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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닥으로 가라

로니 A. 에이나브 지음 | 아라크네
나스닥으로 가라

로니 A. 에이나브 지음

아라크네 / 2013년 8월 / 351쪽 / 17,000원



천재들의 경계 / 월급쟁이만은 결코: 나는 열여덟 살에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의무 복무를 시작하는 대신, 특별 프로그램을 택한 덕분에 테크니온-이스라엘 공과 대학의 전기 공학과 학사 학위를 먼저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후, 보안 연구와 개발을 통합할 목적으로 설립한 IDF의 무기 개발 부대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테크니온에서 오퍼레이션 리서치의 필수 과목을 이수하고, 논문을 제출한 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아버지가 되면서 안정된 직업을 찾아야 했고, 교사직에 대해 알아본 후, 테크니온 석사 과정의 몇몇 핵심 강좌를 맡았다.

그리고 얼마 후 베르세바의 신생학교 벤구리온 대학교로부터 시간제 일자리를 제안받았고, 이곳에서 나는 계획과 설계의 컴퓨터 응용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강좌를 처음으로 개설했다. 이처럼 학계에 내 전부를 바쳤음에도, 나는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원했다. 나의 행운은 예후다 파우스트를 통해 왔다. 예후다는 내가 테크니온에서 가르쳤던 강좌의 수강생이었다. 1972년 그는 찾아와 말했다. “저는 현재 댄 에이탄과 에리 고셴이 동업하는 회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6일 전쟁이 끝나고 엄청난 개발 붐이 일어났는데, 일손이 부족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순간에 찾아온 제안이었다.

예후다는 댄에게 나를 소개했고, 댄은 몇 가지 질문을 하고는 나를 영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댄에게 월급쟁이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다고 했고, 댄은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나는 예후다와 함께 재정 설계 분야에서 전력을 다해 일하며 능력을 입증했고, 내가 설계한 건축 프로젝트 세부 프로그램은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업체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두 달이 지난 1972년 말 나는 에이탄-고셴의 구조 안에서 내 첫 번째 회사를 설립하고, ‘에이나브 시스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마 후 한 이란 도급업자가 이란 해군을 위해 새롭게 세 도시를 건설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는 입찰에 성공한 후에 계약을 직접 이행하기 위해 이스라엘 회사 엔지니어링 서비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회사는 공학 분야를 전문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건축에 관한 전문가가 없었다. 결국 엔지니어링 서비스는 에이탄-고셴과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에이탄-고셴과 계약을 맺은 정량화와 프로그램 전문가인 나는 에이나브 시스템스의 대표로서 가장 먼저 작업에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란과의 비즈니스: 이란 해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란은 우리에게 무한한 기회의 나라가 되었다. 사업가들로부터 호텔이나 요트 클럽을 짓고 싶다는 제의가 쇄도했다. 하지만 1979년 2월 이란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 사업은 종지부를 찍었다. 내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이다. 1977년 11월 그가 예루살렘을 평화롭게 방문한 일은 사회적 통념을 뒤흔들었고, 이란 혁명만큼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내게 그 일은 행운으로 작용했다.

생애 최초의 대규모 계약: 나는 에이탄-고셴의 파트너로 계속 일했다. 그런 한편 ‘에이나브 시스템스’의 소규모 팀은 우리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로 공군 기지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고, IDF의 건설부서로부터 군 보관 시스템을 최적화하고, 주요 프로젝트의 일정을 전산화하는 업무를 위탁받았다. 한편 1977년 11월 사다트가 예루살렘을 평화롭게 방문한 후, 어느 일요일, 당시 IDF 건축부 브랜치 10의 책임자였던 건축가 샤마이 아시프(내 강좌를 들었던 학생이었음)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평화 협정을 맺은 이후 육군은 몇 가지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힘을 모읍시다. 몇 년 동안 입대하세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나는 누군가의 고용인으로는 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내게 한 가지 대안이 있었다. 에이나브 시스템스라면 IDF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생애 최초로 대규모 공공사업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 계약은 시나이 반도의 IDF 기지 전체를 소거할 예산과 일정을 준비하는 엄청난 규모의 작업이었다.

우선 나는 에이탄-고셴의 사무실을 떠나 텔 아비브 중심가에 사무실을 빌렸다. 그런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할 직원 10명을 고용해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프로젝트를 1년 정도 진행했을 때 공군에서도 우리가 육군에게 제공하고 있던 전문 서비스를 요청했고, 이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전문가를 더 영입했다. 그런데 어느 날 IDF는 자신들이 한 민간 기업의 서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직접 자체 시스템에 적합한 병렬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걱정스러웠다.

