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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배틀

데이비드 레스터 지음 | 북스넛
아이디어 배틀

데이비드 레스터 지음

북스넛 / 2010년 11월 / 319쪽 / 15,000원




첨단 아이디어로 무장하라_ 테크놀로지의 점령자들



애플(Apple) - 정상을 향한 거침없는 도전

산타클라라(현재의 실리콘밸리 중심부)의 젊은 컴퓨터광인 빌 페르난데스가 1971년에 자신의 친구인 스티브 잡스를 스티브 워즈니악에게 소개해주었을 때, 이 두 사람이 20세기와 21세기의 혁신을 주도한 테크놀로지 기업의 설립자가 되리라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성공적인 시작: 첫 맛남 후에 잡스는 곧바로 워즈니악에게 매료되었다. 워즈니악이 그가 만난 사람 중 전자공학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의 기술이 시장가치가 있다는 걸 단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첫 사업적 도전은 전화 회사가 만드는 다이얼 톤 신호를 모방함으로써 무료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전자 장치인 ‘블루박스’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 첫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당시 휴렛팩커드에서 일하던 워즈니악은 항상 자신의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1976년 초 그는 MOS테크놀로지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토대로 그의 첫 번째 컴퓨터 설계를 마무리했다.



워즈니악은 첫 컴퓨터 설계를 끝냄과 동시에 컴퓨터 애호가들의 모임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자신의 컴퓨터 설계를 공개했는데, 스티브 잡스는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창기 프로그램 언어인 베이직을 돌릴 수 있고 모니터 대신 TV를 연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컴퓨터는 마침내 650달러 정도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의 권유로 워즈니악은 자신이 일하는 HP사장에게 이 컴퓨터의 상업화를 제안해보았지만, 사장은 ‘HP는 그런 종류의 시장을 타깃으로 하진 않는다’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두 사람이 직접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스티브 잡스는 1천 5백 달러에 자신의 폭스바겐 밴을 팔았고, 워즈니악은 250달러에 아끼던 HP65 계산기를 팔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의 머릿속엔 한 개의 회사 이름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이름이 바로 ‘애플’이었다.



잡스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애플 컴퓨터즈’를 소개했고, 그 결과 캘리포니아에 ‘바이트 숍 컴퓨터 스토어’를 소유하고 있던 폴 제이 테렐로부터 최초의 주문을 받았다. 폴 제이 테렐은 제품을 받는 즉시 현찰을 주는 조건으로 대당 5백 달러에 50대의 컴퓨터를 주문했다. 그런데 테렐이 케이스를 포함해 완전히 조립된 컴퓨터를 원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서 또 한 번 잡스의 흔들림 없는 성격이 빛을 발했다. 잡스는 5천 달러를 대출받고 부품 공급 업체를 설득해 1만 5천 달러를 30일 후에 지불하기로 했다. 얼마 후 드디어 애플이 첫 배송을 했다. 이것으로 애플은 8천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투자가 마이크 마쿨라의 관심을 끌게 되어 9만 2천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초기의 이윤은 또한 설립자들이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부터 창업자금 25만 달러를 신용 대출받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세련된 디자인과 로고의 탄생: 1976년 7월 최초의 애플을 판매한 지 한 달 만에 워즈니악은 두 번째 애플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애플 II라 명명한 두 번째 모델의 문제점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수백 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점에 마쿨라가 등장해 애플은 1977년 1월 3일 법인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애플 II의 제품 개발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잡스는 맵시 있는 컴퓨터 외관을 고집했는데 그는 세련된 디자인이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레지스나 맥케나를 끌어들여 그 유명한 애플 로고를 탄생시켰다. 1977년 3월, 드디어 1천 3백 달러의 가격으로 판매에 들어간 애플 II는 순식간에 히트를 쳤다. 미국 전역의 컴퓨터 애호가들은 애플 II의 매력적인 케이스와 붙박이 키보드, 칼라 그래픽 등에 매료되었다. 당시 애플 II는 장부를 정리하고 게임을 하며 심지어 연산까지 배울 수 있는 ‘모든 가족을 위한 컴퓨터’로 홍보되었다.



잇따른 실패와 새로운 카드: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애플은 세 가지 주요 프로젝트를 감행했는데 그중 두 개는 애플을 거의 파멸 직전으로까지 몰고 갔다. 1978년 애플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선보이기 위한 컴퓨터인 애플 III를 발표했다. 하지만 애플 III는 잦은 고장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애플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을 뿐이었다.



1979년 스티브 잡스는 제록스사의 ‘팔로 알토 리서치 센터(PARC)’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애플이 직원 제프 라스킨과 함께 PARC를 방문했을 때 잡스는 우연히 ‘포인트 앤 클릭’을 적용하는 초기 마우스 운영 체제 컴퓨터를 접하게 되었다 잡스는 이 콘셉트에 극도로 흥분해 이를 ‘하나의 혁명’이라고 부르고는 개발팀으로 하여금 이와 비슷한 인터페이스 개발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애플에게 두 번째 기술적인 실패를 안겨준 컴퓨터 리사였다.



