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100년 기업, 두산 이야기
엄광용 지음 | 북오션
살아남은 100년 기업, 두산 이야기
엄광용 지음
북오션 / 2014년 8월 / 272쪽 / 15,000원
1. 창업 - 1세대 경영 시대 : 박승직
현실을 직시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라 / 세상을 넓게 보고 더 큰 야망을 가져라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현실의 난관을 타개하려는 시도가 바로 사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고통이 주어졌을 때 변화를 꿈꾼다. 변화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본능적인 삶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박승직은 1864년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친 박문회는 당시 여흥 민씨 세력인 민영완의 위토(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을 마련키 위해 경작하던 토지) 15마지기를 소작농으로 부치는 가난한 농부였다. 원래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탄벌리 숯가마골이었지만, 소작농을 하기 위해 민영완의 위토가 있는 임의실 과골로 이주를 했는데, 이곳에서 박승직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10년여에 걸쳐 틈틈이 한문 공부를 했다. 이러한 한문 공부 덕분에 《논어》, 《사기》 등 중국 고전을 탐독할 수 있었다. 특히 《논어》를 통해 익힌 공자의 ‘인(仁) 사상’은 인생을 살아가는 키워드가 되었고,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오는 부자들의 이야기는 그가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해준 멘토였다.
이처럼 주경야독을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박승직은 어느 날 화전을 일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소작농이나 화전만으로는 가난을 극복할 수가 없다. 장사를 해보자.” 어느 날 그는 당시 살던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송파장에 구경을 나갔다가, 거기서 상인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송파장에 나갔고, 서울 사대문 안의 육의전 거리도 두루 살펴보았다.
마침내 박승직은 장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그동안 모아둔 75냥을 밑천으로 삼아 배오개로 나갔다. 그는 석유와 그것을 넣어 짊어질 수 있는 통과 지게 등을 샀고, 석유통을 짊어지고 시골 산촌을 찾아 돌아다녔다. 석유를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 조금씩만 팔았는데도 금세 동났고, 계산해 보니 총 115냥이었다. 본전을 제하고 이문이 40냥이나 남았다. 이처럼 박승직은 16세에 장사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이미 서양 열강들의 개항 요구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었으며, 1886년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부산ㆍ인천ㆍ원산을 개항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그 항구들을 통해 외국 물품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자국의 물품 또한 외국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제 상인은 사농공상의 유교적 신분 차별에서 더 이상 천민으로 취급받을 수 없는, 국가 경제를 짊어지고 갈 매우 중요한 직업군으로 떠올랐다. 그러한 시대적 변화에 힘입어 박승직은 양반 신분임에도 과감하게 상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후 박승직은 평안도ㆍ경상도ㆍ강원도 지역의 보부상을 따라다니며 면직물을 사다 송파나루에 넘겼다. 당시 박승직은 지방 산지에서 백목, 즉 무명 한 필을 10전에 사다가 서울 큰 시장에 20전에 넘겼다. 노자를 제외하면 한 번 행차에 곱절의 이익을 남기는 장사였으므로, 수입이 꽤나 쏠쏠했다.
새로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 성공하려면 떳떳하게 자신의 이름을 걸어라박승직은 보부상으로 전국을 떠돌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익혔다. 마음속으로 나라 최고의 거상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그는 일단 30석지기 전답을 사서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대처에 나가 본격적인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박승직은 집안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로 이주시킨 그 이듬해인 1889년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배오개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박승직은 당분간 보부상을 계속하면서 서울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문물들을 보고 익히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인 1896년에 가서야 비로소 점포를 마련한다. 그동안 보부상을 하면서 어느 정도 사업 자금도 모았고 거래처도 확보했으며, 보부상이나 난전 상인들에게 확고부동한 신뢰를 쌓아놓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1896년 8월 1일 배오개 번화가인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개설한다. 점포 개설 초기에 박승직상점이 주로 취급한 품목은 국내산 목면이었다. 그러다 취급 품목을 점차 다양화해 나갔다. 주단ㆍ포목ㆍ방적사류ㆍ곡류ㆍ염류ㆍ부정(솥) 등을 주거래 품목으로 정하는 한편, 도량형기의 위탁 판매까지도 맡았다. 이렇게 시나브로 박승직상점이 도매상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배오개 일대에서 박승직은 대표적 상인으로 떠올랐다.
