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상도
홍하상 지음 | 창해
일본의 상도
홍하상 지음
창해 / 2009년 8월 / 303쪽 / 18,000원
1부 오사카 상인오사카 상인은 근검 절약을 통한 실리적인 금전 추구로 부를 쌓아 나갔다. 그들은 일본 최초의 상인 학교인 가이도쿠도를 건립하여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정도로, 격물치지의 자세를 가지고 상도를 구축해 갔다. 그들의 상도는 파나소닉, 아사히맥주, 산토리 위스키, 노무라증권 등을 탄생시켰다. 오사카에는 578년에 창업한 건설회사 곤고구미가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고, 100년 이상 된 노포나 기업이 약 500개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
상인을 우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사상 최초로 일본을 통일했다. 일본을 통일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사카 성을 축조하는 일이었다. 10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한 결과, 오사카 성은 공사 착공 3년만인 1586년에 완공되었다. 그가 오사카 성을 그렇게 빨리, 일사천리로 완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 덕분이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 5,000억 엔(약 7조 원)에 달하는 황금을 쌓아 놓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포상을 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가차 없이 죽였다고 한다.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안에서 260여 명의 제후들을 무력화시키고 일본의 경제가 자기 손아귀로 들어올 수 있도록 새로운 경제정책을 폈다. 첫 번째 정책은 "각 지방의 제후(다이묘)들은 현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채소, 생선 가운데서 당장 사용할 분량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사카로 올려 보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취한 정책은 일본의 유능한 상인들을 오사카 성 아래로 집단 이주시키는 일이었다. 본래 바늘 장사를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을 치르면서 상인의 힘이 얼마나 큰가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는 일본의 옛말처럼,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상인의 상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1580~1590년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오사카에 정착한 상인들은 그 뒤 오사카를 물산의 중심, 상거래의 중심, 상인의 도시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상인학교, 가이도쿠도 : 1600년대 이후의 오사카는 상인에게는 천국이었다. 정보만 있으면 물건을 사고팔아서 막대한 부를 손에 쥘 수 있었고 수완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사카 상인들은 새로운 계획에 착수했다. 훌륭한 상인 양성을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1723년, 5명의 상인이 사재를 털어 일본 최초의 상인 학교인 가이도쿠도(懷德堂)를 설립했다. 가이도쿠도는 누구라도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입학이 가능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봉건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학교였다.
가이도쿠도에서는 상인에게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학설 따위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고전의 고루한 세계가 아니라 고전에서 배울 수 있는 유연한 사고였다. 그들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가를 배우려고 했다. 그 과정이 끝나면 고전의 비판을 통한 합리적인 사고의 배양과 한문 독해에 주안점을 두고 교육 과정을 이끌어 갔다. 덕분에 가이도쿠도에서 배운 학생들 중에는 당대를 대변할 만한 유능한 학자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고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학문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으로서 한학의 소양이 어느 정도 쌓이면 이어 『대일본사』를 필사하면서 역사관을 키웠다. 역사관이 서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가르쳤다. 가이도쿠도의 교육 목표는 사물의 핵심을 알게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얻는 것)였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에는 해부학까지도 가르쳤다. 비록 상인들이 세운 학교였지만 가이도쿠도는 이처럼 단계별로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교육을 통해 146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
상인 철학자, 이하라 사이카쿠 : 오사카의 상인이었던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는 겐로쿠 시대(에도 시대 중기, 히가시야마 천황 시대의 연호, 1688~1704) 서민의 생활상을 묘사한 소설가이자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호색일대남 好色一代男』(1682)이나 『세간흉산용 世間胸算用』(1692), 『일본영대장 日本永代藏』(1688)에서는 돈에 운명이 좌우되는 인간들의 모습과 향락에 빠진 당시의 세태를 잘 그리고 있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이 세상에 돈처럼 재미있는 물건은 없다"고 말하며 『일본영대장』에서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서민들을 위해 부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 소상하게 적었다. 1688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에서는 부자가 되는 법을 다음과 같이 처방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5냥 / 가업 20냥 / 저녁 늦게까지 일하기 8냥 / 근검절약 10냥 / 건강 7냥.' 이 재료 50냥을 잘 섞어서 장자환(長者丸)이라는 환약을 만들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면 누구나 반드시 부자가 된다고 했다. 부지런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평생 가난하게 살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실천하면 된다고 설파했다. '맛있는 음식만 먹기 / 음란한 생활하기 / 비단옷 입기 / 다도, 꽃구경, 뱃놀이 즐기기 / 밤에 나돌아 다니기 / 화류계에 출입하기 / 대낮에 목욕탕에 출입하기 / 자식들에게 샤미센, 화투, 골패를 배우게 하기.'