애플의 세 번째 카드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맥 프로젝트)였다. 리사와 애플 III 프로젝트를 실패하고 나자 1980년부터는 잡스 자신이 맥 프로젝트를 총괄했는데, 이는 당시 책임자인 제프 라스킨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라스킨과 잡스는 견해 차이로 자주 부딪혔고 잡스의 높아진 지위로 인해 잡스가 주도권을 행사하자 맥 프로젝트는 순식간에 무정부 상태의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잡스가 맥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맥 프로젝트의 목표는 순식간에 변경되었다. 맥 프로젝트 초창기 라스킨은 저렴하고 가볍고 사용하기 쉬운 컴퓨터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잡스가 여기에 새로운 기능들을 추가하자 라스키의 비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1982년 라스킨은 프로젝트의 총괄을 잡스에게 넘기고 애플을 떠났다. 잡스는 리사 프로젝트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노베이션을 훔쳐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4년 출시된 맥은 리사와 똑같은 테크놀로지를 적용했지만 리사보다 더 작고 저렴했다.



사업에서 물러난 두 명의 설립자: 1984년 성공적으로 출시된 매킨토시는 사용하기 쉽다는 점에 매료된 매킨토시 팬들 사이에서 거의 집착에 가까운 충성과 경탄을 불러 일으켰다. 애플은 경쟁 업체들 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순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플 자체의 운영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 애플이 기업 공개를 한 이후 두 설립자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애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초창기 직원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 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1981년 비행기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은 워즈니악은 결국 애플의 회사 정책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히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후 워즈니악은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고, 1983년 제품 개발을 위해 애플로 복귀했을 때 그는 관리자가 아니라 엔지니어로서 제품 개발에 참여했다.



워즈니악이 떠나고, 후에 라스킨마저 회사를 떠나자 이사진은 잡스의 오만한 리더십 스타일과 변덕스러운 행동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잡스는 한동안 비탄에 잠겼지만 이내 털고 일어나 애플의 경험 많은 직원들과 함께 교육 소프트웨어 업체인 넥스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했을 때 잡스는 루카스필름과 접촉했고 애니메이션 업체인 픽사를 인수해 또 하나의 새로운 혁신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애플은 잡스의 사임 후 몇 년 동안 곤경에 처했다. IBM의 PC와 호환되는 소프트웨어가 더 많은 데다 애플의 가격도 더 비쌌기에 애플은 기술적인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시장점유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1996년 애플이 7억 4천만 달러의 적자를 보자 애플의 새로운 CEO 질 아멜리오는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 사직하기에 이른다. 이제 애플은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리란 것이 분명해보였다.



잡스의 복귀와 혁신적인 제품 출시: 1996년 애플은 스티브 잡스를 다시 CEO로 임명했다. 그동안 애플을 떠나 넥스트와 픽사를 운영하면서 잡스는 많이 차분해진 태도를 보였다. 사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예전과 변함없었지만 본래의 변덕스러운 기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잡스는 곧바로 적자의 주범인, 이윤을 내지 못하는 상당수의 프로젝트들을 중단시키면서 애플을 효율적으로 변모시켰다. 잡스는 파산 위기에 처한 애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맥의 디자인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기 위해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를 영입한 것이다. 애플 II 개발 시 디자인을 가장 우선시했던 잡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직감을 발휘했다. 아이브와 애플 파트너십의 결과는 아이맥의 밝고 심플하며 우아한 디자인으로 나타났다. 당시 아이맥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소비자들은 이제 자신의 컴퓨터를 서재나 공부방에 숨겨두지 않고 하나의 장식품처럼 자랑스럽게 진열하기 시작했다. 윈도우의 팬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맥으로 전향했고, 처음으로 윈도우와 맥 OS의 유사성이 빌 게이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윈도우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주 쉽게 맥 OS의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멋지고 사용하기도 쉬운 아이맥은 전자 제품 소비자의 새로운 니즈를 몰고 온 주역이었다. 아이맥의 열풍으로 애플의 시장점유율과 이윤은 극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애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애플의 계속되는 혁신의 다음 단계는 2001년 아이팟의 출시였다. 이 맵시 있고 매력적인 소형기기는 말 그대로 음악 세계에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사용하기 쉽고 심지어 재미까지 있는 이 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CD나 테이프 대신 MP3를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애플이 2003년 아이튠즈를 론칭했을 때 아이팟의 판매량은 순식간에 폭증했다. 아이튠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터넷을 통해 아이팟에 음악을 다운받을 수 있게 해주는 웹사이트인데, 하나의 앨범 전체를 구입할 필요가 없고 원하는 곡만을 구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2008년 6월 애플은 50억 곡 이상이 아이튠즈를 통해 구매되었다고 발표했다. 잡스는 이렇게 애플의 새로운 소비 혁신의 주역으로 부상시키며 애플에게 또 한 번 성공을 선사해주었다. 애플의 판매 실적과 이윤을 다시 한 번 급상승시킨 그는 실직적인 애플의 구세주라 할 만하다.



