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탄데르 은행
마우로 기옌, 아드리안 최글 지음 | W미디어
산탄데르 은행
마우로 기옌, 아드리안 최글 지음
W미디어 / 2008년 11월 / 350쪽 / 15,000원
제1장 세계 경제 속의 가족 주도 은행산탄데르 은행은 세계 금융계의 대형 은행 중에서 기이한 존재다. 동 은행은 20년 전만 하더라도 현재의 위풍당당한 위용은커녕 금융업의 최첨단이라고 보기 어려운 스페인에서도 이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동 은행은 세계 10대 은행에 들 뿐 아니라 2004년 영국의 애비 내셔널 은행을 15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국제금융 인수 작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늘날 산탄데르는 중간 규모의 스페인계 은행에서 라틴아메리카 최대 은행이자 시장 자본을 1,150억 달러 보유하고 있는 유럽 최대 은행, 북ㆍ동유럽 지역 소비자 금융의 강자로 탈바꿈했다.
산탄데르는 한 집안이 최고 경영진으로 있으면서 휘하에 전문 경영진을 둔 체제로 운영되는 현대 기업의 한 형태에 속하지만 산탄데르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 2.5%에 불과한 지분을 소유한 집안에서 3대가 연속해서 최고 경영자로 일을 해 왔기 때문이다. 1986년 동 은행의 회장에 취임한 에밀리오 보틴 3세는 스페인 국내 금융 분야의 규제 완화를 수용하면서 강력하고도 경쟁적인 행보를 시작하여, 라틴아메리카와 유럽ㆍ미국으로 진출해 세계 153위에서 10위권 내의 은행으로 단번에 진입했다. 향후 그가 퇴임하면 그의 딸 아나 파트리시아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산탄데르를 이끌게 될 것이다.
산탄데르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세계은행의 양대 산맥인 시티은행이나 HSBC처럼 다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산탄데르는 상업 금융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 효율성, IT 기술, 마케팅을 주요 도구로 이용해 시장 점유율을 늘리거나 수익을 증대시키고 있다. 도매 금융과 투자 금융처럼 수익이 높은 종목은 산탄데르의 사업 부문에서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동 은행은 2006년 76억 유로의 수익을 올리며 세계 7위에 올랐다. 현재 산탄데르의 주주들은 연간 30%가 넘는 배당수익을 즐기고 있다.
"이미 성숙한 금융업계에서 산탄데르가 세계적인 경쟁 은행을 능가할 수 있게 만든 힘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기술 혁명과 경쟁 체제의 변화를 겪고 있는 금융업계의 정황 속에서 산탄데르를 분석한다. 또한 산탄데르는 세계 10대 은행 중에서 유일하게 한 가족이 3대에 걸쳐 기업 경영에 대한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은행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가족 경영의 장점과 단점을 탐구하는 사례 연구로는 산탄데르가 적격이다. 게다가 지분 2.5% 만을 보유한 집안이 그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사례 연구를 한층 더 흥미롭게 만든다.
제2장 가족 은행의 기원스페인이 유럽에서 힘이 기울어질 당시인 1857년 6명의 사업가가 스페인 변방 산탄데르에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스페인의 금융 체계는 초보적이었고, 국가 재무 상태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은행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1874~1892년 사이에 새로 생겨났다가 사라진 은행만도 58개나 되었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식민지에서 자본이 들어오면서, 7개 대형 은행들이 설립되었고, 이들 대형 은행들이 1910~1920년대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당시 산탄데르는 상위 50개 은행에 들지 못했는데, 동사의 납입 자본금은 전체 은행 자본금의 0.3%, 준비금은 1.5%에 불과했다. 스페인은 1930년대 발생한 내란으로 인해 경제적 침체기를 맞았고, 금융 분야 역시 성장이 미미했다. 산탄데르 은행은 195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장을 했는데 이는 확실히 보틴 가문과 연관이 있다.
1795년 스페인 남부 카디스에서 태어난 외과의사 호세 마리아 보틴은 1828년 산탄데르 시에 정착하고, 지역의 유명한 사업가였던 호세 라몬 로페즈-도리가 이 비알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호세 라몬 로페즈-도리가 이 비알은 산탄데르 시의 로스차일드 은행 대표였고, 그의 아들 안토니오는 산탄데르 설립자 중 한 명이었다. 로페즈-도리가 집안은 산탄데르 시에서 가족 기반 사업을 하며 구축한 두터운 연결망의 중심에 서 있었다.
