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메이커 혁명
베벌리 슈왈츠 지음 | 에이지21
체인지메이커 혁명
베벌리 슈왈츠 지음
에이지21 / 2013년 3월 / 360쪽 / 16,000원
1부 제도적 규범을 구조 조정하라
평범한 시민들에게 에너지 권력을 - 독일
우르술라 슬라덱은 유럽 최대 친환경 전기 공급업체이자 시민이 운영하는 기업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독일 슈나우 전력공장(EWS)의 창립자이다. EWS의 목표는 에너지 공급의 민주화와 공급권의 분권화를 이루는 것이다. 슈나우는 독일의 검은 숲 지역에 있는 오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 첨탑에 올라가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반짝이며 빛을 내는 수백 개의 태양열 판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슈나우 전력공장, 즉 EWS의 대표 우르술라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곳이다. 그녀의 가족 구성은 좀 놀랍다. 남편과 아이들 외에도 수천 명의 식구들이 더 있다. 그들 모두는 EWS의 주인이자, 동료이자, 회원들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발생했던 1986년 우르술라는 가정주부였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방사성 낙진의 위험성을 깨닫고 원자력을 종식시키는 데 나서기로 맹세했다. 그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들을 설득해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대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핵 없는 미래를 위한 부모 모임>이 설립되었다. 이후 13년 동안 그녀가 한 일은 지역 주민과 정치인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왜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지, 왜 원자력 발전에서 손을 떼야 하는지를 설득했다. 한편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절약하는 것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주민투표를 거쳐 국가 전력망에서 슈나우 마을은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슈나우 마을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 우르술라는 지역 전력망(전기 전송 및 배분 네트워크)을 사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업 EWS를 세웠다. 유럽에서 협동조합형 전력회사로는 첫 번째 사례였다. 6년 후 언론이 ‘전기 반란군’이라고 부른 우르술라와 그녀의 동지들은 독일 전역에서 전력망을 사들일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기적적으로 기금 마련에 성공했다. 주택단지 난방 발전소와 태양열판 설치를 시작으로 EWS는 자체 에너지의 일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백 년간 지속되어온 독일 거대 전력회사들의 독점을 깨뜨린 것이다. 일 년 후, EWS는 독일 전역에 재생에너지를 팔 수 있게 된다. 정부가 에너지 산업의 공적 규제를 해제한 것이다. 반짝거리는 태양열판과 함께 EWS는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EWS는 일종의 혼종 사회 모델(hybrid social model)이다. 우르술라는 이런 운동을 시작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능력 및 열정도 함께 투자해야 한다. 우르술라가 제시한 모델 덕분에 마을 주민 모두가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1997년 창립된 EWS는 독일 전역에 1500명의 조합원이 있으며, EWS가 전력을 공급하는 가구는 전국 12만 가구 25만 명에 달한다. 그들의 에너지원은 친환경 녹색에너지다. 조합원들은 집에서 만든 전력으로 에너지를 얻고, 남는 것은 EWS에 팔고 배당금을 받는다. 나머지 이윤은 새로운 재생 발전소를 세우고, 슈나우 모델을 활용해 녹색에너지 프로젝트를 운영하고자 하는 공동체를 지원하는 데 투자한다. 여러 지역공동체가 EWS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들에게 우르술라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내건다. 그것은 협동조합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독자적인 전력망 프로젝트에 지역 주민이 전적으로 개입하여 공동 주인, 즉 공동 체인지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력거 노예에서 주인으로 - 인도
어느 날 밤 수의사 프라딥은 병원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인력거를 탔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은 차를 사기 위해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인력거꾼들은 인력거를 갖기 위해 대출받을 수 없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교통난으로 길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프라딥은 인력거꾼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그의 대답을 종합하면 지난 16년 동안 운전을 해왔고, 하루 평균 수입은 25루피, 그중 1/3을 인력거 대여료로 지불한다고 했다. 프라딥이 왜 자기 인력거를 장만하지 않는지 묻자 그의 대답은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도 전역에는 8백만~1천만 명의 인력거꾼이 있다. 법적으로 면허 소지자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무면허이다. 한 가지 공공연한 비밀은 마피아가 인력거 소유와 대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인력거꾼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돈을 벌며 일주일 내내 하루 평균 8~10시간을 일한다. 저녁에는 거리에서 잠을 자며 경찰에 쫓기기도 한다. 고된 일로 삶이 힘들다 보니 상당수가 마약이나 술을 한다. 그 결과 도시의 범법자이자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 체류자로 전락하고 만다. 젊은 시절 도시에 처음 왔을 때 가졌던 꿈이 영원히 깨지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인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라딥은 인력거꾼을 돕기 위한 방안을 생각했다. 우선 기업의 광고를 인력거에 부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인력거꾼들이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가우하티에 있는 인도 공과 대학을 찾아가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인력거를 만들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인력거 은행 운영 계획도 세웠다. 원칙은 “임대를 소유로!”였다. 프라딥은 이 사업과 관련하여 인도 대기업 3곳의 후원을 얻는 데 성공했다. 기업에서 백 개의 인력거에 광고 설치대 비용을 협찬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력거 은행>의 아이디어는 현실이 되었다.
