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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쥔지에 지음 | 시그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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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쥔지에 지음
시그마북스 / 2010년 10월 / 744쪽 / 26,000원제1부 중국의 상인들
저장(浙江)상인 - 중국을 대표하는 거부(巨富)상인
천성적으로 타고난 상인: 저장성은 타이후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와 맞닿아 있다. 저장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특유의 상업적 마인드와 기업가 정신을 길러왔다. 진나라 이전, 범려는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대파한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상업에 뛰어들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장사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저장성을 무대로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였고, 천하제일의 거상으로 중국 역사에 남았다.
저장성에서는 동한 시기에 이미 대규모의 수리사업이 나타났으며 제염업, 제도업(製陶業) 등이 상당 수준 발달했다. 이후 진나라 때 저장성 내 닝보 지역 상인들이 다른 성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저장상인들은 무역항인 닝보, 원저우 등을 통해 동중국해를 넘어 일본에까지 진출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상인으로는 이린덕, 이연효, 장지신, 이처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개인 선박을 가지고 일본과 닝보, 타이저우, 원저우(溫州) 등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송나라 때에는 항저우와 닝보, 원저우 등지에 해상무역 관리를 전담하는 관청인 시박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명청(明淸) 시기에는 한때 정부에서 해상무역을 금지했으나, 닝보나 원저우 일대에서는 여전히 밀수 무역이 성행했다. 당시 저장상인들은 정부의 엄격한 감시를 피해 초황, 비단 등 무역이 금지된 품목들을 일본 등으로 수출하면서 장사를 계속했다.
아편전쟁 이후 닝보와 원저우 등 항구가 대외무역항으로 개방되면서 저장성은 본격적으로 중국 민간상업의 발전을 이끌기 시작했다. 여기에 상업을 중시하는 서구 풍조가 유입되면서 저장상인들은 더욱 탄탄한 발전대로를 걸었다. 저장상인은 오랜 상업적 문화전통과 타고난 사업 감각 덕분에 어딜 가나 '천부적인 장사꾼'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198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고 대외에 문호를 개방하자, 저장상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장 먼저 경제개발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 최초로 개인사업 허가증을 받은 여류 사업가 장화메이 역시 원저우 출신이다.
장사에 천부적 자질을 가진 저장상인은 개혁개방의 훈풍을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저장의 향진기업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보였으며, 시장도 그 어떤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같은 성과에 고무된 저장 사람들은 이렇게 호언장담하기에 이르렀다. "시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저장 사람이 있다. 그리고 시장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저장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저장상인들은 저장에만 머물지 않고 남으로 북으로 시장을 개척했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청두 등 대도시부터 우루무치, 라싸, 후허하오터 등 변방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저장상인 및 투자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그 방증으로 중국 각지에서는 저장춘 원저우루, 이우지에, 타이저우루 등 저장 출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거주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지역에 진출하든 간에 저장 사람들은 해당지역의 경제 개혁과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 전역에서 비즈니스 열풍을 일으키며 저장 특유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 결과 중국 전체 면적의 1.06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 저장성의 GDP는 전국 최고 수준이 되었으며, 1인당 GDP 역시 몇 년 연속 전국 1위를 지켰다.
누가 보아도 찬탄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저장 상인은 기존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화, 국제화 추세에 발맞추어 더 큰 무대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해외에서 각종 비즈니스에 종사하고 있는 저장인은 약 300만 명에 육박한다. 중국에서 가는 곳마다 이름을 날렸던 것처럼, 해외에서 저장상인의 명성 역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자리한 원저우지에(溫州街)에서는 어딜 가나 원저우 사투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심지어 이곳에서 일하는 프랑스 공무원들까지도 원저우 사투리를 익숙하게 구사한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는 중국 쇼핑타운이 있으며, 러시아 모스크바에는 하이닝루라는 유명한 중국 쇼핑센터가 있다.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나 아랍에미리트에서도 중국상품을 파는 상점이나 쇼핑센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저장상인들이 세운 것이다. 저장상인은 타고난 비즈니스 마인드로 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지고 일어나 중국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도 '동방의 유대상인', '중국 민간기업의 모범', '풀뿌리 상인의 모델'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장상인의 타고난 비즈니스 감각은 여러 가지 성과나 실천을 통해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으며, 관련 전문가 및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중국 경제학자인 쟈오신왕은 저장상인의 철저한 비즈니스 의식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장인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실로 경탄할 만하다. 시장바닥에 노점을 벌여놓고 채소를 파는 청년이 스스로를 사장이라고 부르며 명함에 휴대전화까지 갖추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노점 장사를 해도 사장의 마인드를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뼛속까지 기업가인 저장 사람들의 성공비결이다."