호세 마리아 보틴의 아들인 에밀리오는 1901년 산탄데르 은행의 이사로 선출되었고, 에밀리오의 아들인 에밀리오 보틴 1세는 1909년 보틴 가문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산탄데르 은행 회장으로 선출되어 1923년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지켰다. 보틴 1세가 사망하자 주주들은 브리즈 라린을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브리즈 라린은 1949년 은퇴할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재임기간 중 전임자의 아들인 에밀리오 보틴 2세를 아껴 그에게 경영자 훈련을 시켰고, 그 덕분에 1950년 보틴 2세는 브리즈 라린의 뒤를 이어 산탄데르 은행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보틴 2세는 프랑코 정권하의 격변하는 정치 상황과 경제 정책이 실행되는 시기에 은행을 경영했다. 그는 1950~1970년 기간 중 산탄데르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국제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초기 작업을 지휘했다. 또한 1950년대 인수 작업을 통해 국내에서 성장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산탄데르는 많이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새로운 지점을 열 때 규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들어 보틴 2세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환경에서 새로운 지점을 개설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은행 지분을 사들였다. 보틴 2세는 1976년 자신의 아들인 보틴 3세를 최고 경영자로 임명해 보틴 가문의 위상을 공고히 다진 후 198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보틴 3세는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산탄데르 은행을 세계 금융계의 강자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보틴 2세가 활기 없는 지방 은행을 스페인에서 상위 7위 안에 드는 은행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보틴 3세는 수차례에 걸친 국내외 인수합병을 성사시켰고, 이로 인해 산탄데르는 세계 10위 안에 드는 은행이 되었다. 보틴 3세는 산탄데르를 시티은행, HSBC, ING, BBVA와 그 밖의 소수 은행으로 구성된 특별한 그룹에 속하는 진정한 세계적 소매 은행으로 만들었다.
제3장 산업체 그룹산탄데르 은행과 다른 은행을 구분 짓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산탄데르가 산업 발전이나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관여하는 것을 주저했다는 점이다. 산탄데르는 1950년대 들어 전국 규모의 은행이 되었지만, 1960년대 들어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수입 대체 경제에서 수출 주도의 성장으로 경제 정책을 선회했다. 정부가 경제 계획을 바꾸자 스페인의 주요 은행들은 산업체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산탄데르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지만 무질서하게 퍼져 나가는 산업 그룹의 중심에 서지는 않기로 했다. 그 결과 산탄데르는 다른 은행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래 태생인 상업 금융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1970년대 산업 위기의 격랑을 헤쳐나갈 때 도움이 되었으며, 경쟁 은행들보다 훨씬 재정이 튼튼한 상태에서 1980년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스페인의 산업체들은 증가하는 금융비용, 두 번의 석유 파동, 임금 인플레이션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부담을 국가에 지우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업체에 대한 투자를 늘려왔던 금융 분야는 그 위기에서 피해를 입고 말았다. 1977~1985년 사이 약 60개의 중소형 은행이 도산했고, 7개 대형 은행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후 산탄데르는 나름대로의 투자 원칙을 가지고 지난 20년 동안 산업체 포트폴리오를 상당량 재배치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은행이 저성장 산업에서 활동을 줄이려 할 때 산탄데르는 제조업체에 투자했던 지분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제조업과 중장비 사업 분야의 활동을 대폭 줄이고, 지분을 부동산, 건설, 도매, 소매업, 통신, 미디어, 여행, 레저 등 스페인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분야로 옮긴 것이다. 고성장 산업에서 목표를 맞춘 산탄데르의 투자 전략은 엄청난 이득을 창출했다.
보틴 3세의 지휘 아래 산탄데르는 기업 또는 기업의 일정 부문을 매매하여 자본 이득을 올렸다. 산탄데르는 소액 지분을 인수한 다음 미국, 영국, 프랑스의 금융기관에 매각 처분했고, 그러면서 70억 달러가 넘은 혼합 자본 이득을 보았다. 산탄데르가 산업에 투자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스페인 국내 시장에서 빨리 성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산탄데르가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미미했던 점이 1970년대 위기 이후 유리한 점으로 변했다. 산탄데르는 작지만 건실한 구조 덕분에 국내는 물론 국제 금융업계에서 경쟁 은행을 능가했고, 경쟁 은행이 투자에서 기대이하의 실적을 보이고 어려운 구조 조정에 붙잡혀 고전하고 있을 때 국내와 국제 인수합병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제4장 강자 생존산탄데르 은행의 눈부신 성장을 분석하며 숙지해야 할 점은 스페인이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금융 분야에서 경쟁의 역학 관계가 갑작스럽게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스페인 은행보다 규모가 크고 더욱 발달한 다른 유럽 국가의 은행들을 보며 스페인 은행들은 동등한 상태로 경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수와 합병을 선택하게 된다.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산업체 투자에서 비교적 손해를 적게 본 산탄데르는 산업과 금융계 위기의 격랑이 밀려온 1970년대를 이겨내고, 자유화와 규제 완화가 정점을 이룬 1990년대를 지나며 선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86년 유럽 연합의 회원이 된 스페인은 반경쟁 규제를 없애고 금융서비스에 대한 시장을 자유화했다. 이러한 시장 환경의 변화에 따라 1980년대 중반 스페인의 대형 은행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서로 결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8년 빌바오가 비스카야를 우호적으로 합병하여 탄생한 빌바오 비스카야(BBV) 은행이다. 동 은행은 스페인 전체 금융 자산의 20%를 차지하였고, 유럽 33위, 세계 69위의 거대한 은행이었다. 이처럼 산탄데르보다 규모가 큰 경쟁 은행들이 합병을 시도하거나 합병 후 통합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보틴 3세는 성장을 위한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1989년 보틴 3세는 높은 이자율을 주는 당좌예금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예금 전쟁이 촉발되었고 바네스토 은행이 산탄데르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섰다. 하지만 바네스토의 수익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1993년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 산탄데르는 저소득층 시장 공략을 위해 복권과 연결된 당좌예금 상품을 내놓았고, 1993년 이자율을 경쟁 은행보다 2% 낮춘 대출 상품을 내놓아 대출 전쟁을 촉발하였다. 이런 식으로 산탄데르는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성장하면서 경쟁사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1994년 산탄데르는 파산 위기에 놓인 바네스토 은행을 인수함으로써 스페인의 2대 은행 중 하나가 된다는 목표를 이루었다.