기존 계약을 보호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나는 일을 저질렀다. 병렬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에이나브 시스템스의 도움을 받는 길뿐이라고 설득했고, 그들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이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급박하게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이웃인 모티 글레이저를 영입하면서 해결되었다. 나는 하도급자로 합류한 모티에게 IDF의 내부 전산화 프로그램을 일임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스라엘의 일류 은행 레우미가 저축 제도를 위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때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몰랐으면서도 “예, 물론 할 수 있죠.”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직원들에게 그 은행의 요구를 전했을 때 그들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사람을 찾기로 결심하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인 출신인 알렉스 슈바르츠라는 이름이 계속 거론되었다. 나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보수에 괜찮은 직위를 제시하며 그를 영입했고, 그를 중심으로 ‘티콘 프로젝트(Tichon Project)’를 완성했다.

나의 모든 천재들: 레우미 은행과의 거래를 소개한 사람은 1979년 우리 회사에 합류한 메이어 아르논이었다. 모티의 친구인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데다 성실함과 활력, 창의성을 겸비한 유능한 인재였다. 그의 부친은 레우미 은행의 고위직에 있었는데, 그 덕분에 메이어는 부친의 탄탄한 인간관계 네트워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모티와 나는 그가 15만 달러 상당의 거래를 수주할 때마다 에이나브 시스템스의 주식 1퍼센트를 지급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같은 해 에이나브 시스템스는 국방부로부터 네 번째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우리는 새 인력을 고용했다. 그 가운데 이라크 킬만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커뮤니케이션과 프로그래밍의 전문가였던 그는 특히 주목할 만했다.

한편 모티는 회사에 자신의 전부를 바쳤고 얼마 후 파트너로 영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마침내 1981년 4월 모티와 나는 정식 파트너십 계약에 서명했다. 파트너 계약에 따르면, 그는 주식의 30퍼센트를 받고, 6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20퍼센트를 받아서 동등한 파트너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함께 일하기 전에 그에게 느꼈던 애정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두 사람은 천생연분은 아니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모티에게 약속은 나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은 메이어였다. 메이어는 레우미 은행 프로젝트처럼 자신이 약속한 규모의 일을 유치했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약속된 1퍼센트 소유권을 원했다. 그러나 모티는 늘 그랬듯이 너무나도 약삭빠르게 약속을 저버려서 메이어에게 크게 상처를 주었다. 메이어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자회사를 설립하자고 메이어에게 제안했다. 그 자회사에서 메이어는 메인 파트너로서 60퍼센트의 주식을 보유하고, 에이나브 시스템스가 나머지를 보유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다행히도 메이어가 제안을 수락한 덕에 1982년 ‘에이나브 컴퓨터 시스템스’가 출범했다. 새로운 파트너십을 맺은 직후에 메이어는 훗날 ACA라는 회사로 탄생하는 건축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한편 1984년 메이어는 경영학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에이나브 컴퓨터 시스템스의 관리를 맡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리크 킬만은 함께 일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지브 야나이를 소개했다. 모티와 나는 그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고, 같은 해 3월 아리크, 지브와 함께 우리의 두 번째 자회사로서, ‘리라즈 시스템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1980년대 이스라엘의 10대 소프트웨어 기업 가운데 에이나브 시스템스의 바로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모티는 이 사실에 못마땅해했다. 모티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을 도통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메이어와 의논한 끝에 에이나브 컴퓨터 시스템스의 자회사로 새로운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무렵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나를 찾아온 젊은 이방인이 베니 바인베르거였다.

소프트웨어의 탄생: 베니는 한 프로젝트의 관리를 맡기기 위해 영입한 인재였다. 그 프로젝트는 방문 피라미드 마케팅 방식으로 운영되던 ‘네이처 뷰티’라는 기업이 위탁한 것이었다. 이 회사의 지불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작업은 정말 복잡했다. 그래서 모티는 이웃에 살던 이트지크 엘다르에게 조언을 구했다. 엘다르는 자신이 직접 지불 시스템을 프로그램하면 좋겠으나, 그러려면 네이처 뷰티의 시스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티는 자신의 인맥을 훑은 끝에 베니를 영입했다. 베니는 신속하고도 손쉽게 시스템을 분석했고, 엘다르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수립해 고객을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베니가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장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메이어에게 얘기했습니다.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내 회사를 설립하는 거죠. 내게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베니를 사로잡은 아이디어는 미래지향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데이터베이스는 기존 데이터베이스 제품 DB2나 ADABAS보다 한층 효율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개발 아이디어에 모티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메이어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그의 기업가 정신이 인상적인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베니의 탁월한 설득력 덕분에 내 두려움은 금세 누그러졌다.

