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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29:1 하인리히 법칙

김민주 지음 | 미래의창
300:29:1 하인리히 법칙

김민주 지음

미래의창 / 2014년 5월 / 250쪽 / 14,000원





1부 하인리히 법칙



1 : 29 : 300 법칙

허버트 하인리히는 1920년대에 미국의 여행자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엔지니어링 및 검사 부서의 보조 감독자로 근무하면서 업무 성격상 많은 사고 통계를 접하게 되었다. 실제 발생한 7만 5,000개의 사고를 정밀 분석하면서 흥미로운 결과들을 얻었고, 그 결과물을 바탕으로 1931년 『산업재해 예방 : 과학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흔히 사무실 청소를 할 때 바닥을 제대로 닦지 않아 물이 남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끄러지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은 미끄러질 뻔할 뿐 별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넘어져 멍이 들거나 약간의 찰과상을 입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뼈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기도 하고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기도 하며, 심한 경우 머리를 바닥에 부딪혀 뇌진탕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부상을 입지 않은 사고, 경상, 중상처럼 정도에 따라 발생 횟수를 비교해보면 일정한 비율이 나온다.

허버트 하인리히는 1931년에 발간된 자신의 책에서, 산업재해로 인해 중상자가 1명 나올 경우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있었고,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를 겪었던 사람이 무려 300명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해 중상과 경상 그리고 부상이 발생하지 않은 사고의 발생 비율이 1 : 29 : 300이었다는 것인데, 오늘날 1 : 29 : 300 법칙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 법칙’이라 일컬어진다.

이 법칙에서 알 수 있듯이,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지 않고 반드시 그 이전에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면밀히 살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큰 재해를 방지할 수 있지만, 징후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도 있다. 이 법칙은 발표된 이후 여행지나 공장, 사무실에서 일어난 사고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현상, 경제 현상, 그리고 개인의 일에도 적용되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누출 사고는 쓰나미로 인한 천재지변이기도 하지만, 미흡한 시설 관리가 사태를 더욱 키웠다. 1972년 미국원자력위원회는 후쿠시마 원전에 사용된 원자로에 대하여, 기존의 대형 격납돔 구조에 비해 폭발에 취약하므로 노심이 녹으면 방사능 누출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1986년에는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의 안전책임자가 내압 능력이 약해 격납 기능에 문제가 있다며 위험성을 다시 한 번 경고했지만 도쿄전력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2007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개최된 원자력엔지니어링 컨퍼런스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이 쓰나미를 견뎌낼 수 없으며, 쓰나미에 뒤덮일 확률은 50년 내 10퍼센트 이상이라고 경고했으나 도쿄전력은 이 역시 무시했다(300번의 잠재요소). 한편 1998년 원전 내 차단기에 화재가 발생했으며, 2002년 원전 내부에 고장 및 균열이 발생했다는 내부 보고서를 ‘무시’하고 장기간 점검기록을 ‘조작’했고, 2006년에는 원전의 위험성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도쿄전력이 법정에 출두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4호기 원자로의 차단기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역시 특별한 조치 없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29번의 작은 사고). 결국 발생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경제성을 이유로 노후화된 원전을 계속 사용한 결과, 2011년 원전 누출 사고(1번의 대형사고)를 맞게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하여 전 세계인들은 세계 3대 원전강국이라고 불리던 일본이 자연재해 앞에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다른 나라가 이를 거울삼아 자국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을 돌아보게 했으며, 기업들이 천재지변에도 대비할 수 있는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300번의 잠재 요소를 사전에 관리한다면, 한 번의 대형사고에서 빚어지는 막대한 비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2부 선박 침몰 사고



세월호

평화 시에 발생한 세 번째 규모의 참사: 1950년 이후 전쟁 시기가 아니라 평화 시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은 대형사고로 어떤 것이 있을까? 1995년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502명의 사망자를 냈고, 1970년 전남 여수에서 남영호가 침몰하여 32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2014년 전남 진도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302명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어떤 큰일이 생기면 그와 관련된 사람과 조직, 사회 전체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세월호 여객선 침몰로 인해 우리 사회에 잠복해 있던 문제점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고발생의 직접적인 원인: 세월호 사고 후 조사에 따르면, 직접적인 사고발생 요인은 ‘① 규정 어기고 출항 ② 삼등항해사가 항해 지휘 ③ 항로 변경 시 정전 ④ 과격한 조타 ⑤ 화물을 제대로 고정 안 함 ⑥ 평형수 제대로 안 채움’으로 드러났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세월호는 원래 4월 16일 오후 6시 30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출항 허가가 나지 않았다. 출항을 하지 못하면 여객과 화물 운임 등 전부 1억여 원을 반환해야 하기 때문에, 세월호는 항만청과 해경, 기상청과 협의하여 출항 허가를 받아냈다. 오후 9시 출항 당시, 안개는 두 시간 전에 비해 좀 옅어지기는 했지만 저시정 2급으로 가시거리가 500미터에 불과했다. 출항이 가능한 가시거리는 원래 1,000미터이다.