인력거 은행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첫째는 기술적인 측면이다. 프라딥은 인력거꾼들의 고된 일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였다. 둘째, 재정적인 측면이다. 현재 인력거를 사려면 1만 루피의 비용이 든다. 그리고 매일 인력거를 대여하는 인력거꾼이 8백만 명 있다. 8백만 명 곱하기 1만 루피, 이 정도 규모면 금융기관이 매력적인 사업 기회로 여기기에 손색이 없다. 인도의 큰 은행들이 지원에 나선 덕분에 인력거 은행은 재정적으로 순조롭게 운영될 수 있었다. 인력거꾼들은 은행에 개인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고, 단체로 손해보험과 생명보험도 들 수 있게 되었다. 일일 대여료 같은 할부금을 내면 440일 후에 인력거가 자기 소유가 된다. 셋째, 사회적 측면이다. 인력거꾼들은 사고보장뿐 아니라 건강보험까지 들 수 있게 되었고, 저렴한 비용으로 병원치료나 약품구입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인력거 은행은 상호협동조합으로 전환되었고, 인력거꾼들은 조합원으로서 인력거 은행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현재 이 인력거 혁명을 지원하는 곳은 인도의 시중 은행들과 국영 은행, 그리고 보험 회사들이다. 인력거 은행을 지원하는 것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기꺼이 손을 내민 이 기업들은 모두 체인지메이커 조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인력거 은행에 합류한 인력거꾼들 역시 체인지메이커로 여겨져야 한다. 그들이 이 활동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규정했던 악순환을 끊을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2부 시장의 역학을 변화시켜라
‘옥수수 411’ 전화로 달라진 소농의 삶 - 케냐
애드리언 머헤비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케냐 서부의 6천 평 남짓한 큰 농장에서 자랐다. 농장 근처에는 큰 농산물 시장이 있었다. 이곳에는 매년 약 3만여 명의 소농이 농산물을 매매하기 위해 온다. 애드리언의 아버지도 가족이 먹고 남은 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때마다 애드리언은 아버지를 따라나서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가져간 채소와 곡물들을 파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늘 가격흥정에 서툴렀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애드리언은 할 말을 잃었다.
애드리언의 아버지는 열심히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애드리언의 두 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야 했다. 그래야 지참금으로 애드리언 형제가 학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드리언은 커서 농업을 전공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농부가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과정과, 그들의 땀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에 있었다. 미국에 유학을 간 애드리언은 그곳에서 농업경제학과 마케팅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그는 시카고상품거래소를 방문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농부들은 더 나은 가격을 받기 위해 공동판매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결국 농부들은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해 구매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시카고상품거래소가 시작한 방법입니다. 케냐로 돌아가면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애드리언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케냐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부가 모든 농산물 가격을 관리하기 때문에 상품시장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17년 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케냐의 농업부문이 자유화되고 민영화된 1990년 초 역설적이게도 농부들에 대한 착취와 가격인하가 심해졌다.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라고 애드리언은 직감했다. 1992년 애드리언은 <케냐농산물거래소(KACE)>를 등록했고, 중간 정도 규모 시장에 칠판이 부착된 간이 안내센터를 세웠다. 경제학자로 근무하면서 일이 없는 저녁과 주말에는 KACE를 근본적으로 제대로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더 많은 상품을 포함하고 더 많은 시장을 확보하도록 KACE의 시스템을 변경했다.
오늘날 KACE 안내센터는 한 마을에 한 개씩 설치되어 있다. 애드리언은 케냐의 대형 도매시장 6곳의 가격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업데이트해서 보급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을 통해 KACE는 가난한 소농들에게 믿을 만한 시장정보를 때맞춰 알려주고 물건이 들어오고 나오는 흐름을 효율적으로 연계해서 파악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장에 오면 이제 농부들은 나무 아래에 앉아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안내센터에 와서 그날의 시장가격을 점검한다. 도시나 다른 지역에서 얼마에 팔리는지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이상, 구매자에게 속을 일도 없다. 농부들은 물건만 좋으면 흥정을 통해 더 나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예전에는 주는 대로 받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먼저 가격을 제시하는 동등하고 능동적인 판매자가 된 것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통로 덕분에 농부들의 수익이 증가하자, 그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을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훨씬 더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젊은 세대들도 농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깨닫고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케냐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의 농부들이 이러한 시장기회와 정보를 기술적으로 잘 활용한다면 농업생산성은 개선되고 경제성장이 앞당겨질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했던 소농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다.
