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
KMA 지음 | 원앤원북스
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
KMA 지음
원앤원북스 / 2009년 10월 / 266쪽 / 13,000원
▣ 등장인물김준혁(주방장) - 몽블랑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인물 중 한 명이다. 원리원칙주의자로 다소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그의 정신 때문에 결국 몽블랑의 구원투수가 된다. 그는 과연 침몰 직전의 몽블랑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김한수(부장) - 몽블랑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인물 중 한 명으로,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블랑의 지점화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의 뜻대로 몽블랑은 몸집을 키워가며 승승장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몽블랑은 위기를 맞게 된다.
박재철(지배인) - 그 역시 몽블랑의 창립 멤버이자 핵심인물이다. 하지만 김준혁 주방장과 김한수 부장의 파워게임에 늘 뒷전으로 밀린다는 피해 의식에 젖어 있기도 하다. 김준혁을 눈엣가시처럼 느끼며 호시탐탐 그를 몰아내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기수(cook helper) - 주방에서 설거지와 청소 등 허드렛일을 담당하지만 그에게는 '행복을 전하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 주방장 김준혁에게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 대표(CEO) - 맨몸으로 시작해 몽블랑의 신화를 만들어낸 인물로, 직원들에게 '여우같은 호랑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무너져가는 몽블랑을 살리기 위해 모두가 탐탁치 않아하는 김준혁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고 만다.
프롤로그 - 몽블랑에 닥친 최대의 위기'몽블랑' 서울 본점 김한수 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몽블랑 김…."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정 대표였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신지?" "무슨 일? 오늘 대한일보 안 봤소?" "네… 아직 못 봤습니다만…." 그때 신문을 든 지배인 박재철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왔고, 그가 가리키는 신문 헤드라인에는 '30년 전통이란 허울 좋은 이름의 빛 좋은 개살구, 몽블랑…'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 부장은 "대표님, 상황을 파악한 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신문을 읽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언제부턴가 몽블랑 음식의 질과 서비스가 형편없어졌다. 종업원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와 무신경은 요즘 재래시장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스펀지를 씹는 듯한 독특한 '가지구이'의 맛은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몽블랑만의 매력이다.'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웨이터 민철이 웨이트리스 은영에게 물었다. "아! 그 사람! 왜, 기억 안 나? 일주일 전인가… 아니, 보름 전인가? 아무튼 그 남자 있잖아. 가지구이!"
과거의 성공은 현재를 위협하는 독초다
그날은 몽블랑 전체가 머피의 주문에 걸린 듯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로 정리가 안 되었고, 어수선한 분위기는 개점 전부터 영업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주방장 한철호에게는 더욱 그랬다.머피의 주문 - AM 8:30 홀 : 주방의 막내인 쿡헬퍼(cook helper) 성민이 호텔경영학과를 나온 자기가 고등학교만 나온 사람과 똑같이 하루 종일 채소나 다듬고 설거지만 하는 것이 싫다며 그만두겠다고 했다. 철호는 성민을 만류하는 것은 포기하고, 슬쩍 손목을 내려다봤다. 시간은 벌써 8시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곧 주식시장이 시작될 시간이다. '호가창을 봐야 하는데….'
머피의 주문 - AM 9:00 주차장 : 몽블랑에 한우를 납품하는 정육회사의 박이사가 배달차량을 직접 몰고 왔다. 박 이사는 철호를 찾았고, 잠시 후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 철호를 발견했다. "형님, 좀 있다가 트렁크 문 좀 열어놓고 가세요. 물건 다 내리면 트렁크에 아이스박스 좀 넣을게요." 그 말은 곧 이번 달의 리베이트를 계산하겠다는 것이었다. 철호의 귀에 몇 해 전부터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작은 액수로 배팅을 했고 큰 수익을 얻었다. 그 후 그는 업무시간 틈틈이 PDA를 이용해 주식을 시작했다. 주식이 활황이어서 그런지 계속 수익이 났다. 하지만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수익은커녕 원금마저 까먹는 일이 이어졌다. 박 이사가 제의를 해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우와 품질 차이가 별로 없다며 수입 소고기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5%의 리베이트와 함께 말이다. 원금은 물론 아내 몰래 받은 대출금까지 날린 후라 그 제안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철호는 그의 손을 떨치지 못했다.
머피의 주문 - AM 10:00 주방 : 퍼스트쿡(First cook) 정규는 주방장이 자리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주방장 광민에게 다가갔다. "이번 휴일에 주방 대청소하라는데요?" "누가?" "지배인님이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컨드쿡(Second cook) 석현이 볼멘소리로 입을 열었다. "홀도 아닌데 왜 지배인님이 주방 청소를 지시해요? 왜 남의 나와바리를 침범하느냐고요?" "나와바리?" 어느새 주방에 들어왔는지 지배인이 석현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도대체 자기 나와바리 주인은 어디 가셨나?" "모르겠습니다. 저도…. 주방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주방장이 지배인의 행동이 월권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알아서 못하니까 나까지 나서는 거 아니야." 지배인이 되받았다.