전문가가 바라본 저장상인: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와 함께 성장해온 저장상인은 중국 최초의 거부 상인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국내외 경제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2004년, 중국 기업경제단체인 중화전국공상업연합회에서 발표한 '2004년 민간기업 규모별 순위 500'에 선정된 기업 중 저장 기업은 총 183개로, 전체의 36.6퍼센트를 차지했다. 또한 중국사회과학원이 선정한 '2004년 중국 민간기업 경쟁력 50강' 중 26개 기업이 저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납세순위 상위 10개 기업 중에서도 절반이 저장 기업이었다. 중국 포털사이트 왕이의 딩레이 총재, 푸싱그룹의 궈광창 회장, 중국 최대 온라인 게임업체 성다(盛大)의 천톈차오 회장 등은 모두 저장 신경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005년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저장 민간기업 중 총자산이 일억 위안 이상인 기업은 총 903곳, 등록자본금이 일억 위안 이상인 기업은 218곳에 달한다. 그 밖에 저장 기업은 총 산업가치, 총 소비액, 사회소비품 소매총액, 수출창출액 등 여러 가지 경제지표에서도 전국 1위를 기록했다.
저장 상인들은 중국적 성공신화의 아이콘으로서 사회 각계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성공비법 또한 경제 전문가들의 연구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심지어 해외 여러 선진국의 경제학 교과서에 저장상인의 성공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쩡용쥔 항저우 상업대학 경제학원 부원장은 저장상인의 성공비결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저장상인은 비즈니스적 재능을 타고 났다. 저장 지역은 산업발달에 필수적인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대규모 외자투입도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타고난 상업 감각을 자원으로 한 수많은 개인 기업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내륙 지역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시장수요와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 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단련하며 더 큰 미래를 준비했다. 그리고 오늘날 저장 신화의 주역이 되었다."
중국 비즈니스계에서 저장상인은 가장 빛나는 별이다. 이들은 근면한 사고방식, 뛰어난 화술, 민첩한 행동력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떠올랐다. 저장상인의 비즈니스 원칙은 성실함과 영민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근원적으로 파헤친다면, '인간됨'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인간됨은 비즈니스를 비롯한 모든 삶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인간됨을 갖추면 모든 사업이 순리적으로 풀리게 된다.
상하이(上海)상인 - 뼛속까지 타고난 장사꾼
중국 비즈니스 요충지, 상하이: 중국 남부 해안선 중심에 자리한 상하이는 창장(長江) 삼각주와 창장 유역 드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도시 중 하나이다. 또한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과 함께 세계5대 무역도시로 명망이 높다. 상하이는 중국의 주요 공업기지이며 에너지 및 물류, 상품의 소비지이자 생산기지이다. 최근에는 금융, 보험, 무역 등 서비스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상하이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항구도시라는 이점을 살리는 동시에 체제개혁과 외자유치에 주력하면서 경제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을 강화했다. 또한 국내외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함으로써 중국의 사회경제 발달에 이바지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중국 내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상하이의 서비스 산업은 최고의 성장 기회를 맞이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상하이는 체계적 성장을 위한 중대한 전략적 방향을 수립하고 '과학적인 발전'을 성장전략의 핵심이자 정신으로 천명했다. 또한 경제 글로벌화와 중국 경제 발전을 큰 배경으로 삼고 더 넓은 범위의 지역과 상호협력을 추구하며, 중국 전역의 발전을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금 흐름, 상품 흐름, 정보 흐름, 기술 흐름 및 인재 흐름이 상하이로 집중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상하이 지역의 상업 및 무역업은 늘 발전 선두를 달려왔다. 와이탄 금융거리, 난징루, 화이하이루 등을 비롯해 해운, 철물, 가전제품 등 다양한 전문적 개성을 갖춘 거리들이 상하이의 오늘을 대변한다.
그중에서도 난징루(南京路)는 '상하이 쇼핑 1번지'라고 불리며 갈수록 그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 현재 난징루에는 600여 개의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며, 하루 유동인구도 300만 명 이상이다. 또한 매출액 최고 기록을 연일 갱신 중이다. 화이하이루는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비즈니스 거리이다. 고풍스런 멋이 돋보이는 옛날 양식 건물들과 위풍당당하게 솟은 고급 오피스 빌딩이 공존하는 화이하이루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곳은 난징루와 함께 상하이의 대표적 쇼핑가로 손꼽히며, 파리, 밀라노 등 국제적 패션중심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오리지널 패션문화가 발달해있다. 또한 패션디자인 기술교류, 모델 에이전시 활동, 패션쇼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현재 상하이 전체의 총 영업면적은 1,000만 제곱미터가 넘으며, 총 사회소비재소매총액은 1,700억 위안에 달한다. 그러나 상하이의 진정한 힘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뒤에 어마어마한 비즈니스 기회가 숨겨져 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상하이는 비즈니스 인재의 요람이기도 하다. 상하이가 배출한 비즈니스 엘리트 중 상하이 본토박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상하이를 발판으로 사업적 성공을 이루었으며, 또한 상하이에 뿌리를 두고 전국을 공략하고 있다. 상하이는 사업가라면 반드시 도전해볼 만한 중국 비즈니스의 요충지이다. 상하이에서의 성공은 곧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뼛속까지 타고난 장사꾼: 상하이 사람은 상술이 뛰어난 중국 상인 사이에서도 '꾀쟁이'라고 불릴 만큼 상업적 재능이 탁월하다. 그러나 상하이상인의 이러한 면모는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그 참맛을 알 수 없다. 상하이 사람은 일상생활에서도 이익을 취하고, 또 마땅히 받아야 할 것과 권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면에서 진정한 재주와 지략을 발휘한다. 남에게 해를 입히면서까지 사익을 도모하지는 않지만, 일단 자신이 정당히 얻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되면 단 한 푼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상하이 사람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상하이에서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돈 몇 푼을 더 깎기 위해 시장바닥에서 채소 장사와 옥신각신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상하이 사람에게 중요한 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느냐 마느냐'이지, '얼마를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상하이에 온 북방 사람이 안경을 맞추러 갔다. 안경점마다 경쟁적으로 가격을 제시하는데, 최고 260위안에서 최저 200위안까지 다양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당연히 200위안을 제시한 가게였다. 그런데 안경을 다 맞추고 계산을 하면서 보니 200위안이 아니라 205위안으로 되어 있는게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찌된 일인지 묻자, 안경점 주인이 온 얼굴 가득 상냥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답했다. "5위안은 애프터서비스 비용입니다. 이 비용을 내시면 향후 6개월 안에 제품에 문제가 생길 경우 교환 및 환불 모두 가능합니다. 물론 손님 실수로 제품이 망가져도 저렴하게 수리해드리고요." 5위안이면 애프터서비스 비용치고는 싸다고 생각한 북방 사람은 흔쾌히 돈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섰다.