위기는 변화를 요구하는 점등 신호다
설립 이후 잘나가던 박승직상점도 위기에 봉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몰아닥친 경제 불황은 전쟁 당사국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파급되어 각 나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면직물을 취급하던 박승직상점도 매출이 뚝 떨어져 경영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때 박승직은 과감하게 박승직상점의 자산을 정리, 1925년 2월 9일 주식회사(자본금 6만 원, 1주당 가격 50원, 1200주 발행)로의 개편을 단행한다.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나서 새로 태어났다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달력을 제작ㆍ배포했으며, 본격적으로 신문에 광고도 게재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해 나갔다.
박승직상점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초반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시 큰 불황이 닥쳐왔다. 1929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증시 대폭락이 세계적인 공황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박승직상점도 1930년에 매출이 뚝 떨어져 최악의 경영 실적을 기록했다. 그 무렵 경성방직주식회사와 조선방직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국내산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박승직상점은 그동안 영국과 일본 등에서 면직물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때를 기해 전격적으로 국산 면직물을 취급하고 수입 면포는 점차 줄여나갔다. 더구나 당시에는 국산품장려운동이 확산되던 추세여서, 이에 적극 호응한 박승직상점의 이미지는 점차 호전되었다. 결국 박승직상점은 1931년에는 전년도 적자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순수익을 달성했으며, 1932년에는 전년도의 두 배가 넘는 순수익을 올려 불황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2. 발전 - 2세대 경영과 전문경영인 시대 : 박두병ㆍ정수창
진정한 성공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수요ㆍ공급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정보를 확보하라박승직의 장남인 박두병은 경성상업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조선은행에 취직했고, 그 후 4년 만인 1936년에 은행을 그만두고 박승직상점에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입사 후 박두병은 이제는 일개 포목점 수준의 점포가 아니라 기업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승직상점을 도매부와 소매부로 나누어 운영키로 하고 도매부에는 20여 명, 소매부에는 10여 명의 직원을 두었는데, 이렇게 부를 나눈 것은 직원들이 더욱 전문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말 두 말 차근차근 쌓아 올리면 큰 산이 된다 / 반목은 종말을, 화목은 영원한 발전을 약속한다미 군정청은 1946년 면허제로나마 무역을 재개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면포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 박두병은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결심을 하고, 기존 박승직상점을 새로운 상호(斗山, 두산)로 바꾸기로 했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큰 기업을 이루라’는, 재화의 축적을 기리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포목점으로 시작한 ‘박승직상점’의 시대는 가고, 운수업으로 시작한 ‘두산상회’의 시대가 열렸다. 운수업의 시작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차가 귀했으므로, 중고 미제 승용차와 일제 트럭 몇 대를 구해 사업을 시작했다. 일단 승용차는 택시로 운용하고, 트럭은 서울 인근 지역에서 장작을 운반해 오는 데 사용했다.
한편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는 1933년 12월 일본기린맥주주식회사가 국내에 세운 것인데, 이때 박승직과 김연수가 각각 200주를 소유한 한국인 주주로 참여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말경,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 자치위원회 사람들인 최인철ㆍ방용운ㆍ윤현두ㆍ이상만 등이 박승직을 찾아와 말했다. “소화기린맥주 한국인 주주시니, 이번에 회사 경영을 맡아주시길 부탁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내가 소화기린맥주 주식을 조금 갖고 있는 것은 맞소. 그러나 나는 이미 늙었소.” “어르신이 정 그러하시다면, 아드님이신 박두병 씨를 추대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하여 박두병은 명맥만 유지하던 박승직상점의 문을 닫고, 1945년 10월부터 소화기린맥주에 정식 출근하기 시작했다.