머피의 주문 - PM 12:30 홀 : 김 부장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노여움 가득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 부장은 서둘러 소란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 죄송합니다. 지배인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뭐야? 지배인? 잘못은 당신들이 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하겠다 이거야?" "아닙니다. 예약을 제가 받은 게 아니라서…." 마침내 지배인 박재철이 테이블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 일은…." "남의 중요한 비즈니스를 이렇게 망쳐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나? 내가 분명히 예약하면서 일행 중에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을 했는데!" 김 부장은 박 지배인이 교통정리를 할 것이라 믿으며,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홀 한구석에서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손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김 부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피의 주문 - PM 1:10 주방 : 민철이 주방문을 열고 잠시 눈치를 살폈다. "뭐야?" "주방장님, 가지구이가 안 되나요?" "무슨 소리야?" 석현이 주방장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늘 가지가 안 들어왔습니다." "뭐?" 석현은 광민을 바라봤고, 이에 광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롭니다. 분명히 주문리스트에는 있었는데 물건이 안 들어왔어요."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보고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이거 뭐 사람이 자리에 있어야 보고를 하든가 하죠.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부주방장이 일부러 부하직원들 앞에서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잠시 주방 스태프들 모두 얼이 빠져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그나마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정규가 민철을 불렀다. "가서 버섯요리로 바꿔. 손님한테 오늘 특별히 좋은 버섯이 들어와서 그걸로 추천한다고 해."머피의 주문 - PM 1:15 홀 : 미라가 우거지상이 된 얼굴로 주방을 나서는 민철을 발견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미라는 그런 민철에게 신경을 쓰느라 쟁반 위에 올려놓은 새 나이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 테이블에 그대로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미라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대한일보의 기자였다. 점심약속이 있어 우연히 몽블랑을 찾은 그는 조금 전 흥분한 남자 손님의 클레임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리고 그는 '요즘 들어 몽블랑의 맛과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었구나'라고 수첩에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정리해 적어 넣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 번은 웨이터가 와서, 또 한 번은 퍼스트쿡이 와서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손님, 오늘 저희 주방에 아주 싱싱한 버섯이 들어왔습니다. 가지구이 대신 버섯요리가 어떠신지요?" "추천은 고맙지만, 그냥 가지구이를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30분이 흘렀다. 한참 만에 나온 가지구이의 맛은 형편없었다. 스펀지도 이보다는 맛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편 같은 시간 서드쿡(Third cook) 동수가 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선배가 시키는 대로 근처 슈퍼에서 가지를 사오기는 했지만, 손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가지구이가 손님의 입으로 들어갔고, 예상대로 잔뜩 얼굴을 구기며 입을 움직이는 손님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선 기자에게 미라는 인사를 건넸다.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손님?" "네. 아주 신기한 식사를 했습니다. 특히 가지구이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위기는 곰팡이처럼 피어오른다오래된 단골마저 떠나다
박 지배인이 손을 쓴 덕인지, 몽블랑의 명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기사의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마침 김 부장은 매출전표를 들여다보면서 재철에게 함께 보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순간 재철의 양복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이고, 박 기자님. 어인 일이십니까?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통화가 이어질수록 지배인의 목소리와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김 부장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때 민철이 노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부장님, 큰일 났어요! 방송국에서…. 저희 가게에서 수입산 소고기를 한우로 속여 팔았답니다." "뭐!" 김 부장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주방장의 실수는 몽블랑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기자들이 주방으로 들이닥쳤을 때마저도, 철호는 자동차에 앉아 주식 호가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따라서 상황을 알 수 없는 김 부장과 박 지배인은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 장면은 정육회사 대표의 구속 건과 리베이트 문제까지 교차 편집되어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잘못이 있으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연일 언론에서는 기사들을 쏟아내며, '몽블랑의 모럴 해저드'에 대해 비판했다. 먹을거리로 장난을 친 업체를 그냥 둘 수 없다며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오래된 단골들마저 몽블랑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준혁, 그가 돌아왔다 / 갈등의 중심에서 / 원칙이 무너진 현실
몽블랑 본사,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라는 철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 대표가 말했다. "오늘부터 제주도에 있는 김준혁 주방장이 서울로 출근할 겁니다." 김준혁. 그는 몽블랑의 창립멤버 중 한 사람으로, 주방보조로 시작해 입사 6년 만에 주방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아마도 김 부장과의 문제가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서울에서 주방장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10년 전, 김준혁은 김 부장이 추진하는 지점 정책을 '무분별한 확산'이라는 이유로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성공리에 지점들이 확산되자,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주도로 내려가고 말았다.
