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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맞수

닛케이벤처 지음 | 비즈니스북스
경영의 맞수

닛케이 벤처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10년 6월 / 372쪽 / 14,500원



유년시절부터 창업까지



<혼다 소이치로의 창업 - 솟구치는 열정과 가능성을 향한 질주>


소이치로는 1906년 시즈오카현 이와다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동네에서 유명한 대장간이었는데, 그는 장남으로 대장간 일을 도왔다.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던 소이치로는 기계나 탈것에 대한 흥미가 유달리 강했다. 정미소나 제재소에 자주 놀러가서 기계 구경을 하고, 초등학교 때는 비행기가 보고 싶어서 집에서 20킬로미터나 떨어진 하마마쓰까지 달려간 적도 있다. 수업시간에도 오로지 기계에만 관심이 있어서 과학실험 이외의 다른 과목에는 흥미가 없었다.

자동차에 대해 지독한 관심을 보이던 소이치로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유시마의 아트상회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어린 나이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정비기술을 체득했다. 6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하마마쓰 시내에 아트상회 지점을 개설했다.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주인이 너무 젊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좀처럼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감만 생겼다 하면 일사천리였다. 다른 정비공장에서는 고치지 못할 고장이라도 소이치로는 거뜬히 수리했다. 이런 실력이 점차 알려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아졌다. 주물 스포크(바퀴살 모양의 주물) 개발에 성공하여 특허도 얻고 해외에까지 수출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공장 규모도 순식간에 확장되어 종업원이 50명에 이르렀다. 소이치로의 발명가 기질은 이때부터 발휘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소이치로는 회사 업무와 관계없는 기계 제작에도 열을 올렸다. 일을 마친 후 모터보트나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때때로 철야 작업을 하기도 했다. 도쿄까지 원정을 가서 다마가와 강변의 자동차 레이스에 출전하여 우승을 거둔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물자 통제가 강화되자 소이치로는 정비공장을 직원에게 넘기고 피스톤링을 제조하는 도카이세이키를 설립한다. 정비업만으로는 회사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 소이치로는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주물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마마쓰 고등공업학교의 청강생이 되었다. 도호쿠대학교나 홋카이도에 있는 제강소까지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능 좋은 피스톤링을 만들지 못한 원인이 소재인 실리콘 함유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스톤링은 1937년 일단 완성되었지만 고품질을 유지하면서 양산할 수 있도록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도요타 자동차와 합작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생산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소이치로가 2차 대전 이전에 세운 도카이세이키는 피스톤링을 제조하는 업체로 종업원이 2천 명이나 되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대지진과 전쟁 때문에 기계와 사원을 동시에 잃고 만다. 남은 것은 약간의 돈과 열의 뿐이었다. 1946년 소이치로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하마마쓰에 있었다. 그곳에는 진 45평 남짓의 판자공장이 있었다. 이름은 혼다기술연구소. 현재의 혼다기연공업이다. 창업자 소이치로가 재도전하는 무대였다. 소이치로가 판자공장을 세운 까닭은 직물기계를 제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모터바이크제조로 방향을 전환했다. 소이치로는 매일 부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군대에서 사용하던 소형 엔진을 싸게 구입하고, 불에 탄 함석판 등을 이용하여 오일탱크를 만들었다. 이렇게 조각조각 주워 모은 부품들을 자전거에 부착하여 최초의 제품을 완성했다.

소이치로가 만든 모터바이크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시중에 가솔린이 부족해서 모터바이크의 매출이 줄어들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소이치로에게 묘안이 떠오른다. 가솔린에 송근유를 섞는 방법이었다. 그는 곧 소나무가 있는 산을 매입하여 송근유을 긁어모았다. "기술면에서 소이치로를 따라잡는다 해도 그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역경에 빠졌을 때 이를 헤쳐 나오는 힘이다"라고 사쿠라이 도시유키(레이싱 클럽 인터내셔널사장)이 말했듯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를 돌파하는 소이치로의 비상한 아이디어와 끈기는 어느 누구와도 견주기 힘든 것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창업 - 특유의 꼼꼼함과 성실성으로 전진>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 와카야마현 가이소군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6세 때 부친이 쌀 거래에 손을 댔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부친은 나막신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 안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큰형과 둘째형, 큰 누나가 잇따라 병으로 죽는 불행을 겪는다. 고노스케도 고향집을 뒤로 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해야 했다. 첫 고용살이는 오사카의 화로가게였다. 그는 주인집 집안일을 돌봐 주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화로가게를 그만 둔 그는 자전거가게에서 6년간 종업원 생활을 하다가 17세 때 오사카전등이라는 전기회사로 옮겼다. 전기회사에서 고노스케는 기술자로서 주위 사람들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20세였던 고노스케는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향학열을 불태웠다. 그때 그가 다녔던 학교가 간사이 상공학교이다. 고노스케는 전기에 관해 공부하려 노력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것이 힘들게 되었다. 소이치로와 마찬가지로 고노스케도 교실에서 배우는 학문과는 큰 인연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능한 사원으로 일에 열중하던 고노스케는 1917년 마침내 독립을 결심한다. 일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 당시 고노스케가 갖고 있던 돈은 100엔도 되지 않았다. 고노스케는 사업자금을 친구에게 빌리고 일손은 전에 같이 근무했던 회사동료 등의 협력을 얻어 소켓 생산에 착수했다.