오사카 상인들은 이하라 사이카쿠가 지적한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검과 절약을 통한 실리적인 금전 추구로 부를 쌓아나갔다. 오사카 상인의 기질은 오랜 시간 쌓여온 장사 철학의 바탕 위에 가이도쿠도의 교육과 이하라 사이카쿠 같은 철학자의 사상이 보태져 수백 년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오사카 상인
곤고구미의 실력 :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는 1,4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건축 회사 곤고구미(金剛組)이다. 창업주인 제1대 사장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 본명 柳重光)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을 시작한 해는 578년이다.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 이 말은 곤고구미의 건축 실력을 알아보고자 찾아갔던 오사카 건축사협회 후쿠모토 부소장이 한 말이다. 실제로 지난 1995년, 고베 일대를 강타한 진도 8의 한신 대지진 때 고가도로가 넘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와중에도 곤고구미가 지은 절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찾아갔던 절은 아카시(明石) 시의 가이코인(戒光院)이라는 절이었는데, 가이코인은 한신 대지진의 중심에 있었다. 가이코인의 주지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지진으로 인해 몸이 공중으로 30센티미터나 튀어 올랐고 40미터나 되는 절 담장이 모조리 무너졌다고 한다. 뒷마당 공동묘지의 묘비나 탑도 거의 다 쓰러졌는데 곤고구미가 지은 대웅전만은 서까래 중 극히 일부가 비틀려졌을 뿐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고 했다. 이는 곤고구미의 건축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곤고구미의 39대 사장인 곤고 토시타카 씨에게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는 "곤고구미는 어떠한 공사를 맡아도 기본에 충실하며 보이는 곳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곤고구미가 짓고 있는 기시와다(岸和田) 시의 절 신축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50센티미터만 콘크리트로 타설하게 되어 있는 기초공사 부분을 70센티미터 이상으로 타설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장을 뜯고 지붕 밑에 들어갔을 때에도 유사시의 재난에 대비해 철저하게 공사를 마무리해 놓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기본에 충실한다는 것은 쉬운 말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곤고구미는 기본에 충실했으며,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욱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1,430여 년 공사 경력을 가진 곤고구미는 그들의 장구한 노하우만큼이나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곤고구미가 1,430여 년 동안 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근본적인 비결일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사장은 언제나 현장에 살아야 한다'는 곤고구미 가문의 경영 철학이다. 실제로 곤고구미의 39대 사장 곤고 토시타카 씨는 곤고구미 본사 사옥 4층에 그의 가정집을 두고 있었다. 1,430여 년간 그 자리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6차선 대로변이어서 차 소리가 시끄러운 사택이었지만 현장에 살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그들은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의후리, 다이마루백화점 : '선의후리(先義後利)' 다이마루(大丸)백화점은 이 한 줄의 글귀로 유명하다. 이 글귀는 오사카 상인의 대표적인 정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귀가 오늘날 일본 상도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이마루백화점의 역사 300년. 다이마루가 300년간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의후리 정신 때문이다. 창업주는 시모무라 히코에몬쇼케이(下村彦右衛門正啓, 1688~1748)였다. 선의후리는 창업주인 시모무라가 강조한 기업의 이념이었다. 본래의 말은 "선의후리자영 先義後利者榮." 이 말의 출전은 중국의 유가였던 순자(荀子)의 「영욕 榮辱」 편에 나오는 말이다. '신의를 먼저 생각하고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번영한다'는 뜻이다. 시모무라의 '선의후리'는 바꿔 말하면 고객 제일주의다. 기업의 이익은 손님이 믿고 사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고객을 하늘 같이 알아서 먼저 신의를 지키는 것이 이익을 챙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장사는 이익을 남기는 것이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신뢰를 쌓으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시모무라는 머리가 크고 등이 굽은 볼품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목점 다이몬지야(大文字屋,다이마루백화점의 전신)를 경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고, 그 때문에 점포도 번성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지는 그가 타계한 이후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본 딴 인형을 만들어 매일 그 인형에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이마루는 2008년 현재, 총 4,670억 엔(6조 5, 38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고 3,200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다.
2부 교토 상인1,200년간 교토가 일본의 수도였다는 유별난 자존심을 가진 교토 상인 정신의 핵심은 신용이다. 신용은 상인뿐 아니라 손님에게도 중요한 덕목이다. 교토 상인은 1,000년 전통의 교토 상도에 현대식 경영을 접목하여 닌텐도, 교세라, 일본전산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1위의 강소기업 30여 개를 키워냈다.
