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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건희

명진규 지음 | 팬덤북스
청년 이건희

명진규 지음

팬덤북스 / 2013년 6월 / 480쪽 / 16,000원





chapter 1 지식사회의 해답, 청년 이건희에게서 찾다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일보한 정보혁명을 체감하고 있다. 트위터를 통해 전파된 누군가의 제보는 1~2시간이면 전 세계를 뒤흔드는 스캔들로 비화된다. 전쟁의 참화는 실시간으로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고, 기업 활동은 실시간으로 감시받는다. 인터넷이 소수가 차지하고 있던 지식을 전 세계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면, 모바일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 어떤 정보라도 즉시 확인이 가능하다. 오늘날 구글, 애플, 아마존 등을 비롯한 글로벌 IT 기업들은 공장 없이도 첨단 스마트폰을 만들어내고, 오프라인 상점 없이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서점과 쇼핑몰을 운영한다. 지식사회는 복잡다변화된 사회로, 과거 한 명의 경영자가 모든 업무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은 불가능해졌다. 소비자는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를 통해 기업의 우위에 서 있으며, 특정 산업에 고유한 기술 영역도 사라졌다.

지식사회에서는 새로운 경영 스타일이 주목받는다. 과거 기술사회에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와 자본을 바탕으로 한 양적 팽창이 경영자의 주된 자질이었다. 하지만 지식사회에선 나무를 보고 숲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지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하나의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은 상상력과 창의력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찌감치 지식사회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를 해 온 인물이 있다. 바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다. 그가 삼성전자의 덩치를 불려 온 과정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산업의 전환점을 정확히 짚어 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는 반도체의 미래가 불확실했을 때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전자기기에 반도체가 탑재된다’고 예견하고 사운을 건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다. 휴대폰이 등장하자 1인 1휴대폰 시대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며 사업화를 지시했다. 당시 지식사회를 관통하는 이건희 회장 특유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그는 많이 듣고, 깊게 연구하고, 결정은 단호하게 한다. 항상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한다. 입은 현재를 얘기하면서도 머릿속은 늘 10년 뒤를 바라본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산물로 연구를 거듭하고 현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연구’는 이건희 회장이 어린 시절부터 갖고 다니던 화두이다. 평생의 경영이념으로 삼아 온 연구, 그 뒤에는 삼성그룹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들기도 한 무한탐구가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우리가 아는 무한탐구는 ‘궁극에 달할 때까지 연구하라’는 뜻이지만, 삼성가에 전해 내려온 무한탐구의 뜻은 ‘궁극에 달할 때까지 찾아라’는 것이다. 이 회장의 일생은 탐구로 점철되어 있다. 사물에 대한 탐구, 사람에 대한 탐구는 지금도 그칠 줄 모른다. 무한탐구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다. 무한이라는 두 글자에는 한계를 두지 말자는 삼성의 꿈이 들어 있다. 무한탐구, 이 네 글자로 인해 이병철 선대 회장은 대구에서 개업한 삼성상회를 시작으로 사업을 일으켜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그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은 무한의 뜻을 더욱 깊게 이해해 삼성전자를 세계 1위의 IT 기업으로 일구었다. 그는 아무리 세계 1등 품목을 많이 만들어도 ‘아직 멀었다’고 답한다. 세계 최고 회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구하고 노력하라는 뜻이 무한탐구였다면, 이제는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시 구하고 노력하라는 뜻으로 귀결된다. 이건희 회장의 1등주의는 바로 이 네 글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인재론은 천재론으로 대표된다. 1994년 이 회장은 한 특강에서 “21세기에는 1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면서 작게는 기업, 크게는 나라 전체를 위해 천재를 육성해야 하며, 리더라면 인재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흔히 학창 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천재라고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출입하며 만나 본 경영진 상당수는 이런 천재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 중에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노력형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많다. 이건희 회장도 어린 시절에는 소위 천재라는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10대에는 평범했고, 20대에는 조용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30대에는 실패와 좌절의 시기도 겪었지만, 40대부터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해 가며 삼성전자를 글로벌 전자산업의 거인으로 일구어 냈다. 예전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 대기업을 맡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나는 이 회장에 관한 공적?사적 일화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비로소 천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천재라고 부른 사람들은 창의력, 종합적인 사고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chapter 2 소년 이건희, 장난감에서 사물의 구조를 연구하다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경남 의령에서 이병철 선대 회장과 모친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두 형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어 그에게 큰 신경을 쓰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사업하느라 바빴다. 그가 어린 시절 줄곧 혼자였던 것 같다고 회상하는 까닭이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서 기쁨을 누리는 대신 홀로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건희 회장의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은 한국전쟁이 차지하고 있다. 전쟁 통의 혼란은 그의 행동범위를 집과 학교로 제한했지만, 생각과 상상만큼은 전 세계를 넘나들었다. 