사업은 쉽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소켓 제조 중 소재의 배합비율을 몰라 애를 먹었고, 제조방법을 배워 생산했지만 판매가 여의치 않았다. 사업이 부진하자 종업원 모두가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자금도 바닥이 나서 옷 등을 전당포에 잡히고 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고노스케는 선풍기 부품제조나 어태치먼트 플러그(전등 선 코드 끝에 부착된 플러그) 등의 개발에 성공하여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마쓰시타전기기구제작소를 설립하고 회사를 오사카 시내로 이전하고 사원 5명을 새로 채용했다. 이날은 1918년 3월 7일로 파나소닉의 창립기념일이다.

사업이 번창하자 고노스케는 자체 제조설비를 갖추고 마쓰시타전기산업의 기반이 되는 자전거용 램프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고장률이 적고 전지를 오래 쓸 수 있는 램프를 개발하기는 했는데 판매가 문제였다. 고노스케가 생각해 낸 것은 제품 보급을 지향하는 무료 배달 작전이었다. "저희 회사 램프는 30시간 이상 유지됩니다. 일단 점포에 놓고 팔아보세요." 고노스케는 이렇게 말하면서 오사카 시내를 누볐다. 그 결과 그의 공장에는 소매점으로부터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1929년 그는 회사 이름을 마쓰시타전기제작소로 변경하고, 라디오, 다리미, 건전지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했다. 1934년에는 대형 중전기 기업을 인수하면서 모터사업에도 진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군수산업에 진출했던 고노스케는 패전 직후 바닥에서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군수산업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공직추방 A급 대상에 올라 사장자리에서 물러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의 구명운동으로 고노스케는 전범 추방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패전 직후 부채 증가와 인원 정리 등 경영 악화를 피할 수 없었으나 고노스케는 사업을 다시 일으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고노스케도 혼다 소이치로 못지않은 불굴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업 이념과 철학



<혼다 소이치로의 기업이념 - 자유와 평등을 중시한 독창적인 조직>

소이치로의 경영이념의 근간은 자유와 평등이다. 그는 학벌, 지연 등 모든 파벌을 부정했다. 연고에 의한 사원채용도 금지했고, 채용시험 때 신상명세서에 자기 소개란도 없앴다. 그는 철저하게 평등을 중시하는 경영자였다. 회사 내의 신분에 의한 차별이나 편파적인 태도를 싫어했고, 스스로도 절대 교만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세는 '종업원은 곧 경영자'라는 경영방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상하의 서열은 학력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질에 의해 결정했다. 소이치로는 실제로 "아이디어에서 사원들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사장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소이치로가 지닌 자유와 평등 사상은 1954년 사보에 게재된 연설문 '우리 회사의 존립 목적과 운영 기본 방침'에 의해 기업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서 소이치로는 다음 6가지 기본 방침을 강조했다. ① 회사는 생산의 장인 동시에 종업원의 인격수양과 도야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② 기술이 세계로 통하는 한 우리들의 시야는 항상 세계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③ 최고의 제품은 최고의 이론을 바탕으로 조립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이론의 발전과 함께 우리 회사 제품도 향상시켜야 한다. ④ 예술적인 작품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듯 우리 회사 제품도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⑤ 우리 회사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일을 우선하며 이론과 시간과 아이디어를 존중해온 정신 때문이다. ⑥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바르냐 그르냐'에 달려 있지, '강하냐 약하냐'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혼다이즘은 1956년 "우리 회사는 시야를 세계 시장으로 넓혀 고객의 요청에 부응하여 성능이 우수하고 값이 싼 제품을 생산한다"는 사실로 명문화되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기업이념 - 사회적 사명을 실천하는 조직>

고노스케가 경영이념을 선포한 것은 1932년 5월 5일의 일이다. 이날 그가 발표한 소주고사(所主告辭)와 1929년 정해 놓은 강령이 마쓰시타전기의 경영 기본방침으로서 회사의 성장을 떠받치는 확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소주고사: 생산의 목적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풍부하게 하여 인간생활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그 주인으로 한다. 우리 마쓰시타전기는 그런 사명의 달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고, 금후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해 일로매진해야 한다.

