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람개비
이길여 지음 | 메디치미디어
아름다운 바람개비
이길여 지음
메디치 / 2012년 1월 / 215쪽 / 13,000원
Part1 천년대계
1. 한 걸음 앞서 가라
공익의 다른 이름, 사랑: 2010년 10월 15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의 가천대학교 성남 캠퍼스 정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캠퍼스 내 신출동인 '비전타워'의 준공식이 열리는 날, 비전타워가 보유하게 된 몇 가지 '최고'의 기록들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그 약속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다는 안도감. 비전타워는 무엇보다 내게 '약속의 상징'이었으며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 이룬 모두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9개월이 지난 2011년 7월 11일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경원대와 가천의과학대학의 통합을 승인 받았다. 새로운 '가천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가천(嘉泉)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고(故) 류승국 박사님이 가천길재단 산하 의료재단과 대학의 발전을 위해 헌사한 '가회합례 수세인천(嘉會合禮 壽世仁泉)'의 뜻을 받들었다. 이 말은 '참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른 삶을 이루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생명으로 온누리를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 중 아름다울 '가(嘉)'와 샘 '천(泉)' 두 자를 따온 것이다. '아름다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샘'이라는 깊은 뜻이 있다. 가천의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고 미래 지향적이며 발전적인 의지를 담아 나는 통합 대학교 명칭을 '가천'으로 결정했다. 나는 가천대학교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을 것이다.
나는 항상 신명나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왔다. 뚜렷한 비전이 있을 때 사람들은 생기가 돌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비전은 이상과 현실, 신념이 조화를 이룰 때 실현된다. 나의 이상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열린 지성'을 배출해 내는 것이며,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나의 의무다. 나는 나의 꿈과 비전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적 사명감을 실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공익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이익 창출과 사회적 사명감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둘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할 든든한 동반자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공익경영은 곧 사랑이다.
언제나 시작은 미미하다: 돌이켜보니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 출신인 내가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80년대 말 가천길재단의 뿌리인 길병원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다. 그즈음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간호사를 기르고 싶다는 소망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병원 직원들을 가르치며 쌓은 경험과 외국에서의 유학 경험도 내가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실 1970년대부터 의과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강한 생각을 품었다. 참된 의사를 육성하는 것은 결국 교육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가슴으로만 품었을 뿐 늘 병원 일에 쫓겨 학교 설립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 꿈은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러던 1994년 어느 날, 운명처럼 그 기회가 찾아왔다. 인천의 한 전문대학인 경인간호전문대학이 부도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 있을 때 한 교육계 인사가 찾아왔다.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하루에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하랴. 그 와중에 그를 만난 건 운명이었다. "원장님, 우리 지역에 전문대학이 있는데 부도가 나게 생겼습니다. 간호전문대인데 길병원에서 인수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경인간호전문대학을 맡게 되었고, 인수한 뒤 '가천길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저 교육에 대한 일념으로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당시 전국에 있는 전문대학 수는 200여 개. 인수한 뒤에 확인해 보니 200개의 전문대학 가운데 경인간호전문대학은 거의 꼴찌 평가를 받고 있었다.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인수하긴 했지만 한심하다는 생각뿐.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도와주어야 했다. 그 결과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전문대학 평가에서 금방 100위권 내에 진입했다. 교육 사업은 조금만 관심으로 도와주고 사랑을 주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학교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98년에는 평생의 꿈이던 의과대학을 설립해서 개교했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종합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또 다른 운명이 나를 찾아왔다. 가천의대에서 첫 신입생을 받던 날의 일이다. '가천길대학' 인수를 제안했던 그 교육계 인사가 나를 찾아와 조심스레 말했다. "성남에 있는 경원대 아시죠? 지금 그 학교가 경영난에 처해서 새로운 인수자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경원대를 인수한 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신흥 명문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교수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강의동을 지어 교육 환경을 일신했다. 내 꿈은, 내 사랑이 닿는 학교를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공익경영이니 윤리경영이니 하는 말은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사랑으로 경영할 뿐이다. 마취제를 맞고 축 늘어진 덩치 큰 환자를 내 품에 끌어안고 방에 뉘일 수 있는 그런 애정이 담긴 사랑경영 말이다.
