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씨 이야기, 허씨 이야기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구씨 이야기 허씨 이야기
전경일 지음
다빈치북스 / 2010년 11월 / 263쪽 / 12,000원
1장 부(富)를 일구어내는 과감한 도전2005년 3월 3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 타워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GS그룹 CI 및 경영 이념 선포식이 열린 것이다. 이날부터 LG그룹은 LG와 GS그룹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공식 작별 선언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구본무 회장의 가슴엔 창업 3세대로서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3대 57년에 걸친 동업시대가 끝나고 이제 분리된 두 그룹 앞에는 각자의 처녀항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57년의 동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구 LG그룹 임직원들은 물론 창업자들, 주주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마음속에 담아두고자 했다.
LG는 57년 전 구씨와 허씨 두 가문이 손을 잡은 이래로 대를 이어 완벽한 동업을 이어 나갔고, 이날 성공적인 분할을 함으로써 동업이 완성된다. 처음 자본금 300만원으로 출발한 락희화학은 1년 만에 3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1대 구인회 회장, 2대 구자경 회장을 거쳐 3대 구본무 회장으로 오면서 눈부신 글로벌 성장을 이루어냈다. 2009년 현재 LG는 자본금이 7.4조원으로 274만 배 늘었고, 매출액도 125조 원으로 41만 배 넘게 성장했다. 분리되어 나간 GS그룹도 순항중이다. LG와 한 지붕에 있을 때의 23.1조원이었던 GS그룹의 매출은 계열 분리 이후 규모가 2배 늘었다. 내용만 보면 동업 57년과 분할 5년 만에 두 가문은 재계 수위에 드는 두 그룹을 서로 나누어 가진 셈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동업은 망한다'는 고정관념은 틀렸다는 것과 산업에서 더 크게 상생하고 커나가는 파트너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만큼이나 흥미롭고 감동적인 것은 그룹 분리 시 두 집안이 친구로 헤어졌다는 점이다. 이들의 우호적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씨, 허씨 양가는 어떻게 해서 57년간 불협화음 없이 성공적인 동업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동업을 했기에 조그마한 락희화학을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
두 집안이 손을 잡게 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1946년 1월 부산에 있던 구인회에게 그의 장인 허만식의 6촌 허만정이 찾아온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 무렵 구인회는 소문난 장사꾼이었고 허만정은 진주의 만석꾼이었다. 사실 두 집안의 인연은 구인회 회장의 8대조인 구반공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반공의 부친이 현풍현감으로 재임할 때 진주의 만석꾼인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고 이후 두 집안은 몇 대에 걸쳐 친교를 맺으면서 겹사돈을 맺게 된다. 이는 두 집안이 훗날 동업으로 손을 잡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LG, GS 두 그룹이 출범하는 계기가 된다.
구인회는 1907년 8월 경남 진양군 승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며 자란 그는 13세 때 이웃집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한다. 이후 양 집안은 무려 8건이나 겹사돈을 맺으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간다. 결혼 후 구인회는 보통학교에 편입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두 명의 미래 기업가를 만나게 되는데 삼성의 이병철과 효성의 조홍제가 바로 그들이었다. 1924년 구인회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26년 중퇴를 한다. 학비를 대주던 장인이 사망하여 공부를 계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구인회는 사업에 뜻을 보였다. 처음에는 승산리 협동조합 일을 맡아보다가 일본인 상인에 대항하여 소비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한다. 당시 마을에는 무라카미라는 상술에 능한 일본 상인이 독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석유, 비누, 비단, 광목 등을 공동 구매하면 일본인 가게에서 사는 것보다 이득이라는 점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해 나갔다. 비록 작은 시도였지만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1929년 구인회는 <지수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마산과 진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석유와 포목, 비누, 잡화 등을 공동 구매해 주민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포목의 유통경로와 마케팅 기법을 체득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구인회는 1931년 협동조합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포목상을 열게 되었다. 그가 포목상을 하기로 한 이유는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큰 업종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친과 동생으로부터 사업자금 3800원을 받아 경남 진주에 <구인회 상점>이라는 간판을 건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첫 사업은 실패였다. 포목의 수요, 유통 및 마케팅에 대해 치밀하게 연구했지만 상대적으로 점포 규모가 작고 품목이나 재고량이 많지 않아 기존 업체와 경쟁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구인회는 첫 실패에 굴하지 않고 부친을 설득하여 고향마을의 논 문서를 담보로 동양척식회사에서 8천원을 대출받아 역발상으로 가게 규모를 더 확대한다.