미 군정청은 10월 6일 그를 소화기린맥주 민간 측 관리 지배인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48년 2월 28일,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라는 일본식 회사 이름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바꾸고, 영문 회사명인 ‘ORIENTAL BREWERY CO., LTD.’라는 것에서 머리글자를 따와 ‘OB’라는 상표를 새롭게 선보였다. 이렇게 회사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브랜드로 탈바꿈하면서 회사는 날로 발전을 거듭했다.
진정한 사업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 생산ㆍ판매라는 두 날개와 품질 개선의 바퀴를 달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박두병이 경영하던 동양맥주 공장은 전화로 인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일단 박두병은 노부모를 경기도 광주로 모신 후 트럭 한 대를 빌려 가족들을 먼저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바쁜 일들을 처리하고 곧 부산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광주에서 부친이 사망했다는 연락이 왔다. 1951년 12월 20일 아침이었다. 한편 1951년 8월, 정부는 전쟁 발발로 보류되었던 정부 귀속 관리 업체의 민간 불하 방침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재공고했다. 박두병은 1952년 3월 22일 동양맥주주식회사 공개 입찰에 단독으로 응찰해 관재청 사정 가격대로 낙찰을 받았다. 박두병은 이날을 동양맥주주식회사의 창립일로 정했다.
박두병은 새로운 상표로 OB맥주를 시장에 선보이면서 종업원들에게 다음의 선언을 했다. “새로운 상표로 도전을 하게 된 만큼 판매 체제를 혁신해야겠습니다. 생산과 판매를 같이 하는 방식은 기업의 총체적 역량을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생산과 판매를 분리해서, 동양맥주는 생산에만 집중하고, 두산산업은 판매에만 전력을 다하는 체제로 전환해야겠습니다.” 두산산업은 처음 운수 사업으로 시작한 두산상회의 사업을 확대해 1953년 상호를 변경한 기업이었다. 박두병은 한국 최고의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그는 전쟁 직후 공장 복구가 한창일 때도 별도의 실험실을 두어 연구원들로 하여금 맥주의 품질 개선에 힘쓰도록 했다. 1955년에는 이 실험실을 연구실로 승격시켜, 품질 개선 시스템을 크게 확충했다. 그리고 독일 맥주 양조 전문 기술자인 루돌프 쇼테를 동양맥주의 새로운 양조 기술자로 초빙하여 국내 연구원들로 하여금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적도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줘야 한다
동양맥주와 조선맥주의 경쟁은 날로 심화되었다. 1961년 2월, 양 사 경영진은 수많은 회합을 거친 끝에 절충안으로 ‘한국맥주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OB맥주는 국내 맥주 판매량의 6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과당 경쟁을 지양하고 업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한국맥주판매주식회사를 통해, 일단 1962년 1년간 OB맥주와 크라운맥주의 출하 비율을 58대 42로 조정했다. 이에 따라 맥주의 과당 경쟁은 진정되었으며, 그 이후 꾸준하게 수요가 늘어 양 사 모두 생산 시설을 대폭 확충하는 등 1960년대 말까지 공동 번영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주력 사업을 키우면 부대사업도 동반 성장한다 / 자본과 경영을 분리해 투명한 회사를 만들다
기업이 한 분야의 사업을 집중적으로 키워 나가다 보면 부수적으로 그와 관련한 사업들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데, 부대사업이 주종 사업보다 더 번성하면 흔히 문어발식 기업이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기업의 속성상 부대사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어 있다.