애플의 현재: 애플의 계속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결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애플의 최근 주력 제품인 아이폰을 통해 잡스는 휴대폰이라는 또 하나의 분야에서 새로운 스타일과 기능적인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아이폰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애플은 여기에 추가될 또 다른 이노베이션을 계획 중이다.



2003년 이래 애플은 점점 더 작은 패키지에 새로운 기능을 집적시킴으로써 소비자들을 유혹해오고 있다. 애플의 포트폴리오에서 컴퓨터가 계속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애플은 그외 다른 모든 제품군에도 지속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각종 컨퍼런스 및 맥월드 엑스포에서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곤 하는 잡스는 현재도 애플에서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애플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첨단 테크놀로지의 산실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을 접속시켜라 _ 웹사이트의 다크호스



구글 -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장악하다!

페이지 랭크의 탄생: 구글이 처음부터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었다. 사실 사업을 시작했을 때, 구글의 설립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들의 웹사이트가 어떤 식으로 돈을 벌어들이게 될지조차 몰랐다. 두 사람은 1995년 봄 스탠포드 대학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둘 모두 스탠포드의 컴퓨터 공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들은 이미 컴퓨터를 아주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의 작동 원리도 꿰뚫고 있었다.



당시 기존의 몇몇 검색엔진이 있었지만 검색 시 수천 개에 달하는 검색 결과는 검색어와의 관련성 순서로 정렬되지 않았다. 스탠포드 박사 과정 동기인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후를 개발했지만, 이들은 그저 일단의 편집자들을 고용해 웹디렉토리를 정리하는 것에 그쳤기에 엄청난 기세로 퍼져나가는 월드와이드 웹을 따라잡는 데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서 정보를 추출하는 데 탁월했던 정보 검색의 전문가 세르게이는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 확신하며 당시 주요 검색 엔진인 알타비스타를 연구하던 래리와 힘을 합쳤다. 언제나 야심에 차 있던 래리는 당시 알타비스타가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웹 링크 간의 상호 관련성을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PC에 전체 웹사이트를 다운받는 작업에 돌입했다.



두 사람은 하나의 사이트에 연결된 링크 수는 그 사이트의 인기 척도가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게다가 링크의 중요성도 가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면, BBC와 같이 접속량과 링크가 많은 웹사이트가 당신의 웹사이트를 링크했다면 그것은 비교적 인기가 떨어지는 웹사이트가 당신의 웹사이트를링크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래리는 이러한 서열을 정하기 위해 개발한 알고리즘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페이지 랭크’라고 이름 지었다. 단순히 검색어를 웹페이지의 키워드와 연결시켜주는 전통적인 검색 방식에다 페이지 랭크의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세르게이와 래리는 사용자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정확한 결과를 보여주는 검색엔진을 개발했다.



검색엔진 판매의 실패: 래래와 세르게이는 자신들의 검색엔진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백럽’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1997년 ‘구글’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1에 0을 100개 붙인 ‘구골’이라는 수학 용어를 변형시켜 만든 말인 구글은 웹상의 방대한 데이터를 상징한다. 대학 캠퍼스의 한 방에서 밤낮 없이 연구에 몰두한 결과 둘은 자신들의 창조물을 대학 인트라넷을 통해 스탠포드 대학 전교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보에 굶주린 학생들은 이들의 검색엔진이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도출한다는 걸 곧바로 실감 할 수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통해 금세 퍼진 이들의 검색엔진은 그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개발한 검색엔진이 당시의 어떤 검색엔진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특허출원을 하기 전 자신들의 기술을 익사이트나 야후 또는 당시 업계 선두주자인 알타비스타 등에 최고 백만 달러까지 받고 팔아보려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든 회사가 이 황금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검색이 확실한 수입 창출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데다 눈 깜짝할 사이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구글의 목표가 광고주들에겐 그리 달갑지 않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개발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진 세르게이와 래리는 이제 구글을 직접 마케팅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학우들의 이메일 피드백을 참조해 검색엔진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1998년 8월 둘은 선마이크로시스템즈사의 공동 창업자인 개인 투자자 앤지 벡톨샤임을 만났다. 아직 엉성한 사업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벡톨샤임은 구글의 아이디어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주었고, 세르게이와 래리는 비로소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구글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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