나는 공익과 백년가약했다: 16세기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그녀는 조국을 위해 행복과 사랑마저 버렸다. 그 결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녀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45년간 영국을 통치하며 영국의 역사는 물론 세계의 역사까지 바꿔 놓았다. 오직 영국과 영국민만을 섬기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고 일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철학은 단순했다. '영국에 이익이냐, 손해냐'가 판단의 기준이었다. 정략적인 목적이 담긴 수많은 결혼 제안을 거부하고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영국의 안위만을 염려했다.
나도 혼자다. 사실 내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한 사업가와 결혼할 뻔했으나 결혼해서 사는 삶은 내 운명이 아니라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 일 외에는 그 흔한 연애 한번 해 본 적 없다. 그 후로 결혼해서 사는 삶에 대한 미련을 접었기 때문이다. 대신 내게 주어진 삶을 오롯이 병원과 학교 교육에 바쳤다. "나는 병원, 그리고 학교와 결혼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병원 직원들과 환자,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익이냐, 손해냐'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다. 이런 철학 덕분에 나는 매년 졸업식 때마다 큰 선물을 받는다. 졸업생들이 내게 달려와 안기는 뜨거운 선물, 그리고 환자들에게는 시도때도없이 눈물이 담긴 감사의 말을 선물 받는다.
혹자는 나를 두고 공익경영의 표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궁극적으로 사랑할 뿐, 그 이상은 없다. 내 삶은 공익을 위한 삶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위한 삶이다. 결과적으로 공익을 위한 삶이 되었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이 환자이건 학생이건 나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홀로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환자를 보면 안아주어야 마음이 풀린다. 내 품에 안긴 학생과 내 몸에 안긴 환자들의 심장소리와 숨소리를 들을 때 나는 안도와 환희를 느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로지 영국의 안위만을 염려했기에 자신의 삶을 숭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영국과 영국민을 사랑했을 뿐이다. 나 역시 환자들과 병원 식구들, 그리고 가천대학교의 모든 학생들을 사랑할 뿐이다.
2. 꿈에는 마침표가 없다
위기는 위대한 기회: 누구나 살다 보면 위기와 마주친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는 삶의 일부다.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1987년, 지금의 가천의대 길병원을 한창 짓고 있을 때의 일이다. 국내 도급 순위 8위의 이름난 건설사를 선정했는데도 시공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고 만 것이다. 결국 사전 공사비용을 고스란히 날리고 어렵사리 다른 업체를 선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설사가 건물을 짓지 않고 건축비를 다시 산정하자고 억지를 쓰는 통에 애를 먹였다. 나중에는 위생난방공사 업체 선정 문제로 조직 폭력배가 병원에 난입하는 황당한 사태까지 벌어졌다. 어수선한 일을 거듭 겪다 보니 급기야 인천 일대에 '길병원이 부도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심지어 '이길여가 죽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공기(工期)가 자꾸 늘어지다 보니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줄 상여금이 모자라 간호대학 부지로 사두었던 땅을 헐값에 매각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경원대학교를 인수한 뒤에도 하루하루 크고 작은 위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힘든 일 앞에서 '힘들다'라는 생각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위기가 닥쳤을 땐 그것을 돌파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위기 시에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해법 없는 위기는 없다. 위기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잉태되고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도 우리가 찾을 수 있다. 만약 정말로 해법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라. 노력할 만큼 노력했는데도 어쩔 수 없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라. 모험과 도전에 익숙해진 사람은 위기를 즐길 수도 있다. '덤벼라. 내가 맞서 주마'라고 생각을 전환하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가천길재단의 상징은 바람개비다. 어린 시절, 나는 자주 바람개비를 돌리며 놀았다. 바람개비를 수수깡에 꽂아 한 손에 들고 탁 트인 언덕을 오르면 바람개비가 씽씽 돌았다. 숨이 차고 힘들어도 더 빨리 도는 바람개비를 보고 싶어 나는 힘을 다해 뛰곤 했다. 바람개비는 맞바람이라는 저항이 있어야 비로소 세게 돌아간다. 맞바람이 거셀수록 바람개비는 더 빨리, 더 신나게 돌아간다. 위기 앞에서 더 강해지고 도전 정신이 솟는 나처럼 말이다.