몽블랑은 세월의 흐름이 비켜간 모습으로 준혁을 맞이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상기된 준혁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테이블은 규정대로 세팅되어 있지 않았고, 바닥의 카펫 또한 교체 시기가 꽤 지나 보였다. 게다가 이미 사용해 세탁업체로 보낼 리넨과 사용 전의 리넨이 한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파손된 컵과 접시들이 쌓여 있었다. 몽블랑이 계속 이런 상태를 유지한다면 '가짜 한우 파동'이 아닐지라도 침몰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몽블랑의 출근 시간은 오전 7시였다. 그런데 준혁의 손목시계가 7시 20분이 넘어가도록 출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7시 30분, 첫 출근자는 어이없게도 새로운 쿡헬퍼 기수였다. 이윽고 7시 50분, 부주방장의 출근을 마지막으로 주방 스태프들이 모두 출근했다. 준혁은 본격적으로 손님을 맞기 전, 주방 스태프들의 실력 점검에 나섰다. 몽블랑의 대표 음식인 '파리의 하늘' 코스요리를 만들어보라고 시킨 것이다.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오르되브르를 살피던 준혁의 시선이 '망고 소소를 곁들인 캐비어와 키조개'에 닿았다. 소스의 색깔이 망고와 비슷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준혁은 즉시 부주방장을 호출했다. "이 소스가 뭡니까?" 부주방장은 정규에게 되물었다. "이거 망고 소스 아냐?" "네. 망고가 떨어져서 황도 소스로 바꿨어요." "황도 소스라는데요?" "주방장의 허락도 없이 레시피가 바뀌었다고요? 여기가 무슨 동네 포장마차인 줄 아십니까? 언제부터 주방에서 사전 보고 없이 일을 처리했습니까? 성과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보고'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업무일지 좀 봅시다. 업무일지 어디 있습니까?" "…."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준혁은 오늘부터 당장 보고 체계를 세우고, 업무일지를 작성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타성이 병을 부르다 / 협력 시스템마저 무너지다
저녁에 조촐한 환영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준혁은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다. "제가 오늘 출근해서 놀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출근시간을 지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몽블랑의 음식이 '학교급식' 같았다는 점입니다." 참다못한 지배인이 나섰다. "아니, 출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런 막말을 하는 거요?" 준혁은 상관치 않았다. "지배인님, 주방 상황을 모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일부터는 출근시간 10분 전까지 출근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부장님도 말입니다. 현재 몽블랑의 신뢰도는 바닥입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여러분은 직장을 잃을 것이고, 몽블랑은 사라질 것입니다. 변화할 것인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몽블랑의 생존은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일의 권한과 책임을 확실하게 부여해서 예전의 질서를 되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환영식을 끝내고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김 부장은, 10년 만의 회포를 풀어야 한다며 준혁과 지배인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김 부장이 말했다. "내 오늘 주방장님의 말을 들으니 많은 생각이 납니다." 그러자 준혁이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철에게는 준혁의 모든 말과 행동이 '월권'으로 보였다. 게다가 분명히 교통정리를 해줘야 할 김 부장조차 준혁의 손을 들어주자 배신감까지 들었다.
변화와 혁신의 씨앗을 뿌려라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준혁은 평소 습관대로 퇴근하기 전 홀과 주방을 둘러봤다. 그런데 주방의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기수가 감자 깎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준혁을 보고 기수는 "주방장님,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는데….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만나다니? 자네나 나나 오늘 첫 출근인데…." "다시 만난 게 맞습니다. 주방장님은 전혀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제가 올해 22살인데, 이제 와 전공도 포기하고 이 길을 택한 건 주방장님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부모님 결혼 10주년 기념일에 저희 식구가 몽블랑을 처음 찾았을 거예요. 아버지는 '양식' 하면 '돈가스'가 전부인 줄 아시던 양반이라, 테이블에 놓인 그 많은 포크를 보고 당황하실 수밖에 없었대요. 그런데 주방장님이 요리를 설명해주러 오셔서는 단번에 상황을 눈치 채시고는, 포크 사용 방법부터 테이블 매너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셨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그 일을 말씀하세요. 그때 주방장님이 어린 아들 앞에서 아빠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일부러 제게 설명해주신 것이라고, 덕분에 당황하지 않고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일까요? 제게 몽블랑은 늘 '행복한 기억'이에요." '그래, 그때는 몽블랑의 드넓은 홀에 그런 행복한 모습들이 가득했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기수가 준혁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