3부 시장의 원리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라
쓰레기에서 황금으로 - 페루
1986년 페루의 수도 리마 변두리의 지자체 직원 조합 건물에 검은 머리의 28세 여성(알비나 루이즈)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그녀 앞에는 600명이 넘는 남성들이 화가 잔뜩 난 채 시끌벅적대고 있다. 그녀가 지자체 최초 여성 책임자로 고용된 지 불과 몇 개월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취임 후 몇 달을 공공 쓰레기 수거 과정에서 만연한 부패를 척결하는 데 보냈다. 그리고 지금 새 시스템을 설계하려던 참이었다. 그 시스템은 쓰레기 수거 대상 지역을 리마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까지 확장할 구상을 담고 있었다.
기존의 쓰레기 수거 시스템을 바꾸려는 알비나는 조합원들과 엄청난 문제를 겪었다. 조합원들은 첫 번째 표결 안건으로 그녀의 사임을 요구했다. 막상 투표에 부치려 할 때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만약 이 시청에 나보다도 더 이곳의 일을 잘 운영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회의장 전체가 침묵으로 가득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더 이상 누구도 해임 운운하지 않고 표결 문제는 회의 안건에서 빠졌다.
페루의 정글에서 태어난 알비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리마로 왔다. 대도시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왔지만 막상 리마에 도착하자 그녀의 실망감은 엄청났다.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온통 거리를 뒤덮은 쓰레기 산이 가득했다. 1983년 그녀가 리마에 왔을 때 당시 도시는 매일 만들어지는 3,500미터톤 이상의 쓰레기 가운데 고작 1/3만 수거했다. 나머지 2/3는 매일 거리에 흩뿌려졌다. 도심이 이 정도이니 가난한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리마는 거대한 쓰레기 웅덩이였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그녀는 쓰레기 수거 트럭의 효율성 측정에 초점을 맞춘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가 사는 곳의 쓰레기는 왜 수거가 되지 않을까?” 보고서를 보니 답이 보였다. 길가의 쓰레기 더미 주변으로 다니기에는 쓰레기 트럭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꽂힌 생각은 새로운 시스템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쓰레기 너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 그것을 재활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양돈가도 있었다. 고철과 병을 수거하는 사람들은 존엄성도 수입도 거의 없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아주 위험한 삶을 살고 있다. 훗날 그녀가 재활용 쓰레기 수거인 협회를 설립했을 때, 이들은 회원이 되었다. 수거인 협회는 유료로 쓰레기를 수거하는 문화를 장려하고, 각 가정이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문화를 일구도록 도왔다. 또 유용한 자산으로서 쓰레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알비나는 이 협회의 회원들에게 체인지메이커가 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과 가족, 이웃을 돕고 리마의 쓰레기를 황금으로 탈바꿈시켰다.
25년 이상 쓰레기 관리 부문에서 일해온 그녀는 <시우다드살루다블레>라는 비영리 기구를 설립하고 책임자로 있다.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고형 폐기물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이 단체는 리마뿐 아니라 페루 주변, 라틴 아메리카의 위생을 향상시키는 데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의 전략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공동체 단위로 수거?쓰레기 재활용?쓰레기 처리 활동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고도로 잘 연계된 네트워크다. 그녀가 쓰는 변화의 도구는 고용이다. 그녀는 재활용 쓰레기 수거인들을 조직하여 수입이 창출되는 초소형 기업으로 전환하는 데 활용한다. 이러한 초소형 기업들은 준독립 단체이면서 자립적인 단체로 조직된다. 이러한 조직특성은 폭넓은 공동체의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
똥 치우는 일만큼 중차대한 일은 없다 - 나이지리아
아이작 듀로자이예는 나이지리아에서 유명 정치인이나 부유한 고객을 보호하는 경호원이었고 또한 정보 장교였다. 하루는 만여 명의 하객이 오는 결혼식 경호 계획을 세우면서 그곳에 화장실이 2개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하객은 위험인물로 간주되기에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이동식 화장실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4주에 걸쳐 전국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구해오질 못했다. 그는 재미 삼아 자기 스스로 이동식 화장실 18개를 만들었다. 결혼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경호직을 그만두었다. 본격적으로 화장실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사업은 처음에는 어설프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위생적이며 지속가능한 화장실, 지속가능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이제 그는 아프리카 전역은 물론 화장실이 없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다. 전 세계인의 약 40%인 26억 명 정도가 화장실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본다. 배설물이 관리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마시는 물로 흘러들어간다. 그 결과 1년에 15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만성 설사 합병증으로 죽는다. 1999년 아이작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나이지리아에서 사용가능한 공중 화장실은 500개가 못 되었다. 하지만 2011년 말 약 5천 개 이상의 공중 화장실이 생겼다. 아이작의 이동식 화장실 덕이다. 정부는 1만 7천 개의 추가 화장실을 전국에 있는 학교에 설치하기로 아이작의 회사와 계약했다. 현재 그의 회사는 나이지리아 전국에 수천 개의 가맹점을 두고 총 2만 2천 개의 화장실을 운영하고 있다. 가맹점들은 그 덕에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 공중위생 시스템도 개선되고 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밖에서 볼일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