3. 하루 25시간을 뛰어라
우보천리(牛步千里):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고, 의대 시절과 유학을 준비할 때도 그랬고, 미국에서 인턴 생활을 할 때도 그랬고 해야 할 공부는 늘 너무나 많았다. 수많은 책과 외워야 할 자료를 한데 쌓아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혔다. '이걸 언제 다 하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무력감이 엄습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쓰곤 했다. 해야 할 공부와 남은 시간을 계산하여 하루 동안 공부할 수 있는 양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1천 페이지의 책을 읽고 외워야 하는데 시험까지 남은 시간이 1주일이라면, 하루에 봐야 할 책의 양은 150페이지 정도가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모아 놓으면 많지만 쪼개놓으면 별 게 아니다. 목표가 힘겨워 보이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잘게 나누어보라. 한 번에 할 수 있을 만큼만 나누어라. 또한 한 가지 중요한 팁을 주자면, 각 진행 단계마다 '이정표'를 설치해두라는 것이다. 중간에 여러 이정표를 마련해두면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전이라도 중간중간 성취감을 얻고 의욕을 재충전할 수 있다. 중간 목표에 도달할 때마다 작은 이벤트를 마련해 자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초등학교부터 여고 시절까지 내 꿈은 하얀 가운을 입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나의 지상목표였다. 서울 의대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것으로 꿈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늦은 나이에 안정적인 터전을 버리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인천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을 일구었다. 그리고 지금은 국내 10위권의 종합병원의 책임자이자 첨단 연구소를 보유한 종합대학교의 운영자가 되었다.
'이길여 산부인과'가 없었다면 '길병원'도 없었을 것이고, '길병원'이 없었다면 '가천의과대학교'와 '가천대학교'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꿈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한 걸음,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한다는 점에선 누구나 똑같다. 다만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벽돌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자신이 짓는 인생이라는 집의 형태가 결정된다. 우보천리(牛步千里)라고 했다.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뜻이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우직하게 앞을 향해 한 걸음씩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
4. 최첨단을 찾아라
최고를 향해: 가천길재단의 식구는 현재 5천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53년 전 처음 병원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고작 간호사 두 명을 가진 작은 병원이었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을 뿐인데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득한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 가천길재단의 핵심은 당연히 병원이다. 1958년 처음 병원 문을 연 뒤로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법, 인생을 살아가는 법, 지속가능한 경영 기법 등을 모두 병원에서 배웠다.
서른두 살에 떠난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오던 해인 1968년, 나는 다시 인천에 병원을 열었다. 건물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현장소장이 물었다. "병원 이름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이길여 산부인과로 해주세요." 의사 이름을 앞세운 병원이 드문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 짓는 병원에는 반드시 내 이름을 넣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었다. 내 이름을 걸고 한국 땅에 진짜 병원다운 병원의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길여 산부인과는 36개의 병상을 갖춘 9층 건물로 완성되었다. 인천 소재 병원으로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당시 가장 큰 병원이었던 도립병원에도 없는 최첨단 장비들을 속속 들여놓았다. 인큐베이터와 나팔관 검사기는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에 4대뿐이던 태아의 심장박동 측정 초음파기도 구비했다. 1973년에는 복강경 수술기를 들여와 국내 개인병원 최초로 복강경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되었다.
첨단 시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력과 정성이다. 나는 실력과 정성 면에서도 자신이 있었다. 미국에서 잠자는 시간을 반납하고 배워온 것이 바로 환자에 대한 철저한 서비스 정신과 첨단 의료 기법이었다. 환자들은 '미국에서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산부인과 여의사'라며 앞다퉈 입소문을 내주었다. 엘리베이터와 각종 첨단 장비들이 병원의 신뢰도 제고에 큰 역할을 해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길여 산부인과가 다른 병원들과 구별되는 점은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었다. 당시에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의사들은 많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의사로 살아도 어느 정도 안락한 삶이 보장되지만, 미국에서 의사로 살면 훨씬 더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여의사가 있다고 하니 별다른 홍보 없이도 병원은 늘 만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길여 산부인과는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가 됐다.
미국 유학을 통해 나는 첨단 진단 장비와 수술 도구, 시술법 등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환자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의료 혜택을 내 가족과 환자들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미국의 기술과 장비도 놀라웠지만 진료 시스템과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의 태도는 더 놀라웠다. 미국 병원 의료진은 환자를 친절하게 대했고, 고객 만족이 최우선이었다. 당시의 미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30년쯤 앞서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는 여러 모로 앞선 시스템을 실천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최상의 장비로 최고의 진료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 않을 바엔 아예 시작하지 말 것이지 일단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감동'은 상상을 초월한 것,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맞닥뜨렸을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긍정의 반응이다. 이제는 기업들도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을 실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