당시 구인회가 취한 장사 방식 중 하나는 매점을 통한 이익 극대화였다. 비성수기에 포목을 사서 성수기에 내다 파는 사업 방식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올린 것이다. 그의 사업 원칙을 이렇게 내세웠다. "절대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 자(尺)를 속이지 않고 물건을 판다." 여기에는 구인회의 깊은 장사법이 숨겨져 있다. 시장에서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고객 만족을 꾀한다는 경영철학이다. 이런 제값 받기는 이후 럭키(LG)의 주요 사업 원칙이 된다. 1차 실패 이후 잘 되어가던 사업은 1936년 대홍수로 인해 점포가 물에 잠기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사업에 다시 실패했지만 구인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이 있었다. 장사를 해서 쌓아올린 고객의 신뢰, 거래처와의 신용, 상업적 경험 등이 그것이다. 점포를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을 고민하던 구인회는 불현듯 옛말이 떠올라 무릎을 쳤다. "장마 진 해에는 풍년이 든다." 그는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주변 사람들에게 거금 1만 원을 빌려 포목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예측대로 그해 풍년이 들자 그동안 미뤄온 혼수 수요가 폭증했다. 덩달아 포목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했고 그의 사업인생도 다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두 번의 좌절 끝에 세 번째의 도약이었다.
1937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구인회가 전쟁 발발 1년 전에 전시 특수 경기를 예측하여 광목 1천 짝을 사둔 덕분에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 무렵 구인회는 무역업으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다가 두터운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전시 통제로 군수품이 될 수 있는 포목 공급이 막히면서 무역업 전개가 어려워진 것이다. 구인회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대기업들을 만나 거래를 트려고 했지만 소자본인 그를 상대해주는 곳은 없었다. 이 경험은 구인회가 향후 장대한 포부를 펼칠 결심이 싹트는 계기가 된다. '내 반드시 일본 기업을 뛰어 넘으리라.'
이후 구인회는 전시통제 대상이 아닌 어물사업에 뛰어들어 쏠쏠한 재미를 보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예금을 모두 안전한 토지로 갈아타기로 한다. 이 무렵 그는 갖고 있던 모든 돈을 투자하여 약 200만 평의 논을 장만하였다. 이로써 구인회는 토지에서 장사로, 장사에서 다시 토지로 돌아오는 사업상의 한 주기를 넘게 된다. 멀리 내다보면서 무리 없이 합리적으로 재산을 지킨 구인회의 부의 철학은 창업과 수성을 교묘하게 엮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버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금주의 사고는 부의 증식의 가장 명확한 원칙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해방이 되자 구인회는 다시 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재빨리 땅을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부산으로 사업의 본거지를 옮기고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 간판을 내건다. 그가 무역업에 손을 댄 이유는 해방공간에서 생필품 수요가 많은 것이라는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역업은 제조업보다 사업에 많은 이점이 있었다. 토지나 기계 같은 고정 설비가 들지 않았고, 허가만 받으면 맨 주먹으로도 사업을 벌여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무역업은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사업상 실패가 이어져 구인회에게는 슬럼프 시기가 찾아온다. 무역업의 뒤를 이어 남들이 좋다고 권하는 자동차 운수업에도 뛰어들었지만 여기서도 손해를 보게 된다. 기업가 구인회의 일생에서 힘만 들이고 허탕 친 대표적인 사업 두 개가 바로 이것이다.
2장 세상을 바꾸는 기업가 열정부산에서의 야심찬 도전이 실패로 돌아갈 무렵 구인회에게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양 집안의 동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946년 1월 어느 날 구인회에게 장인의 6촌인 허만정이 허준구라는 젊은이를 데리고 불쑥 찾아왔다.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내 사돈의 사업역량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청을 하나만 들어 주소. 이 아이는 맡기고 갈 터이니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 주소. 내 사돈이 하는 사업에 출자를 할 생각이오." 허만정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3남 허준구의 경영수업을 부탁하고 사업자금을 내놓으면서 그 자리에서 동업을 제안한 것이다. 구인회는 허만정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허만정이 출자한 금액은 조선흥업사 자본금의 1/4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집안은 자본 참여와 인적 투여의 파트너십이 형성된다.
처음에는 조선흥업사의 사업이 신통치 않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오늘날 LG그룹의 윤곽을 드러내게 해 준 우연한 만남이 찾아온다.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가 당구장에 들락거리다 흥아화학 화장품 기사 김준환을 알게 되었고, 흥아화학이 도청 상공과 지정 업체에 크림과 머릿기름 등 화장품을 납품한다는 정보를 얻어 들은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구인회는 미군정 치하 부산에서 늘어나기 시작하는 미용 수요를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하고 흥아화학과 거래를 트기로 하였다. 70만원 어치 크림을 사서 서울로 보내면 현금으로 1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사업이었다. 포목점을 하던 구인회가 화장품 업계로 뛰어든 것은 모험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지구상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화장품 시장은 영원하다는 것이었다.