1996년 사회당 정부 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 스페인 금융계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금융 시장이 자유화 되었고, 여러 가지 금융 규제 완화가 이루어졌으며, 두 번의 거대 합병(BBV와 BCH)이 있었고, 12개 국영 은행이 아르헨타리아로 통합되었으며, 산탄데르의 바네스토 인수가 이루어졌다. 7개 대형 은행이 4대 대형 은행이 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 직면한 금융 시장 통합이라는 도전을 생각할 때 스페인 은행의 규모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작았다.
1996년 보수파인 민중당이 승리하자 스페인 금융계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가장 큰 변화는 1999년 스페인이 유럽경제통화동맹의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기로 한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금융 통합은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수주간에 걸친 협상과 정부의 암묵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1999년 1월 BCH와 산탄데르는 대등 합병을 발표했고, 각 은행 최고 경영자가 공동으로 새로운 은행을 대표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대등 합병 사례와 마찬가지로 발표 후의 여파가 문제가 되었다. 두 파당 간의 긴장이 3년 정도 지속되다가 전략상 후퇴를 했던 보틴이 결국 합병된 은행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산탄데르는 스페인 시장의 선도자 자리를 꿰찼을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로 확장해 가면서 유럽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가 되었다.
제5장 신세계산탄데르의 라틴 아메리카 진출은 199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스페인 국내 시장은 절망적인 포화상태가 되어갔고, 국내 합병으로 몸집을 불린 은행들은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했다. 시장 포화상태와 유럽 통합이 국제화를 촉진시킨 두 가지 엔진이었다. 산탄데르의 한 중역은 말했다. "우리는 인수대상이었습니다. 성장을 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한바탕 쇼핑을 하러 나갔지요."
1980~1990년대 산탄데르는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국가들이 규제완화와 민영화, 자유 경쟁을 단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어 그때까지 외국 은행에는 닫혀 있던 고도성장이 가능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소매 금융 변화는 스페인에서 똑같은 변화가 일어난 지 5~10년 후에 일어났다. 따라서 이미 변화를 체험했던 산탄데르는 손쉽게 관련 지식과 운영 절차, 조직 모델을 라틴아메리카로 이전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진출 초기 산탄데르는 국가별로 4가지 진입 방법(대표사무소, 지점, 지사, 자회사)을 상황과 전략에 맞춰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동 지역에서 산탄데르의 성장은 1970~80년대 계속되었으며, 그 결과 산탄데르는 동 지역에서 뱅코오브아메리카(BOA)보다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금융위기로 인해 주춤했던 산탄데르의 진출은 1990년대 초에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더 이상 스페인 국내 시장은 성장이 어려웠고, 새롭게 통합된 유럽 금융 시장에서 다른 경쟁 은행에 먹히지 않으려면 밖에서 성장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둘러보며 성장 가능성 있는 시장을 찾던 산탄데르는 미국과 유럽은 너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경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기존에 쌓아 놓았던 투자 금융 실적 덕분에 그곳 정부의 경제 계획에 연결될 수 있었다. 문화적 동질성과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 두 번째 진출하면서 산탄데르는 전략을 바꾸어 진출국의 대형 은행을 골라 지분을 매입해 통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방식으로 1990년대 중반 산탄데르는 라틴아메리카 9개 국가에서 27개 은행을 인수했다. 이때 산탄데르는 스페인 주요 은행을 제외한 다른 외국 은행들과는 경쟁을 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 은행들은 라틴아메리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산탄데르는 좋은 기회를 노려 인수를 했고, 인수 후에는 공을 들여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동 지역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다. 2006년 현재 산탄데르는 전 세계 10,852개 지점 중 4,368개 지점, 전체 종업원 129,196명 중 66,889명이 라틴아메리카에 있으며, 66억 유로의 그룹 순이익 중 35%를 라틴아메리카에서 창출한다. 라틴아메리카로의 확장은 산탄데르가 세계 10대 은행이 되기 위한 목표를 향하는 길에 첫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제6장 제휴와 그 한계점산탄데르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상호 지분 소유 방식으로 다른 유럽 은행과 제휴를 맺으면서 상당한 재정상의 이득을 보았다. 금융 서비스 제휴는 동종 업계 기업과의 제휴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은행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비용을 줄이고, 미래의 옵션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상호 불가침 협약을 맺는 전략상의 이점도 있다. 금융업체들은 합병이 불가능하거나 실질적이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 이러한 제휴를 맺으려고 노력한다.