나중에 상하이 태생 친구를 만난 북방 사람은 '5위안'에 숨겨진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상하이상인은 대부분 시장 내 흥정 가격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심리도 정확하게 꿰뚫는 꾀가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만족해할 만큼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 그리고 손님이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자기 가게로 온다면, 그때는 구매가 확실하기 때문에 살짝 '술수'를 부린다. 바로 애프터서비스 비용 등의 명목으로 5위안을 더 청구하는 것이다. 5위안이면 그리 큰 액수가 아니기 때문에 손님도 별다른 불만 없이 돈을 지불하기 마련이다. 상하이상인은 이런 식으로 고객을 확보하고 5위안도 더 번다. 꿩 먹고 알도 먹는 셈이다.
일상생활에서 검증된 상하이 사람의 '꾀'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노련한 상술로 나타난다. 상하이상인은 물건을 보는 안목이 날카롭고 뛰어나며, 한번 목표를 정하면 용감히 경쟁에 뛰어들어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과감성과 행동력도 갖추고 있다. 또한 빠른 셈속과 대처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상하이 사람을 상대로 돈 벌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든지 '상하이 깍쟁이'라는 말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상하이 사람이 꾀가 많다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꾀'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에게 물을 먹여 근수를 늘린다든지, 저울추를 속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남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꾀는 반드시 지양해야 할 나쁜 꾀이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파는 쪽과 사는 쪽 모두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꾀가 필요하다. 상하이 사람들이 능한 것도 바로 이런 좋은 꾀이다. 비즈니스맨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기본적인 가치를 지켜야 한다. 만약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기본적인 원칙과 도리까지 무시한다면 결국 제 발등 찍기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당한 이익은 바라지 않으며, 정당히 얻을 이익이라면 끝까지 추구하고 보호하는 상하이상인의 근성은 배울 만하다고 볼 수 있다.
윈난(云南)상인 - 쉽게 만족하는 상인
성실하고 정직한 윈난상인: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원을 차지하면서 그의 다섯 번째 아들인 후게치가 윈난왕으로 봉해졌다. 이후 주원장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이 지역을 점령한 뒤 몽골군을 쫓아냈다. 그러나 윈난성에는 아직도 몽골족의 후예가 상당수 남아 있다. 수천 년간 거칠고 험한 윈난고원에서 생활해온 윈난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며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이들은 현재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안다. 또한 과도한 욕심과 허영을 부리지 않으며 근면성실하고 타인과 잘 어울려 지낸다.
윈난 사람의 특성은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윈난상인은 사업을 크게 일궈서 많은 돈을 벌고 이름을 날리고자 욕심 부리지 않는다. 그저 절제와 정직을 덕목으로 삼아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에게 맞는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윈난상인 중에는 교활하거나 간사한 사람이 별로 없다. 윈난은 도시뿐만 아니라 산간 시골에서도 가격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거의 없으며 반드시 정가제를 준수하는데, 이 역시 윈난상인의 정직한 성품과 관련이 깊다.
약삭빠른 광동상인은 100위안짜리 물건에 1,000위안짜리 가격표를 붙여놓고 그 위에 가위표를 그은 뒤 50퍼센트 세일이라고 써놓는다. 그걸 보고 손님은 세일가격이 원래 가격이겠거니 생각하고, 조금 더 깎아볼 요량으로 400위안을 부른다. 그러면 광동상인은 내심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말한다. "뭐, 좀 손해 보는 셈이지만 손님은 왕이니 그렇게 해드립죠." 그러나 윈난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윈난상인은 '폭탄세일'이라든지 '창고대방출' 같은 문구로 손님을 현혹하지 않으며 최대한 정직하고 성실하게 장사를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뒤탈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