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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비즈니스를 바꾼 최고의 CFO

야마다 아리히토 지음 | 예문
세계 비즈니스를 바꾼 최고의 CFO

야마다 아리히토 지음

예문 / 2009년 6월 / 223쪽 / 12,000원



비즈니스를 바꾼 회계참모들




구글의 상장에 기여한 조지 레이에스

인터넷 이용자라면 누구나 적어도 한번은 구글(Google) 검색엔진을 이용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구글 어스'를 이용해서 자신의 집이나, 가보고 싶은 곳을 위성사진으로 찾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구글은 스탠포드대학 박사과정을 휴학중이던 두 학생, 래리 페이지(Lawrence E.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이 만들었다. 구글은 2004년 8월 19일에 상장을 했다. 상장 때 사용했던 27억 2천만 달러라는 자금 조달액은 1995년 상장했던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의 1억 3,700만 달러를 크게 웃도는 금액으로 인터넷 관련 기업으로는 역대 최고의 규모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상장에는 조지 레이에스(George Reyes)의 공이 컸다. 레이에스는 2002년 CFO로 구글에 입사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기술 관련 기업에 종사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전 직장인 광학 네트워크 회사 오니시스템스(ONISystems)를 시에나 코퍼레이션(Ciena Corporation)에 매각하는 실무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3년간 근무하면서 일반 시스템의 그룹 책임자, 해외영업부문 재무 책임자, 감사, 기업 감독 담당 부사장, 회계 담당 부사장 등 재무관련 직무에 주로 종사했다. 산타클라라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남 플로리다대학에서 회계학 학사를 취득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천재와, 기업경영의 프로가 합쳐진 구글이었지만, 투자한 벤처 캐피털 회사들이 원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주식공개를 향해 돌진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에스가 힘을 쏟았던 것은, 속력은 빠르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야생마를 멋진 경주마로 단련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례를 들면, 당시 구글은 회계 기록을 위해 200달러 정도하는 퀴켄 소프트웨어(Quicken Software)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개인상점이나 영세기업용이어서 상장을 목표로 하는 기업에는 확실히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라클사의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제안하자 두 창업자는 왜 쓸데없는데 돈을 낭비하느냐며 반대를 했다. 이것은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핸들과 타이어가 있으니까 장 볼 때 타는 자전거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론하는 것과 같았다. 또 당시 구글에서는 회사에 자동적으로 청구가 되는 신용카드를 사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었다. 기업의 유일한 목적은 이익을 남기는 것인 만큼, 이를 위해서는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관리해야만 한다. 보통 회사라면 사내에서 정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카드사용액에 대한 지불 절차를 밟게 된다. 그래서 당시 CEO였던 슈미트는 한 장의 카드를 제외하고는 모든 카드를 해약시켜버렸다. 그러자 어느 날, 슈미트의 방에 공중전화 박스가 설치되었다. 그 범인을 추적하자 이번에는 마사지 의자가 몇 대 나타났다. 이처럼 두 창업자는 마치 장난꾸러기 어린아이들처럼 경영자에게 저항했던 것이다. 이처럼 레이에스와 슈미트는 통제 불능의 창업자들을 끌어안으면서 상장을 지휘하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다.

소프트뱅크의 약진을 이끈 기타오 요시다카

소프트뱅크의 창업자이자 대표이사 사장인 손정의(孫正義)는 1981년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당시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업계 최고였던 핸슨과 판매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고, 컴퓨터 분야 출판업에도 진출해 사업을 넓혀갔다. 1987년에는 포벌(FORVAL)과 공동으로 전화를 걸때 자동으로 요금이 싼 회선으로 연결해주는 'NCC BOX'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그 사용료(로열티)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는 급성장을 하게 된다. 1990년에는 '소프트뱅크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마침내 1994년 주식을 공개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소프트뱅크는 상장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사업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뒤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기타오 요시다카(北尾吉孝)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1994년 손정의는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하던 기타오를 직접 스카우트했다.

기타오가 소프트뱅크에 입사한 이후, 손정의와 기타오 콤비는 증권시장으로부터 약 5,000억 엔의 자금을 조달해 이 돈으로 홀린 듯이 기업매수에 열을 올렸다. 당시 일본에서는 M&A(인수·합병)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바다 저편 구미에서는 M&A가 번창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회사를 매수한다는 것은 도산 직전의 회사를 사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경영의 중심으로서 M&A를 전략적으로 행하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소프트뱅크의 매수 실적을 보면, 1995년에 지프 데이비스를, 1996년엔 미국의 반도체메모리 제조업체인 킹스턴 테크놀로지를, 또 호주의 미디어 왕 루퍼트 머독과 손잡고 TV아사히를, 2000년에는 경영 파탄상태인 일본채권신용은행을 사들이는 등 굵직한 매수만 해도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M&A를 통한 확장 정책이 성공을 거두가 2000년 2월에는 소프트뱅크 주식이 198,000엔까지 치솟았고, 주식 시가총액은 도요타자동차에 이어 일본 2위를 차지했다.