그가 뭔가를 배우는 방법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일단 자신이 배워야 할 것에 대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한다. 책, 비디오, 전문 자료 등을 모두 구한다. 그 뒤 읽고 보기 시작하여 관련 자료들을 모두 찾아보고 배운다. 자료로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 해당 분야 전문가를 불러 직접 궁금한 점을 묻는다. 지식 습득이 끝나면 장고에 빠져든다. 홀로 집무실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생각의 정리가 끝나면 함축적이고 간결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지난 1982년 반도체 사업 진출 시 삼성 경영진은 ‘가능성은 있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당시 전자 업계는 ‘공상과학 소설을 쓰려는 수준’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국내외 언론을 비롯하여 전문가들도 그를 말렸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에게는 오랜 조사와 공부, 연구 끝에 내린 확신이 있었다. 반도체 사업 없이는 핵심 기술을 확보할 수도 없고, 미국이나 일본을 영원히 따라갈 수 없다. “언제까지 미국과 일본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사운을 건 반도체 투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일단 투자가 시작되자 그는 무섭게 움직였다. 매달 일본을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났고,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고 데려왔다. 그는 미국, 일본과 직접 경쟁을 하는 대신 곧장 차세대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1메가 D램 개발이 목표였다. 그를 비롯한 삼성 경영진들이 밤낮을 새며 개발에 몰두한 지 4년 후인 1986년, 삼성은 1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이건희 회장 특유의 숙려단행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이건희 회장은 항상 혼자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혼자 지내는 시간 동안 그는 사물의 분해와 재구성에 탐닉했다. 특히 그는 모형 기차나 모형 비행기 같은 움직이는 장난감에 관심이 많았다. “저 안에 무엇이 있기에 스위치만 넣으면 달려갈까?” 물어볼 사람도 대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결국 궁금증은 스스로 풀어야 했다. 장난감을 직접 뜯어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분해와 재구성은 이건희 회장의 오랜 취미가 되었다. 그는 평생 공학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유학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는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했다. 오히려 영화, 책, 음악 등 그가 성장하면서 익힌 학문과 소양은 인문학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어떤 경영자보다 공학에 대한 이해가 깊다. 전자 산업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막대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큰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물을 이해하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던 이건희 회장은 경영을 맡으면서 비즈니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삼성그룹이 비단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호텔, 의류, 금융 등 다방면에 걸쳐 성공한 배경에는 업의 본질을 파악하고 경영진에게 전파하고 나선 이건희 회장이 있다. 1980년 대 후반 그는 당시 현명관 신라호텔 전무를 만나 물었다. “현 전무, 호텔 사업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현명관 전무는 ‘서비스업’이라고 대답했다. 이건희 회장은 “다시 제대로 한번 잘 보세요.”라고 말했다. 회장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현 전무는 일본 출장을 떠났다. 일본 호텔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현 전무의 눈길을 끈 것은 호텔 사장들이 최첨단 시설을 도입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새로 호텔을 오픈하려는 곳은 부동산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자 이건희 회장이 다시 물었다. 이에 현 전무는 호텔 사업은 서비스업보다는 장치 산업과 부동산업에 가깝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회장이 말했다. “이제 조금 알게 되신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경영진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스스로 연구하고 체득하도록 유도했다. 자신처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경영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chapter 3 영화에서 사람, 스포츠에서 삶을 배우다



이 회장은 12살 때 아버지의 지시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일본은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문화도 많이 달랐고, 한국인을 무시하는 풍토도 여전했다. 어린 나이에 그가 일본에서 느낀 감정은 차별로 인한 분노, 외로움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머물렀던 어린 시절 3년, 대학 시절 4년은 가장 외로웠던 시절이면서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것을 배우고 연구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기업가로서의 사업 동기다. 그는 평생을 걸쳐 일본을 넘어서기를 원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전자 왕국 일본을 넘어선 뒤에는 해체된 전자 왕국 일본을 반면교사 삼으며 세계 1등을 위해 연구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시네마 키드로 살았다. 일본에서 그에게 주어진 공간은 학교와 하숙집 방 한 칸이었다. 영화관에서는 그 좁은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담은 영화 속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대초원과 사막, 빙하가 있다. 먼 미래로 떠나 로봇과 대화하고, 인류의 숙원인 우주여행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그가 영화에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는 도피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 회장은 자신의 미래를 찾았다. 그가 3년간의 첫 일본 유학 시절에 본 영화는 모두 1천여 편을 넘어선다. 하루 한 편 이상 영화를 본 셈이다. 장르나 감독을 가리지도 않았다. 영화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며 고전에 관심을 가졌다. 오스 야스지로의 영화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인간 군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는 그의 여성관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성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비즈니스에 연결하려 노력했다.