세월호는 예정된 제주 입항 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력을 올렸고 진도 부근에 와서는 물살이 빠르고 세기로 유명한 맹골수도를 택했는데, 이곳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해양사고가 18번, 한 해에 네 번꼴로 발생했던 곳이다. 맹골수도가 불법 항로는 아니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이 지역을 한 번도 항해해본 경험이 없는 삼등항해사에게 항해 지휘를 맡겨서는 안 되었다. 원래 책임을 맡은 항해사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출항 시간이 늦춰지면서 입사 4개월 차인 삼등항해사가 키를 잡았다. 또 삼등항해사가 항해를 지휘하더라도 선장이 그 옆에서 지켰어야 했는데, 당시 선장은 조타실에 없었다.

속도도 문제였다. 인천에서 출항을 정시에 했다면 제주항에 오전 10시 30분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항이 두 시간 지연되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속도인 20노트(시속 36킬로미터)로 간다면 12시 30분에 도착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고 당시 세월호의 예상 도착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즉, 통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운항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타수는 진도 앞 관매도와 병풍도 사이에서 제주항으로 가기 위해 보통 조타 방향을 우측으로 약간 꺾는다. 조타수는 세월호의 복원력 부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변침 각도를 5도 이상 바꾸지 않지만 실제로는 15도 이상으로 훨씬 많이 급회전한 것으로 보인다. 변침을 한 후 정전이 발생하면서 자동식별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전기 신호가 방향키로 전달되지 않았고 배는 계속 우회전하면서 반원 형태로 돌았다. 3분 36초 이후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지만 화물은 이미 무너져 내렸고 배는 평형을 완전히 잃었다. 배의 기울기를 보여주는 클리노미터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35도 이내만 되면 다시 평형 상태로 복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월호처럼 선폭이 좁고 무게 하중이 위에 있으면, 그 각도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무너질 수 있다.

미흡한 초동대처: 침몰이 시작된 후 선원과 해경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들이 조금만 더 제대로 했더라면 승객 상당수가 구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흡한 초동 대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선장의 부재와 리더십 부재 ② 엉뚱한 곳으로 구조 요청 ③ 청해진해운 본사와 교전하느라 시간 허비 ④ 선원들의 집단이기주의 ⑤ 잘못된 안내방송 ⑥ 해경의 소극적인 구조 활동 ⑦ 해경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민간 잠수를 허용하지 않음.’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배가 기울어지기 10분 전에 조타실에 들어왔다가 나간 선장은 배가 상당히 기운 후에야 조타실에 다시 들어왔다. 그는 당시 매우 당황하여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선장의 리더십은 매우 중요한데 선장은 그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일등항해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퇴선 명령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선장에게 물었지만, 당황한 선장은 제대로 된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일등항해사는 침몰 지역과 가까운 진도재난센터로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해상교통관제센터로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걸어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했다. 1초가 시급한 이 시간에 그들은 또 청해진해운 본사에 전화를 걸어 화물 과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물으며 자신들의 문제점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한편 선원들은 승객에게 움직이면 오히려 위험하다며 가만있으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안내방송을 믿고 선실에서 추후 방송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결국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선장은 배가 복원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해실 승무원(12명)과 기관실 승무원(3명)에게 탈출 지시를 내렸다. 항해실과 기관실 승무원을 선박직 승무원이라고 하는데 이들 15명은 모두 대피하여 목숨을 건졌다. 승객 서비스를 맡아서 하는 사무원과 조리원 같은 일반직 승무원은 14명인데 그중 5명만 살았다. 선박직과 일반직 승무원은 도합 29명인데 그 가운데 20명이 살아남아 생존율이 69퍼센트였다. 이에 반해 승객 중 단원고 학생들의 생존율은 23퍼센트에 불과했다. 집단이기주의의 극치다. 타이타닉 호의 선장도 서해훼리 호의 선장도 배가 침몰할 때 운명을 같이했다.