손정의는 탁월한 비전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결코 실무자 타입이 아니었다. 손정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수법을 구사하고 솜씨를 발휘한 것은 기타오였다. 그는 매수하고자 하는 기업을 조사(이것을 '기업실사(due deligence)'라고 한다)하기 위해 투자은행, 변호사, 회계사 등 수십 명으로 꾸려진 팀을 진두지휘했다. 시가총액 극대화를 노래하는 손정의와는 대조적으로 기타오는 매수하고자 하는 기업의 장래 현금흐름에 대해 꼼꼼히 따졌다.

닛산의 V자 회복을 이룬 티에리 무론게

닛산자동차는 후요그룹에 속하는 상장기업으로 도요타, 혼다와 함께 일본의 3대 자동차 메이커이다. 한때 회사의 슬로건이 '기술의 닛산'이었던 것처럼 창업 때부터 선진 기술을 흡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기술에 편중된 기업 풍토 속에서 판매정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며, 더구나 노사간의 갈등과 회사 내부의 권력 암투가 발목을 잡아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라이벌이었던 도요타자동차와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약 2조 엔의 유이자 부채를 떠안을 정도로 재무내용이 형편없어졌고, 이후에도 판매 부진이 이어져 도산직전에 이르렀다. 그러자 1999년 3월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인 르노와 자본 제휴를 맺고, 르노의 자회사로서 갱생을 꾀하게 되었다. 르노사의 회장겸 CEO인 루이 슈바이처(Louis Schweitzer)는 자본제휴 계약을 바탕으로 르노의 부사장인 카를로스 곤(Carlos Ghosn)을 닛산자동차의 COO(이후 곧바로 CEO로 승진)로 취임시켜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 온 곤은 1999년 10월 '닛산 재생플랜(NRP)'을 발표한다. 그 골자는 크게 세 가지로 첫째, 영업이익 2,903억 엔 달성, 둘째, 영업이익률 4.75% 달성, 셋째, 부채액 9,530억 엔으로 감소하였으며, 이것을 3년 이내에 달성하지 못하면 곤 자신과 실행위원 전원이 퇴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곤이 3년 이내에 달성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고 했던 세 가지 공약을 보자. 이 세 가지는 모두 회계수치이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숫자이다. 이와 같은 수치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퇴하겠다는 방식은 웬만한 자신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목표에 조금이라도 못 미쳐 발언에 책임을 지고 최고경영진이 사임하게 되면, 그 때는 경영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전체에 재생을 위한 모티베이션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곤은 이들 회계수치를 달성하는 데 확고하게 자신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은 곤 뒤에 그가 신뢰하는 회계·재무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티에리 무론게(Thierry Moulonguet)로, 곤이 일본에 올 때 프랑스에서 데리고 온 인물이었다. 무론게는 1976년에 프랑스 국립행정학원을 졸업한 뒤 재무부에서 일했다. 그 후 1997년에 르노에 입사해 IR(회사 홍보)담당, 투자관리담당을 역임하고, 닛산자동차의 수석 상무이사로 일본에 와서 2000년에는 부사장겸 CFO가 되었다.

무론게가 취임하기 이전에도 닛산자동차는 유이자 부채를 줄이려는 노력을 해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채를 줄이는 것을 경리부 소관이라고만 생각했다. 부채가 그렇게 눈덩이처럼 부푼 까닭은 한편으로는 무계획적으로 융자를 계속한 주거래은행제도 탓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권체제 아래서 해외 현지법인이나 국내의 관계회사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재무 전략을 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경리부만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닛산자동차에는 그룹 전체 차원에서 돈 빌리기를 자제하거나 현금을 관리하는 장치가 없었다. 이에 따라 무론게는 재무부서의 기능 집중화를 단행했다. 우선 세계를 일본, 미국, 유럽의 세 권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 있는 금융자회사 한 곳에 자금관리를 맡겼다. 또 이 세 금융자회사의 자금관리를 통제하기 위해 총괄본부를 두었다. 총괄본부가 거래하는 금융기관은 어디 한 곳이라고 정해놓지 않고, 그때그때 가장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금융기관과 상대했다. 이런 방식은 일본의 주거래은행제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95년에 영업이익과 맞먹는 1,000억 엔에 달했던 이자를 2002년에는 420억 엔으로 감소시켰다.

하지만 무론게의 최대 공적은 단지 닛산의 유이자 부채를 감소시킨 것만이 아니라, 부서간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종적인 조직 문화에서 '이익률'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알기 쉬운 공통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이에 따라 회사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점에 있다. 곤과 무론게는 이익이 생기지 않는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는 방침 아래 모든 제품에 대해서 생산을 계속할지 여부를 검토했다. 그동안 닛산에서는 이익을 올리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거래관계가 가장 중요시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같은 전통과 결별하고, 이익을 최우선에 둔다는, 기업의 본질적인 기준을 내세워 새로운 거래 관계를 구축했다. 무론게가 시도한 것은 주거래은행제도, 종적인 조직, 매출 중시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일본기업의 전통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다. 세계화와 소비자의 기호 변화, 규제완화와 같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기업은 과거의 빛나는 성공 체험에 도취되어 개혁을 주저했다. 닛산자동차의 획기적인 V자 회복은 외국인이 주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적대적 매수를 주도한 아디티야 미탈