구인회는 화장품 유통 사업이 잘 풀려 나가자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천운이 따랐는지 당시 화장품 업계 최고 기술자로 불린 김준환이 흥아화학을 나와 독자 사업을 전개하려 하다가 자본이 부족하자 구인회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인회는 1947년 300만원의 거금을 들여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김준환을 공장장으로 임명하였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럭키 크림'은 전국적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생산이 수요를 못 쫓아갈 정도였다. 그런데 수요가 많아지면 품질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긴 구인회는 사업원칙으로 뛰어난 기술력과 품질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 같은 품질 제일주의 정신은 훗날 LG의 주요 사업 원칙이 된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 수도 부산은 각종 소비재와 생필품이 귀했다.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무역업이 호황기를 맞이했고, 미군을 통해 엄청난 원조물자가 들어왔다. 다들 PX 물건이라고 하는 원조물자에 생존의 일부를 의존하고 있을 때 구인회는 전쟁과 산업을 연결하는 대담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저 막강한 자본주의 본령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기막힌 물건들과 한 판 붙고 싶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그의 결단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난리 통에 플라스틱 사출기를 도입하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전쟁이 나면 제조업에서 상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인데 오히려 전쟁 중에 제조업을 하겠다니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구인회는 결단을 내리고 결행한다. "항상 눈을 뜨고 멀리 보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 구인회의 도전 정신으로 한국 플라스틱 산업이 태동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LG가 한 산업 영역에서 막강한 리더십을 확보하는 순간이자 이후 그룹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구인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9월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최초의 합성수지 제품인 오리엔탈 상표의 빗과 비눗갑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락희에서 만든 플라스틱 빗의 견본을 진상했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반색했다고 한다.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나?" 전쟁이 끝나고 1954년 구인회는 부산 연지동에 대형 공장을 건립하였다. 이듬해부터 연지동 공장에서 비닐 원단과 플라스틱 제품이 생산되었고, 같은 해 3월 럭키치약이 최초로 생산되었다. 플라스틱 제품에서 화학제품으로 사업을 넓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락회화학은 1956년에는 PVC 파이프, 1957년에는 비닐 장판과 폴리에틸렌 필름을, 1959년에는 스펀지 레진을 각각 개발 및 생산했다. 이 모든 성장이 LG의 발전사와 함께하였으며, 혁신의 중심에는 언제나 구인회가 있었다. 그를 통해 구씨와 허씨 양씨 집안 사람들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가 똘똘 뭉쳐 혁신의 동업 역사를 탁월하게 이루어 내었다.
1950년대 중반 락희화학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 구인회는 새로운 도전 대상을 찾는다. 그가 참조한 것은 일본 통산성 백서였다. 백서에는 향후 석유화학이나 전자공업이 유망하다는 예측이 있었다. 구인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전자산업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화학을 하던 회사가 전자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불확실성이 높다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심을 한 데에는 시장 초기 진입자의 우위를 누리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결단을 내린 구인회는 1957년 금성 산업을 발족시킨다. 그는 일본, 홍콩, 유럽의 전자 산업 현황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1959년 금성 산업을 금성사(Gold Star)로 개편하고 본격적으로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다.
금성사는 설립 초기 국내 최초로 진공관식 6구 라디오를 생산했다. 부품 국산화율이 60%에 달해 한국 전자공업사에 획기적인 성과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플라스틱 제품 생산을 통해 축적한 금형 기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외제를 선호하는 국내 고객의 외면으로 위기를 맞았다. 전자산업에서의 철수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금성사를 도운 것은 5.16 쿠데타였다. 군사정부가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고 정부 시책 홍보를 위해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금성사는 기사회생을 하게 되었다. 이후 금성사는 1960년 선풍기 개발, 냉장고(1964), 흑백 TV(1966), 에어컨(1968), 세탁기 및 승강기(1969)에 이르기까지 주요 가전 분야를 국내 최초로 국산화함으로써 국민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금성사는 1962년 자산규모 5억 원에서 출발하여 18개 품목의 전기, 전자 제품을 비롯하여 통신기기, 전선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1971년부터 고도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1978년 매출 1천억을 돌파한 이후, 1986년 1조원 대에 진입했고, 1988년에는 2조 원대를 상회하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금성사는 럭키가 화장품, 치약 등 생필품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나간 것과 달리, 우리 생활에 미디어 시대를 여는 혁명적인 전자시대를 가져왔다.
구인회가 전자산업에 뛰어들 때 주위에서 이렇게 말렸다고 한다. "미군 PX에서 신형 라디오가 쏟아져 나오는데 무슨 재간으로 그들과 부딪쳐 이길 수 있겠나?" 이때마다 구인회는 자신의 생각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PX에서 나오는 외국 물건만 사 쓰고 살아야 한단 말이오? 무서워 앞장서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거요." 그의 기업 철학이 드러난 이 말은 훗날 LG가 전자시대를 열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구인회가 주위의 반대로 전자산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오늘날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한국의 전자제품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뚝심과 비전이 대한민국의 미래 핵심 산업을 지켜냈던 것이다.
3장 사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