천년 상인의 고향, 교토
교토, 경제의 중심이 되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그를 대신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군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1600년 9월,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압승을 거두었다. 사실상 일본을 통일한 것이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교토에 교토 출장소에 해당하는 니조 성(二條城)을 지으라고 명령하고 교토에 이른바 '교토의 부엌'이라는 니시키(錦) 시장을 만든다. 비단이라는 뜻의 '니시키' 시장은 다목적이었다. 우선 첫 번째는 자신의 교토 출장소에 해당하는 니조 성에 각종 식자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일본 경제의 중심이었던 오사카 상권을 최대한 교토 쪽으로 옮겨 오사카 상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방 성주들에게도 에도 성을 지으라고 지시하고, 에도(오늘날의 도쿄)에 바쿠후(幕府)를 세웠다. 얼마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로 가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나 그 영향권인 교토가 싫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일본 최대, 최고의 시장이 수도인 교토에 생기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상인들이 니시키 시장과 교토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교토로 대거 몰려든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 후, 오사카 대신 교토를 키울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신흥 상인들은 교토라는 신천지에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가게를 일으켰다.
교토 화과자 이야기 : 화과자(花菓子)는 일본의 상징이다. 일본인들은 화과자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실제로 일본의 화과자는 과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일본 화과자 속에는 일본의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다. 봄에 피는 화과자 속에는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표현되어 있고, 여름의 화과자 속에는 푸른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어 있고, 가을엔 짙게 물든 단풍의 수줍음이, 겨울에는 차디찬 설경이 담겨 있다. 계절이 바뀌면서 일본의 화과자 가게에 진열되는 과자도 바뀐다. 그러나 화과자는 계절에 따라서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화과자는 일본인과 인생을 같이 한다. 아기가 태어나면 3일째 되는 날 오하기(맵쌀과 찹쌀을 섞어서 만든 동그란 떡으로 팥이나 콩가루 등을 묻힌 것)라는 떡을 가까운 이웃에게 돌린다. 결혼식에는 빨간 만주와 흰 만주를 하나씩 돌리고, 환갑(60세), 고희(70세), 희수(80세), 미수(88세), 졸수(90세), 장례식에 돌리는 과자나 떡도 따로 있다. 이처럼 일본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과자, 떡과 함께 인생을 보낸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입춘이나 성인식처럼 단 하루 동안 팔기 위해 그날의 과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선보인다.
이는 놀라운 상술이기도 하지만, 전통에 대한 무서운 집념이기도 하다. 과자 하나에도 목숨을 걸고 몇 대에 걸쳐 그 집념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일본 장인들이다. 일본이 경박단소의 전자제품으로 세계를 재패한 배경에는 비록 단돈 2~3000엔짜리 과자 한 상자에도 수백 년간 목숨을 걸고 기술을 연마해 온 장인 정신이 밑거름 되었다. 과자뿐만 아니다. 칼, 기모노, 게다 등 그 어떤 분야에서도 목숨을 걸고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켜온 장인의 혼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심지어 톱의 날을 세우는 일만 평생 해온 장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일본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회에서 하찮은 일이란 없다. 모래알 같이 작은 일, 남이 전혀 알아줄 것 같지도 않은 일에 평생을 바치고, 그걸 대물림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상도, 이시다 바이간 : 오늘날 일본 상인의 바이블이자, 일본인의 상도를 최초로 체계화시킨 책으로 『석문심학 石文心學』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이 상인 국가로 탄생하게 된 바탕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석문심학』을 쓴 사람은 이시다 바이간(石田海岩, 1685~1744)이다. 그는 교토 근처에 있는 구와다(桑田) 군의 도겐(東懸)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 겨우 8세 때 교토의 작은 포목점에 견습사환으로 들어가 13세가 될 때까지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 가게 주인을 봉양했다. 그후 고향에서 잠시 농사를 짓다가 다시 교토로 나와 23세 때, 이번에는 일류 포목점에 취직해 견습점원이 되었다. 하루 종일 가게 일을 하느라 고단했지만 밤에도 쉬지 않고 책을 통해 유학, 불교, 신도 등을 배우고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견습 생활은 무려 1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4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반토(番頭, 지배인)가 되었다. 반토 생활을 하면서 그는 더욱 더 깊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로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은자(隱者) 오구리 료운(小栗了雲)이다. 오구리 료운으로부터 배운 것은 도(道)와 심(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참선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깊게 다져나갔다. 반토에서 은퇴한 뒤엔 교토의 구루마야초(車屋町)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심학(心學)을 가르치는 학교를 연다. 그는 그때부터 15년간 제자를 가르치고 여행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그 시기에 『석문심학』('석문'은 이시다 바이간의 아호, '심학'은 마음으로 반성해 몸으로 실천한다는 뜻)을 저술하게 된다. 1700년대 일본 사회는 쌀에서 화폐로 경제 단위가 바뀌는 와중에 있었다. 이시다 바이간은 모든 쌀이 오사카로 와서 화폐로 교환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시대를 맞아서 이시다 바이간은 상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인은 왜 존재하는가, 이익은 어떻게 남기는 것이 좋은가 등등의 내용을 『석문심학』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