한때 인도네시아의 스크랩(쇠 부스러기나 깨진 쇠붙이, 고철 등을 일컫는 말) 공장 경영자였던 라크슈미 미탈(Lakshmi Mittal)은, 1989년 미탈사를 창립한 이후 세계 굴지의 철강제조업체들을 잇따라 매수함으로써 미탈사를 세계 최대의 철강업체로 키워낸 인물이다. 그가 세계적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9년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국영기업이었던 아이언 앤드 스틸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회사는 심각한 경영부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정부가 지명한 경영진을 경질하고 대신 자신이 신뢰하는 인도 사람을 중용함으로써, 비용 삭감 등을 통해 불과 1년 만에 회사를 재건시킨다. 이후 그의 매수극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매수전략은 채산성이 없는 제철소를 싸게 산 다음 경영진을 교체하고 그가 신뢰하는 인도 사람을 간부로 보내서 재건을 시도하는 식이었다. 재건이 본 궤도에 오르면 파견했던 인도 간부를 불러들이고, 목표 수익을 달성하는 한 자치경영을 허락했다. 그는 채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기업이나 국가가 관리하는 비효율적인 제철소를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부르고도 매수에 성공했다. 얼마 후 미탈은 구 공산권으로 눈을 돌렸다. 카자흐스탄의 제철소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체코,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매수를 계속했다. 그는 해당 국가의 경제상황과 정권의 약점을 읽어낸 다음, 경영난을 겪고 있는 제철소를 싸게 매수했다. 2004년 3월 동유럽 최대인 폴란드 제철소를 매수함으로써, 미탈사는 철강생산량 세계 2위의 거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뒤 2004년 4월. 라크슈미 미탈은 세계 제1의 철강메이커를 목표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미국 제2의 철강업체인 ISG(인터내셔널 스틸 그룹)와 주식교환을 통한 통합에 성공함으로써, 미탈사는 명실공히 세계 제1의 철강업체가 되었다.

이러한 미탈사의 끊임없는 확장에는 라크슈미 미탈의 아들이며 회사의 CFO였던 아디티야 미탈이 있었다. 그는 1996년 펜실베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투자은행인 크레디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CSFB)의 M&A 부문에서 근무했다. 1997년 미탈사에 입사한 후 1999년에는 M&A 부문 책임자로서 미탈사가 추진하고 있는 매수 프로젝트의 실무를 담당했다. 미탈사가 해 온 수많은 매수극에서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거론하는 주요 인물이 바로 이제 막 30세를 넘긴 젊은 CFO였던 것이다. 또한 인재층이 두텁지 않은 미탈사는 대형 기업을 매수할 때 외부 전문가를 기용하는데, 이들 외부 전문가를 리드하는 것도 CFO인 아디티야 미탈의 일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제철회사의 매수에는 미디어 대책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2006년 아르셀로를 매수할 때 골드만삭스의 소개로 프랑스의 '이마쥬'라는 PR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처럼 아디티야 미탈의 직무는 매수상대와 직접 협상하는 것에서부터, 외부 전문가를 끌어들여 만든 팀을 관리하는 데까지 두루 미치고 있었다. 그는 2008년에 CNBC로부터 '차세대 유럽 비즈니스 지도자'에 선정됐다.

회계학과 CFO라는 직업



회계만큼 효율적인 투자는 없다

기업에서 나오는 회계정보는 다양한 이용자의 의사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경영자는 이용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업의 경영성과나 재정상태를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 발표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결산을 '분식결산'이라 부른다. 원래 '분식(粉飾)'이란 말은 붉거나 희게 화장을 하는 것으로 '외모(표면)를 손질한다'는 뜻이다. 영어에서는 분식결산을 'Window dressing(창을 닦는다)'이라고 하는데 그 말에서 분식결산의 의미가 한층 명료하게 전해질 것이다. 물론 분식결산은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분식결산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안이 필요하다. 첫째는 회사가 공표하는 회계정보에 대해 회사로부터 독립된 제3자가 엄격하게 감사를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공인회계사이다. 둘째는 회사가 공표하는 회계정보가 경영자의 자의적인 논리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공인회계사의 감사도 회사의 회계정보가 이 규칙을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보통 기업들은 '기업회계기준'이라는 공통된 규칙을 따르게 돼 있다. '기업회계기준'의 전문(前文)에는 '기업회계의 실무 속에서 관습적으로 발달해온 것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공정타당하다고 인정받은 것들을 요약했으며, 반드시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기업이 회계를 처리할 때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기준'이라고 그 성격을 요약하고 있다. 즉, 기업회계기준이란 법률이 아니라 기업이 따라야만 하는 단순한 실천규범인 것이다. 또 기업회계기준의 일반원칙 속에는 '기업회계는 기업의 재정상태 및 경영성적에 관해 진실하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실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회계의 최고규범으로서 다른 모든 원칙들은 이 원칙의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실성'이란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실이라기보다는 '상대적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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