우리는 설립하려는 회사에 어울릴 이름을 ‘더 포스 디멘션 소프트웨어 유한회사(The Fourth Dimension Software LTD)’로 결정했다. 미래지향적이면서 흥미로웠으며 4D라고 줄일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회사의 소유권은 베니와 에이나브 컴퓨터 시스템스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 한편 베니의 자신감은 전염성이 있어서 무역 산업부의 선임 연구원인 아리에 라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라비 박사는 5,000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그 돈으로 우리는 모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 개발은 지지부진했고, 2차례나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니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당시 베니는 바르 일란 대학교에서 강의를 수강하고 있었는데(두 번째로 실패하면서 그는 학업의 길을 고려했다), 그곳에서 한 지인(군인인 아비 코헨)으로부터 공군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밤새 진행 중인 수백 가지 업무를 계획하고 배정해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오퍼레이터가 작업할 필요도 없이 야간 배치 런(batch run)이 자동으로 완료되었다. 아비는 GS 데일리를 민간 부문에 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해 나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제대하자마자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비의 주선을 통해 베니와 내가 그의 상관과 만났다. 당시 나는 에이나브 시스템스가 공군에 제공했던 성공적인 프로젝트 덕분에 공군에서 꽤 괜찮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얼마 후 셰울라 헤이트너 중령으로부터 만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만났더니 공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간 기업으로부터 수명이 훨씬 더 긴 최신 첨단 기술 제품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공군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아비와 그의 동료들이 작성한 1만 개의 코드라인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대신 우리는 프로그램이 사용되는 동안 그것을 업데이트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베니는 우리가 진행할 프로젝트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가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육군은 우리와 계약을 맺을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문제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했는지 알게 되었다. 급히 셰울라 헤이트너에게 달려갔더니 그는 머지않아 승인이 날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1주일을 기다렸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개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국방부의 협조문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한편 당시 우리는 이미 두 번의 실패로 큰 손해를 보았기에 파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그런데 메인프레임은 또 어떻게 구할 것인가?

베니가 수소문해 보니 근처에 있는 한 대학교에 우리에게 필요한 개발 스테이션이 있었다. 베니는 대학에게 지금은 돈을 지불할 형편이 안 되지만, 개발이 성공하면 그곳에서 완수한 업무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3퍼센트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대학은 받아들였다. 그사이에 나는 계속해서 국방부를 찾아다녔고, 2년 동안 우리는 대학 지하실에서 열띤 연구를 계속했다. 덕분에 원래 계획했던 1만 개가 아니라 10만 개에 이르는 코드라인을 완성했다. 그래도 판매 가능한 제품은 아직 얻지 못했다. 처음 2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연구한 프로그래머는 베니와 아리엘 고든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나중에 프로그래머 4명이 더 가담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아비 코헨이었다. 그 결과 제품 개발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어, 컨트롤 M(우리가 GS 데일리에 붙인 새로운 이름)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제품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재정적인 압박이 더욱 커지던 1984년, 국방부의 협조문은 행정 절차의 문제로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할 파트너를 구했다. 그 결과 첫 번째 파트너 갈리아 스트라이커가 같은 해 5월에 합류했다. 갈리아가 파트너로 합류하면서 더 포스 디멘션의 지분은 메이어, 에이나브 시스템스, 갈리아, 그리고 내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메이어가 떠난 후 우리는 또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했고 용케 ATL을 찾아냈으며, ATL의 운영자 예체즈켈 자이라와 마케터였던 아모스 마고르도도 합류했다. ATL은 매달 6,000달러를 송금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승인하는 국방부의 협조문이 도착하지 않아, ATL은 1985년 우리와의 파트너십을 종결했다. 그리고 1985년 10월 22일 오랜 고생 끝에 마침내 국방부의 협조문을 받았다.

미국 진출: 사용 가능한 최초의 완제품과 소중한 승인서를 손에 넣고, 우리는 아량을 베풀어 전 파트너 ATL에게 다시 제안했다. ATL은 우리의 제안을 수락하고 모회사인 타디란에게 즉시 완제품을 판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판매량이 증가했다. 그리고 갈리아는 미국 시장을 타진했고, 1986년 11월 처음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한편 모티는 4D 업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조언을 구하면 득이 될 게 없는 경우에는 언제나 관심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4D의 사무실을 옮겼다. 새 사무실로의 이전은 모티와 나 사이의 시시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일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별 과정의 신호이기도 했다.

빠져나오기 어려운 파트너십: 그 무렵 에이나브 컴퓨터 시스템스의 파트너 메이어가 사업을 그만두고 자기 몫의 주식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갈리아와 함께 남은 주식을 매입했다. 그 결과 갈리아와 나는 각각 40퍼센트와 44퍼센트를 보유하고, 에이나브 시스템스는 이미 보유한 16퍼센트를 그대로 유지했다. 한편 1987년이 모티와 나에게는 고비였다. 모티는 자신의 개인 문제에 더 관심을 쏟은 반면, 나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4D를 위해 일하며 내 시간의 절반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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