박두병은 한국전쟁 이후 동양맥주 공장 복구 작업을 하면서 건설의 중요성을 크게 절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두병은 동양맥주 영선과 과장 한상억을 불렀다. “앞으로 공장의 개보수, 상하수도 건설, 사택 보수 등 건설과 관련한 공사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네. 이참에 영선과를 확대해 건설회사를 설립하려 하니 자네가 좀 맡아주게. 건설회사 이름은 동양맥주의 ‘동’ 자와 두산산업의 ‘산’ 자를 따서 ‘동산토건’으로 하는 것이 어떤가?” 이렇게 하여 1960년 7월 1일, 동산토건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 3년 동안은 주로 그전부터 해오던 동양맥주 영등포공장의 개보수를 비롯한 내부 공사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1961년 5월에 강화도 동락천 개수 공사, 같은 해 10월에 문래동 한국미곡주식회사 창고 신축 공사 등 외부 공사를 수주해 착실하게 건설 시공 능력을 쌓아나갔다.
박두병은 동산토건 설립이 성공하자 1967년 동양맥주 공무과를 분리ㆍ독립시켜 기계제작회사인 윤한공업사를 설립했다. 설립 초기에는 기존에 해오던 영등포공장의 제품기 수리 공사를 비롯한 관계사의 시설 개보수 공사를 시행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가 기계공업의 성장을 촉진하면서 매출 증대와 함께 자립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편 동양맥주는 1956년부터 청량음료인 OB시날코를 개발해 술을 마시지 못하는 소비자들에게 판매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와 OB맥주의 수요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생산 설비가 부족해지자 할 수 없이 OB시날코의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62년 시행한 정부의 주세 인상은 맥주업계를 불황으로 이끌 조짐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동양맥주는 다시 청량음료 시장으로 눈길을 돌려, 순발력 있게 1962년 2월 미국 럭키콜라사와 원료 수급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OB콜라를 생산했다. 여기에다 기존의 OB시날코까지 생산량을 늘려 두 제품이 소비자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판매량이 크게 늘어나자 박두병은 장남인 박용곤에게 말했다. “용곤아, 네가 청량음료 사업체 발족에 힘을 보태야겠다.” 박용곤은 곧 동양맥주 내에 조사과를 신설하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면서 주한 미군에 납품도 가능한 청량음료를 다각적으로 검토했고, 최종적으로 코카콜라를 국내에 들여오기로 했다. 이렇게 해 1966년 5월 25일 박용곤은 한양식품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한편 두산산업은 1960년대 초까지 주로 동양맥주의 수출입 대행과 군납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3년 2월 OB맥주의 대미 첫 수출을 실현시키면서 무역상사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했다. 바로 그 무렵에 박두병의 둘째 아들 박용오가 미국에서 귀국해 두산산업에 입사했다. 박두병은 자주 박용오를 찾아가 경영수업을 시켰다. 그는 내심 큰아들 박용곤에게는 생산을, 둘째 아들 박용오에게는 수출 업무를 담당케 하려 했던 것이다. 참고로 두산산업이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지사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부터다. 그해 4월 미국 뉴욕에 최초의 지사를 설립했으며, 1967년 1월에는 사이공에, 1968년 3월에는 홍콩에 지사를 각각 설립하면서 무역회사로서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이 시기부터 두산산업의 수출 품목도 다양해져서 맥주ㆍ융단ㆍ맥아 등 관계 회사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자체적으로 비관계 회사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1970년 이후에는 배낭ㆍ유도복ㆍ검도복ㆍ모자ㆍ우산ㆍ버클ㆍ말 털ㆍ쇼핑백 등 취급 품목도 다양해졌다.
두산산업은 1970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편 1970년 어느 날 박용곤은 동생 박용오에게 권했다. “앞으로 사진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질 거야. 미국의 이스트만 코닥과 판매 대리점 계약을 맺어보도록 해.” 박용오는 형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와 전격적으로 대리점 계약을 맺고, 1970년 9월 을지로 1가에 코닥 전시장을 설치했다. 그리고 1972년 6월에는 등촌동에 ‘두산 코닥칼라 현상소’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