장난감을 분해하던 그의 취미는 영화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겪지 못한 일을 경험하면서 수많은 직업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영화를 다각도로 보면서 기업 운영에 대한 묘를 연구했다. 기업 오너는 영화로 치면 제작자에 가깝다. 어떤 소재를 갖고 영화를 만들지를 결정해야 하고, 필요한 배우를 섭외해야 한다. 투자도 필수다. 영화가 성공하려면 감독을 잘 선임해야 한다. 기업으로 치면 전문경영인이다. 감독은 수많은 스텝들의 의견을 조율하면서 종합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배우와 스텝들이 있다. 배우는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감독의 철학에 따라 호흡을 맞추며 연기해야 한다. 스텝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처럼 영화를 보면서 그는 세상을 배우고, 기업을 배우고, 사람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만나고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사람에 대한 통찰력의 원천은 바로 영화였던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삼성의 3대 스포츠를 골프, 야구, 럭비라고 밝혔다. 3가지 스포츠 모두 경영학적 측면에서 의미를 두고 있다. 그는 골프를 통해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골프는 룰과 에티켓의 스포츠다. 룰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 남한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제3자가 관련된 사항에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배우는 것이 바로 골프다.” 그가 골프에서 삼성인의 정신으로 신사도를 찾았다면, 야구에서는 기업 경영의 묘를 찾았다. 야구는 9명의 선수들이 팀을 이루는 경기다. 잘 던지는 투수, 잘 치는 타자 등 뛰어난 실력을 뒷받침하는 스타플레이어가 중요한 경기다. 하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나머지 선수들이 없으면 제아무리 강팀이라 해도 승리가 요원하다. 특히 감독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선수들은 감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감독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 이건희 회장도 여기에 주목한다. “뛰어난 스타플레이어와 이를 뒷받침하는 선수들, 말없이 고생하면서도 표를 내지 않는 캐처의 정신, 선수와 감독 간의 신뢰, 이것을 야구에서 배워야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꼽는 스포츠는 럭비다. 그는 학창 시절 럭비를 접하고 강인한 투지와 추진력, 강력한 단결력, 순간적인 판단력에 매료되었다.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비가 와도 중지하지 않고 계속한다. 오직 전진이라는 목표를 향해 격렬한 태클과 공격을 반복하면서 하나로 뭉친다.” 진흙탕에 몸을 던지고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 선수를 들이받으면서 난관을 돌파하는 럭비의 정신은 실패로 인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삼성그룹의 자산이 되었다.



chapter 4 청년 이건희, 세계로 향하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건희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후일 기업 경영을 위해 일본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골프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 교분을 쌓았고, 틈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보거나, 카메라나 라디오 등의 전자 제품을 분해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이건희 회장은 최첨단 기술로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과 당당히 견주는 전자 왕국 일본의 출발을 지척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이 회장은 1965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으로 진학하여 MBA 과정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그는 자동차에 푹 빠졌다. 어릴 때부터 정밀한 기계를 좋아했던 그에게 자동차는 최고의 유희였다. 미국에 있는 2년 동안 그는 총 6번이나 자동차를 바꾸었다. 5대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 것이다. 그가 일본과 미국에서 머문 6년의 시간은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느낀 시기였다. 일본은 전후 상처를 딛고 최첨단 전자 왕국으로의 도약을 마련하고 있었다. 미국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 속에서 그는 정치, 경제,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변해 가는지를 직접 체험했다. 변화에 대한 그의 위기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임직원들에게 변화의 속도에 대해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다. 해외 출장에는 항상 규칙이 있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일본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머무른다. 이곳에서 일본 경제단체연합회 회장단을 비롯한 지인들과 출장 결과를 논의해 가며 경영 구상을 마무리한다. 경영상의 난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전하거나, 문제의 해법을 찾기도 한다. 이른바 이건희 회장의 싱크탱크인 셈이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산 그는 일본 재계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인맥,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맺은 인맥,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맺은 경단련 회장단과의 인맥은 다른 기업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에게 일본은 배워야 할 존재였고, 넘어야 할 나라였다. 또한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였다. 그의 인맥은 실제 사업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스미모토 화학과는 LED 소재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소니와는 LCD 패널 생산을 위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올해 들어서는 도시바,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과 함께 미국에 메모리 합작 법인을 세웠다. 과거 경쟁 상대였던 일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한일 경제협력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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