을 잃었고, 하반신에 전혀 감각이 없는 마비 상태에서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다. 사고 일주일 뒤쯤 중요한 일정이 잡혔다. 그룹 회장단에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보고하는 회의를 앞두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면서 보고를 늦춰도 좋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병원의 만류를 뒤로하고 서둘러 퇴원해서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기로 하였다. 보고 당일, 회의가 시작되려는데 갑자기 그룹 회장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하느님은 잘 계십디까?”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나의 사고와 관련한 우회적 질문임을 알았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 좀 더 일하다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해 연말 인사에서 나는 운 좋게(?) CEO의 자리를 지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죽을 뻔 했던 사고와도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사고 소식과 회의 직전 오갔던 대화가 ‘숫자가 인격’이라는 냉혹한 국면을 벗어나게 해준 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