* 강령: 산업인으로서 본분에 철저하여 사회생활의 개선과 향상을 도모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당시 고노스케는 천리교 본부를 견학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신자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서는 급료를 지불하고 있는데도 불평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급료도 없는데 즐겁게 일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종교에는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 인생을 행복하게 한다는 숭고한 사명이 있다. 우리들의 사업에도 생활의 유지향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한다는 중요한 사명이 있지 않은가?"

결국 그는 소주고사 발표회 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지론을 폈다. "가격이 매겨진 무언가를 훔치면 도둑이 되지만, 길가의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마셔도 책망을 듣지 않는다. 이는 물이 싸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생산자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수돗물처럼 싸게 무진장 공급함으로써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사명이다." 이것이 후에 수도 철학으로 불린 유명한 마쓰시타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려운 생활로 가난을 증오했기 때문에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들이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업은 사업을 해서 번 이익의 절반을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를 배당이나 사업 확장 등에 투자하여 사업을 번창시켜야 한다. 천하의 돈과 천하의 사람, 천하의 토지를 사용해서 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경영의 원칙과 방식



<혼다 소이치로의 경영관 - 혼다기연을 완성시킨 투톱체제>

2차 대전이후 소이치로는 모터바이크 생산을 시작했다. 매출은 급성장했지만 외상값 받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의 재정을 맡아줄 사람을 구하던 소이치로는 1948년 사업의 파트너로 후지사와 다케오를 만난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역할 분담을 약속했다. "금전관계는 당신에게 맡기겠다. 그러나 무엇을 만드느냐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말아 달라"라는 소이치로의 말에 다케오는 "돈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 당신은 사장이니까 당신의 말에 따르겠다. 단,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추진하자"라고 대답했다.

5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소이치로가 고안한 F형 카브 오토바이가 인기를 끌었다. 다케오는 F형 카브의 매출을 늘리기 위해 전국의 자전거 판매점을 오토바이 판매조직으로 활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다케오는 소이치로가 만든 제품을 널리 보급하는 데 주력했고, 소이치로는 다케오의 기대에 보답할 만한 제품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그들은 서로의 업무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다케오는 소이치로가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경영에만 전념했다. 소이치로 역시 무리한 요구(예: 새로운 기계 설비 투자)를 해서 경영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배려로 어떻게든 현재의 기계로 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케오는 이러한 소이치로의 의중을 간파하여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한 설비투자를 건의하여 소이치로의 개발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 전념하면서 혼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후 1973년 동시에 은퇴하였다.

<마쓰시타 - 마쓰시타 전기를 키운 사업부제>

혼다가 기술의 소이치로와 경영의 다케오라는 두 수레바퀴의 활약에 힘입어 성장하게 된 데 비해, 마쓰시타전기산업은 고노스케 한 사람의 기술력과 경영능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고노스케 혼자 모든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3년 마쓰시타 전기는 처음으로 사업부제를 도입했다. 사업본부장에게는 각각 상품개발에서 판매, 수익까지 독립적인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었고, 각 사업부는 다른 사업부의 동향에 좌우되지 않는 독립채산의 사업부가 되었다. 이후 사업 내용이 확대되면서 사업부가 비대해짐에 따라 분사화라는 형태를 도입하였는데, 이 제도가 마쓰시타 전기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고노스케는 결코 혼자서 회사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도가 유망한 간부사원에게는 권한과 책임을 대폭 위임하여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회사의 기둥으로 키워갔다. 그는 경험을 쌓는 장으로는 독립채산제인 사업부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독립채산의 사업부제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다른 사업부가 얼마를 벌든지 자기 사업부와 하등 관계가 없고, 사업부 간의 우열이 수익이라는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각 사업부가 모든 것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된다면 사업부에 속한 전원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더 좋은 일을 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것이다.

사업부제에 맞춰 신뢰하는 부하에게 경영을 맡긴 그는 "일이 잘 안 되면 책임은 모두 사장인 내가 진다"는 자세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맡은 사람은 고노스케의 뜻에 감동하여 업무 추진에 더 노력하게 된다. "고노스케가 실패를 책임지게 될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의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고노스케의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지시가 없더라도 자주 보고나 상담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아랫사람에게 맡기면서도 자기 뜻대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인재를 키우는 기본 원칙



<혼다 소이치로의 인재관 - 창의적이고 개성 넘치는 인재 양성>

"뭔가 일이 잘못됐을 경우엔 주의를 주기보다 먼저 주먹이 날아왔다. 그런 난폭한 교육을 견뎌낸 사람만이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혼다 소이치로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동네 공장 시절부터 수천 명의 대기업으로 커진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소이치로는 기술개발에 착수하면 사흘 이상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소에 틀어 박혀 기름투성이가 되었다. 그렇게 연구에 몰입하듯이 종업원을 꾸짖을 때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러한 전형적인 중소기업형 경영방식이 소이치로의 인재육성의 기본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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