구조에 나선 해양경찰도 허점투성이였다. 사고가 발생한 후 해경이 처음으로 사고발생 사실을 인지한 것은, 세월호에 탑승하고 있던 고등학생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목포해경 상황실로 신고전화를 걸고 나서였다. 122로 전화를 걸면 해경은 그 배가 위도와 경도상 어디에 있는지를 자동으로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정보는 모니터에 뜨지 않았다. 해난신고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선박의 위치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선박모니터링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고, 선박이 항로를 벗어나면 경보장치가 울리게 되어 있는 지능해상교통관리시스템도 먹통이었다. 이들 시스템으로 구성된 위험경보분석장치는 사고발생 열흘 전부터 내내 고장 난 상태였기 때문에 사고 당시 무용지물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해경의 구조활동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한마디로 수준 이하였다. 세월호에 오른 해경 일부는 구명벌을 발로 차서 바다에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헬기나 보트로 구조하는 데 그쳤고, 아직 선실에 남아 있는 승객들이 밖으로 나오도록 적극적인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선실에 진입하지도 않았다. 또 해경은 선박이 침몰한 다음에는 신속하게 잠수사를 내려 보내야 하는데 해군이나 민간 잠수사가 자신들보다 먼저 투입되는 것을 막았다. 이 또한 관에 만연한 집단이기주의와 공적 다툼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고발생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이와 같은 대참사는 선사와 정부 및 관련단체들의 부실한 행태와 해이한 마인드에서 시작되는 면이 큰데, 조사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발견되었다. ‘① 안전상 설계에 문제가 있는 노후선박 도입 ② 승객을 더 많이 싣기 위해 선박 증개축 ③ 규정을 넘긴 상습 과적과 평형수 빼기 ④ 안전 훈련을 소홀히 함 ⑤ 계약직 직원을 다수 채용 ⑥ 생명중시보다 경제우선주의 마인드.’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청해진해운은 세월호를 일본선사에게서 2012년 10월에 구입했는데, 이때 선박은 1994년 일본에서 건조된 지 18년이 지난 오래된 배였다. 원래 우리나라 법규상 여객선 수명은 20년이었으나 정부는 1991년에 25년까지 연장해주었고, 2009년 해운법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30년까지 연장해주었다. 물론 선사의 수익성을 개선해주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연장 조치가 없었다면 청해진해운은 18년 된 중고 여객선을 도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형적인 로로선(화물과 여객을 동시에 싣는 배)인 세월호는 선폭이 좁아서 일본에서 이미 사고를 낸 적이 있었고, 해사기구에서 운항을 금지했던 배였다. 선폭이 좁으면 복원력이 떨어져 선박 전복 위험이 크다. 거기에다가 청해진해운은 더 많은 수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 2013년 배꼬리 부분에 객실을 넓히는 증개축 작업을 했고, 그 결과 배에 실을 수 있는 정원이 840명에서 956명으로 늘어났다.

세월호는 선박 개조 후 해양수산부를 대행한 한국선급에서 선박 검사를 받았다. 선급이란 배를 건조하는 단계에서 안전성을 검사하여 등급을 매기는 것을 말한다. 한국선급은 세월호 선실의 무게가 늘었기 때문에 복원성을 위해 화물량을 구조 변경 전 2,437톤에서 987톤으로 줄이고, 여객도 88톤에서 83톤으로 줄이고, 평형수는 1,023톤에서 2,030톤으로 늘리라고 조건을 달았다. 선체 증축으로 무게 중심이 51센티미터 올라갔기 때문에 배 아래에 평형수를 더 채워서 무게중심을 맞춰야 했지만, 한국해운조합은 배가 물 아래로 얼마나 잠기는지 흘수를 망원경으로 볼 뿐 평형수를 제대로 점검하지는 않았다. 청해진해운은 평형수를 더 채우는 대신, 수익을 위해 화물을 더 실어 배 무게를 늘렸고 그만큼 평형수를 뺐다. 수익을 위해 안전을 완전히 포기한 셈이다.

한편 여객선이 안전수칙을 지키는지 감시하고 배가 출항할 때마다 과적 여부를 점검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운항관리자인데, 그의 임무는 선장이 제출한 출항 전 점검 보고서를 서면 확인하고 선장의 선내 비상훈련 실시 여부와 구명기구 완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운항관리자는 해운법 시행규칙에 규정된 운항관리자의 13가지 의무 중에 7개를 준수하지 않았다. 운항관리자만이라도 자기가 맡은 임무를 다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청해진해운의 채용에도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선박의 운항과 관리를 책임진 사람들 대부분은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이었다. 선장마저도 1년 계약직이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선박회사인 청해진해운이 안전훈련에 사용한 금액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한 해 안전훈련에 들어간 금액은 54만 1,000원으로, 선원 1인당 5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1년 동안 쓴 접대비는 6,000만 원이 넘었다. 이는 청해진해운만이 아니라, 국내 선사 대부분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선박의 운항 및 관리와 관련된 정부기관은 해양수산부인데, 장관이나 차관은 퇴임 후에 주로 한국해운조합, 한국선급 같은 기관의 대표를 맡는다. 그런데 이들 조직은 해운회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에 해양수산부 전임자는 정부부처, 국회의원, 항만청, 지역 해경에 압력을 가하는 로비스트 역할을 하며 선박안전법, 선원법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정하도록 유도한다. 해운업체의 회비로 운영되는 이익단체인 해운조합이 정부에 로비를 해서 선박 상태를 검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인명구조 조치: 엄청난 재해에 가슴을 친 사람들은 또 한 번 땅을 칠 수밖에 없었다. 구조된 사람의 숫자가 단 한 명도 늘어나지 못하는 기막힌 현실 때문이었다. 이 사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해경의 주도 ② 정부의 지휘체계 난맥.’ 자세히 살펴보자. 해경 중심의 구조 작업이 지지부진하면서 민간 구조단체와 해군 해난구조대가 구조 작업에 참여 의사를 밝히고 여러 아이디어를 주었지만, 해경 및 청해진해운과 독점 계약을 맺은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사는 이 제안을 모두 거부하고 단독으로 구조작업을 추진했고, 곧 난관에 부딪혔다. 빨리 그리고 여러 명이 동시에 구조를 했다면 구조 활동에서 정말 중요한 140분간의 골든타임 동안 인명을 구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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